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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 천도교의 현대적 의의

stellio 2022. 11. 28. 07:00

천도교의 현대적 의의

박종홍

 

   저는 천도교에 대하여 문외한입니다. 그러한 저로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할 때 외부사람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였습니다. 중학 2, 3학년 때 친구 중에 독실한 신자가 있어서 교당에 드나들었고 야뢰夜雷 이돈화 선생의 강연이 있을 때는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제가 철학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천도교와 깊은 관계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인내천人乃天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리 저리 생각하다 보니 철학 비슷하게 생각하게 되고 차차—깊이 들어가 결국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그런 관계로 인내천에 대하여 철학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신앙이라든가 체험으로써 인내천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외람스럽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이랄 것까지는 없으나 천도교가 현대적인 사조와 어떻게 맞먹어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평소부터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하여 볼까 합니다.

 

   한울님을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것은 동양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로서 어떤 특색이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어디서나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에 대하여 공통적이면서도 어딘가 달라져 온 것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임사호천臨死呼天>이라고 절박한 처지에 하느님을 부르지 않느냐 하는 것을 천주교 신부도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하면 <이스라엘>에서 나왔는데 지중해에 삐죽 나온 이 땅이 북쪽으로는 <바빌론> 같은 큰 종족이 살았고 남쪽은 <아프리카>의 <이집트> 같은 강국이 있고 그 틈바귀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니 남쪽 북쪽에서 내리밀면 올데 갈데가 없게 되어 동쪽으로밖에는 못 가는데, 동쪽은 사막이라 사람이 못 살 곳이고 서쪽은 바다이고 그 틈바귀에서 살다보니 아마 이 세상은 살기 어려운 세상이고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을 생각하게 되고 내세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되어 하느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여 달라는 것보다 저 세상에서나 잘 살게 하여 주시오 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이 없어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거기서 본 하느님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봅니다.

 

