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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도슨 : 『Essays in Order』 총서를 간행하며

stellio 2022. 12. 30. 05:51

 

『Essays in Order』 총서를 간행하며

크리스토퍼 도슨

박갑성 번역[각주:1][각주:2]

 

   유럽 문명은 오늘날, 일찍이 없었던 중대 위국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각주:3] 어떤 사람은 「유럽은 이미 성기盛期를 지난 것이다. 유럽 문명은 퇴폐에의 피치 못할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이제 겨우 근대 과학의 힘을 알기 시작한 것이며 사상 초유의 신사회는 이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낙관론을 품고 있다.[각주:4] 비관이든 낙관이든 간에 옛 질서가 몰락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옛 질서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옛날부터의 신앙도,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의 신뢰도 또한 따라서 약화된 것이다. 이들 신앙은 저 과학 만능시대라고 한 19세기에 있어서까지도 아직 강력히 인심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각주:5]

 

   여기에 발간하려고 하는 총서의 목적은, 이런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고찰하고, 가톨릭의 체제와 새로운 세계와의 사이에는 서로 제휴해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상극하는 위험이 있는가를 검토하는 데 있다.[각주:6] 따라서 어떤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대 생활의 일반적 원리 또는 구체적 문제를 다룰 생각이다. 실제로 현대의 사상적 혼란이라는 것은 문예나 사회 문제나 윤리 도덕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상 분야에 나타나 있는 까닭에 연구를 어떤 한 분야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총서는 이것 저것을 실험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본시 일관한 체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일이다. 또 이것에 의하여 결정적인 해결을 제시하려고 하든가 정석적인 <프로그램>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톨리시즘은 현대 세계의 물질적 해악에 대해서 만능약을 제공할 아무런 정책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또 이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자들과 경쟁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절대로 틀림없다는 확신 위에 살아온 자에 있어서, 현대의 문제가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린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청교도나 다른 종교의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들의 시대에서 이탈하여 자기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그에 적응하는 각자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나, 가톨릭교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가톨릭교는 본시 자연계 및 인간계에 있어서의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이 각각 그 위치를 얻어서 존재할 하나의 보편적 질서를 이 세계에 행하려고 하는 것이 그 사명인 까닭이다.

 

   현대 세계의 혼란은 영靈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고, 또 영혼의 문제와 일상 생활의 영위와를 아무런 관계없는 2개의 독립된 세계로 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가톨리시즘은 이 세계와 신의 세계가 분명히 다른 것이며 각각 독립한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 두 세계가 전연 관계없다는 설에 그대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의 세계, 영원의 세계는 육의 세계, 유한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므로, 인간 생활 중에서나, 사회와 역사상에 있어서도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결국은 영원한 영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톨릭의 이상은 인생의 모든 내용을 통일하려는 데에 있다. 자연에 의하여 수여된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파괴함으로써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영의 진리와 실재와의 생명적 연관에 도입함으로써 통일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교도가 이에 필요한 노력, 즉 도덕적으로 공감하고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노력을 예비함으로써 능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가톨릭교도가 소극적으로 다만 자기들만이 진실을 파악하고 있으면 그만이라 해서 만족한다 해도 별로 교회의 신성하고 불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나, 이 세상에 있어서의 자기의 사명에 반하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이 이 세계나 사회의 멸망할 일부를 표시하고 있으면서, 이 세계와 이 사회를 버리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마리탱이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매몰된 번데기와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역사 중에서 출생되고 있는 새로운 속세에 섭리하는 신의 의지가, 어떠한 방식으로 현시되어 있는 것이다. 변전하는 여러 모습도 이런 뜻에서 이 지상의 영원한 이익에 유익한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유행 사상에 안일하게 동의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행 사상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신의 원리를 상실케 하고, 극히 <협소한 마음>을 배양하여 <인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역사에 있어서의 신의 일을 의롭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 일은 실로 곤란한 일이기는 하나 과거 수세기를 통하여 어떠한 시대보다도 이것을 성취하는 데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옛 방벽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근대 문화의 파괴적, 부정적 경향은 과거의 전통에 있어서의 좋은 것을 무수히 파괴하였으나, 그것은 동시에 또한 많은 인습적 편견과 고정 관념을 일소해주었다. 이 편견과 고정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의 전통은 근대 생활의 진실한 모습에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고립하여 있었다.

