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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 <우리>와 우리철학 건설의 길

stellio 2022. 11. 23. 05:00

<우리>와 우리철학 건설의 길

박종홍

 

1.

   내가 왜 이 시대에 이 사회에 그리고도 하필 이 땅에 태어났는가를 나는 묻는다. 그러나 하여간 나 역시 금일의 조선 사람의 일원으로서 이미 생존하였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 사실은 내가 철학을 함으로부터 비로소 발견된 것이 아니요, 이러한 말 자체가 도리어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리 만큼 평범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나의 생이 최중最重하니 만큼 내가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보다도 더 엄숙한 사실을 또한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랴. 평범하고도 엄숙한 이 사실이 나로 하여금 철학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도 정열에 불을 질러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라고 하는 독특한 나이기 전에 이러한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로서의 나로서 먼저 생존하고 있다. 그것이나마 무슨 색다른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대중의 일원으로서 항다반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남과 같이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거듭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도 이 사실은 나 개인의 주관으로써 임의로 좌우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벽을 박차는 수밖에 없게 된 절박한 정세도 허공에 매어달린 채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미와도 같은 막가내하莫可奈何의 고민도, 우리의 이 평범한 사실이 절대적인 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실이 곧 엄숙한 사실이라는 소이도 그 근거가 결국은 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2.

   구름을 타고 안개를 마시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조才操라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 모르거니와 적어도 대지에 땅을 붙이고야 살 수 있는 우리로서는 죽는 날까지 이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 속에서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도 이 사실이 나에게만 유독히 품전禀傳된 것이 아니요, 이미 대중적으로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니 도리어 나의 일상의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이란 곧 나의 것이라기보다도 먼저 대중의 존재성인 이상, 이러한 사실을 지반으로 하려는 나의 철학은 나의 철학이라기보다도 우리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철학하는 것의 주체이며, 동시에 과제인 것은 위선爲先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라고 파악할 수가 있다. 이것은 고립된 개인적 주관을 속깊이 파내림으로부터 홀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요, 또는 만인공통의 인간성을 추상함으로 말미암아 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때에 여기에 있는 이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가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철학이 진실로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철학이어야 할 것이라면 우리의 철학은 단지 공막空漠한 인간학일 수가 없게 된다.

 

3.

   과연 우리의 철학은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들 속에 움트고 있다. 우리의 철학은 독일서 차를 타고 왕림하는 것도 아니요, 미국서 배를 타고 내왕來降하는 것도 아니다. 석가도 공자도 우리들 속에 이미 뿌리박고 있는 우리의 철학의 싹을 북돋워 주는 역할은 도울 수 있을 법하되 그네들의 교설敎說이 곧 우리의 철학은 아닌 것이다. 만권의 철학서를 독파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곧 우리의 사상으로서 진실된 힘이 못 되는 바는 우리의 철학이 우리들 속에서만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철학적 유산을 이 시대의 이 사회의 이 땅의 우리의 현단계적 입장으로부터 전승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드는 때에 우리의 철학이 비로소 건설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매 우리는 선각을 세계에서 구하는 동시에 좀더 우리들 자신의 철학적 유산을 천착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철학이라면 마치 <칸트>나 <헤겔>을 말하여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구폐舊弊를 일소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철학의 근원인, <우리>를 잊어버린 철학이, 감성 오성을 논하며 변증법을 운위한들 우리에게 무슨 관여되는 바 있을 것이랴.

 

4.

   그렇다고 하여 외인의 철학을 배척하여야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우자. 각기 소장所長을 따라 힘껏 배우자. 마음껏 섭취하자. 우선 우리의 철학의 건설은 진지한 태도로 꾸준히 배워 마지않는 학도들의 배출을 요구한다. <칸트>학자여 나오라. <괴테>학자여 나오라. 우리 세대의 원효, 우리 세대의 퇴계될 사람은 그 누구인가. 모든 방면에 있어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학도여 나오라. 그리고 더욱 우리의 철학적 유산을 조홀粗忽히 보려는 금일에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의 철학적 업적을 연구하는 우리의 독학자篤學者가 나오기를 또한 고대하여 마지않는다. 우리에게는 위의 철학사, 아니 사상사 한 권인들 이렇다 할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여기서 또 한 번 특히 주의하여야 될 것은 이 시대의 이 사회의 이 땅의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현단계적 입장으로부터 하는 섭취며 전승이어야 될 것을 수유須臾라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철학을 건설할 때는 먼저 철학하는 사람들 자신의 책임임은 물론이겠으나 어떤 개인의 철학이 아니요, 우리의 철학인 이상, 배후에서 그들의 연구를 지지하며 후원하는 일반사회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또한 아울러 있어야 될 것을 다시금 생각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