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커크
본문
위대한 책들의 목적은 윤리적이다. [마땅히]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모든 주요한 문예형식들은 T. S. 엘리어트가 “공리the permanent things”—인간 본성의 규범들을 뜻한다—라고 일컬은 것들을 심원한 주제로 삼았다. 극히 최근까지도, 우리는 문학literature은 규범적 의식을 빚어내는 것이며 인간에게 자신의 도타운 본성과 자신의 존엄과 만유에서의 제 합당한 위상에 대해서 일러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좀체로 의심하지 않았다. 욥기와 호메로스 이후, 그것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시詩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인문humane letters”이라는 구절 자체에, 문학literature은 본디 인간human의 본분의 특징에 관해서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어빙 배빗이 『문학과 미국의 대학』에서 적었던 것처럼, 휴머니즘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비롯된 것인데) 중요한 책들을 섭렵함으로써 사람됨[남성성]의 자질들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했던 윤리적 학문이었다. 허무주의적 문학이나 포르노그래피, 선정주의적인 문학은 근래의 현상이며, 삶에 대한 종교적 이해가 끝장을 보고 철학의 위대한 전통이 몰락하였던 18세기에서야 (우리 당대에는 더욱 강력하거니와) 등장한 내력의 것임은 알베르트 잘로몬이 『진보의 횡포』에서 기술한 그대로이다.
문학letters의 규범적 목적은 영미문학에서 몹시 현저하여서, 18세기 후반에 불문학을 제패하였던 에고이즘에도 눅어지지 않았다. 밀턴이나 버니언, 드라이덴이나 존슨—미국에서는 호손, 에머슨, 멜빌과 헨리 아담스—과 같은 이름들이 모두 다 그 증거가 된다. 스콧, 디킨즈, 새커리, 트롤로프 같은 19세기의 출중한 대중 소설가들은 작가된 자들은 저 본분에 대하여서 도덕적인 의무를 지고 있으며, 사적 · 공적 행동거지에 관한 몇몇 계속되는 기준들에 의해서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결박되어 있다고 일제히 가정하였던 것이다.
위대한 작가는 끊임없이 설교나 늘어놓는다는 투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벤 존슨은 자신의 당대의 속절없는 어리석음을 가열하게 헤집었을지언정, “사랑스러운 아가씨, 착하게만 자라다오, 다른 사람들이나 똑똑하게 두렴” 식으로 타이르는 일은 오히려 없었다. 도리어, 문인文人은 비유담比喩談, 우의寓意, 유추類推, 그리고 자연에게 거울을 되비치는 우언寓言으로써 우리 삶의 규범들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와 같이, 선한 것 보다 악한 것에 대해서 더 많이 쓰는 작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하되, 그는 그 때 인간 본성의 파탄을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가 이탈해 나온 기율들이 엄존하며 저 타락된 대본大本은 민망스런 정경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의 심상에 능히 각인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또한—존 P. 마퀀드가 그러했거니와—규범을 상실한 득의만면한 세속의 비루함과 용렬함을 즐겨 취급할 수도 있다. 양심에 양심으로 다가가면서, 작가는 때때로 천조각을 노에 사려감기도 하고, 자신의 규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그만그만할 수도 있다. 아마도 짐작건대, 막강한 예술가일수록 미묘한 설교자일 터이다. 대체로 보아서, 구구한 훈계보다는 완곡한 imaginative 설득이 규범을 옹호하는 문학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세기의 제일류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T. S. 엘리어트는 저 자신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시인은—그는 이 단어로써 심상적이고 철학적인 작가들 모두를 의미한다—자신의 에고를 공중에게 군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엘리어트의 견해였다. 오히려, 시인의 임무는 특수한 것과 개인적인 것에 초탈한다. “전통과 개별적인 재능”(1917)에서 그가 적었던 것처럼, 시인이 새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태양 아래 아무것도 없다. “시인은 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들, 저 자신의 삶 속에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촉발한 감정들에 의해서 남달리 되거나 돋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러저러한 감정들이란 공소하고, 거칠며, 자질구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 속의 감정은 몹시 복잡할 테지만, 살면서 크게 복잡하고 각별한 감정들을 가졌던 사람들의 복잡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진실로 시의 기벽된 오류는 표현할 새로운 인간 감정을 찾아 두루 헤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저 가엾은 모색 속에서는 기형적인 것이 찾아질 뿐이다. 