 

   현대인은 종교 문제에 관해서 극히 민감하다. 실제로 일반 영국인은 대체로 교회에 가지 않으며, 신학상의 확신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연하다. 벌써 전세기의 사람들과 같이 종교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세기에는 교회에 간다는 것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는 표시이며, 종교라는 것이 국민 생활 중에서 뚜렷하고 국한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데에는] 옛 종파적 근성이 편협하며 어리석은 것이라는 인식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종교가 합리적인 인생의 희열에 대해서 지극히 엄격한 제약을 주며,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 착취케 하며, 부자가 되려고 경쟁을 시키고 인생을 염증나는 것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종교에 반항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것이 실재의 여러 모습과 접촉하며 근대 세계의 사회적, 사상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고, 또한 종교가 인간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요구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가끔 진정한 종교적 이상에서 분리할 수 없는 절대적 초월요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 결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전세기보다 약화했다고는 하나, 오히려 널리 보급된 것도 사실이다. 종교는 설교단과 집회소에서 빠져나와, 신문과 방송국에 나타났다. 영국에 있어서나 미국에 있어서나, 종교라든가 근대라든가를 다룬 문학이 계속적으로 홍수와 같이 나오고 있으며 또 근대 과학의 광명에 비쳐서 그리스도교의 문제를 취급한 문학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문학은 대체로 그리 적극적인 가치가 없다. 과연 그것은 진실에의 요구를 표시하고 있기는 하나, 하등의 적당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런 철학적 원리도 없는 까닭에 공허한 기염이며, 시국의 참된 곤란을 겉도는 막연한 낙관론으로 인해서 경기景氣는 좋으나 겨우 <명석한 고찰>의 대용품으로 <천진한 선의>를 내는 것뿐이다. [각주:7] 종교는 근대 세계와 조화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 정통 신학의 전통을 던져버리고 아무런 확고한 지적 근저가 없는 도덕 관념과 사회 이상밖에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저 숱한 작가들은 가톨릭 사상에는 아무런 동정도, 이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톨리시즘>이라는 것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전연 무관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는 무능한 자가 도피하는 장소이며, 가톨릭의 철학자들은 중세기적 암흑의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과거에 사는 사람들이며 새시대가 시작된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마치 17세기의 강단학자가 천지5원설을 문제로 하여 논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우주론을 떠들고 있을 때 이미 뉴턴과 갈릴레오가 새로운 물리학설을 창조하고 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종교 사상가의 대종大宗들은 <도그마>로부터의 종교의 해방이라든가,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본질이라든가 하는 진부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의외로 세계는 주관주의, 이상주의를 버리고 새로이 절대적 혹은 영적 실재를 구하고 있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사실 18세기 및 19세기에 있어서는 유럽 문명의 모든 조류는 가톨리시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철학의 절대주의 및 실재주의는 루소나 칸트 혹은 스펜서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것이었다. 비오 9세가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 진보주의 및 근대 문명과 조화할 의무가 있다는 이론을 부정했을 때 이 선언은 유럽 각국에서 이구동성으로 갈채를 받았다. 이것은 교황이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물질 진보주의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이며 아무도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각주:8]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연 다르다. 자유주의, 진보주의, 근대 문명은 70년 전과는 전연 딴 조명 밑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벌써 진보가 필연적이며, 자동적 프로세스라고는 믿지 않으며, 또 인간이 제멋대로 연구해가면 인간은 반드시 더욱 현명하게, 더욱 행복하게, 더욱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들도 근대 진보의 현실이 거대한 물질적 성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조부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을 의미한다. 딴 동물의 생활과 다르지 않게, 인간의 생활은 힘의 균형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 균형이 제약적 요인의 제거로 인하여 전복되면, 이것을 새로이 원상태로 복귀하는 경로는 극히 위험하고 곤란한 것이다.

