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제이콥[각주:1]

코제브와 티리아의 유럽제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정세에서 유럽의 위상은 위축되기만 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행사한 가공할 이념적 중압감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하되, 유럽중심의 세계관을 부활하려는 시도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인인 프랜시스 파커 요키 (1917-1960)나, 알렉상드르 코제브 (1902-1968)와 장-프랑수아 티리아 (1922-1992) 같은 유럽인들은 이것을 도모하였다. 요키는 이 셋 중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므로 나는 유럽 임페리움[각주:2]에 관한 유럽 쪽의 두 프로그램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알렉산드르 코제브니코프 [프랑스어는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러시아계 프랑스인 헤겔주의자이다. 그는 러시아의 추상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의 조카이자 정치가이다. 코제브는 베를린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6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프랑스로 이주해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파리에 위치한 고등연구원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관해서 일련의 명망 높은 강의들을 하였다. 그는 이후 프랑스 경제재정부에 몸담았고, 프랑스 정부가 유럽경제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유럽경제공동체는 1957년의 로마조약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코제브의 지적인 작업을 구성하는 빼어난 철학적 저술들을 제외할 때, 1945년 8월 27일 무렵에 (제2차 세계대전의 끄트머리에) 작성된 그의 논문 「프랑스의 정책 독트린을 위한 개요」는 확실히 유럽의 지정학적 담론에 가장 흥미진진한 기여에 속한다. 일차적으로, “개요”는 프랑스를 경제적·정치적으로 일류의 국가로 만드는 지침으로서 작성되었다. 만들어져서, 독일이 미래에 대륙적인 패권으로 부활하여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한통속이 되어서 설쳐대는 것을 프랑스는 단속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전후戰後에, 과거의 민족국가[각주:3]들은 제국의 시스템으로 재편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코제브의 완강한 믿음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제국의 시스템을 건설하려고 했던 제3제국의 열망을 지적하면서, 독일인들의 참혹한 실패는 그 지도자들에게 통합주의적인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갈파하였다. 히틀러의 독일 라이히는 대륙에서 인터내셔널한 사업으로 성립되기에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었던 것이다. 코제브가 피력했던 것처럼, “독일이 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민족국가로서 전쟁을 승리하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의 관념에서 “인류” 일반의 관념에까지 환상적으로 비약했는데, “인류”는 한낱 추상에 지나지 않는 한에서 공상적인 정치체제들로 귀착될 것이었다. 당대의 자유주의자들 또한 대륙적인 구조를 모색하였으나, “국가”가 아닌 “사회”에 대한 그들의 편애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사회의 개념은 개별자들에게만 밀착할 뿐 공동체적 단위에 대해서는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제브에 따르면, (국민)국가와 보편성 사이의 불가피하게 과도기적인 단계가 곧 제국이다. 그는 이러한 이치를 이해한 인물로 소련에서는 스탈린을 꼽았는데, 가엾은 트로츠키는 보편주의적인 목표만을 추수했던 것이다. 앵글로-아메리칸 제국은 정치·경제적인 블록으로 성립하는 것인데, “자매국가들의 [거대]연방”이라는 훨씬 더 견고한 바탕을 지닌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독일이 대서양 양안의 저 [정치]단위[각주:4]와 어느새 야합하여서, 기존의 경제적 패권에 더해 정치적 위세를 보태는 것이 코제브가 논문을 쓰던 당시의 위험이었다.

 

   소비에트 제국과 앵글로-아메리칸 제국의 야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프랑스는 독자의 라틴 제국을 수립하고 경영해야 한다고 코제브는 촉구했다. 라틴 제국은 프랑스뿐 아니라 스페인과 이태리의 경제적·사회적 역량까지를 집결시킨 것이다. 라틴성이라는 공통된 기질과 사람들의 심성이 라틴 제국에 관한 코제브의 구상의 단초 내지는 초석이었다. 저 특질에 관해 그가 서술한 대목은 인상적이어서, 부분이나마 인용할 만하다.

 

이 심성은 모든 예술의 원천인 여가의 기술에 의해서 포착되어지는 듯싶고, 물질적 편리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는 저 “생의 찬란함”을 빚어내는 (무슨) 기질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모양이다 (…)

 

이, 공통된 심성은 지극한 심미의식을 대동하는 것인데, 이 심미의식은 대체로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특히 더) 수려한 균형감각과 결부되어 있으며 저 진부한 “부르주아적인” 웰-빙을 생生의 귀족적인 “찬란함”을 향해 전환시키는 것이다 (…) 이 심성은 단지 라틴 동포들에게 그들의 참된, 즉 정치·경제적 결합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역사의 눈 앞에서 그 결합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앵글로-아메리칸, 러시아, 라틴의 세 제국 중 라틴 제국이 문화적으로 최정상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코제브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프랑스인들을 정점으로 하는 라틴인들이 문명세계에 베풀어왔고 앞으로 베풀게 될 무엇을, 독일인들과 슬라브족들과 앵글로색슨족들은 가져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질 일이 없을 것이다.”

