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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 : 주권에 대한 전쟁이 다가온다

stellio 2023. 11. 3. 12:59

주권에 대한 전쟁이 다가온다[각주:1]

존 볼턴

 

번역자의 앞글

   주권의 영생을 믿었던 것은 똥구더기 같은 보수 세력만이 아니라 주권을 “글로벌 컨셉트”라고 치켜세웠던 좌파 학자들이었고, 시간의 다수성에 대한 그들의 서정적인 열광이었다. 이 개념의 환절기에, 로마황제의 임페리움이 영토군주의 왕권확립으로 놓여나고, 또 근대국제질서를 지탱하는 일반명사로 해탈되어지는 평범한 순서 속에서, 주권의 변주가 자아내는 낯설고도 강렬한 무대야말로 어떤 역사철학의 차원을 생생하게 환기해주고 있다.

 

   들으니, 미국과 세계를 지극한 비참함으로 몰아갔던 것은 미 정부의 대외정책이고 인페르노적 집단이라고 평해지는 네오콘이라고 한다. 걸프전에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이 주전론자들의 침략주의는 타자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 결정 지워지는 것이고, 그 공포의 기류 위로 부유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동일성의 사유”라고 규탄되고 있다. 그 상투적 면박이 어찌되었건 간에, 그 순진함을 조롱해 가면서 주권은 그런 자유주의 근성에 찌들린 체념 따위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끝까지 싸워서 이긴 주인의 것이라고 크리스톨의 제자들과 레이건의 수하자들은 극악무도하게도 떠벌렸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서 “포스트주권”적인 유럽연합에 열광하던 하버마스와 같은 코스모폴리탄들이 외치던 사회적 연대나 정의 같은 멀고 희미한 주장들과, 국민국가의 담장의 형해화에 열광하면서 전개되어갔던 휘황찬란한 이론적 성과들이 이론이 실천에 대해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에 걸려 넘어지고, 하버마스가 그토록 부심했던 절차주의적 주권이 포퓰리즘적인 민족주의의 발호와 복지국가의 붕괴에 대한 구멍마개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2008년 금융위기가 역사로의 회귀를 표시하는 뒤숭숭한 지표가 되었을 때, 2009년에 씌어진 존 볼턴의 이 기고문은 이미 한낱 시국적 표현은 아니었다.

 

   오바마 이후, 부시 행정부의 산일하고 희석되었던 네오콘들은 차곡차곡 번성했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자멸적 정서를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가면서 시대의 파괴적 경향과 결탁했고, 특히 볼턴은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어서 초강수로 아태지역을 충격했다. 그가 진두지휘했던 “하노이 노딜”에서 그 보수반동적인 계기는 문재인 정권이 전력투구했던 남북관계를 말아먹었다. 로마법적 기원의 주권은 수많은 색으로 흘러가다가 기어코 신보수주의로 함몰하고, 유엔 헌장으로 육화되었던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피에 물든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주권의 개념을 사로잡았던 것은 인권이었다. 1945-48년 이후, 국가들 간의 평등이라는 대외적 주권의 모호성 안에서 서식했던 것은 인권이라는 난공불락의 환상이었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국제법의 원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하던 켈젠이나 마이클 도일과 같은 국제주의자들에 반해서, 인권은 자유주의적 국민국가에서만 제도적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왈쩌, 롤즈와 같은 국가주의자들은 훈수를 두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 대항해서 주권의 깃발을 내세우는 거대한 주권주의의 대열이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가 운명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주권의 규범화, 윤리화를 따지고 들면서 그 혹세무민에 대해서 단말마의 신음과 절규로 사보타주했던 것이다. 국제법이나 인권협약들이 인권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주권의 사실로부터 유리되어서 국가주권과 국내법을 침범하는 뻔뻔스러운 괴력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을 하트와 네그리, 모인과 같은 좌파들은 시비했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제국과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지독한 인권의 위선과, 인권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선하고 좋은 낱말들도 주권 위에 완강히 입각하지 않을 때 무모하고 추잡한 권력으로 탈바꿈된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 주권주의자들에게서 인권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미 제국의 야심은 물구나무를 서서, 인권은 삽시간에 애물단지로 구박받게 되었던 것이다.

