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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어트 :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 (1)

stellio 2023. 11. 16. 13:00

 

엘리어트를 번역하기 위하여

1.

   낙후된 팸플릿 하나를 번역한다. 독일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던 1938년 말에 이 팸플릿은 작성되었다. 영국, 이태리, 프랑스는 나치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일부를 건네 주었고, 이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배제되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 국토를 독일 나치에게 자진납부하였다. 크고 힘센 나라들이 가난한 약소국을 찢어발기는 폭력과 야만과 모욕의 야바위판이 “우리 시대의 평화”로 둔갑되어지는 체임벌린 수상의 황홀한 연설을 청취하면서, 엘리어트는 영국을 미워하지도 나치들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골방에 처박혀서 저 “기독교 사회”에 관한 강연 노트를 끼적거리고 있었다. 늙고, 까맣게 지친 수상의 목소리에서 시인은 서구문명 전체가 무너지는 굉음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엘리어트는 그 자체가 추문이다. 지금 그의 이름은 반대파의 저주 속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압도적인 첫 구절의 위력으로 문청文靑들을 감염시키고 자의식과 모더니티를 반씩 섞은 섬광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들로써 잘 해석되지 않는 시를 읊조리게 했던 엘리어트는 1920년대 중반 어드메쯤부터 늙고 병든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땅이 찢어지고 라일락이 올라오는, 허무의 반복을 허물어뜨리는 애욕과 집착의 법칙을 작동시키는 사월의 잔인하고 가혹한 관능을 규탄하고, 봄이면 자기 몸 속에 피어나는 생生에의 환상으로 고통받았던 엘리어트에게, 무럭무럭 늙다가, 병들어 뒈지고, 끝내는 잊힌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올이 김지하 씨의 작고에 당하여 적은 축문祝文에서 애꿎은 엘리어트를 “뭔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타박하고, 엘리어트를 혐오하면서도 사랑한 버지니아 울프가 젊음을 늙히기가 힘이 들어서 나이 스물에 이미 마음이 썩었던 저 숫기 적은 도반의 초로를 두고서 “...차라리 송장이 더 신뢰할만할 것”이라고 콜레라균만도 못한 취급을 했던 것처럼,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 이 폐허 같은 제목이 여러 겹으로 봉인하고 있는 가열한 절망의 고담준론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불가해했던 것이다. 엘리어트의 불운과 퇴폐는 영락한 부잣집 막내아들이 누리는 호사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에즈라 파운드나 W. B. 예이츠와 같은 영미 계통의 모더니즘 총아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세월이 가는 만큼 연약해지고 생로병사에 밟힌 나머지 진보적인 성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순응주의로 나아간다는,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운 미적 혁명의 불안감과 가파름이 견딜 수 없이 무섭고 시퍼렇게 숨이 막혀서 기독교의 확실성으로 그 절박한 모호성으로 후퇴했다는, 그러므로 20세기로 뚫고 나아가지 못하고 19세기에 주저앉아 버렸다는 흥미로운 실패이자 선구자의 비극, 아니면 전위의 뒤쳐짐, 또는 훼절 시인으로서의 엘리어트라는 주지의 명제에 의지해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와 「휑뎅그렁한 놈들」에서 속절없는 무간지옥을 그려내고 「하마」라는 그의 이십대 시절 쓴 시에서 피가 시키는대로 그토록 선연한 눈빛과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에 덤벼들던 엘리어트가 연륜과 더불어 기독교, 전통, 보수주의 등등을 운위하고 고전주의자, 앵글로가톨릭 등의 무슨 무슨 “주의자”로 스스로 선포해 자승자박하였다고 그를 흘겨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 안에 교회를 지닌다는 것, 자신의 내부에 유배지를 가지는 일은 얼마나 쓸쓸한 일일 것인가. 『네 개의 사중주』는 정말 엘리어트의 장미정원이었을까). 모더니즘이란 결국은 모던에 대한 반발이고 민족적 · 국가적 전통의 거덜남을 감당하고 수용하는 다양한 표정이자 그 표정들의 집회장소, 예배당이라면, 저 고명한 「황무지」뿐 아니라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 또한 역사적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예술의 종언이자 전통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생겨나는 마음이나 표정 같은 것, 그리고 그 종말감을 통해 심미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시인이 바로 엘리어트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순간에 매우 강렬한 포에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모더니스트, 이 미美의 사도들은 예술을 사회로 재통합시키고 그것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상상하는 기초가 더 이상 될 수 없다는 자각의 절망에 힘입어서 (에즈라 파운드와 W. B. 예이츠의 경우) 그 둘의 찬란한 합일을 약속하던 파시즘을 수락하거나 (윈덤 루이스와 D. H. 로렌스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심미적인 것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와 사회의 경계를 긋고 독야청청한 미의 참호를 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야말로 진보, 즉 혁명을 통한 과거—낡은 진실—의 극복이었으므로 미야말로 모든 혁명의 법칙이고 복고야말로 진보의 소실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그래서,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의 팸플릿은 사회를 배반한 미의 참호로부터 뛰쳐나간 부랑아일 것인가, 창조적 힘을 소진한 시는 그렇게 언어의 주관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말의 길이 끊긴 저 언어도단의 세계로 들어섬으로써 저 스스로의 안타까운 운명을 완성해나가는 것인가, 그것이 엘리어트의 가엾은 모더니즘이었던가..., 나는 먹먹했다.