시인의 직임은 새로운 감정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감정들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시로 끌어올림으로 실제 감정들에는 오히려 부재하는 돈독함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 엘리어트만큼 고즈넉한 시인은 없었다. 그러하되, 맞대면했을 때 그만큼 귀담아 들렸던 시인 또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당초 누구도 그를 발견하고 법석을 떨 수 없는 에딘버러 호텔의 작고 볼품없는 응접실이나, 예악禮樂의 전통에 눌리어 낡은 터키 카펫 밑으로 감정들이 낮게 출렁대던 퀴퀴한 런던의 클럽들에서 엘리어트를 만나곤 했다. 나는 늘 엘리어트의 무구한 친절함에 경악했다. 이 친절한 인간은 자신의 우주에서 그다지도 사소한 에고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사적인 삶에서, 엘리어트는 그의 시와 그의 비평과 그의 희곡에서처럼 공리들에 진력했는데, 그의 찬연한 힘은 이 독실함에서 돋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때늦은 어거스탄으로서, 엘리어트에게는 문학적 헛거품은 되지 않으리라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저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묵은 진리들에 현대적 의상을 입히는 것이 엘리어트의 첫째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18세기의 거의 끝자락까지도 건재하였다. 그 후, 한 부류의 낭만주의자들의 에고이즘이 쳐들어와서 인문의 취지는 허물어져 버렸다. 인간은 짐승에 지나지 않거나, 해봐야 제도에 의해서 짐승의 꼬라지로 되었다고 숱한 리얼리스트들은 주워 넘겼다. 이제, 특히 미국에서는 러시아의 대책 없는 허무주의자들 보다도 더 허무주의적인 한 부류의 작가들이 날뛰고 있다. 에드먼드 풀러가 『현대 픽션 속의 인간』에서 철저히도 묘사했던 똥과 구역과 아귀다툼의 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성찰되거나 수호되어야 할 규범이 없음으로 작가들 또한 애써 의리의 수호자이거나 주석자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 유파의 구성원들은 생각하였다. 작가는 그저 인류와 자신에 대한 저 스스로의 환멸을 거리낌 없이 과시할 뿐이다—그것이 그들의 밥벌이였다. (이 자들과 조나던 스위프트 사이에는 하나의 무간지옥이 가로놓여 있다. 스위프트는 대다수 인간들에게 기가 질리긴 했지만, 그들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에만 그들을 미워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의 20세기 허무주의자들의 이름은 한 세대도 안 되어서 증발할 것이고, 계속되는 것들, 곧 후인들에 호소하였던 소수의 문인들의 작품은 우리의 시대로부터 능히 우뚝할 것이다. 그 실례로, 지금 나는 지로넬라의 소설 『사이프러스는 신을 믿는다』를 생각하고 있다. 더할 것 없이 궁핍한 자들의 몸을 씻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던 지로나 구시가지의 무구한 소년은 공산주의자들의 흉탄에 쓰러졌으나 문필의 영역에서는 오래토록 살아남으리. 그런가 하면, 이 땅의 허무주의적 작가들의 엉성히 위장된 인격은 베스트셀러의 주인공들처럼 괴기스럽게 흐느적거리는 것이어서, 대중의 관심이 새 자극으로 옮아가는 순간 싸그리 씻겨 없어질 것이었다. 모름지기 영혼과 사회적 질서에 생生을 불어넣는 것은 규범적 의식이므로, 규범적 오성은 작가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몇 년 전 말콤 카울리는 일군의 신예 소설가들에 대해서 쓰면서, 그가 논평해온 몇몇 작가들은 칠죄종七罪宗이니 칠추덕七樞德이니 하는 말들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적시하였다. 저 젊은 소설가들에게, 범죄나 죄악은 다만 운이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진짜 사랑과 진짜 증오는 이들의 소설 곳곳에서 부재하고 있다. 저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세계는 무목적적이고 인간의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비치는 것이어서, 저들이 죽기 살기로 표현하는 것은 갈팡질팡하는 에고에 지나지 않는다. (자크 바전은 『지성의 거처』에서 저 작가지망생들의 돼먹지 않은 자만심에 대해서 패려궂은 말들을 좀 적어놓았다.) 그리고 이 청춘남녀들은 유년시절과 성장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뭐든 허락된다는 분방한 태도 외에는 어떤 절도節度에도 규율되어 본 일이 없어서, 영적이고 지적인 규율이 부재할 뿐더러 그 어느 것에도 진짜 욕구를 느껴본 일이 없다고 카울리는 갈파하였다.
