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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라 파운드 : 신은 꼴림이다
stellio
2022. 6. 10. 22:08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그리스도교의 창안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어서, 예수쟁이들의 한없는 낙후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희랍의 신들이, 핏줄이나 기질적 특성에 근거해서 소수의 인간들만을 편애했다는 것은 수긍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무지몽매와 패역에는 아랑곳없는 저 인류애 운운에 비해서는 한껏 애교가 있는 것이었다. 사랑을 받는 자들은 편애를 받는 자들 2이었고 말하자면 손수 선택된 자들이었다. 논누스의 저작에서 이러한 발상은 분별없고 한심스러운 것으로 변모하였다.
칼뱅의 하느님과 칼뱅에 이르기까지의 또 칼뱅에게서 연원하는 허다한 작가들의 하느님은 정신나간 사디스트여서, 우리 부모된 자질로는 다른 특질들이 마땅히 선호될 터이다. 3 프랑스의 상식, 곧 유럽적인 상식은 여기에 [다음과 같이] 대처했다:
Pere eternal vous avez tort
Et ben devetz avoir vergogne,
Vestre fils bien amis est mort
Et vous dormez comme un ivrogne. 4
신앙인은, 빵의 껍질 속으로 그의 이빨이 가라앉을 때마다 수락되는 5 것이다.
독자獨自의 신들을 창안하기를 사절하는 종족들은, 두들겨 부숴질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현재진행형이다.
- [역주] 요한일서 4:16 참조 [본문으로]
- [역주] 혹은 택함을 받은 자들. 선민. [본문으로]
- [역주] 이 문단에는 칼뱅에 대한 파운드의 적대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집트나 아시아의 식물신들 (오시리스, 타무즈, 아도니스 등)에 대한 파운드의 집착의 배면에는, 그리스도교의 “시체 숭배”와 금욕주의에 대한 그의 증오(와 그것에 대척적인, 지중해적/유럽적인 엘레우시스 숭배에 대한 그의 광적인 옹호)가 깔려 있다. 동방의 식물신과 그리스도교 예식 사이의 관계의 밀접함은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정립된 것이다. 파운드는 율법적인 히브리 성서를 이를 갈면서 증오했을 뿐아니라, 저 금욕주의를 증폭시키고 연장시킨 혐의를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에 두어서 지체없이 그들을 단죄하였던 것이다. “유대적인” 근동의 파행성은 생生에 적대적인 것이고 “참된” 유럽 문화에 대한 이방의 침입에 다름 아니라고 파운드는 주장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으로]
- [역주] 영존하는 아부지시여 당신은 참 못됐고 / 염치도 좋으십니다 /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은 죽어버렸는데 / 주정뱅이처럼 잠만 주무십니까. 볼테르가 「비극예술의 몇가지 변화에 관하여Des divers changements arrivés à l'art tragique」에서 인용한 바 있는 이름없는 신비극mystery play의 일부이다. [본문으로]
- [역주] commune의 번역.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의미들을 하나의 한국어 어휘에 모으는 일은 난감하다. commune은 일차적으로는 (i) 무엇과 교감한다거나 어디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면서, 종교에 국한시킨다면 (ii) 성찬에 참여하거나 영성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파운드는 빵을 말했을 것이다). 또, 첫번째 뜻이 파생되어 나온 원의미로서, 명사형으로 쓰일 때 그것은 무엇보다 (iii) 공동체라는 뜻도 가진다. 즉, 영어로 “commune”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교감하는 행위의 보편성을 제한하는 컨텍스트로서 그리스도교를 가지되, 이것을 단순히 “성찬/영성체를 받다”라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컨텍스트가 교차하는 텍스트(현실)는 온전히 사라지게 된다. “수락된다”는 나의 번역어는 그러므로 궁여지책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