   불교를 생각할 때 인도 역시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이 못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가 곤란하니까 역시 내세를 생각하는 그런 신앙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하느님은 그런 절망에 빠졌을 때 보는 하느님과는 좀 다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대체로 만주나 기타 북쪽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반도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우랄 알타이의 언어 구성으로도 그렇고 <석기시대>의 유물을 보아도 공통점이 있고, 남쪽을 앞이라고 그러는 점 등으로 보아 거의 사실일 것 같고 확실히 이 땅이 만주나 기타 북쪽나라보다는 살기 좋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에 살 때는 몰라도 외국 같은 데 나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땅에 들어서면 어쩌면 그렇게 하늘이 맑으냐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너무나 맑기 때문에 좀 흐릿하여야 격에 맞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장마가 지루하다지만 동경같은 데 가면 무덥고 지루한 게 비교가 안 됩니다. <런던>에 가면 우산들을 들고 다니는데 무시로 비가 주룩주룩 와서 우산을 안 가지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 점에서 구태여 우리나라와 비슷한 데를 찾는다면 <이탈리아>나 <그리스>가 비슷합니다. <그리스>는 고대문명의 발상지고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근세문화가 발단된 곳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하늘을 가진 것이 서양문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반도니까 늘 시달려서 약하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가 반도이니까 대륙도 아니요 섬나라도 아닌 그것을 넘어선 <그리스>가 그랬고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대국적인 판도가 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여간 태양과 맑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특별히 하늘에 대해서 관심이 깊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경천敬天이니 애천愛天이니 순천順天이니 하는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말이 많지만 중국과는 좀 다른 데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좀 아기자기한 것이, 무서운 자연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자연을 생각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은 대강 농사 아니면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아침 저녁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늘을 의지해 살면서도 <이스라엘>과 같은 무서운 한울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자연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인연을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연 두려움을 안 느낀 것은 아니겠지만 대륙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것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땅에 나는 물건도 아름답다는 것보다 모든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국사람이 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국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같은 고기를 먹어도 소고기도 우리나라 소고기가 좋고 돼지고기도 우리나라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은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닭도 그렇고 계란도 알은 작지만 고소한 것이 외국 것이 따라올 수 없고, 외국사람이 그러는데 배梨는 우리나라 배를 따라갈 수 없다더군요. 인삼은 중국에 없을 리가 없는데 우리나라 인삼이라야 약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는 인간만 못났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깨끗한 하늘을 이고 좋은 산천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인지 아기자기한 인간미가 꼭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남을 잘 속이고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이탈리아>나 <그리스> 같은 나라에 가 보니까 별로 나은 것이 없어요.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이 이렇게 하늘을 숭상하고 자연을 사랑하면서 살아오다가 그것이 죽—내려와서 인내천이 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변혁입니다. 고전을 따져본다면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이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많지만 이렇게 드러내놓고 대담하다 할까 용감하다 할까 그것을 근본입장으로 삼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 온 것은 우리나라밖에는 없습니다. 서양사람은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심판하는 임금님으로서의 하느님, 벌을 주는 하느님으로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나와서 이것을 조금 다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이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심지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서 인류의 죄를 구해 주셨다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상당히 변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과의 사이는 굉장히 먼 것이었습니다. 서양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하면 놀라 자빠질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드릴 자격도 없는 것을, 가만히 주의해 들어보면 나는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드릴 자격도 없는 죄인이올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격차가 굉장히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톨릭>이 오랜 역사를 지나 오면서 교회를 통해서 신부의 조력을 받아 하느님과 통하게 되었고 차츰 지나니까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는 등 자꾸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의 매개자가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곤란하니까 가족을 통한다든가 뒷문을 통해서 접근하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교 개혁을 들고 일어난 <루터>는 내가 보기에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좀 직선으로 하여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교회라든가 신부라든가 하든 복잡한 매개체가 많기 때문에 면죄부니 뭐니 하는 것이 생긴 것이니 이것을 좀 간소화하여 직선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직접 하느님을 통해보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천도교에서는 인내천이라고 하니까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내천이 어째서 현대적인 의의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훌륭한 것이니까 인간과 간격을 두어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텐데 좀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도 되지만 그 점에 있어서 요사이 사람들의 생각이 좀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서양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의지하고 하늘을 우러러 살아왔지만 차츰차츰 문화가 발달되어 근대화되니까 기계를 만들고 동력을 이용하게 되어서부터 전천후全天候 농사를 하게 되니까 별로 자연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기계를 만들어야겠다, 기계가 잘 살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독일에서 전자계산기를 보았을 때입니다. 이 전자계산기를 우리가 살 수 없으니까 세를 내고 빌려 쓰는데 그 세가 우리나라 농민이 수천명이 몇 달 몇 해를 일을 해서 거두어 들일 돈만큼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계를 만들면 애써 땀을 흘리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늘을 무서워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것이 기계를 가지고 달나라에 로켓을 쏘아 올리게 되고 보니 하늘과 인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기계를 만들고 기계만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상점도 대규모가 되고 공장도 대규모의 자동조절이 되고 모든 게 공업화하게 되니까 직공이나 백화점의 여점원이나 할 것 없이 밖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별로 관심이 없고, 손님이 많은가 어떤가 관심이고 어떻게 하면 손님을 끌 수 있을까 하는 게 문제이지 생활과 관계가 없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옛날식의 하느님이나 신앙이 그들 머리에 잘 들어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한 10여년 전에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세계의 청소년의 타락을 막기 위한 대책을 이야기하는 세계 고등교육자회의가 있었습니다. 한 일주일 회의를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서 퍽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들어보니까 어떻게 하면 청년들을 예배당에 잘 나오게 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파티나 놀이를 해서 재미를 붙이게 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정도의 결론밖에 안 나와 매우 실망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요새 소위 근대화란 말을 많이 하는데 나 역시 그것을 찬성을 하기는 하나 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이 근대화했다면서 무엇을 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잘 살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의 식민지를 개척한 역사라고 봅니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한 일이란 자기보다 못한 민족에게 대포를 들이대서 정복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동양에서는 일본이 재빨리 그들의 흉내를 내고 동양천지를 뒤흔들다 망해버리고 말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거기서 근대는 막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화해서 잘 살았다는 나라의 역사를 본다면 침략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옳은 길로 인도해서 잘 살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는 이성과 관련이 됩니다. 그 전의 중세기에는 교회중심에서 자아의 자각으로 발전해서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데서 독일에서 신비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내가 열심으로 기도하여 황홀한 지경에 가면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성하고 결부되면서부터 철학적으로 <데카르트>의 <내가 생각하니 내가 있다>는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니까 이성이 지성과 관련되고 인정적인 면이라든가 아름다운 면이 없어지고 과학적인 냉철한 이치를 따져 들어가 근대화라고 하면 인간미가 없는 논리적인 면을 말하는 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에 반발하고 일어난 것이 실존주의 사상인데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라는 데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계상황에 들어가면 <나>라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심리는 이상해서 6 · 25와 같은 때에는 여기 저기 폭탄이 떨어져 사방에서 사람이 죽지만 어쩐지 내 머리 위에만은 안 떨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몇 번 겪으면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막상 부닥쳐 보면 내가 죽는 것이지 남이 대신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개체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인데, 2차대전을 겪은 구라파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겪고 보니 가장 틀림없는 것이 죽음이지만 가장 막연한 것도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내면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지성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보통 가치를 <진선미>라고 하지만 <진선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뭣인지 좀 더 성스러운 것, 좀 더 원자리까지 들어가서 인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철학의 한계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하고 기계문명이 발달해서 전자계산기가 가정교사 노릇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의 지력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지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한계선을 넘어선 데 가치가 있습니다.