 

   볼턴의 주권론 또한 이 좌파 주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주권을 스스로 저 자신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닌 높이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다. 인간의 억압과 고통과 야만에 대응하려는 전투의식은 인권의 언어를 더욱 들뜨고 허망한 신기루로 만들어 가서, 가령 리처드 턱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주권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고 웃자란 초국가적 제도와 인권의 위태로움을 돌아보려는 경계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네오콘의 화행이 배후조종했던 것은 다만 팽창주의나 간섭주의, 강권주의라는 악질적 이념이 아니라, “미국적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에 기반해 있는 도덕주의였다. 좌파 학자들이 들끓고 날뛰는 인권의 언어를 글로벌 자본과의 밀월 관계 위에 설정했다면, 볼턴에게 유럽연합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스트 베스트팔렌적” 주권모델은 자기통치라는 제일원칙을 져버리는 것이었다. 국제법은 그 자기통치의 원리를 위협하는 다자주의적 기구들의 외곽을 치장하는 패션에 불과하다는 볼턴의 수사법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몽매한 열정의 언어들을 돌이키게 하는 견인력을 가진 것이어서, 보수적 주권주의는 이내 시대의 중원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볼턴이 강조하고 있는 대로 주권이 보호하고 있는 것은 “위 더 피플”이라는 정치적으로 통합된 사회의 민주적 자기결정이었는데, 이는 다만 자민족중심주의라고 넘겨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주권이 여전히 민주주의의 선결요건이자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핵심관념인 이유가 있다. 볼턴의 주권론은, 요사이의 사나운 표현법에 따르면 단순히 개별적 미국인들을 국민적 수준으로 재주술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권이야말로 민족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과 국가적 신념의 중개장치라고 확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권은 단념할 수 없는 것인데, 벤하비브가 난민의 문제에 그토록 공들이는 이면에는 에트노스ethnos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 거대한 결핍들에게도 노모스의 정당한 몫이 주어질 수 있는가, 곧 데모스demos, “우리”의 경계라는 어렵고 모순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 좁고 가난한 영역 안에 갇히는 부자유를 모두가 수락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주권의 종명終命을 기록하는 돈 헤어조그 같은 대학교수들이 조소했던 것은 권위에 대한 공간적 유비에 갇혀서 멈칫거리는 주권적 사고의 타성이었고, 권위의 비장소성, 분리가능성, 제한성 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론적 구조의 허망함이었다. 그 후, 영토성에 기반한 주권관념을 실질적으로 탈각하는 “디지털화된 주권”이라는 역설적 종합명제가 (피스토Pistor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제시되었고, 주권자가 기술수단의 최고도의 실효성을 거머쥔 자로 되어가는 “주권 2.0”과 같은 참신한 논자들의 공격적 아티클 속에서 보댕과 홉스의 고전적 주권론에 둘러쳐진 차일막은 소멸되고 훼손되어 버렸던 것이다. 

 

본문

   상례가 되었지만, 갓 시작된 버락 오바마의 임기는 그의 행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유력하고 위세 높은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정책 제안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공물 하나가 눈길을 잡아 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연구보고서이고, 발원처는 비범하며, “행동을 위한 플랜”이라는 제목이 지녀져 있다.[각주:2] 그 부제는 놀라우리만치 거침이 없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국제협력의 새 시대: 2009, 2010, 그리고 그 이후.”

 

   “행동을 위한 플랜”은, 설명하는 방식이나 말씨에서는 치사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그것은 대외정책보고서 보다는 기업의 홍보물을 더 닮았고 또 그렇게 읽힌다. 그것은 세 학자들—뉴욕대의 브루스 존스와 브루킹스 연구소의 카를로스 파스쿠알, 스탠포드의 스티븐 존 스테드먼 들—의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보고서의 결론과 주문들은,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의 여러 전 국무부장관들 뿐 아니라 클린턴과 아버지 부시 정권의 국방부 관계자들까지 포함해서 국내 및 해외의 대외정책 분야의 명사들과의 대담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들은 역설한다. 저 명망가들의 참여에 의해서 “행동을 위한 플랜”은 그 그럴싸함을 보장받는 것이지만, 그들의 생각들이 보고서에 실제로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저러나, “행동을 위한 플랜”에서 표현된 생각들이 미국 대외정책의 향방에 대한 좌파적 비전의 주조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쉽잖은 것 같다.