 

   이로써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증가한 부와 인구는 무조건으로 계속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제동력을 생기게 함으로써 자기의 극한을 만드는 것이다. 기계는 산업의 거대한 확장을 가능케 하였으나, 그것은 또한 생산 과잉과 실업을 가져왔다. 과학은 질병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가시켰으나 그것은 또한 전쟁의 파괴력을 격화했다. 식민지의 확대, 경제력의 확대는 유럽으로 하여금 세계의 지배력을 장악케 하였으나, 그것은 또 동양인의 적의와 항쟁심을 각성시켰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부의 원천을 만들어 냈으나, 동시에 그것은 착취와 사회불안을 조성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 표류함으로써, 방향도 없이 진보해 갈 수는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를 번영과 권력에 인도해 온 동일한 조류가 동시에 또 우리를 파멸에로 인도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만약 재액을 피하려고 한다면, 지도와 질서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된다. 문명은 결코 진화의 자연적 도정의 결과가 아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자연을 인간 정신에 의하여 완전 지배하는 데서 오는 것인 까닭이다. 문명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고 창조된 바 인공적 질서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 있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데는 문제가 없다.[각주:9] 다만 현재의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창조하는 질서가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냐, 혹은 그것이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냐에 있다.

 

   이것이 근대 세계의 주요 문제이다. 한편에 있어서 우리는 공산주의자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순전히 유물론적인 근거 위에 하나의 질서를 건설하려고 하는 유일하고 철저한 시도, 모순없는 노력이다. 그러나 이보다 일관성을 적으나 훨씬 인간적인 아메리카적 해결책도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전통에, 표준화된 집단 문명이라는 유물적 질서를 결합시킨 데에 기초가 된 것이다. 현실의 운영 상황으로 보면, 러시아의 실험보다는 훨씬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치 이상과 그 경제적 실천과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순당착이 있으며, 그로 인해서 지적 불만과 도덕적 불안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집단 문명의 메카니즘과 유물주의는, 정치적 자유 내지 사회적 민주주의의 옛 관념과 하등의 유기적 관계가 없다. 그 관념들은 옛날의 더욱 단순한 사회 경제의 상황 하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메리카적 해결책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한 지방 한 시대의 어떠한 상태와 관련되어 있을 뿐이며 그 진보는 아직 불완전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유럽 문화의 역사적 전통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결코 순전히 유물론적이었던 예는 없다. 과거에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연결되어 있었고, 전세기에 있어서도 그것은 자유주의적 인도주의, 자유주의적 국민주의의 이상과 동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의 혁명, 영국의 자유주의, 이탈리아의 사회개혁Risorgimento, 독일의 국수주의, 의회존중주의Parliamentarianism, 사회주의, 이러한 모든 운동이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며 그리고 이것들은 다 정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들만으로는 정신적인 질서를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보면 불순한 현상이며, 이상주의에다 이기주의를, 정신적 열망에다 유물적 목적을 혼입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기의 후반에 있어서 이들은 일종의 소극적 정화운동을 해 왔다. 마치니와 청년 이탈리아의 국수주의가 무솔리니 및 파시스트의 국수주의에로 전화하였고, 영국의 자유주의는 존 러셀 경과 글래드스턴의 손에서 로이드 조지의 손으로 옮겨갔다. 또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환상에서 웨스트민스터의 현실에로 내려왔다. 민주주의를 위한 안정된 세계를 만드는 일은 4년간의 집단적 살인행위와 언제든지 폭발할 위험을 내포한 평화를 가져왔다.