저러한 부류의 들뜨고 불우한 작가들은, 문학의 규범적 기능이 내동댕이쳐진 시대의 산물일 터이다.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어리벙벙해서, 저 작가들은 자신의 직업을 밥벌이가 될 수도 있는, 때때로 자신의 허영을 충족시켜주지만 끝내는 어떤 목적에도 일로매진하지 못하는 한낱 기예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환멸과 무기력증에 의해서 거덜이 나게 될 것이지만, 도리어 1920년대와 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적인” 글쓰기 조차도 [투철할] 목적을 가졌던 것이다. 의견에 대해서 “방임적인” 세태의 결과로서 작가들이 이 같은 곤경에 처해 있다면, 저들의 독자는 오히려 어떠하겠는가? 이제, 비교적 적은 수의 독서가들만이 규범적 지식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거나—때때로 삐뚤어진 성격의 대리 경험이나—칵테일 파티의 대화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시사적이고 지적 조류에 관한 조잡한 “읽을거리”의 추구를 일삼는 것이다.
말콤 카울리가 말한 젊은 소설가들은 엘리어트의 “휑뎅그렁한 놈들”만큼이나 쎄고 버렸다. 자연은 진공을 혐오하여서, 규범이 빠져나간 마음자리에는 어떤 다른 힘, 자칫 마귀적인 경사傾斜에 놓인 힘이 달려들기 마련이다.
문학은 타락시킬 수가 있다. 우리의 규범적 지식의 대부분은 우리의 독서에서 말미암는 것이어서, 인문의 무지에 의해서 비뚤어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양서가 아닌 악서를 읽는 이들은 점차로 부박해지는 것이고, 책을 아주 읽지 않는 이들은 귀스타브 티봉이 “반듯한 습관들”이라고 부른 것과 구술 전통에 의해서 아직도 놀라우리만치 지배되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지 않는 다음에야, 평생을 아득히 표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인쇄물로부터의 전적인 차단은 어림없는 것이 되어서, 소년은 『보물섬』을 읽지 않는다면 『매드 굴 코믹스』라도 읽는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기준들에 대한 이해를 강구하는 문학적 규율의 요체를 제시하는 것이 썩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정작 프로그램이라고 불린 적은 없으되, 수세기 동안 서구의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독서 프로그램이 엄존하고 있었다. 한 예로, 그것은 초창기 미 공화국의 지도자들의 마음과 행동거지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독립 혁명의 지도자들, [미]헌법의 기초자들, 그리고 1800년 이전의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살펴 본다면, 그들 거의 모두가 몇 권의 중요한 서물들을 섭렵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셰익스피어, 약간의 키케로와 약간의 베르길리우스로, 이들은 몹시 규범적인 문헌을 구성하고 있다. [미]공화국의 설계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커먼웰스를 로마 공화국과 영국의 관행적 제도들의 융합으로 이해했고, 성서의 예언자들과 왕들과 사도들과 플루타르코스의 고귀한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지도력에서 자신들의 본보기를 찾았다. 카토의 완강한 덕성과 데모스테네스의 웅장한 예언들, 클레오메네스의 물불 가리지 않는 개혁에의 의지—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마음에 기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오늘날 경세가들이 이해하는 것은 주식시장 뿐인데, 그조차도 시원찮다”라고 샤토브리앙은 한세기 하고도 반 전에 적었다.