 

   새벽이 되어 나의 번역수첩을 들여다보고 있다. 잡종, 열성인자라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난 칼 만하임, 아돌프 뢰베 같은 독일계 유대인들, “독일 라이히의 적”으로 적시되어서 대학교를 집어치워야 했던 폴 틸리히, 열아홉의 나이로 가톨릭으로 개종해 젊어서도 노인 행세를 했던 크리스토퍼 도슨, 문학적 상상력, 혹은 미적 직관, 또는 아름답고 근사한 것이 윤리적인 것을 정초 지으며, 이것이 다시 문학의 자율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인해서 근대로 건너가지 못하고 낭만주의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다가, 모더니즘도 하고 반모더니즘도 하고 공산주의자도 하고 페미니스트도 하고 그리스도인도 하면서 당대의 온갖 사조와 충돌을 하던 존 미들턴 머리,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 비명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고 온갖 악다구니를 쓰면서 몸부림치던 머리 같은 삼류 로맨틱 구라꾼에게 덧없는 공감을 만들어 가졌던 친체제주의자 엘리어트 들을 규합해서, J. H. 올드햄이라는 스코틀랜드인 선교사는 이 가장 참혹하게 저주받은 이방인들을 데리고 1938년 4월 “무트Moot”를 결성하였다. 저, 유대인과 유대인 혐오자들, 망명자들과 고향의 고국산천이 망명지가 된 폐인들,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과 교회를 저주하는 자들, 가시면류관을 쓴 배교자 코스모폴리탄들이 서로를 부축하면서 기독교인으로 환골탈태해 간 이 서클을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두려운 그림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서구 문명의 정당성에 대한 깊고 대책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혀 종교의 문턱 앞에 모여 두려워하면서 서로에게 기대는 이단자들이다. 저 진보적인 인사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로 낡은 원탁 앞에 쪼그려 앉아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저, 말시적 징후의 멸절의 위기에 닥친,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게워내고 영국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대관절 대중들이 삼키기 좋게 키치에 의해서 희석된 그런 문화가 아니라 (그래서 엘리어트 들에게 문화는 교회나 엘리트, 귀족들에 의해서 담지되고 전승되는 것일수밖에 없었고, 한국말로는 “혼”이 가장 적합하겠다) 어떻게 문화를 창조하고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회적 질서를 마련할 수 있는가 의 문제에 사로잡혀 슈미트가 “구체적 질서”(법학적 사고의 세 단계)를 운위하고 켈젠이 “법적 질서”(순수법학)를 말하고, 하이에크가 이 모두를 벗어난 “자생적, 경제적 질서”에 골몰하고 있을 때 이들은 이 같은 문제에 마음을 투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가 되어가는 유럽의 영적인 파탄과 대혼돈을 독대하면서, 시민적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종교적·도덕적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섬뜩하리만큼 총명했던 이 유다들은 절망을 부정하고 절망을 긍정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저 “질서”를 위해 무자비하게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의 뼈대가 된 엘리어트의 바우트우드 강연은 이 모임에서 발표된 미들턴 머리의 논문(“기독교 사회이론을 향하여”)과 그들이 함께 읽고 토론했던 자크 마리탱의 책(『온전한 휴머니즘』)에 대한 응답으로 쓰인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낡은 중년이 된 그들의 진보성을 의심하는 일은 쉽고 기독교 신앙, 유럽의 뿌리를 잘도 나불대면서 입술이 닳도록 바울의 서신을 음독하고 그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지 않을 수 없었던 50살 먹은 닳아빠진 인간들,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지 몇 번이고 되묻지 않을 수 없던 기성旣成의 절망의 바닥을 헤아리는 일은 어렵다.

