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에른스트 윙어-마르틴 하이데거 서신

stellio 2023. 6. 20. 06:00

 

번역자의 앞글

   독일 보수혁명에는 1918년이라는 절대 연도가 부여되어 있다. 그 연도의 전언傳言은 선명한 바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고 『서구의 하강』의 첫째 권이 출간된 해였다. 정치적으로, 공화국의 의회주의는 파국적 모순에 직면해 있었고, 괴테의 고전주의의 신휴머니즘적인 유산이 남긴 문화적 여백 속으로 횔덜린에서 하이데거에게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적 파토스는 파고들었다. 학문에서 그 휴머니즘은 실증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고대의 가치들을 상대화시키던 역사주의에 의해서 포섭되었고, 그 반고전주의로서 어제와 그제들은 더 이상 오늘의 삶의 실재를 조형하는 일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보수와 혁명은 결국 같은 것이었는데, 같은 것이 왜 반대인지 사람들은 묻지 않았다.

 

   에른스트 윙어는 보수혁명을 통해 일대사를 이루었다. 1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유럽 내부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헌정체제와 문화들을 둘러싼 일대 전면전이었다. 독일의 우월감은 학문과 고전문예, 군사력과 입헌적 군주제에 바탕했고, 독일의 문화적 성취는 축적된 고전의 수용과 전승에 의해서 조건 지어져 있다는 의식은 확고했는데, 이 우월감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보답되었을 때, 세계대전은 “무에 의한 대숙청”이었으며 상처받은 윙어들은 사교도들과 같이 잘로몬과 에드가 율리우스 융 주변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시대가 어지러웠음으로 이에 따라 말도 어지러웠다. 고국에 용납되지 못했던 폐품 같은 청년들은 독일과 유럽 사이에 광야를 짓는 독랄한 말부림들을 함부로 주워 읽었고 신들이 뛰쳐나온 그 땅에서 그들은 트라클과 게오르게의 미학에 세뇌당했다. 말초신경은 옥죄이고 뇌세포들은 부어올랐고, 계몽과 부르주아의 시대는 끝났다는 흔한 말 한 줄 더 보태기 위해서 『데어 링』과 『다스 게비센』에게 석권되었다. 세기말적인 환흉 속에서 핏물이 솟구치도록 의미를 구하고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시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했던 그 벌거숭이 인간들은 테러의 미학으로 함몰했다. 서부 전선의 모리배에게 감전된 그 버러지들은 윙어의 무모한 역마驛馬에 열광했고, 『강철 폭풍 속에서』의 쓰레기매립지 같은 참호 속으로 유폐되었다. 저능아들의 몸에서는 모든 땀구멍마다 헤아릴 수 없는 『광란의 오를란도』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바야흐로 니힐리즘의 시대였다.

 

   하이데거는 그 니힐리즘의 은총을 받았다.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공허와 모욕감은 숨막혔고 그들은 몸 둘 곳 없었다. 소년배들은 니힐리즘의 가호 아래서 다음 페이지를 서둘러 넘기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도주”를 도모했다. 카시러의 상징형식에서 시간의 밀도는 맹렬한 기세로 엷어졌고, 로젠츠바이크의 구원의 별에서는 시간이 고여서 폐수처럼 썩어가는 분지盆地의 형상이 감지되었다. 그 때, 하이데거의 철학은 시간을 짓무르게 하는 요술이었다. 그에 따르면 시, 곧, 철학은, 언어로 사유하는 부재였고, 오로지 시와 사유만이 세계와 역사에게 의미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와 시간』 속에서 비재非在는 존재를 모독하고 존재를 성화하는 의미의 광채를 띠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파락호들의 시혼을 받아내는 피뢰침이었고, 비극적인 것, 스스로를 오므리는 것 속으로 의미는 핏발을 세웠다. 윙어는 니체를 추수했고, 선악의 피안에 있었으나, 숲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그 밟히지 않는 죄의 길을 집으로 삼았던 하이데거의 호명권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었다. 윙어는 하이데거에게 예속되었다.