 

   아무튼 계속적으로 곤란을 받아온 것은 관념적 요소였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19세기의 영감이었던 모든 관념은 산산조각이 나고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어디에서나 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의회제일주의Parliamentarianism라든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각주:10]

 

   이상주의의 모든 힘이 이와 같이 퇴폐했다고 하는 것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유럽이 유물적인 세계관을 수락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유물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감은, 19세기의 관념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비례하여 감소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번영을 자랑하던 19세기, 자신이 만만하던 19세기보다는, 훨씬 간절하게 정신적 세계에의 요망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근대적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로서 올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모든 면에 있어서의 이 실망과 환멸의 비애의 그늘에는 더 심각한 무엇이 있다.—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것이다. 이 신뢰야말로 전全 근대발전의 중심적 도그마이며 영감이었던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상실한 것이다. 이는 아무튼 놀라운 일이다. 근대 세계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Weltanschauung의 반항의 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생각을 돌이켜 볼 때 실로 경탄할 일이다. 그러나, T. E. 흄이 통렬하게 말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했다는 변혁은 사실과는 정반대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인간은 그 중심이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유현幽玄한 강력한 것에서부터 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낙천주의에의 변화를 얻은 것이다. 이 낙천주의는 루소에 있어서 제 1단계를 경과한 후 점차로 전락해 가서 마침내 우리는 불행하게도 도탄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T. E. Hulme, 『Speculations』, p.80).

 