 

   걸레처럼 썩어서 후줄근해지는 아사리판 같은 현대문명을 위한 처방전은 기독교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엘리어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1930년대의 시대사적 특징은 국제질서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던 자유민주주의라고 총칭되는 제국주의의 가리개가 경제대공황으로 그 쓰라린 불구의 교언영색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발호와 세계대전의 대살육으로 화답되었던, 온갖 더럽고 불행한 꼬라지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엘리어트는 각고의 불완전과 미완성 속에서 한 글 한 글 쓰기 시작했다. 1926년 봄, 크라이테리온 지誌에 서유럽의 공통된 문화라는 이념을 회복함으로써 과거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갈파했던 엘리어트는 혼돈과 비합리의 수렁에서 더 높고 명확한 이성의 개념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단연코 현대적인 감각을 “고전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의 힘으로써 1927년에 “이성의 복권”을 겨우 썼으며, 그 해,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였다. 엘리어트는 전 생애를 걸고 삶과 혈투하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전력을 다하는 힘으로써 그 모순과 역설을 녹여내고자 했다. 1928년에는 “랜슬롯 앤드류스를 위하여”에서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근왕주의자, 종교에서는 앵글로 가톨릭”이라는 포즈로써 위대한 샤를 모라스를 모방해 보이고 (그러나 포즈가 곧 본질이다), 1930년에는 “휴머니즘이 없는 종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에세이를 쓰고, 1932년에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에세이를 쓰고, 1933년에는 “가톨리시즘과 국제 질서”라는 논문을 쓰고, 1937년에는 “세계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다. 엘리어트에 따르면, 도덕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해결책은 전혀 없다. 신의 사랑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이상적인 행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사려 깊게 고정된 지점, 즉 가톨릭의 교리가 요청되는 것이다. 교리에는 여지가 없으며, 여지가 없는 것만이 겨우 교리라고 불릴 수 있다. 엘리어트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이고 프로테스탄티즘적인 “내면의 목소리”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이며, 고전주의적인 비판으로서 존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내면에 결정적으로 있는 것이다. 무르익는 모든 것들은 대책없고 허망하다. 그 초지일관할 수 없는 사회철학으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유효성과 충분성까지를 엘리어트가 의심하게 된 것은 1938년 가을의 치사하고 바닥을 치는 뮌헨 협정에서 엘리어트가 말로 해서는 도저히 안 되는 개같은 세상의 파국 직전의 위기를 느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하나된 유럽을 절규하던 독일의 디 노이에 룬트샤우, 스위스의 노이에 슈바이처 룬트샤우, 스페인의 레비스타 디 옥시덴테, 이태리의 일 꼰베뇨 등은 일제히 아작이 나게 된다. 그리고 1939년에는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엘리어트는 그가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던 크라이테리온 지를 종간시켜 버린다. 그는 힘에 부쳤다. 이 팸플릿은 유럽의 정신적 보초의 최전선이 모두 닫쳐버리고 망해버리던 시대에 엘리어트가 불행하고 처참한 기독교에 스스로의 몸을 묶음으로써 그것을 서구 문명의 자랑이라고 부르는 자조의 힘으로 자신의 절망감을 언어로 개조해내고, 더러운 세상을 깊이 증오하는 그 미움의 가호 아래서 삶을 간신히 추어올려야 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해서 출간되었다.

 

   다자 간의 연결감, 연대감이 곧 사랑이라는 나의 낙서를 노려보고 있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은 “당신의 교리가 되겠다”는 말로도 된다는, 이제는 알 수 없는 말도 적혀 있다. 에토스에 미만하는, 중량감이 전혀 없이 쓸려가는 마음의 시시껄렁은 중립사회라고 불린다.

 

   (엘리어트와 동갑내기인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는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스미는 것이며, 중립적인 영역 같은 것은 없다고, 그것은 그저 리버럴들의 병신 같은 말버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그는 내부적인 정치화를 “중립화하는” 더 거대한 힘으로서 국가에 모든 것을 걸기에 서슴없이 나아갔고 (따라서 슈미트에게 이 중립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시민사회는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봄처럼 칭칭 감기는 운명과 조국과 모든 관계를 혐오했고, 그 혐오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문화를 아끼던 시인 엘리어트는 기독교 “사회”를 선전하는 팸플릿을 쓰기에 이른다. 국가와 사회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적 두 구분이 그 두 “반동” 작가의 생에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 있다. 엘리어트가 이 팸플릿을 출간한 1938년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유대인 스승 후설의 장례식에 불참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저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순례를 떠나고, 칼 슈미트는 리바이어던의 작가 홉스에 관한 저서를 세상에 내보내다. 그 저서에서, 정치화된 여러 기독교 분파와 교파들 간의 분주한 대립을 중지시키는 데 국가의 사법적 권위는 자리하는 것이며 싸우고 반목하는 그 자들이 지닌 계율commitment 보다 더 높은 계율에 호소해야만 탈정치화는 가까스로 확보될 수 있을 터인데, 이 지엄한 중립화하는 계율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청승이자 진리주장일 수밖에 없다고 홉스는 절망적으로 말했다고 슈미트는 적었다.)