 

   전간기 독일은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공간연출이었다. 하이데거는 보수혁명론자들의 출판 그룹에 소속되지 않았고 1933년 이전에는 정치적 작가로서 운을 떼지도 않았다는 점에서는 슈미트와 구분되었다. 그러하되, 하이데거는 분명히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에콜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이치툼과 실지회복주의의 푯말을 치켜 들어서, 그는 독일인들에게 각별히 주어진 역사적 사명들을 대의했다. 『존재와 시간』의 실존적 존재분석은 존재의 역사로 인계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울부짖던 참다운 역사적 실존은 “민족적인 것”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31년부터, 꼴같잖은 “1789년”의 진저리나는 유산과 그 모순덩어리의 진보를 속속들이 표백하고 또 내다버리자고, 그리하여 “오른쪽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룩하자고, 하이데거는 외마디로 짖어댔다. 열등하고 비역사적인 인종들의 씨를 말리고 오염투성이가 된 독일을 게워내자고 비명을 질렀던 히틀러에게 젊은 교수의 시선은 박혀 있었다. 이처럼, 하이데거가 나치 내부의 혁명적 분파를 향해서 통제불능으로 이끌리고 있을 때, 윙어는 노동자에 관한 혁명적인 견해에 몰두하고 있었다. 1932년, 윙어는 『노동자』를 편찬한다.

 

   하이데거가 이 독일적 현존재에 눈독을 들인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1932년, “소규모 서클에서”, 윙어의 『노동자Der Arbeiter』를 강독했다고 그의 총장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마르크스에서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아바이트는 독일인들의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같았다. 윙어의 매니페스토는 노동자의 몰개성성을 집요하리만큼 상찬했다. 『강철 폭풍 속에서』가 군인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세계대전의 전쟁터를 통과한 뒤 어떻게 역사적으로 현신現身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듯이, 윙어의 노동자는 기술이 부추기는 생산성의 요구에 절대복종하는 병정과도 같았다. 그렇기는 해도, 군인이 다만 기술의 지배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유형인 반면에 노동자는 기술과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 형상이었다. 윙어는 기술을 “총집결”로 특징지었는데 이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모든 국면을 작동시킨다는 뜻이었다. 윙어가 볼 때, 이 총집결에 부응할 수 있는 타입은 바로 군인이었고, 이 총집결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존재가 곧 노동자였다. 하이데거는 윙어의 이 정치적 전체주의에서 니체식의 권력의지와 초인을 직시했다. 윙어와 하이데거는 긍휼한 새로운 형상들Formen에 목말라했고 새로운 엘리트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인류학적인 관점을 공유했다. 때가 이르면, 윙어의 노동자론은 율리우스 에볼라에게 영향을 미치고 신우파들의 헹가래를 받을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보수주의자였고, 전통의 타자他者였고, 보수혁명론자였다. 파괴하고 해체해야만 전통이 이루어짐으로 그는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장 완고하고 가장 하릴없는 복고주의의 힘으로 철학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가장 미래지향적인 철학의 혁신을 단행했다. 1934년, 12개월 간의 총장-영도자 직에서 내려선 연후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일신론 배후에 있다는 프리소크래틱한 시작점으로 돌아갔고, 아테네와 예루살렘, 플라톤과 모세 이전으로 소급하는 그 태어나지 않은 근본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몽롱한 말들을 많이 지껄였다. 그에 따르면, 막힌 수챗구멍 같은 형이상학의 첫 시작은 하강Untergang 곧 모더니티였음으로 (그리고, 젊은 날의 하이데거에게, 히틀러의 반정反正이야말로 이 하강을 유기하기 위한 불가피한 의례일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에게 형이상학으로 나가는 최일선의 전진기지이며 형이상학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일 것이었다. 오래된 것만이 새로웠고, 태어나지 않은 곳이 곧 열반이었다.

 

   하이데거와 윙어가 마침내 교유하고 우의를 맺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1948년 9월 16일 토트나우베르크에서 두 늙은 혁명가는 처음 조우했다. 윙어에게도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눌러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무서운 고립의 지루한 집착 안에서 철학을 탄생시키는 그 요술꾼은 신령했고, 그 법음法音은 논리나 역사를 초월한 피의 호소이자 절대적인 확신으로 군림해 왔다. 이 때늦은 방문을 계기로, 1949년부터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 번역해서 내놓는 대목은 1950년에 씌어진 것으로, 초창기의 서신에 해당한다.

