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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토 슈트라우스 : 피어오르는 산양의 노래 (1)

stellio 2022. 9. 18. 13:41

피어오르는 산양의 노래[각주:1]

슈피겔 1993/6

 

   자유 사회, 그 총체에 거리낌을 느끼는 자 – 그것을 은연중에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솜씨 좋은 예술가도 결코 창조할 수 없고, 그 어떤 은총을 받은 통치자도 다스릴 수 없을 뜨임새의 저 장엄하고 민감한 유기체, 그것의 어수선히 얽섞인 경로와 맺어짐에 대하여 너무나 큰 경탄을 품고 있기에.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근저의 악성 앞에서 둥둥 떠다니듯 서로를 지나치는 것, 다시 말해 서로 교제하는 것을 경외심으로 얼떨떨해 그저 관망만 하고 있는 자. 사람들의 사업과 운동 곳곳에서 한갓 줄타기, 춤추며 맴돌아가려는 포즈, 놀이, 교활한 눈속임, 가식이나 기교의 작태를 발견하는 자 – 이 결집은 과연 모든 외부인에게, 정치의 병통에 사로잡히지 않은 다음에야, 끓어오르는 샘[각주:2], 「타인의 지옥」[각주:3]이라기 보다는, 숫제 불가해한 곡예로 보일 수 밖에 없다 . . .

 

   그러나 이따금 그에게는 마치 이제 최후의 체념의 사각거림이 들리는 듯하며, 최후의 인간들이 도피처로 달아나는 모습이 어물대는 듯하고, 저울추의 균형이 맞추어지는 소리가 마치 자물쇠가 철컥 잠기듯 나직히 들려오는 듯하다. 잇따르는 것은 오로지 밧줄,[각주:4] 맞잡은 손들, 연계들, 접촉들, 꿈들이 미끄러져 풀러짐 뿐이다.

 

   우리가 벌려놓은 이 판은 얼마쯤의 가변성을 지니고 있는가? 어느 모로 보나 게걸음만 치는 모양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선하는 체계의 불변성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이것이 민주정치일지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일지, 인공두뇌학적 모델, 학술 담론, 정치기술적 자기감시동호회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이, 마치 자연의 생물처럼, 곁길로 새어나가서 지리멸렬하곤 하는 자신의 힘들을 다시 거두어 모으기 위해서는, 거듭해서 위험과 곤경에서 오는 내적 · 외적인 압박을, 심지어는 심각한 약화를 겪는 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일테면 전체주의나 신정국가로서는 이 확실히 겨냥된 자유의 체제보다 최대 다수의 안녕을 위해 더 나은 어떤 것을 이루어낼 수 없었으므로, 이것에게는 지금까지 어떤 경쟁상대도 없었다.

 

   물론 이는 경제적 번영만이 대중을 형성하고, 이어주고, 비춘다는 확신 내에서만 유효하다. 현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주의가 만사의 원동력으로 구실하지 않는 사회들에서는, 그들의 잘 통제되고, 굳은 믿음에 근거한 욕구 억제력이 갈등시에 적잖은 장점일 뿐 아니라, 그로인해 어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그사이 점차 번지고 있다.

 

   우리 넉넉한 사람들은 행여 쥐고있는 부의 극소량을 잃기라도 하면, 이는 우리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기구의 국내정치적 화로 귀결될 뿐 아니라, 정치의 내면에 비약적인 결과, 즉 조급성과 공격성의 우발적인 돌발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에 적이 도취해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신진 국가들의 민족주의 조류들을 경계한다. 우리가 우리의 하천을 보존하려 하듯이, 타지키스탄의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 정치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한 민족이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낯선 관습에 맞서 견지하고자 인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자아도취 속에서 그런 것들이 괴이쩍은, 그릇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부유한 서유럽인이, 윤리의 영역에서야말로 「할 수 있는 것」이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윤리적 형편에 맞지 않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과연 불리하게 작용할는지 모른다. 우리의 판단과는 전연 무관하게도, 옛것들이 단순히 노폐물로 전락하거나 괴멸하지 않았으며, 인간이 – 개인이든, 민족의 일부든 – 비단 오늘만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싸움, 힘든 씨름이 될 성싶다. 재래의 세력과 끊임없는 추동의 세력 사이에, 보존파와 말소파 사이에 전쟁이 치러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네 것을 위해 벌이는 이 투쟁은 오로지 내부로 향해있다. 어떤 적국의 정복자도 우리를 이 싸움판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망명자들과 고향 잃은 이들의 무리를 동정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태도를 취하기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법적으로 선을 행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가 (겨우 유권자들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강바닥에 퇴적되기 위해서는 더도 덜도 아닌 우리 근대 자기중심주의 이교의 재기독교화가 필요할 것이다. 역사의 비극적 설계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비폭력성이 이 전쟁을 우리의 후생에게 넘겨씌우게 되지 않을지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다.

 

   공중도덕의 위선이 언제나 행해왔거나, 최소한 용납해온 것: 에로스의 경멸, 군인들의 경멸, 교회, 전통, 권위의 경멸. 그러니 얄궂게도 위급한 상황에서 말발이 서지 않는다고 해서 의아해할 이유 무엇이랴.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더 심한 악으로부터 면케 해주는 실권, 언권은 대체 누구의 손에, 누구의 입에 달려 있는가?