 

   마음이 중립기어처럼 정처없이 건들거리고 시시때때의 욕구에 허무하게 얽혀들거나 저항하는 그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인간과 스승들은 하루하루 말을 바꾸어 가고, 우리는 오늘 저 자신의 말의 공터와 마음의 얼룩 안에 있는 그림자 속에 남겨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신경증으로 고통받는 아내에게 (“오늘 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내가 당신의 말을 열심히 듣겠노라고, 나무토막처럼 어디에도 가지 않고 사랑하는 당신 곁에 있겠다고 텅 빈 눈으로 거짓말했던 엘리어트는 그 같은 사회를 수락하기를 힘들어 했다. (그 버림받은 아내는 엘리어트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어서 자신을 찾아오지 못한다는 섬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동의 아스팔트 바닥에 코를 박고 죽었다.) 중립사회는 오래 버티어내지 못하고 이교사회 (비기독교 사회) 역시 마찬가지로 될 일이 아니라고 엘리어트는 탄식했다. [진정한] 신을 부정하는 이교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엘리어트는 그가 주저앉아 있는 중립사회를 이를 갈면서 증오했다. 중립사회는 마음처럼 쉴새없이 낡아가서 기진맥진해질 뿐이고 이교사회는 효율성을 빌미로 염결적 도덕지향성의 청교도주의 (한반도에서는 리理의 신앙이나 도덕지향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를 옹위하고, 프로파간다와 미디어를 통해서 의견의 통일성을 강박하며, 그 참상 속에서 예술은 다수의 취향을 따라갈 때만 장려되게 된다. 이 창녀급의 목불인견을 엘리어트는 전체주의라고 불렀다. 숫자가 많다고 정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오로지 남아있는 가능성은 기독교 사회의 이념을 회복하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보기에,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인 것은 한사코 기독교적인 것이거나,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유럽문화의 뿌리는 기독교적인 것이고, 원죄의식이 없는 디시플린은 가능하지 않다. 기독교 사회는 순정을 완성한다. 고전주의(혹은 모던에 대한 고전주의적 견해)는 리버럴들이 사회에 없어도 된다고 믿는 치졸하고 비루먹은 것들에 무진장으로 연연하고, 집착하고, 추슬러서 간직한다: 위계! 신앙! 장소(고향)의 감각! 공리주의적인 것이 아닌 더 높은 합리성, 전통의 권위를 포함해서 이 슬프고 희망없는 것들은 수치심을 가르친다. 짓무르고 늘어붙는 수치심이 없다면 예술에서 형식과 부자유한 한계가 사라지는 것처럼, 종교에서 디시플린과 권위는 어렴풋해지고, 통치에서의 중앙집권 또한 가능하지 않으며, 사회는 건들거리고 술렁이는 마음처럼 썩어서 무너져 갈 것이고 쇠진하여 잦아들 것이다. 훌륭한 예술은 간음 없는 마음에서만, 원망과 토라짐 없는 절망에서만, 끝없는 용서 속에서만 숨쉴 수 있는 가난하고 영원한 마음에서만, 진정한 귀족과 지배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탄생한다. 그래서, 제어되지 않은 도무지 시건방진 감정의 배출이 극성하고, 인간에게 서운한 인간들이 행복해야 할 당연한 권리와 무슨 잘난 인권을 보채고 투정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엘리어트의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대한 정의: 피조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마구 쓸리우면서 서러움에 넘쳐서 제 울음소리에 도취된 짐승들처럼 “감정의 존중”을 무진장으로 종알거리는데, “취존”을 부르짖는 현대의 야만인들은 지난 시대의 예술 또한 우리 당대의 예술처럼 엉망이고, 형편없고, 징그럽고, 나른하고, 대수롭지 않으며, 못나고 흔해 빠졌다는 음모론에 속아 넘어가고, 그 체념의 가녀리고 참혹한 편안함은 문명 전체에 대한 혐오와 쓸쓸한 자기혐오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어서 (“무녀야 넌 뭘 원하니 애들이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부정과 탄핵의 문화가 창궐하게 되었다고 엘리어트는 혀를 차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밤새 흐느끼다가 약을 먹고, 자유주의는 저 스스로 씹창이 난다. 