 

   1950년은 “검은 수첩”에서 노골화된 그 분노가 가라앉고 그간의 뒤숭숭했던 생활이 겨우 정상화된 해라고, 하이데거 전기작가인 로렌츠 예거는 쓰고 있다. 그 해, 많은 사람의 경복을 받았던 『숲길』이 발간되었고, 그의 환갑을 기념해서 『Anteile』가 출간되었다. 뢰비트나 가다머 같은 하이데거의 큰 제자들뿐 아니라 사랑이 계속 지체되는 사태를 뜨겁게 자각했던 과르디니와 같은 가톨릭 사상가, 그리고 에른스트 윙어와 그의 남동생 프리드리히 게오르그가 이 기념논문집에 기고했다. 에른스트 윙어의 「선을 넘어서Über die Linie」는 이 논문집의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고, 그로부터 5 년 뒤 이번에는 윙어가 환갑을 맞았을 때, 하이데거는 윙어의 기념논문집에 「선”에 대해서Über <Die Linie>」라는 글을 기고한다.

 

   「선을 넘어서」에서 윙어는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경유해서 『노동자』의 각론을 폈다. 그는 세계의 니힐리즘적 상태를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니힐리즘과 정면대결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신학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신학을 질타했다. 윙어가 볼 때, 노동자들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부르주아 대중의 유일한 빈틈이었고, 총집결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세련된 나약을 찢어버리는 이 시대의 타이탄들이었다. 니힐리즘은 외면하고 싶도록 두려웠지만, 니힐리즘은 이 세계의 재편과 갱신, 부활과 복원을 위한 통과의례가 될 것이었다. 니힐리즘을 끝내기 위해서 우리가 그것의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선을 넘는다”의 의미이다) 기술적 프레임워크(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Ge-stell”)는 존재망각의 양식일 뿐 아니라 여전히 존재의 양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총동원되는 노동자의 형상 속에서 윙어가 위험을 보았지만, 위험이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강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형상을 통해서 위험을 소진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 소진으로부터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구원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선 너머를 향한 팽팽한 그리움으로 글을 쓰고 있던 윙어와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윙어에게 기술이 “거인족”적인 것인 반면에 하이데거에게는 다만 형이상학의 실현이었던 것처럼, 윙어가 니힐리즘에게서 서구적 ·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가치들의 정반대를 본 반면에, 하이데거에게 니힐리즘은 그 가치들의 안타까운 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윙어는 니힐리즘은 데카당스가 아니라 강철기계와 같이 진군하는 인간들, 카타스트로프에도 부숴지지 않고 나아가는 영웅적인 노동자들을 양산해냈다고 보았고, 하이데거의 「”선”에 대해서」는 그 남루한 희망조차 섣부른 낙관주의라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심으로 하이데거는 연명하지 못했다. 근대 테크놀로지는 하이데거의 종부성사였다. (오직 한 분의) 신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조그맣게 간증했던 1966년의 『슈피겔』 지와의 대담에서도 근대 기술의 본질은 천부적인 화두를 이루었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유년기의 뇌파에 새겨진 메스키르히의 햇빛과 종소리를 따라서 그의 103권에 달하는 전집 속의 수천만 활자들은 모조리 하나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자진自盡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사람의 자세였는지, 아니면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다만 가톨릭 신앙 쪽으로 허물어진 것인지, 나는 두려워서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보수혁명”이라는 네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그 자멸적 암호에는 “보수”와 “혁명”을 조합한 첫 마음과 그 두 단어 속에서 시든 마음이 비명처럼 심겨져 있다고, 나는 겨우 추스르고 있다.

 

   이 서신을 번역하면서 유의한 핵심 사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알랭 드 브누아의 지적대로 윙어가 하이데거의 휘하에 들어 있었다는 점 (그렇기는 해도, 여기 번역된 두 서신은 니힐리즘에 대한 이 두 대가의 견해 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두번째는 내 나름으로는 언어를 관념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고 즉물적으로 써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그 노력은 마침내 무익했다. 결과적으로는, 톤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떫은 번역이 되었다. 글자를 남기지 못한 이미지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무기력해진다.

 

본문

   라벤스부르크, 1950년 1월 6일

   친애하는 하이데거 선생님께,[각주:1]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들길」에 대해서 미처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읍니다.[각주:2] 그 선물은 저에게 선생님의 사유의 본질에 관한, 선연한 깨달음들을 수여해주었읍니다.

 

   선생님과 제 공동의 출판사인 비토리오 클로스터만 측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선생님의 생신에 즈음하여 간행되는 기념논문집에 기여함으로써 선생님의 저 선물뿐 아니라 선생의 존재에 대한 제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각주:3] 아마 이 선물은 [다른 분들의 것들과] 동질적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 대신에 바라건대 진실되기는 한 것입니다.