 

   “행동을 위한 플랜”이 유독 흥미롭지만, 또 그만큼 걱정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보이는 그대로의 것이라면—즉, 조지 W. 부시의 대외정책과는 구별 지어지는 대외정책을 개발하려고 하는 오바마 행정부를 위한 청사진이라면—이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은 미국의 건국부터 미국이라는 실험의 핵심부에 있었던, 대표에 의한 자기통치의 원리와 실천으로부터의 (급격한을 넘어선) 급진적인 방향 전환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주권에 대한 변화된 이해를 그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 * *

   “주권”이라고 하는 말에는 무수한, 때로는 상호 충돌하는 정의들이 미끄러져 들어왔지만,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은 우리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는 우리의 집단적 권리를 뜻하는 것으로 그 어휘를 이해해 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좌파 엘리트들은 주권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어서, 개개 시민들에게도 덜한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라고 의뭉을 떤다. 저마다의 국경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개별 국민국가들이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관리하는 모델을 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게 된 것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한 것인데, 그 모델은 21세기에 한결 적합한 새로운 구조들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이 새로운 모범으로 주로 내세우는 것은 유럽연합이다. 브뤼셀에서 통어되는 중심화된 금융시스템의 지도력 아래 스물일곱 개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있다. 기후변화에서 무역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슈마다, 미국의 좌파들은 초국가적 합의라는 유럽적 사례를 미국에 대해서도 합당한 표본으로서 점차로 더 참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특히 더 두드러지는 것은, 존 케리가 2004년 대통령 후보경선 과정에서 미국의 정책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노출되고 있는 그대로이다.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이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의 행동이 때때로 지극히 상이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지닌 다른 정부들의 동의를 상관해야 한다는 관념을 미국인들은 오래 저항해왔다. “행동을 위한 플랜”을 배후에서 추동시키는 것은 저 오랜 미국적 신념에 대한 대외정책 기득권들의 불안감이고, “행동을 위한 플랜”은 그러한 신념들은 혁파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가공할 만한 시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목적이 그러함으로, 필자들은 그들이 “책임 있는 주권”이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한 변론서를 써냈다. 이것은 “주권에는 저 자신의 시민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까지 의무와 책무가 수반된다는 관념”으로 정의 내려지고, 그 적용은 “협동적 국제질서”를 위한 기반을 형성하리라고 그들은 믿는 것이다. 언뜻 보아서, “책임 있는 주권”이라는 귀절에는 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누가 도대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권”을 옹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하되, “플랜”의 주류적 발원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은 주권 자체를 극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글로벌 리더들은 고립되어서는 자신들의 이익과 시민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으며, 국가안보는 국제안보와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플랜”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미국이 “일방주의[단독주의]를 거부하고 군사력의 저편을 바라보는 규칙 기반의 국제 시스템”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임시방편의 국제체제에 매몰되어야만 하리라”는 것이다. 단순한 “전통적 주권”은 우리가 들어선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고, 이 시대에는 우리는 “이제 초국가적인 세계라는 현실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 “규칙 기반의 국제 시스템”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위한 조건들을 빚어내리라는 것이다.

 

   부시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참담한 피해 때문에 이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당장에라도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 “플랜”의 주장이다. “플랜”의 내러티브에 따르면, 부시는 외교를 경멸하였고 무력사용, 체제변혁, 선제공격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무작정無酌定을 한결같이 선호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플랜”은 “일방주의[단독주의]를 탄핵하고 군사력 저편으로 눈길을 돌린다”는 것이다. 실행되어서, “플랜’은 분쟁들을 잇따라 요령 좋게 해결할 것이고 급기야 전세계적인 상합이라는 새롭고 전례 없는 시기를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 * *

   오바마가 집권했음으로, 외교의 효용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분명 필요할 것인데, 그러나 그 토론이 “행동을 위한 플랜”에서 제시된 너절한 전제들에는 기반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절대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국제 시스템 내에서 발생하는 갈등들의 해결책은 외교일 수밖에 없다고 대외정책 전략가들은 이념적 성향을 가릴 것 없이 믿고 있다. 부시 정권도 그처럼 행동했음은 물론이다.

 

   차이는 극소수의 경우들을 고려할 때 발생한다. 그 경우들이란, 외교적 노력을 극력 어지럽히고 저마다의 국익들이 기어코 화해되지 않는 경우들이다. 만약에 외교가 먹혀들지 않고 먹혀들 수도 없다면, 문제적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외교를 고집하는 것은 암환자에게 차도도 없는 화학요법을 고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 결과는 치료 비슷할지 몰라도, 사실은, 환자는 그저 악화될 뿐이며, 개선의 가능성 또한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교라고 다른 인간 행위들과 다를 바 없다. 비용이 있는가 하면 편익도 있는 것이다. 특정 문제와 관련해서 외교에 관여할지 그렇지 않을지[의 판단]은 비용과 편익 양자의 엄정한 셈을 요구한다. 이는 합리적 인간들 간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외교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매개변수—언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일지, 우리의 목표들을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지, 그리고 이 과정의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확정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냉전 초기, 해리 트루먼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강자로서 협상할 수 있을 때에만 미국은 비로소 소비에트와의 협상을 고려해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외교라는 무도에서 시간만큼 중대한 변수는 없다. 자주, 시간은 이편에는 비용을 부과시키는데 그 반대편에는 혜택을 부과시킨다. 외교적 프로세스가 허락하는 시간을 누림으로써, 국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뭉뚱그리거나, 동맹을 형성하거나, 전쟁을 위한 작전에 매진하거나, 그리고 특히 오늘날에는 대량살상 무기와 이를 운반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제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인도주의적 지원으로서 호의를 베푼다든가, 경제적 제재를 중지한다든가, 심지어 협상 도중에 정상무역관계를 재개한다든가 하는 것을 위시한, 적국을 외교적 영역 속에 관여시키는 행위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구체적 경제적 이법들도 엄존한다.