나서, 저 자신의 귀결인 대혼돈의 산산조각에 대한 억지책으로서 인위적이고 기계적이며 야만적인, 흉흉하고 조악한 통제(=전체주의)를 막무가내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신을 향해서 너희들의 무릎이 꿇리지 않는다면 히틀러, 스탈린 들을 향해서 네 잘나고 메스꺼운 무릎은 꺾이게 되어 있다고, 엘리어트는 일그러지고 뭉개진 얼굴로 우리에게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으면서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이든 엘리어트는 서구문명 전체의 죄업이 저 자신의 저지른 죄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교회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죄가 많은 것처럼 폐타이어 같이 오체투지했다는 증언은 더 이상 가책과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우리의 시대, 곧 죄사罪史로서의 역사의 차원이 실종된 시대에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엘리어트 개인사적으로는 1921년에 정신이 완전히 거덜난 이후, 이를 악물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지옥을 두려워하고 애틋해 하는 힘(상상력)으로 신생에의 열망과 그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꿈꾸는 몸부림으로 그의 남은 생은 살아졌다. 그가 꿈꾸던 비타 누오보의 신천지를 위해서 치성을 드리는 일로 엘리어트의 낡은 무릎은 계속 꿇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개폼 잡는다고, “백작 부인의 사치”에 지나지 않고 절망이라는 꾀병을 앓는다고 안철수에게 헛된 윙크를 허비하고 JTBC에 나와서 시진핑을 찬양했던 김용옥처럼 야멸차게 부르고 엘리어트의 허벅지를 질겅질겅 밟아도 좋은 것일까? 퇴폐보다 인간적인 것이 다시 또 있을까? 엘리어트의 무릎을 뚫고 무엇이 들어왔던 것일까? 한국의 누추한 정신사는 무엇으로 무릎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엘리어트의 그 고개를 수그러뜨리는 치성은 요샛말로 하면 자신이 지닌 가치의 순결만을 고집하는 고집스러운 꼰대의 결벽증과 과대망상의 노추, 또는 메시아 콤플렉스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얼마나 무거운 멍에이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저토록 경건하고 엄숙하고 성실해야만 하는 것이며, 쉽게 인생 앞에서 까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엘리어트는 자신의 상상력이 자신의 뉘우침과 불화하는 절망과 무정견 속에서 한 글 한 글 써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곧 그의 기도의 중력이어서, 그는 상상하기 위해서 더 철저하고 뼈저리게 인간 질곡의 밑바닥을 떠멨고 상상하기 위해서 형벌의 질량을 자진해서 가장 많이 짊어졌다. 언젠가, 엘리어트는 “완전한 예술가일수록 고통받는 자아와 창조하는 정신을 더욱 엄격히 분리시킨다”고 썼다. 그러나 엘리어트의 고통받는 자아가 창조하는 정신 속의 먼 오지에 남아 부비적거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늑하지만 쓸쓸하다.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내 수첩의 모서리에는 “도덕성”, “도덕적 진지함”, “에토스” 같은 멸종 위기의 다 거덜나고 망가진, 쑥스럽고 무기력한, 숨이 끊어질 것 같이 힘겹고 쫓기고 내몰린 단어들도 빌붙어 있다.