 

   저의 독자이신 바르트 씨로부터 선생님의 브레멘 방문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았읍니다.[각주:4] 그가 제게 귀띔해준 대로의 토론이 그 세부에서 틀림이 없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읍니다만, 선생님께서 “저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하던가요.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주장을 내세워 본 일이 없습니다. 저를 정작 두렵게 하는 것은 신학적 통찰의 속절없는 결핍이고, 제 바람은 그것이 철학자들에 의해서 극복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철학자도 시인도 그들[신학자들]에게서 인수할 수 없는 직임이어서, [행여] 다른 세력들에 관해서는 불문가지이겠지요.

 

   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갓] 반反그리스도인은 더구나 아닙니다만.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의 명언明言 속에는 집요한 알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저는 호의를 가지고 참을성 있게 굴며 사실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저희가 감내했던 많은 충격들을 품어 안았습니다. 오늘까지도 라벤스부르크 같은 도시에서는, 그곳의 두 교회[교단]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날 밤에라도 식인食人 행위가 창궐할 것만 같은 형편입니다. 그것은 얇디 얇은 허울 아래 도사리고 있습니다.

 

   포스트 페스툼post festum에도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개입할 수 없는 천상天上에, 다른 것들 가운데서, 태어나려고 떨고 있는 기독교의 아이온이 결단코 없다고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전조Vor-Gänge가 우리 여생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지도 모르겠읍니다. 천국은 마지막 한 번의 쪼아댐만을 남겨둔 알껍질처럼 보입니다.

 

   잡지에 관한 계획은 아주 포기하였읍니다. 특히, 저를 모해하는 실없는 출판 계획들을 고려했을 때, 선생님의 주저함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인식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놈들이 제가 그들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보고 있읍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과 같은 [몇 가지] 물음들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저러한 플랫폼은 다소나마 유익했을 뻔했읍니다만, 저 여우원숭이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늘 건강하시길

EJ 삼가 씀.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1950년 12월 18일

   윙어 형!

 

   형의 “몫Anteil”에 대한 제 진심 어린 감사는 외람될 정도로 뒤늦어 도착하겠군요. “선線을 넘어서”는 형께서 존재 자체에 막바로 참여Anteil하시는 고무적인 모험입니다. 이로써 형의 참여는 [형의] 제씨弟氏의 것과 더불어서, 여타의 모든 기여[논문]들과는 영락없이 구별되는 것이군요. 그것은 또 “숲길”을 걸어가는 것과도 북돋아주는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 형이 적실하게 조명해 주셨습니다.[각주:5]

 

   『노동자』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거기 확정된 실재에 구태여 옥죄여 있던 그 정신이 이제는 정화되었고 안목은 터졌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예리해졌으며, 종사할 준비가 된 채로 도상道上에서 자유롭습니다.[각주:6]

 

   그 글은 청년들에게 상황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지침까지 덧붙어 있는, 봄(Sehen, 관觀)에 대한 절묘한 훈련을 가져다 줍니다. 그 주시가 그 자체로 선을 넘어서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수런거리는 요구는 무엇보다 “고통이라는 미지未知의 자본”(258, 274)을 보살피고 있는 자들에게 때로는 절망적이기까지 한 용기를 회복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어그러져 있던 표상방식에 만족하려는 환경의 한복판에서, 서투르기 짝이 없는 시도들을 꼼지락거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형의 “몫”를 읽었을 때—저는 다른 모두를 제쳐 두고 그것을 맨 먼저 읽었습니다—저는, 뒹굴며 걸어온durchmessen[각주:7] 길은 따지지 않고도, 이제 형이 『노동자』에 대해서 자유와 우월성을 확보했다고 자답할 수 있어서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형은 이로써 그 작품을 다시 한번 시대의 뇌리 속에 부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스튀번바센 [산]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우리의 첫번째 대화를 통해서, 제가 그 작품을 얼마나 흠모하는지 형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스타일과 체재Dimension에 있어서, “선을 넘어서”는 [바야흐로] 『노동자』의 새로운 판본의 씨앗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이제 제가 몇 가지 물음을 통해서 형의 “참여”에 대한 제 특별한 관심을 표현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저는 271쪽의 하단에서 형이상학적 요체가 되는 일절을 발견합니다: “선이 돌파되는 순간은 존재의 새로운 뒤채임Zuwendung을 가져온다…”. 우리는 또, 존재의 본질에 응대하기entsprechen 위해서 [이렇게] 말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선이 처음으로 돌파될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자신의 뒤채임을 마련하는 순간이고, 이 뒤채임은 무엇보다 인간본질을 향한 자지러지는 곤두세우는[각주:8] 말건넴Ansprechen이라고 [말입니다].

