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제임스 핸킨스 : 이교인들 가운데

stellio 2022. 12. 15. 03:56

 

암브로시우스, 다윗 시편 해설 中

제임스 핸킨스

이교인들 가운데

2022년 12월 14일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기독교의 종말La fin de la Chrétienté』 에서 프랑스 철학자 샹탈 델솔은, 근대의 종교가 기독교 문명의 종말을 불러왔다는 논지를 폅니다. 두터운 가톨릭 신앙을 가진 델솔이 이로써 말하려는 바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끝장났다거나 언젠가는 끝장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장 지난 16세기 동안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로부터) 세워진 문명이 마침내 그 적들의 손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현하의 기독교인들은 요컨대 이교인들 가운데 거하는 셈입니다 — 전에 기독교의 땅이었던 이 곳으로 이제 이교인들의 미래, 우리 기독교인들이 참여할 수 없는 미래가 밀어 닥쳐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패배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필히 고민해야합니다.  적대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침묵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카타콤베로 후퇴하고, 하느님의 밀정密偵으로 활동해야 할까요?

 

   『First Things』의 독자들은 델솔의 비전을, 기독교와 라이시테laïcité 사이의 난투가 혁명시대부터 죽 이어져온 특수한 역사로부터 연원한, 그저 프랑스인의 견지로 치부할지 모릅니다. 우리 역사가들에게는 이것이 유럽사, 아니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를 확장된 프랑스사 정도로 파악하는 프랑스 역사가들의 경향을 뚜렷히 나타내는 사례로 보여집니다. 아니 대체, 수건을 던지고 항복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가요? 유럽에서도, 헝가리나 폴란드, 어쩌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까지도 기독교 신앙을 받쳐주는 문명적 규범이 북돋움 받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제도화된 권력이 꼭 모두 기독교 건너편에 있는 윤리와 줄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돕스Dobbs 판결이 보여주었습니다. 훗날 우리는 워키즘의 과두제가 기독교를 광장으로부터 쫓아내는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날이 아직 아닙니다.

 

   기독교의 종말이 말해진 것은 무론 처음이 아니지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전 (674-678) 때 이미 몇몇은 최후의 날이 임박했다고 울부짖었고, 예언자 마호메트의 군대가 이제 머지않아, 사사니아 왕조의 페르시아와 그 고대종교를 말살시켰던 것처럼, 기독교권 또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또 마키아벨리의 관찰에 따르면, 13세기에 부패와 이단의 수렁에 빠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성 도미니코와 성 프란치스코의 성결聖潔의 덕분이었습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튀르크인들에 의해 함락된 후로 점쟁이들은 기독교 유럽의 붕괴를 예고했으나, 두 세기 후에 비엔나에서 패전하여 (1683) 유럽으로부터 쫓겨난 것은 오히려 튀르크인들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기어코 프랑스로부터 기독교를 지우는 일에 매달렸으나, 그 헛노릇은 12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개혁reformatio과 쇄신renovatio은 초기 교부들이 발명해낸 개념으로, 유사 이래 교회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무릇 기독교는 미처 소모되지 않은 탄력성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궁극에 가서는 하느님이 주시고, 하느님이 불허하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소모될 수조차 없습니다.

 

   델솔은 “역사로부터 버림받은 쪽의 운명이란, 더 극단으로 치닫고, 남아있던 세련된 변호인들을 잃게 되는 것, 그리하여 종국에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어떤 파국적 과정들을 지나, 적들의 희화를 시나브로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문명이 비틀대듯이, 그 문명을 변호하는 이들 역시 유치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디까? 델솔의 책은 지혜와 통찰력으로 넘쳐나고, 개중에 태반은 수긍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공적인 영향력에 관해서 너무도 비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현 시대에 기독교의 변호인들이 보여주는 이 품위입니다. 『First Things』의 지면만큼 이 품위가 내보여지는 곳도 없습니다.

 

   이교인들 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어찌 되었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이교인들의 학교로 보내고, 우리가 거주하는 도시는 그들이 다스리며, 우리가 다니는 직장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조차도 그들의 지배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만큼 유대-기독교적 사고관을 보전할 필요성이 절절했던 적이 있을까요. 『First Things』는 기독교 문명의 보존 및 재건에 기여할 도구입니다. 구원久遠한 종교의 적들 가운데 삶을 영위해 나가야하는 젊은이에게 구독권을 선물해주십시오. 혹시 영혼을 구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도성의 닳아가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