 

   에토스는 공동체를 향해 있는 마음이라는데, 그 깍지 낀 이심전심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범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그 작위성의 막막함이 견디기 어려울 때 나는 엘리어트가 집어치웠던 이 팸플릿의 가제假題를 생각하곤 한다. 그는 이 팸플릿을 “기독교 국가라는 이념”이라고 이름 붙였고, “국가”를 향해서 비틀거리면서 나아가던 그는 찢고 다시 썼다. 후인으로서, 그의 어눌함의 환경이나 그의 마음의 지하도의 풍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우리”라는 허상의 껍데기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더 잔혹하고 간절하고 지극한 것이다. 그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 “우리”는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었음으로 사랑의 길은 “사회” 속에 저들을 가만히 두는 일뿐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도덕에도 사랑은 있다. 그러하되, 사랑이 한낱 도덕에 의해서 예속되고 길들여질 때, 사람들은 더는 진정으로 서로를 돕지 않는다. 사랑은 무질서하고 위태롭게, 대책 없이 절망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서로를 돕는 것이다. 너로 하여 불붙는 것이다)(물론, 엘리어트는 사제니, 기독교 엘리트니,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니 해서 그 “사회”를 “이념”이 거듭남을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비책을 마련해두고는 있었다는 사실은 지적해 둔다.) “사회”에 의해서 동질성이 확보될 때 국가의 [민주적] 정당성의 수준은 제고되게 된다. “Society”의 원原인도유럽어 어근인 sekw-는 “따르다”라는 순하고 낮은 뜻을 지닐 뿐이다. “사회”라는 일본식 한자어는 다만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짓고 서로 기대면서 두려워하고 또 받아들이는 터를 의미함으로 “에토스”는 예절과 다른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가축들이 사는 마구간을 지칭할 때 자주 에토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엘리어트는, 국가다운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들의 자유에 선행하는 다자를 통일하는 습관이나 공동체적 정체성, 곧 연결감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 연대감은 억지로 해서 될 만한 일은 아니며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는 감당될 수 없다는 인식의 슬픔으로 저 “국가”를 뭉개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권, “크리스텐덤”의 존재는 결코 원활한 공동체 국가의 형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며, 이미 크리스텐덤에서 이해대립의 중화 기능을 찾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내재적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엘리어트의 핵심 논변은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공동체적 질서는, 전통적 일체성을 구성 원리로 하는 전근대적인 기독교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체의 위기를 경험한 공동체의 재건은 이 크리스텐덤을 모델로 삼지 않으면 안 되고, 공동체 원리는 이것에 의해서 기초 지워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공동체가 기독교 윤리를 국가에 일의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국가만이 존재하는 세계, 사회라는 범주가 국가 자신에 의해 구성된 헛것이 된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는 종교의 공기를 공급받지 않으면 고름집처럼 고여서 썩어갈 뿐이라는 엘리어트의 테제를 증명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이후 엘리어트에게, 다원주의나 이질성 같은 영악한 것들을 잘 다독거려서 사회적, 관계적 동질성의 안쪽으로 확실히 편입시키는 일에 그의 이론적 노력은 마침내 바쳐질 것이었다. 1948년의 “문화의 정의에 관한 각서”를 참고하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자립자존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에너지를 강화하고, 결박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추슬러 간직하고, 축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완시키고, 건들거리게 하고, 놓아보내는 경향만을 가짐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관습과 지조를 파괴시키고 본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의식을 개별자적 구성원들로 용해시키는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다. 질서의 기초가 되는 맨 밑바닥은 종교적 교리이다. (이 무참한 우스갯소리 같은 말은 내 조국에서는 터무니없다. 우리는 더 이상 충과 효를 근간으로 나라의 기강을 잡지 않고, 땅 위에 간신히 세워졌던 인륜과 인간의 기본 도리들은 두렵게 여겨지지 않는다. 마을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미풍양속은 끝을 모르는 태업을 하고 있는데,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저질러진 많은 비리, 억압, 차별, 불평등과, 그런 모순들이 엉덩방아를 찧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리게 되었으니 그 덜 떨어지고 불미스러운 “질서”를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통해서 엘리어트의 명제는 저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인가.) 교리와 신조라는 바탕 위에서 인간문화는 가까스로 이루어졌다고, 엘리어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포즈밖에 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의 말, 가난한 사람의 말이다. 그는 연대의 결과가 고통과 실패라 해도 당신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다. 이런 태도의 성실성이 거듭되는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공동체)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다고 엘리어트는 믿었다).

 

   노트 가득 붙어있는 나의 메모 쪼가리들은 여기서 끝나 있다.

 

2.