 

   선을 넘어서는Überqueren 것은 무無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다만 인간의 약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구원하는 것(das Rettende, 구원자)에 의한 [저편으로의] 건너가기Überholen이고 그것의 이편으로는 오직 넘어서기Überqueren만을 위해서 선을 환히 밝혀주는lichtet 것입니다. 이 길道에서 형의 스타일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지점을 붙좇아야만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 방면에서, 두 개의 물음이 저를 붙들어 오는군요. 이들은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니힐리즘을 카오스나 질병, 악惡 들로부터 뜯어내는 극도로 중요한 [작업]과 회통하는 것입니다. 저 관계들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아서라, 특히 “신학”은 거푸 안개 속을 더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힐리즘이라는 근본적인 힘과, 곧, “선”이, 병증病症은 아님으로, 선을 넘어가는 사유는 그것이 “예후”니 “진단”이니 “치료”니 하는 의학적 용어법 아래에서 꾸물거리는 한에서 [사유하는] 사태에 대해서 도대체 부적합한 것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각주:9] 물론, 형께서 이러한 분류법을 채택하셨던 것은 다만, 기여[논문]의 부류가 요구하는 부득이한 제한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형께서 심리치료를 이 시대의 단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격상시키려는 것과는 아주 멀다는 것을, 제가 어째서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표상방식이 사방에서 그 방향으로 모여들고 이로써 위험한 신新인류학이 모략됨으로 그 매캐한 흐름을 절단해내는 것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젊은 니체가 1873년에 쓰려고 계획했던 글의 제목은 “문화의 외과의로서의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저의 두번째 질문은 “질서”의 화두와 관계됩니다. 형은 니힐리즘 속에서도 질서가 지배하고(253), 심지어는 그것의 스타일에 속한다고(256) 또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형은 다른 한편으로 선의 이쪽 편에서 “도저한 질서사유”는 “완벽한 예술작품” 만큼이나 희귀한 것이라고 쓰셨습니다(250). 형께서는 또, 선의 저쪽 편에서까지 질서를 하나의 근본범주로서 고집하고 계시고, 이쪽 편과 저쪽 편에서의 질서사유 간에 [질적이나 종적인 구별이 아니라] 다만 정도에 따른 구별을 하실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선은 본질적이고,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구별을 위한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질서의 범주는 끝끝내 무근거한 형상-질료 관계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관념론적이거나 유물론적인, 체계적이거나 역사적인, 모든 변증법들은 그 [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의 저쪽 편에서는 어떠한 지고한 질서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질서”는 근원적인 것을 주지 않으며, 그것은 가치Werte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구축된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제게는 272쪽 상단에 있는 형의 문장이 본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의 이쪽 편에서는 사태에 대해서 누구도 판단 내릴 수 없는 것이다.”

 

   형께서는 “선을 넘어서”와 관련해서 자연과학의 현재 입지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자연과학은 막다른 골목에 있으며, 자신의 방편으로는 그 막다름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재래의 철학이 손댈 수 있는 것은 뭣도 없다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에게 무규정적 관계가 몰려오는 곳에서,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사유가 엄존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형이 작가의 수공예품을 얼마나 높게 감정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잗다란 것 하나를 감히 지적하려고 합니다.   

 

   252쪽의 끝에서 두번째 문단에서 형은 “직관과 인식”과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 일치성을 설정하시는군요. 고대로부터 직관(intuitus)은 인식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그러나 이 대목에서 형은 비직관적인 것, 개념적인 파-악Be-greifende을 직관과 대비되는 것으로 지칭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인식이 아니라 마땅히 “판단Urteil”이 들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들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저는 그저 형의 어여쁜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아마 한 차례 더 흉금을 터놓을 기회가 있어서 사상Sache과 스타일에 관한 물음들을 하나하나 톺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타일에 관한 물음은 공방工房의 신비이면서 동시에 소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것은 공적인 폭로에는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필수적이고 가장 불가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스타일은 사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성절萬聖節에, 저는 제 남동생과[각주:10] 더불어 몇 일간 메스키르히에서 머물렀고 형의 새 집으로 형을 거의 기습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교통 수단이 당시로서는 여의치 않더군요.