물론—예를 하나 들자면—헌법의 기초자들의 규범적 이해가 오롯이 책들에 의해서 계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규범에 대한 그들의 공부는 가족과 교회와 학교와 삶의 현장들에서 습득된 것이다. 그러하되, 책에서 획득된 규범적 의식의 몫이 컸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개인적 경험만을 규범적 스승으로 의지해서는 덕스런 기준들에 아무래도 지극히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으뜸 원칙들에 대한 개인적인 실험은 자주 오그라지는 것이고, 더러 시간 소모적이다. 뉴먼의 말처럼, “삶은 각고실천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정치와 취미에 있어서 키잡이가 필요할 때, 우리는 세월의 저장고와 전범으로서 문학에 저장되어 있는 규범적 지식에 의탁하게 된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로, 이 규범적 지식은 점점 더 책 속에서 표현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 부분 인쇄물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게 되었다. 때때로, 이것은 허망한 일일 수 있다. D. H. 로렌스가 말한 “신문을 씹는다”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사실을 극구 부정해보아라, 그 사실은 네 목을 비틀어 쥘 것이니.
또 하나의 사실은 이렇다. 삼십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미국은 중요한 문헌들을 공부시키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통해서 청년들의 규범적 의식을 함양시키는 데 실패해 왔다. 우리는 “평생교육”이니 “생활 적응을 위한 훈련”이니 하는 어거지를 떠들어 댔지만, 대부분은 문학 분과가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주된 방편이라는 것은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더해서, 우리의 가늠자가 되는 삶이 규범에 의해서 단속되고 있지 않다면, 아, 그것은 정말 누구에게도 좋은 삶일 수 없을 것이다.
학교의 전형적인 “생활 적응을 위한”, “자유방임적인” 커리큘럼의 문제점은—흔히 가정 내에서 유사하게도 관용적인 태도와 나란한 것이지만—“삶의 현장”[류의] 독서로써 진정 상상적인imaginative 문학의 섭렵을 대체시킨 것이다. 이 같은 경향성은 으레 초등교육에서 천 번 만 번 두드러지는 것이지만, 고등학교에까지도 골고루 미치는 것이다. “딕과 제인”이나 “런, 스팟, 런” 유파는 상상력을 자극하지도 않고, 규범에 관한 가르침을 부여하는 바도 도리어 희박하다. “생활 적응” 교육의 이 같은 측면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들은 신중하고, 관후하며, 협동적인 행동을 치켜 세우는 평이한 글들을 지정함으로써 의리에 대한 존중을 조성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의 터득함을 훈도하는 데 별무효력인 듯싶다. 빅토리아 시대의 것이든 20세기의 변종이든, 직접적으로 도덕적인 권계는 특히 타고난 총명이 어느 정도 있다면 오히려 필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도道의 고루한 숭상은 곧 배반이다. 꼭대기 선반 위에 있는 그 군것질거리에 대한 호기심을 돋우는 것이다. 사키Saki의 “이야기꾼”에서 한 짓궂은 남자는 방정함으로 메달까지 수여받은, 대단히 경우가 바른 계집아이의 이야기를 기차의 세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말하기를, 그 애는 공원에서 늑대와 마주쳤고, 무작정 내달렸지만, 그 메달들이 내는 쨍그랑 소리는 늑대를 그 애 쪽으로 몰아가서, 급기야는 그 애는 통째로 잡아먹히게 된다. 아이들은 그 기상천외한 전개에 환호작약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저토록 요사스러운 얘깃거리를 들려주다니!” 아이들의 이모는 쏘아붙인다. “딱한 여자 같으니라고!” 남자는 떠나면서 뇌까린다. “앞으로 반년동안 저 여자는 짜릿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시달리겠지.”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로 말하자면 때로 허황하기는 하나, 도덕적 상상력을 격발시키고 딕과 제인의 실없고 끝모르는 짓거리 보다는 법도의 이른 터득을 면려하는 것이다. 판도라의 이야기나, 토르의 늙은 여자와 고양이와의 모험담은 어린아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고, 그 나이에는 어렴풋하게만 파악되는 것이되 자라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공리주의적인 “현실밀착” 픽션은 도저히 미칠 바가 아니다. 영구히 긴요함으로, 헤시오도스와 영웅전saga의 가객들은 현대적이다. 그리고 호손이나 앤드류 랭의 문장들이 20세기의 교과서 대부분 속에서 학생들을 점령하는 딴따라 영어보다 아주 더 훤한 산문이다. 존 헨리 뉴먼이 그려내는 성심illative sense은 가녀린 손짓들, 단초들, 징표들의 여러 편린들이 얽히면서 무르익는 종법宗法의 어지럽지만 바른 방편으로서, 전승되는 옛이야기가 머금고 있는 예지叡智에 의해서 대체로 유년 시절에 자득되는 것이다.