 

   라틴 제국이 다른 경쟁 제국들에 의탁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그 안의 천연자원과 인구자원의 결합 덕이다. 자급체제를 보전하기 위해서, 라틴제국은 제 영토를 수호할 수 있는 강성한 군대를 필요로 할 것이었다. 공간들이 격절되어 있지 않고 연접해 있을 때 영토는 가장 쉽게 수호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북아프리카의 연안에까지 펼쳐져 있는 라틴 제국에게 지중해는 그야말로 목숨과도 같은 영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후미진 국가들 또한 언젠가는 유럽의 라틴 제국으로 합쳐질 것이었는데, 저 국가들은 라틴 제국이 대표하고 수호하는 문명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들의 식민植民 사업을 코제브는 나무라지 않았고, 제 식민지들을 영구화할 것을 라틴 유럽의 세 열강들에게 장려하기까지 하였다. 그 식민지라는 것에는 아랍의 국가들도 제외되지 않는다. 실제로, 코제브는 라틴성과 이슬람 사이의 거침없는 협동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주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체로 보아서, 라틴 제국의 준엄한 바탕이자 통합의 기율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하나의 블록으로 잇는 축선의 경제적 통일성이다.

 

이 하나된 라틴-아프리카의 세계 안에서 무슬림 문제가 (그리고 혹시 “식민지” 문제 전체가) 끝내는 해결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 여러 혼합적인 견지見地들 (스콜라주의에 끼친 아랍사상의 영향, 라틴 국가들에 나타난 이슬람 미술의 반향 등)을 일제히 성토하면서 아랍의 이슬람과 라틴의 가톨리시즘은 [우연히도] 합치되어 있었다. 참된 제국 내에서, 이 양극단은 통합을 이룩하고 저 자신의 내적인 모순들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을 것인데, 저 모순들은 일국적 관점으로는 기어코 함몰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중해는 사활적으로 라틴 제국의 “마레 노스트룸,” 즉 영해領海로 간주되어야 할 터였다. “대양은 다른 두 제국들의 경쟁에 내맡기더라도 지중해만큼은 라틴 제국이 배타적인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코제브는 당부하였다. “라틴 제국이 빚어낸 문명을 보수保守하는 책임은” 라틴 제국에게만 지워지는 것이어서 지중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러니, 라틴 제국의 정책적 목적은 서유럽의 평화를 확보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 제국은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몹시도 강대한 열강들과 합력해야 한다고 코제브는 주장하였다. 아메리카의 패권적 야심에 대한 방파제로 작용하려는 블록에게는 소비에트의 지원이 차라리 가까울텐데 말이다.   

 

          라틴 제국 내에서도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국가는 있기 마련인데, 그 국가는 이태리와 스페인에 대해서 경제적인 우위에 서 있는 프랑스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앵글로색슨 블록을 점철하고 있는 대량실업이나 규제되지 않는 거대 카르텔들의 이른바 “자유주의”도, 평등주의적이고 가히 “야만적”이기까지 한 소비에트 연합 식의 “국가주의”도, 라틴 제국은 모두 모면해야 할 것이었다. 라틴의 제국사업은 인구의 모든 정치적인 부문의 최정예한 자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을 필요로 할 것이고, 프랑스의 정치적 의지를 구현하는 드골주의자들, 경제 · 기술 분야의 리더들, 그리고 노동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일제히] 대표하게 될 것이었다. 코제브가 썼던 것처럼, “유효한 정치적 과업을 위해서는, 공산당에 의해서 얼마쯤 장악된 대중들과, 드골 장군이 대변하는 정치적 의지와, 경제 · 기술 · 문화 방면의 엘리트들이 휘두르는 실질적 권력 간의 연대가 맺어져야 한다.” 반국가주의의 좌파 지식인들과, 징글맞게도 반동적인 비시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논외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제시될 정치적인 이념은 얼마쯤 “민족주의적”인 늙은 “정치분자들”과, 아울러 정확히 작동하는 건설적인 노동에 열광하는 이들을 모두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라틴 제국에 속한 유럽 국가들의 문화의 골수에 배어 있는 것이다. 제국 내에서, 그것은 제국 정부의 종교적인 국면을 다시 주재해야만 할 것이었다. 소비에트 제국은 근본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 근거하는 것이고 앵글로-아메리칸 제국은 근본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에 근거하는 것인데, 라틴 제국의 사회적 저변에는 로마 가톨릭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강고히 하고, 미국의 입김으로부터 바티칸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프랑스의 노력은 겨누어져야 할 터였다. 그래야 로마가톨릭 교회는 저 세 교회들을 하나로 수습해 들이고, 하나된 가톨릭 인류를 불러모으는 저 자신의 목적을 기어코 완성해 낼 것이었다. 코제브의 말대로는, “정말로 통합된 인류—즉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하나된 인류—가 여전히 에클레시아[교회]의 구조를 가진다면, 그 구조는 보편 교회—즉 완벽하고 순결한 의미에서의 “가톨릭”—에 의해서 제공될 수밖에 없다”.