 

   때로는, 세계의 혼돈과 박모薄暮의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리고 우스개로 만드는 공공성의 위세에 노출되어서, 유일하고 그리고 도리어 충분한 것으로 남아 있는 일은 주어진 순간들에 존재의 뒤채임에 다만 응대하는 것, 들리지 않고 말하는 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짐작건대 그러한 응대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의” 여정이 개시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필수적일 터입니다.

 

   프리데리케 포더빌스 백작 부인이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으로 가져다 주신 “미르둔”에 대해서 아직 감사의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각주:11] 가지가지의 아름다움 가운데, 형이 이 근사한 단어를 문득, 그리고 수많은 지면 뒤에서야 발음하게 되는 방식이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언젠가 그 단어를 노르웨이인의 입술으로부터 청취하고 싶은 욕망을 살큼 일깨워주더군요.

 

형에게 평안이 깃드시길.

마르틴 하이데거 드림

 

  1. [역주] Klett-Cotta 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간된 Briefe의 14쪽에서 21쪽까지의 번역이다. 하이데거의 “윙어 커넥션”은 한국에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하이데거 연구서들에서 윙어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거나 소략하다. 서신이 오고 간 초창기에 둘은 주로 팔라스Pallas라는 잡지의 참여 여부에 대해서 논의했다. 팔라스에는 당시 윙어의 개인 비서로 집무하던 아르민 몰러가 편집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 잡지를 기획하던 출판인 에른스트 클레트는 윙어 형제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던 하이데거와 하이젠베르크를 대표 편집인으로 모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이에 클레트는 1949년 중순경 하이데거에게 직접 접근했다. 하이데거는 머리카락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윙어는 이후 하이데거가 아닌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안타이오스Antaios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된다. [본문으로]
  2. [역주] 「들길Der Feldweg」이라는 책자는 비토리오 클러스터만 출판사에서 1949년에 비매품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책자는 하이데거 전집의 제13권으로 묶여 나왔다. 전집 해당 권의 국역본은 신상희 번역의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도서출판 길, 2012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3. [역주] 하이데거의 환갑을 기념해서 1950년에 출간된 『Anteile』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4. [역주] 하인리히 바르트(1914-1997)를 지칭한다. 아데나우어 정권에 참여한 정치인이었다. [본문으로]
  5. [역주] 하이데거는 1932년 자신이 재직하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서 모임을 조직해 에른스트 윙어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했다. 이 시기의 메모와 기록은 하이데거의 전집 제90권에 담겨 있다. [본문으로]
  6. [역주] 윙어의 『노동자』는 국역본이 존재한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최동민 번역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 [역주] durchmessen, 즉 “남김없이 측정한”이나 “가로지른”. 여기에서는 말의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쓰이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철학 체계 내에서는 “차원Dimension”의 동의어로서, 본래적 시간에 귀속되는 것이다. 이하에서도 Sache (“사태”)의 경우에서와 같이 정립된 번역어를 따르지 않은 사례가 많다. [본문으로]
  8. [역주] ereignendes. 이는 한국 하이데거 문헌에서는 흔히 “생생하게 고유화하는” 식으로 번역된다. Ereignis, 곧 “생기” (또는 “별기”)는 넓은 의미에서 존재의 진리가 고유하게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9. [역주] 윙어는 라이프치히에서 한스 드리시Hans Driesch에게 생물학을 배웠다. 다윈 이후 1900년 어간에 탄생한 “생물학주의”와 이후 물리학의 혁신이 과거에 철학적, 신학적 논쟁으로 점철되었던 보수주의 담론의 레토릭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는 몹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본문으로]
  10. [역주] 프리드리히 “프리츠” 하이데거(1894-1980)를 지칭한다. 하이데거가 나고 자란 메스키르히에서 평생 살았다. [본문으로]
  11. [역주] “Myrdun”은 윙어의 노르웨이 기행문이다. 1935년 7월부터 8월까지 윙어의 여행 기록을 담고 있고, 노르웨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 군인들을 위해서 1943년에 특별히 편찬되었다. 포데빌스 부인은 클레멘스 폰 포데빌스 백작의 여동생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