 

   당연히, 더 큰 목표의 달성을 위한 현명한 투자처럼 보인다면 상당한 비용도 기껍게 지불하는 것은 미국만 아니라 모든 합리적인 국가의 상정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러한 몽상적 결론들은 당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 불편하고 명명백백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국가들은 개선의 마지막 빛이 꺼진지 오랜데도 협상을 질질 끌어왔던 것이다. 너무나 많은 외교관들에게, 교섭의 점멸 버튼은 존재하지 않고,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순간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혹시라도 수포로 돌아간 협상으로부터의 “엑시트 전략”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외교관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겠지. 그런데 말이다. 있어야만 하는거 아닌가.

 

* * *

   외교는 도구일 뿐 방침이 될 수 없다. 외교는 기예이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적들과 “교섭해야engage”[각주:3]한다고 절절하게 부르짖는 것은, 그러나 협상테이블에서 인사치레가 끝난 후 뒤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특히 그 자리에 나오는 것만으로 공인되는 이들이 있는 만큼, 대화를 무릅쓰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유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더 보태지지 않는다면, 사진촬영의 의미와 효능은 빠르게 수그러들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외교는 추잡하고 공공연한 알목을 내동댕이치지 않는, 보다 포괄적인 전략적 스펙트럼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외교가 혹독한 제재와 껄끄러운 비난, 심지어 무력사용의 위협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이는 한쪽은 합의에 다다른다는 순진한 기대에 멍청히 있는 동안 다른 쪽은 꼴리는 대로 행위하게 되는 호구놀이가 될 위험마저 있는 것이다.

 

   “행동을 위한 플랜” 속에서, 외교는 그 자체 목적으로 되고 있다. 다자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플랜”이 상찬하고 옹호하는 다자주의는 부시 정권에 대해서 그려낸 제 나름의 초상화—현존하는 국제조약과 국제기구들을 재미삼아 뒤엎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일방주의자 카우보이들로 넘쳐나는—와 현격한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방주의에 대한 정의는 간단명료하다. 그 낱말은 국제 사회에서 제멋대로 행위하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다.[각주:4] 그러하되, “다자주의”를 단순히 그 반대말로 새기는 것은 심중한 개념적 착오가 아닐 수 없다.

 

   먼 예를 들 것도 없이, 국제연합과 나토,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의 갖가지 역할들을 구경해보라. 다자주의의 성배라고 해야 할 국제연합은 192개국의 조직으로서, 국제평화와 안보를 수호하는 책임은 안전보장이사회에게 맡기어져 있다. 나토는 26개국의 군사 동맹인데, 회원국은 모조리 서구 민주주의[국가]이다. 확산방지구상(PSI)은 부시 정권에 의해서 2003년에 창설되었고, 대량살상무기의 불법적 국제거래를 방지하기 위해서 현재는 90개국 이상의 다양한 국가들이 포함되어 협력하고 있다.

 

   이 각 조직들은 두말할 나위없이 “다자주의적”이지만, 그 낱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에 그들의 역할은 민망할 정도로 상이하다. 예를 들어서, 가령 미국이 중대한 위협과 맞부딪쳤을 때, 다자주의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그 문제를 나토나 국제연합에 회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두 선택지는 모두 “다자주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실질 뿐만 아니라 아마도 군사적 함의에서까지도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그 둘이 비교가 가능하다고 해도, 스테이크 나이프가 일회용 버터 나이프와 비교 가능하다는, 그런 멋쩍은 의미에서만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PSI는 더욱 역연한 대조를 이룬다. 국제연합이나 나토와는 다르게, PSI에는 사무총장이 없고 사무국이나 본부도 없으며 정기적인 회의 또한 개최하지 않는다. 한 영국 외교관은 PSI를 “조직이 아니라 액티비티”라고 불렀다. 아닌게 아니라, PSI의 모델은 때때로 비효율적이고 별무효력이었던 재래의 국제기구의 구조를 넘어선다는 이유로 인해서 미래의 다자주의적 행위의 이상적 모델로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자주의”는 더불어 행위하는 일군의 국가들이 취하는 국제적 행동action를 묘사하는 낱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행동을 위한 플랜”의 필자들에게 다자주의는 거의 영적이기까지 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국경과 대양을 넘나드는 하모니의 기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모니가 불협화음들을 마름질하기 위해서 꾀해지는 것처럼, “책임 있는 주권”에 의해서 지도되는 미국 대외정책이 그려내는 다자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 속에서 미국은 다만 여럿 중 하나의 행위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 국가들의 연합체는 그 하모니를 위해서 대체로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대외적 행동 뿐만 아니라 50개 주 내부에서의 행동에까지—제약하도록 결의된 정책과 행위들을 개시하는 것이다.