 

   <수심정기守心正氣>라는 말을 나는 대단히 묘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가령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할 적에 내 맘속에 모셨으니 하지 않고 내 몸에 모셨으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몸이란 묘한 것이라 보통 눈이 밝은 것은 명明이라고 하고 귀가 밝은 것을 청聽이라고 하는데 결국 사람의 지식이란 눈하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별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지만, 그러나 한걸음 더 들어가 우리가 사는 것이 눈과 귀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侍 자를 이야기할 때 지기라고 할까 몸 전체로써 느끼고 생각하는 경지가 인내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존철학에서 개인을 정적인 면에서 살리려고 하였지만 개인을 독자적인 면에서 고독한 나로밖에 안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독특한 면은 인내천할 적에 인人이라고 하면 개인주의적인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기至氣라는 면에서 전체적인 기운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젊은 사람들이 종교 문제에 관해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해 내려오는 기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그런 생활양식 속에서 살아나오고 있으나 현실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면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것을 심각하게 지적한 것이 <수운>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사람은 천주의 뜻에 의해서 온 세계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공취천하攻取天下라고 하지 않으냐. 천주의 뜻이라니, 천주의 뜻이 어디 원자탄을 떨어뜨리라는 것이겠느냐. 그러나 살아가자니 원자탄을 안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물 우물하다가는 다 죽을 판이다. 이러한 곳에 현대의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한울님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세계의 현대적 사조가 필연적으로 근대가 지나고 현대에 이르러보니까 한울님을 저 하늘에서 찾고 죽어서 천당에 가자는 종교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한울님을 찾는 종교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천도교>가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절을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를 향해서 설위를 하라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혁명이 아닙니다.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지 말라, 나를 믿지 말고 네 몸에 모신 한울님을 왜 위할 줄 모르느냐 하셨으니 그 극치에 가서 생각하면 나를 향하는게 옳을 것입니다. 그럴 때의 나는 어떤 지적인 나, 진선미의 나, 감정적인 나가 아닌 거룩하고 신성한 나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의 존중은 서양철학에도 얼마든지 나옵니다. <데모크라시>—하고 인권선언하며 여기서는 인간의 권리의식과 정치적 입장에서 인간을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내천은 이런 것을 포괄한 더욱 거룩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런 것을 안다면 서양사람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사이 근대화 근대화 하는데 현대에 살면서 언제 근대화해서 그 뒤를 쫓아가겠습니까. 악착같이 지름길을 찾아 앞장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내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양사람의 사상이란 별 게 없습니다. 신념을 가질 때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외람되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철학을 집어치워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와서 특히 정신적인 자세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남의 것을 배운다는 것보다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그 전의 신화를 가지고 억지로 머리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하여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천만은 틀림없이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천도교>에서는 장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것은 살아서 잘 살자는 말이지 죽어서 오래 살자는 말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에 간다고 해요. 언제인가 불교관계자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당신이 철학을 한다는데 철학에서는 죽어서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라고 물어요. 그래서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하니까, 그걸 모르고 어떻게 철학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기에, 나는 철학을 잘못해서 그런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할 수 없지만 당신네는 죽어서 극락간다고 믿지요, 제발 그렇게 믿기 바랍니다, 만약 다 죽게 되어 목숨이 경각에 있을 적에 아차 내가 잘못 믿지나 않았을까 할 적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니 조심하시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새 불교 중에는 참선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깨치면 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인내천과 접근하는 말인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이 있는 자리가 극락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있는 자리면 당연히 극락일 것이고 깨달으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초월했을 때 극락이 거기 있고 영원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영원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 깨닫고 초월했을 때 거기에 극락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내천이 여기까지 깊이 들어갔을 때 장생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동시에 몸을 천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천도교당에 무슨 식이 있을 때 들어서면 어딘지 향토적인 냄새가 물씬하게 납니다. 이것은 머리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땀내가 물씬물씬 나는 어머님 품에서 젖을 찾아먹는 온몸으로 느끼는 체취에서 오는 감정,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 체취로 느낄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힘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그 방향을 노리고 있습니다. 요새 노이로제가 많지요.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면 그 채취[각주:1]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잠재의식의 세계입니다. 나는 모르지요. 그러나 다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먼 곳에 떨어졌을 때 이상하게 느끼지요. 꿈자리에도 나타나지요. 그러한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속 깊이 깊이 들어가서 우리를 움직이는 무엇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인내천>을 살리고 같이 단결하여 나아갈 적에 무엇보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세계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막대한 투자를 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데 한번 지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하의식下意識, 즉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근대화 근대화 하는데, 근대화라고 하면 서양을 연상하게 되는데, 서양사람 흉내내는 것이 근대화가 아닙니다. 좀더 새롭고 우리 독자적인 창의를 발휘하는 것이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비약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남의 뒤만 쫓아가다가 천생 남의 종노릇밖에 못합니다. 내가 외국에 갔을 때 컴퓨터(電子計算機) 만드는 공장을 가 보았습니다. <피아노>만한 것, 조금 더 큰 것, 작은 것 등이 있는데 저것을 우리나라에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우리는 살 염도 못합니다. 겨우 세를 내서 빌려 쓰는데 그 세가 또 굉장히 비쌉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싼 것을 무엇에 쓰느냐. 안 쓰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쓰면 그 몇 배의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대가로 얼마를 가져갈까, 우리나라 농부들 수천 명, 수만 명이 몇달을 땀 흘린 것과 같은 값어치를 가져갑니다. 미국에서 한국의 기계도 수입한다더군요. 그 사람들은 창의성을 발휘해서 잠시 동안 뚝딱뚝딱 해서 만들어 내서 돈 버는 것이나 하지, 애써 땀 흘리고 일해서 한푼 한푼 모으는 그런 식 돈버는 것은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나도 땀을 흘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방학 때 계몽대에 나가는 학생들에게 가서 땀을 흘려라, 머리에서 머리로 옮기는 것도 있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땀에서 땀으로 통하고 체취에서 체취로 통하고 같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할 때 힘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전쟁을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미국무성의 전자계산기가 분석하고 평가하고 대항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지금은 각 기업체에서 세계 각처의 정보를 꿰뚫고 경제경쟁을 하는데 전자계산기를 쓰고 있습니다.