   그러나 현세기에 이르러서부터, 이 인간 이상화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 일반화되어 왔다. 심리학자는 인간 영혼의 심해를 측정하여 거기에는 근소한 진흙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문학자들은 낭만적인 인생관 같은 것은 처음부터 비웃어버리고 말았다. 또 예술가들은 추상적 관념을 배척하고 자연주의를 가했으며, 물리학자는 낡아빠진 과학적 유물론의 극히 소박한 경험주의를 깨끗이 버리고 상대적 이론이라는 수학적 추상관념을 수립하고 말았다. 철학자들 간에서도 전통적인 주체성과 관념론을 폐이弊履와 같이 버리고, 존재론, 실재론에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반동은 전통의 성벽이 길게 계속된만큼 특히 독일에서 현저하다. 신칸트파의 학자들까지도 그들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여, 유럽 사상의 옛 전통의 광명에 비춰서 칸트를 재음미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의 철학은 이미 사멸한 철학이라고 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독일 사상계에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실유론(實有論, realism)에로 복귀하려고 하는 현저한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종교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태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가치를 극히 높게 보는 것과 자연을 관념적으로 이상화하는 결과로 정신적으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낮게 보거나 혹은 부정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형이상학과 교회의 도그마를 버리고 인륜적 관념에 이론을 집중시킴으로써 근대 사회에 교묘하게 적합할 수 있었던 것이나, 가톨리시즘은 주관적인 관념론과 도덕적 실용주의의 공기에 파묻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야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페터 부스트Wust가 말하는 <가톨릭교의 추방 생활로부터의 복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가톨릭사상은 유럽문화의 중심에 지위를 발견하고, 근대 세계에 그 사명을 수여할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톨리시즘은 19세기 관념론의 파산으로 인하여 화의和議를 해버리지는 않았다.[각주:11] 그는 신교의 모든 파벌이 부정하듯이 자연 질서의 존재와 의의good를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신계의 질서는 절대적인 정신적 원리의 광명 하에 있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과거 25년 간에 있어서 가톨릭적 지성의 괄목할 부흥이 생긴 것이다.[각주:12] 반세기 전에는 프랑스 및 독일에 있어서는 인텔리는 무신론이고, 가톨릭 신자는 시대의 사상에서 추방된 유형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같이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식인들 간에 더욱 가톨릭의 영향이 가장 현저한 것이다. 이것은 또 철학의 분야에 있어서 극히 명백하게 예시되고 교황 레오13세에 의해서 시작된 토마스 부흥이 크게 결실되어 일반에게 수락되기까지에 이르른 것이다. 프랑스에는 쎌띠랑즈Sertillanges 신부와 마리탱이 있고, 두 사람은 근대 세계에 대한 성 토마스의 찬란한 해석자이다. 또 중세사상사가인 질송Gilson과, 고故 루스로Rousselot 신부는 명저 『성 토마스의 주지주의L’Intellectualisme de St. Thomas』의 저자로서, 우리의 자랑이다. 벨기에에는 루뱅파가 있다. 이것은 과거 40년간에 있어서 가톨릭 부흥의 선구자이며 이 파의 마레샤르Maréchal 신부의 『형이학상의 출발점Point de Départ de la Métaphysique』은 최근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독일에 있어서의 가톨릭 사상 부흥은 데니플레Denifle, 에를레Ehrle, 바움케르Bäumker, 폰 헤르를팅von Herlting 및 그라프만Grabmann 등의 역사 저작에 우선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세사상의 지식을 부흥시키는 데에 있어서 각자의 연구로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뉴먼Newman의 영향 및 막스 쉘러Scheler와 같은 최근의 독일 사상가도 가톨릭 사상 부흥에 많은 힘이 되었다. 쉘러의 가톨릭에 대한 개인적 귀의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칸트 윤리에 대한 비판 및 그가 윤리학, 사회학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영계靈界의 가치에 복귀한 것은 지식인의 세계에 가톨릭적 전통의 정신적 풍부성을 의식시키며, 가톨릭교도들에게도 그들의 지적 사명의 중대성을 새로이 인식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이 수개년 간에 종교 사상은 대단한 발전을 한 것이다. 즉, 오늘날에 있어서 가톨릭 철학이 근대 사상과 가장 밀접히 결합된 것은 독일이며, 현대의 요구가 가장 적합하고 있는 것도 독일이다. 이것은 프시와라Przywara, 부스트Wust, 칼 슈미트Carl Schmitt, 테오도르 해커Theodor Haecker, 폰 힐데브란트von Hildebrand와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순수 문학에 있어서도 가톨릭 운동의 부흥이 현저하다. 이는 프랑스에 있어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비교적 젊은 작가가 많이 가톨릭 사상의 보급에 정신挺身하고 있다. 원래 가톨릭 문예 운동은 대전 전부터 페기Péguy 와 클로델Claudel과 프시카리Psichari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다. 특히 모리스 바레스Maurcie Barrès의 영향이 많다. 그러나 바레스 자신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이 운동은 작가, 극작가로서는 클로델Claudel과 앙리 게옹Henri Ghéon이 대표하고 비평가로서는 앙리 브레몽Henri Bremond, 샤를르 뒤 보Charles du Bos,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앙리 마시Henri Massis가 대표하고, 소설가로서는 프랑수아 모리악François Mauriac, 쥴리앙 그린Julian Green이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군소 작가들을 이끌고서 『금의 갈대Roseau d’or』, 『Cahiers de la Nouvelle Journée』, 『시사 문화론제Questions Disputées』, 『전야Vigile』등의 여러 논총에 기고하고 있다.[각주:13]

 

   독일에 있어서는 이 운동은 아직 최근의 일에 속하고,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독일의 사정은 많은 점에 있어서 영국의 사정과 흡사하다. 독일 문학에 있어서의 중심적 전통은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가톨릭 작가는 소수 반대당의 문학이라고까지 해서 거북스러운 분위기에 잠겨서 대단히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불리함들은 대담함과 지적 활동이 왕성한 새로운 정신에 의하여 극복된 것이다.[각주:14] 이 신문예 운동의 실력과 활약 상황은 『고지Hochland』와 『성배Der Gral』와 같은 가톨릭 잡지에 나타나 있다.

 

   영국에 있어서의 가톨릭은 독일과 같은 불리한 조건이며, 오히려 훨씬 고난의 길을 걷고 있으나 여기에도 역시 가톨릭 문예 운동의 현저한 부흥을 볼 수 있다. 사실 영국 가톨릭이 수행한 업적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또 수적으로 극히 열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예기한 것 이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가톨릭의 지적 부흥은 전체로서 전 유럽 대륙의 운동이며, 그 중요한 의의는 아직 영국에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철학의 존재까지도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낡은 안목밖에 가지지 않는 쿠울톤Coulton 박사와 반스Barnes 목사 같은 작가가, 가톨릭 사상을 다만 대규모의 미신적 발작 정도로 생각하고 또 현대의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리도 아닌 것이다.