 

   이것의 선례가 되는 것이 유럽연합의 준거conduct로서, 그 27개국은 이제 유로라는 공통화폐와 주권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극도로 복잡한 무역 및 노동 정책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유럽연합은 “행동을 위한 플랜”의 필자들이 미국 내로 수입하려고 내세우는 “책임있는 주권”의 레짐의 궤범을 제공하고 있다. 브뤼셀에 소재하는 유럽연합의 관료들은 이제 십여년도 넘게 회원국들의 우선순위와 요구들을 재편성해왔는데, 그 기제를 본뜬 시스템을 제안하는 것은 미국을 그 대외정책에서뿐만 아니라 온당히 일국적 정책에 속하는 문제들에까지 국제적인 감시에 항복시키려는 속셈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규범설정norming”이라고 알려져 있는, 국제적 행동conduct을 규격화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작태에서 수년간 드러난 대로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를테면 측정을 위해서, 또는 공해에서의 행동[규범]을 위해서 국제적인 규준을 설립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규범설정”은 이 같은 예사로운 이유들을 초극하는 것이다. 일례로, 국제연합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명백한 의도에서부터 여러 위원회에서 사형제를 규탄하는 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낙태권과 총기류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투표들이 행해져 왔다.

 

* * *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 내에서 무성한 민주적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토론을 더 풍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문제들을 국제화할 필요는 없다. 이 문제들과 여러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것은 국내 토론에서의 패배자들이 자주 논쟁들을 국제화하는 것의 옹호자로 된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행위자를 바꿀 수 있다면, 정치적 결과도 바꿀 수 있다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 듯싶다. 이곳의 국내 정치판에서 패배한 그네들은 저 논제들이 판정될 수 있는 판도를 재구획하려고 하고, 단독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미국의 의사결정을 다자적이고 관료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환경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국내적 문제들을 망라하여서 자신들의 당면과제를 “규범설정”의 문제로 어떻게든 바꿔치려는 비정부단체들이 국제무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이름하여 “책임 있는 주권”이란 이러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이다. “행동을 위한 플랜”의 저자들과 서명자들에게 있어서, 주권이란 다만 추상어에 불과한 것이고 그 단어가 처음 연원했던 절대적 권리를 지닌 “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상실한 구태의연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이 이해하는 바는 이와 다르다. 미국 헌법은 국가의 주권적 권위를 구성하는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에 그 정통성의 기반을 의존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과 주권을 “공유”하자는 것은 미국인들에게는 결코 추상에 지나는 것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부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가지는 미국인들의 주권적 힘을 감소시킬 것이고, 이는 헌법이 씌어진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오래] 주저해 왔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주저함은 계속해서 진군하는 “책임 있는 주권”을 저지하고 뒤바꾸기 위해서 이에 대한 보다 합력된 행동의 형식을 띠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건국자들이라면 이 필요를 직시했으리라.

  1. The Coming War on Sovereignty - John Bolton, Commentary Magazine [본문으로]
  2. [볼턴의 원주] 보고서는 http://www.brookings.edu/reports/2008/11_action_plan_mgi.aspx 에서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다. [본문으로]
  3. [역주] 외교안보 분야에서 “engage”는 대체로 “관여”로 번역되고, “교섭”은 “negotiate”의 번역어로 정착된 것 같다. 대체로 이 관행을 따랐으나 역자의 판단에 따른 부분도 있다. [본문으로]
  4. [볼턴의 원주] 일방주의와 고립주의의 계속되는 착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이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부시 행정부 이전부터 나는 이 구분에 관해서 “일방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Gwyn Prins, ed., Understanding Unilateralism in American Foreign Relations, Chatham House, 2000. 근래에는 매쿠빈 토마스 오웬스가 “부시 독트린: 공화당 제국의 대외정책”, Orbis, 2009년 겨울호에서 유사한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