   민주주의의 참모습으로서의 기독교사회! 엘리어트는 이미 자신의 당대에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는 불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또는 그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저 자신의 사회에 대해 골몰하고 민주주의라는 말로써 지시되는 그 대상이 전체주의를 향해서 얼마든 전개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괴로운 사실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의 법규정이나 실정규범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무엇인가 기어이 따져 묻고, 거기에 서슴지 않고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복창이 아니라 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행위였다. 그 행위는 민주주의의 규정과 규칙들은 그 자체 지향하는 이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과거에 실정화된 수단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로 해졌다면,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을 위한 쓰여지지 않은 전제조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묻고 있다. 또 그 아이디어라는 말에는 기진한 자유주의의 근간은 종교적 관용이고 이를 구성하는 공과 사의 구분일진대, 서로가 저마다 제 내면의 사막을 견디는, 관용의 그 말하지 않는 정과 영험함은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 이념의 곡진함이 너와 나, 공과 사를 구분하는 골격을 이루며, 오늘날에는 그 곡진함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념과 이념 아닌 것의 전면전이 요구된다는 시대사적 자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골격 안에서 너의 나임과 공의 사인성과 자기 밖의 자기 (유행 따라 말하면 타자화된 자아)는 발생하는 것이다. 그 골격이 전제되지 않은 오늘날 우리가 포섭하게 된 민주주의의 판본이 자랑하는 다양성포용성은 이 관용의 부지런이 아니라, 제일 불쾌한 것처럼 발악하는 자가 제일 감수성 있는 자로 되는, 여하한 관심도 폭력으로 치환시키는 한낱 몰염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사회라는 꼬장꼬장한 단어에 매달린 ...라는 이념이라는 골수를 울리는 당부의 말은 자유주의적이되 마침내 비관용적이다. 엘리어트는 자유주의에 약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엇이 공통된 전통을 부르짖으며 그토록 하나되기를 기원하던 유럽은 다 깨져버렸다.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와 구분되지 않고, 허무주의는 흔쾌히 보수주의로 통용된다.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공통의 전통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동아시아주의가 이미 곤죽이 되어버린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책으로 횡행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비록 전 인류가 견딜 수 없는 재앙이라도 우리를 여기서 구원해줄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진부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엘리어트에게,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은 전근대적 의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기독교”는 유독 서구인들의 지배이념에 맞는 종교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자라는 저 위선자들의 얼굴을 직시하기 위해서 선 절박한 자기 진실의 자리이자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고 야만을 감지하는 그 힘으로 현실을 조직하고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선 백척간두였다.

 

   한국에도 그 작고 서늘한 자리가 확보될 수 있는가. (엘리어트의 범유럽주의 모양으로 그것은 우리에게는 동아시아주의인가? “유교사회” 내지는 “대동사회”가 내 자유민주주의 조국의 기독교 사회가 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존하고 이를 품는 반대급부로 국가로부터의 거리를 획득했음으로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은 한국의 토양에서 품어지거나 역사성에서 획득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그 시초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정주지, 보루이고 그 기점起點이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투쟁해본 바 없고, 늘 국가 친화적이었다. 국가와 교회는 한 덩어리로 뒤엉켜있었으므로, 그 알량하게도 거룩한 예배당에서는 세속과 신성이 다르지 않았다. 국가와 교회는 내통했고, 결탁했으며, 서로를 충분한 정도로 불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와의 투쟁으로부터 (정통의 기초가 되는) 가톨릭성catholicity을 형성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미국=기독교=자유민주주의를 수입했으므로 (엘리어트는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와 어떤 긴장 관계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긴장 상태를 담지할 교회가—또는 “사회”가—한국에게는 없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는 광화문이고 그들의 기도의 내용은 구국救國과 국가정체성의 회복이며 그들의 일은 아메리카의 국기를 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문제는 개발도상의 국가권위를 어떻게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할 것인지를 묻는 “세속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저 신자들이 기독교의 기율이 국가의 공법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락하게 만드는 “정치신학”을 재구성하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신학의 임무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선을 계속 새롭게 그려내는 것임으로, 그것은 그 이분법의 강고한 시대착오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개념사적 작업이기도 하다.

 

3.

   이 번역의 무수한 브러싱업을 거듭하면서 기독교, 사제, 이념 같은 발붙일 자리가 없는 신학적·형이상학적 단어들, 이 화려하고 거덜난 것들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쥐어짜내고, 저 안쓰러운 단어들을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인의예지와 공편타당의 아득한 저편으로 건너가려고 하였던 엘리어트의 야욕과, 소멸해가는 것들과 소생하는 것들의 사잇길에서 어둠 속에서 어둠을 수정해가는 숨막히는 허송세월을 읽고 말았을 때, 나는 이미 시를 배반한 시적 사상가 엘리어트는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여전히 단테와 아퀴나스의 시대를 열어내야 하는 내 고향의 정신사에 물어, 나는 극도로 예민해졌던 것이다.