 

   본 총서의 주목적은 독일과 프랑스 등 대륙에서의 현대 가톨릭 운동의 소식을 영국에 소개하는 데에 있다. 벌써 영국은 현대에 있어서 다만 하나의 섬나라가 아니며, 또 문명의 외적 형식은 도처에서 단일 공통화 문화의 지적 공동체를 재흥再興하는 데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각주:15] 특히 가톨릭 신자에 있어서는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만이 오늘날의 세계 동포적인 기계문명의 유물적, 외면적 단일성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보편적인 영적 세계의 대표자로서 의연히 서 있는 것인 까닭이다.

 

   물론 우리는 가톨릭 부흥에 있어서의 지적 요소의 중요성을 과대시할 것은 아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지성의 문제를 가톨릭의 전매라고 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가톨리시즘은 결코 신기한 지식을 구하는 자에게도, 또 경기가 좋은 편을 들고 싶은 자에게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으로 영의 실재를 구하는 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장점은 결코 두뇌가 우수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지하는 주장의 견고함에 있는 것이다. 격언에 있는 토끼conies와 같이, 우리는 약할지라도, 우리는 견고한 암굴 속에 살고 있다.[각주:16] 우리의 사상은 자유라고 하지만 멋대로 주의 주장을 조작하여, 신을 제마음대로 적당한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바로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야말로 근대 사회가 전락한 불신의 무정부 상태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19세기는 문학과 윤리 속에 정신적 이상을 삽입하려고 하였으나 한편 영적 세계의 객관적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에 우리는 오늘날 완전히 인간 생활에서 영적 요소를 추방해버리든가 혹은 영적 요소야말로 실재의 기초라고 인정하든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 사회가 후자의 원리를 인정하는 한 그는 가톨릭적 해결책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톨리시즘은 영적 세계 원리의 유일하고 위대한 역사적 대표자이며, 이 영적세계는 인간 정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배자이며 창조주의 창조물인 까닭이다.

 

   마리탱의 본 논문은 이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양상에 있어서 취급한 것이며, 종교와 문화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마리탱은 『가이사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 Caesar’s』이라는 논문에서 영계의 것과 속계의 것과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논했거니와 본서에 있어서는 정치론을 초월하여 궁극의 영적, 형이상학적 기초를 논하고 있다. 이것은 낡은 주제이며 과거의 논쟁과 멸절된 이단들의 쓰레기débris 밑에 매몰되어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각주:17] 그러나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현실의 논제로서 존재한다. 이 논문이 주목표로 하고 있는 가톨릭의 독자층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원리의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실현을 신앙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생명적인 논제이다.

 

   마리탱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가톨릭의 지적 부흥에 있어서의 가장 대표적이며, 영적 세계의 실현은 그의 전全 문필 활동의 지도 원리였다. 그는 사상의 방향 교정을 「지식에 의하여, 영성의 우위를 위한 절대 실재에의 복귀」라고 하여, 이 방면의 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순수한 성 토마스의 전통에만 의거하고, 때로는 극단으로 근대 철학, 근대 과학을 멸시하는 것 같이 보이나, 그가 근대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베르그송Bergson의 제자이며, 근대의 연구에서 성 토마스에 이르렀고, 사실은 그가 근대 사상에 통달에 있기 때문에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인 성 토마스 철학의 객관성과 지적 강인성을 잘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각주:18]

크리스토퍼 도슨

영국, 1931

 