 

   누군가 본인이 놓여 있는 처지를 사회적으로 가능한 공생 형식의 궁극적인, 최상의 실현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과연 누가 떠살이, 막-방금까지만해도의 변호를 그럴듯하게 표현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발원지(히틀러)서부터, 독일 전후 지식층은 오로지 지배 조건의 결함만이 인식될 수 있다고 역설해왔다.[각주:5] 심지어는 가히 수상스러운 대안들을 그럴싸한 것으로 납득시키려 부단히 힘썼으며, 우리에게 급진적인 선과 타재他在를 세속적인 종말론의 형태로 제공하기도 했다. 웬 사이비교가 기약한 종말의 날과 같이, 이 세속적 종말론 또한 저절로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더 이상 자유주의자는 본인 스스로에 근거해서 자유주의자인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 완고한 자유주의로 무장해서 반자유주의를 대적하려는 성싶다: 이렇게 그는 자유주의자 노릇을 한다. 스스로 자유주의자로서의 정당성을 쟁취한 그는 이 관직에 임함에 있어 인정을 갈구하며, 그러므로 해서 점차 더 거리낌 없는 자유주의자가 된다.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선포하며, 내적으로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기실 그는 제 적수에 썩 닮아 있는 반자유주의의 대항자에 다름아니다.

 

   이따금 우리는 관용에 있어, 무엇이 진실되고 자생적인 것이며 무엇이 바로 이곳, 증오 받는 조국에서의 현 상황의 허물을 벗겨 마침내 그것을 저 유명한 – 한때 좌익 공포정치의 범죄자-변증법에서 일컬어졌듯, 그리고 필시 암암리에는 아직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을 – (「준-파쇼」들의) 정체를 들통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독일인의 경직된 자기혐오에 근거한 것인지 정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텔리겐치아가 이방인에게 보이는 친절함은 이방인을 위함에서 아니라, 다만 우리 것을 향해 표독부리는 짓이며, 우리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쌍수 들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인데 – 혹 이런 심기 도착증의 소문이 들려오면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수면 밑으로 일어난다) – 완전한 도착, 난폭한 확신으로 철컥 닫아버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듯하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혹자는 독일인 다수의 대표자로서의 독일인 「전형」을 향해서 충분히 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구걸하는 집시의 존엄성은 대번에 눈에 보이는 반면에,  나의 기형적인, 듣그러운 동포, 잔치라도 벌이는지 요란법석한 나의 동포의 존엄성은 – 오호라, 궁중에서 빌어온 저 상투의 말이란! – 그의 뻔뻔스러운 요구의  총체 앞에서 주도면밀히 뜯어보고 나서도, 재수가 퍽 좋아야 어렵사리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가끔 상상해 보건대, 같잖게 짓까부는 나의 이웃에게 예상하지 못한 고통거리, 걱정거리가 찾아들거든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짐짓 그의 존엄성이 비쳐질 수 있지도 않을까. 그 존엄성이란 것을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의무화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본 적 있어야할 것 아닌가.

 

   오늘날 점점 그 숫자가 불어나는, 자기확신에 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Nächsten을 난란한 조명을 받는 같은 토크쇼 출연자Nachbarn 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들은 다른 모든, 혹은, 자신 스스로의 동포들의 이성異性에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 이 감각은 때로 감각의 꺼림칙함, 감각의 경악이기도 하다.

  1. 역: 원문. τραγῳδία는 ‘산양의 노래’라는 뜻. [본문으로]
  2. 역: 고대 노르드어 이름 흐베르겔미르Hvergelmir는 일반적으로 “끓어오르는 샘”으로 번역되며, 모든 강의 출처인 심연이나 샘으로 이해된다. 『고 에다』 Grimnismál 26 참조: Eikþyrnir heitir hjörtr, / er stendr á höllu Herjaföðrs, / ok bítr af Læráðs limum: / en af hans hornum drýpr í Hvergelmi; / þaðan eiga vötn öll vega: 출처: 『Edda Sæmundar hins fróða 』 Theodor Möbius 編, 라이프치히: J. C. Hinrichs, 1860. 36. [본문으로]
  3. 역: 사르트르의 「L'enfer, c'est les Autres.」 Huis Clos. Paris: Gallimard, 1947. 93. [본문으로]
  4. 역: 숙어 wenn alle Stränge reißen에 빗댄 표현으로,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5. 역: 1945년에 벌써 윙어Ernst Jünger는 네벨Gerhard Nebel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비록 히틀러의 몸뚱아리는 민멸泯滅했을지언정, 그의 수법은 전쟁을 이긴 모양새네. 도처에서 그의 제자들이 불같이 발호하는 꼴이 워낙 사나워, 천하에 몇 남지 않은 공평무사한 지성인들이, 이성의 대의를 위해 다시금 창을 빼드는 일이 – 돈키호테 노릇이 되지 않고서 – 과연 가능할 지에 대해서, 마땅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 Obwohl Hitler ja physisch ausgelöscht wurde, hat es den Anschein, dass seine Methodik den Krieg gewann. Seine Nachfolge wird überall mit solcher Leidenschaft betrieben, dass man billig zweifeln darf, ob es den wenigen unbefangenen Geistern, die auf der Welt noch leben, gelingen wird, für die Vernunft noch eine Lanze zu brechen, ohne dass das gänzlich den Anstrich der Don-Quijoterie gewinnt.」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