 

   둘러보라. 이제 그 죽음의 내음이 수술대 위에 까무라친 환자처럼 한국의 정신세계로 풍겨오고 있다. 기독교는 세속화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제3세계 속으로 환원되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의 새로운 정주지이자 피난처이고, 그것의 보루이고 그것의 반석이며, 신생의 성령들이 출렁거리는 다가오는 시간이다. “전염”을 아랑곳 않는 전광훈의 광신적 전념과 대형교회의 “웰빙 보수주의” 사이에서, (촛불혁명가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이승만 광장”과 (우리가 거기 수용되어 있는) “광화문 광장”의 사이에서도, 신은 한 분 살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다 같이 천국에서 만나자던 이승만의 『독립정신』의 마지막 문장과 (샨티 샨티 샨티) 미국인 선교사들의 피흘리는 선구자적 노력과, 서구가 쳐들어와서 전통 사회의 물적 토대를 짓밟아버리고 그럼에도 그 저주받을 깡통 같은 기독교에 매달려서 새로운 공동체를 가차없이 작심해내야만 했던 선비 이승만의 고독한 “개종”과 조정력 있는 나라를 만들지 못한 그의 실패, 그리고 뒤이어진 유구한 갑질과 약육강식의 전통, 윤보선의 민족주의적 기독교관과,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두고 우리 민족이 겪어내야만 했던 질곡들과 기독교가 깨운 혁명적 에너지를 전용해서 민중=모던으로 환치하려고 했던 한신의 허다한 역사, 민중신학자들의 좌절된 시간들, 문선명의 하나님주의와 아베의 가슴을 관통하던 총탄 사이에서, 내가 태어나서 살아온 이 손바닥처럼 빤한 나라에서 기독교만큼 상스러운 것이 다시 또 있을까,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 부족의 다정과 화냥은 기어코 짝사랑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나의 하나님, 유일신이신 하느님을 향해서 말 건넨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혼자서 뇌까리는 참혹한 독백극, 강간당한 문화의 사랑타령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라, 거짓 사랑아). 이래서, 가혹한 말이지만, 기독교는 끝끝내 한국인의 자기혐오의 동의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마도, 고유하게 한국적인 모든 것은 독백적인 것 같기도 하다). 브라질의 황무지에서 돌무더기를 옮기는 한농복구회의 작고 슬픈 신앙과 사랑을 연설하는 권세가들과 압구정 소망교회의 거대한 예배당 사이에서, “국가의 신화”에 복무하는 목사들이 토해내는 신권정치적 언설과 억압받고 눌린 자들의 메시아주의 사이에서, 사랑으로 사랑을 억압하고 사랑으로 사랑을 강변하는 기독교의 가혹한 아수라이자 무정의 황무지, 교회의 전단지 뭉치가 창궐하는, 성聖과 결별한 세속도시의 도심 바닥과 잔인한 장미정원인, 나의 사랑하는 지옥, 나의 조국에서, 긴 겨울밤 동안 연필을 혀끝으로 적시면서 “오, 크리스쳔 소사이어티!”를 외쳤던 엘리어트를 우리는 다만 잔잔한 미소로 되새길 수 있을 것인가. 좌절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혁명적 에너지의 메시아주의와 신권정치가 마주 부딪치는 이 피묻은 아이러니에서, 그것을 내리누를 수 없다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 나가도록 발길질하는 것이 보수주의라면 그 보수주의는 우리 시대의 카테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보수주의의 상징적 수반이자 얼굴마담, 모더니즘의 교주가 모던 앞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단말마적인 긴장과 오체투지의 자기학대로 그토록 간절히 질서를 지향하면서 시대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신공양은, 그 생지옥 같은 엘리어트의 “이념”은 내 나라의 근본주의자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외친 악명 높은 “전통”론은 “기억”과 “욕망” 사이의 좁은 문을 통과해가는 황톳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생사의 거듭이라는 쳇바퀴을 가차없이 드러내는 봄의 관능에 진저리치고 쩔쩔맸던 저 젊어서 늙은 시인 T. S. 엘리어트, 그리고 1960년의 사월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는 전율”에 빠졌지만(김수영)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오지 않던 봄을 절규하고 통곡한(이성복) 한국의 시쟁이들의 “모던”과 엘리어트의 “모던”은 그렇게 맞닿아 있는 것인가, 혹은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 것인가. 왜 우리의 “고전”들은 당대의 작가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가 를 절규하고 몸부림하던, 늘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찌그러진 인생들, “얼과 넋”, “초연”(서정주) “고삽미”(조지훈) 같은, 전통의 인자인지 전통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 위장하는 허허로움의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단어들을 늘어놓고 근대로 건너가려고 했던 저 못나고 부끄럽지만 기어코 무를 수 없는 나의 식민지 조국과 대한민국의 선배들인 육당과 벽초와 백철과 김동리 들의 혼백이 들락거리는 서재에서, 이 가혹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나는 삭아 문드러진 원서를 들고 책상에 붙어 앉았다. 이 번역은 끝내 서글픈 것을 보여줄 것 같아서 나의 눈에는 날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