  1. 자크 마리탱의 『종교와 문화』에 첨부된 크리스토퍼 도슨의 서문이다 (도슨은 그 자신 『종교와 문화』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1931년, 도슨은 자신이 기획한 “Essays in Order” 총서의 첫 권으로 마리탱의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했다. 따라서 도슨의 서문은 마리탱의 본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총서 전체에 대한 서문(“General Introduction”)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박갑성이 도슨의 권두언까지를 포함한 이 “Essays in Order” 판본을 국역해서 경향잡지사에서 출간한 것은 1955년이었다. 이 번역은 일부 수정되어서 1975년 신태양사의 “세계기독교사상전집” 제6권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신태양사 본을 옮겨 적었다. 박갑성의 번역은 원문의 자구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맞춤법과 명백한 오역들을 수정하는 것에 그쳤다. 다만, “마리탱”, “마리땡”, “가톨릭”, “카톨릭” 등 오락가락 하는 표현들은 모두 하나로 통일했다. 낡고 근사한 표현들은 그대로 두었다. [본문으로]
  2.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생기는(...) 문제를 고찰”하기를 목적했던 도슨의 이 총서는 얼마 전 미국의 Cluny 출판사에서 “The Persistence of Order”라는 제목으로 총 세 권으로 재발간 되었다. [본문으로]
  3. 원문을 직역하면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원리는 흔들리고 신용을 잃었으며, 우리는 무엇이 그 원리들을 대체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정도가 된다. [본문으로]
  4.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은 유럽은 이미 성기盛期를 지난 것이며 유럽 문화는 퇴폐에의 피치 못할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이제 겨우 근대 과학의 가능성을 알기 시작한 것이어서 세계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과감히 초월하는 초유의 사회질서는 이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박갑성의 번역은 의역이다. [본문으로]
  5. “저 과학 만능시대라고 한”은 박갑성이 덧붙인 대목이다. 무리없이 읽혀서 그대로 두었다. [본문으로]
  6. 이 총서란 물론 “Essays in Order”를 지칭한다. “essays in order”는 “essays on order”와 유사하게 “질서에 관한 에세이들”로도 읽히는 한편으로, “가지런한, 정돈된, 적절한, 유효한 에세이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질서에 관한 에세이들”이라고 상투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소 얼버무리는 번역이 된다. 어느 쪽이든, 후련한 정답은 없는 성싶다. [본문으로]
  7. 박갑성이 애호하는 이 “경기景氣”라는 단어는 빼고 읽어도 무방하다. [본문으로]
  8. [도슨의 원주] 자크 마리탱, 『가이사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 Caesar’s』, 부록 V, “자유주의”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9. “이미 오늘날에 있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도로 새기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문으로]
  10. 다음 문장이 빠져 있다. “국수주의[민족주의]만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나, 그 음울하고 위협적인 모습은 문명의 기치에 별반 좋은 징조는 못 될 성싶다.” [본문으로]
  11. “화의和議를 해버리다”는 “compromised”의 주책없는 직역이다. [본문으로]
  12. 원문에는 “remarkable revival of Catholic intellectual life”라고 적혀 있으나 “life”를 너무 심각하게 여겨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13. Cluny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에는 『Vigile』 대신에 『베르길리우스Virgile』라고 적혀 있는데, 오타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4. 박갑성의 번역은 이 대목에서 불명확하다. 바로잡았다. [본문으로]
  15.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벌써 영국은 다만 하나의 섬나라가 아니며, 또 문명의 외적 형식은 도처에서 단일화되고 공통화more cosmopolitan되므로, 유럽 문화의 지적 공동체를 재흥再興하는 데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16. 이 문장은 오역이라고 할 만하다. “the proverbial conies”는 “격언에 있는 토끼”가 아니라 “잠언에 나오는 토끼[또는 사반/오소리]와 같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Proverbs 30:26. [본문으로]
  17. “extinct heresies”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져서 삽입했다. [본문으로]
  18. 페터 부스트의 논문을 소개하는 대목은 삭제되었다. 박갑성의 문단구분을 Cluny 판본의 문단구분에 따라서 수정하였다. Sheed & Ward에서 출간된 초판본은 미처 참조하지 못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