중등교육의 현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국어 교사 하나는 자신의 10학년 학생들이 그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청랑한 농구선수들, 개결한 학생 간호사들과 그 밖의 “현실” 영웅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그들은 대신, 구석진 편의점에 즐비해 있는 이언 플레밍이나 미키 스필레인이나 [그것들보다도] 덜 떨어지는 것들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젊은이들을 상상력과 모험, 그리고 영웅주의에 기갈 들리게 한다면, 그들이 아동 수신서修身書들을 그윽이 용납할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지루해 죽는 것을 택하기 보다는 허드레 저급 책들을 주워 읽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단순히 그들의 미감이 곤두박질칠 뿐 아니라 그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서 고질적으로 오해하고, [이는] 자연히 국민 전체의 성정에서까지 감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트뵈브는 그의 『회화록』에서 붕우의 창가에 서서 거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파리의 폭도들을 바라보는 한 극작가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여기, 나의 가장행렬을 보라고!” 그 극작가는 그처럼 기특하게 말한다. 거듭 말하건대, 예술은 사람의 성nature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시시댄 것처럼, 성정nature은 예술을 답습한다. 우리 훗날의 사적이고 공적인 처신들은 유년 시절에 이미 구현된 의견들과 미감들에 의해서 부림을 당한다. 위대한 책들은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릇된 책들은 개인적 사회적 행동의 수준 전체를 실추시킨다. 가장행렬을 보았음으로, 폭도들은 극작가가 그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대로 처신하기 시작한다. 그토록 자주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극을 구경 가는 군중은 국인들은 이렇게 행동한다고 윌리엄스가 생각한대로 마침내 행동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권위의 목소리들이 그렇다고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 무엇으로 된다.
그러므로 문학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해서 생활적응 및 자유방임적인 학파의 몇몇 이론들은 지극한 폐단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생활적응 교육의 옹호자들은 비판가들에 대응해서 이런저런 변명들을 나불대고 있다. 그들 교리의 지적인 선조는 루소이다. 나는 루소 사상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려운 시절』의 그래드그라인드의 교리는 훨씬 더 목불인견인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여염의 방식들이 하물며 그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들에 의해서 대체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사실, 인간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진짜 적응은 덕목에 대한 적응일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법을 가르치려는 미약한 시도가 모든 궤범을 팽개치거나 무시하는 것보다 낫다. 규범적 가르침을 가로챈 공리주의적 직업교육을 향한 허깨비 열정들, 문학을 커리큘럼의 구석진 곳으로 밀어내는 물리학과 생물학에 처져 있는 윗점들, 우리의 모국어로 씌어진 위대한 작품들을 대가로 해서 외국어 회화능력을 확보하려는 기도들—이들은 생활적응 및 자유방임적 악당들이 저지른 것 보다도 문학을 통한 규범의 교수에 자못 더 적대적인 교육적 변화인 것이다.
- 커크의 에세이들을 선집한 『Enemies of the Permanent Things』의 제2부, “문학의 규범The Norms of Literature”의 제1장 “The Purpose of Humane Letters”의 첫 부분(“Nature Imitating Art”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을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