 

   땀을 흘리는 것도 귀중하지만 머리도 최대한으로 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비약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근대에서 근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서 근대화하려고 하고 있는데 걸핏하면 현대화한다고 유행만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전자계산기에 의한 자동조절에 의해서 모든게 움직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동조절에 의한 전자계산기를 쓰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상대방의 자동조절을 능가하는 자동조절을 발견하는 데 승패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의 자동조절의 버튼을 누르는 것은 잘 들여옵니다. 그러나 이 버튼만 누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버튼을 만든 사람에게 홀딱 넘어갈 것입니다. 땀 흘리는 것도 좋지만 창조성을 배워야 하고 그것은 배우기만 하여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새 큰 기업체는 기업체 나름으로 <엘리트>를 선발하여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합숙을 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이제는 전자계산기가 기억해 줍니다. 전자계산기 속에는 백과사전을 몇 권이라도 넣어둘 수 있습니다. 어떤 원리만 발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도 전자계산기가 다해줍니다. 분석도 다해줍니다. 몇백년 걸려야 할 계산도 몇초에 다해줍니다. 지식이나 기억이 필요치 않습니다. 창의성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창의성이란 어디에서 나오느냐. 머리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밑바닥에서 우리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근본적인 생명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천의 경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채취”라고 되어 있으나 “체취”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