 

   코제브는 또 말했다. 이, “보편하고 단일한 교회로의 전환은 단지 가톨리시즘의 목적일 뿐 아니라 유럽의 운명에 관계되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미래는 미지수여서, 그것은 몇몇 사람들이 예기하고 선망하는 것처럼 휴머니즘적 비종교로 될 수도 있고,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최종목적이면서 존재이유이기도 한 그리스도교적 가톨리시즘으로도 될 수 있다. 그러하되, 라틴의 정신세계는 오로지 이 가톨릭 그리스도교에서만 원인되었던 것이다.”

 

*

 

   이 대목에서부터 장-프랑수아 티리아의 제국 프로젝트를 살펴보겠다. 티리아의 기획은 코제브의 기획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반복하는데, 그 인종적[혈연적]· 종교적 특질들은 온전히 지워져 있다. 뿐만 아니다. 미국이나 소비에트 같은 열국들과의 경제적인 협력을 바랐던 코제브와는 판이하게, 티리아의 교의는 저 두 패권에 대한 완강한 반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티리아는 유럽을 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전제에 자신의 정치적 기획 전체를 조건 지었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미국은 유럽의 대적大敵으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의 정치사상가 프랜시스 파커 요키 (1917-1960)와 비슷해 있다.

 

   티리아는 브뤼셀에서 태어나서 “사회주의 수호 청년회Jeune Garde Socialiste”나 “반파쇼 사회주의 연합Union Socialiste Anti-Fasciste” 같은 벨기에의 사회주의 운동들에 참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피히테 연맹Fichte-Bund”이라는 1920년대 함부르크의 국가 볼셰비키National Bolshevik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후 “독일 대大 라이히의 친구들Les Amis du Grand Reich Allemand”에 가담하였다. [벨기에의] 왈롱 지역의 극좌 분자들 가운데서도 유럽과 독일 라이히 간의 협력에 우호적인 자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 단체와의 연루로 인해서 티리아는 1944년 투옥되었고, 1959년까지 벨기에에서의 시민적 권리들을 제한 받았다.

 

   티리아는 1960년에 다시 등장되었다. 콩고가 탈식민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프리카계 벨기에인들의 보호와 행동을 위한 협의회Le Comité d’Action et de Défense des Belges d’Afrique”에 참여했는데, 이는 이후에 “시민행동운동Mouvement d'Action Civique”[이하 MAC로 약칭]으로 전이된다.

 

   1962년 3월 4일, 베니스에서 회담이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MAC와 벨기에를 대표하는 티리아 외에도, 이태리의 “이태리 사회운동Movimento Sociale Italiano”, 독일의 “사회주의 국가당Sozialistische Reichspartei Deutschlands”, 영국의 오스왈드 모슬리의 “유니언 무브먼트”가 참여하였다. 공동의 성명을 통해서, 이들은 “단일한 유럽의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민족정당National European Party”을 설립하기를 원하며, “미국에 의한 서유럽의 위성화를 수락하지 않고 폴란드에서 헝가리를 거쳐서 불가리아에 이르는, 동부의 영토들과의 재결합을 피하지도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의 편협한 일국주의는 유럽민족정당의 기획을 일시에 절단 내버렸다.

 

   당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오그라졌을 때, OAS (비밀 군사 조직Organisation Armée Secrète)는 참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OAS는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령 알제리 편에 서서 싸웠고, 티리아는 그런 OAS의 편이었다. 얄타의 결의를 거부하는 정당과 국가들의 공동의 전선으로서 유럽혁명정당을 출범시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티리아는 결론 내렸다. MAC은 1963년 1월 “젊은 유럽Jeune Europe”으로 바뀌어서,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영국, 이태리,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위스에 구성원들을 망라한 유럽적인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유럽주의에 관한 그의 생각들이 담긴 수많은 논저들 외에도, 티리아는 “유럽민족을 위한 매니페스토 Manifeste à la Nation Européene”를 1961년에 작성하였다. 그 논문에서 그는 아메리칸 블록과 소비에트 블록과 대척을 이루는, 하나된 공동체주의적인 유럽의 개념을 주창하였다. 이후 1964년에는 4억명의 제국』이 출간되었으며,[각주:5] 1965년에는 『거대한 국가La Grande Nation: 브레스트에서 부카레스트까지 하나된 유럽』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각주:6]

 

   미美점령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개시할 유럽혁명군단을 조직하는 것은, “젊은 유럽”의 또 다른 목적이었다. 그들은 유럽뿐 아니라 제3세계의 혁명세력들에게서도 외부적 지원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중화 인민공화국, 이라크, 이집트, 팔레스타인 레지스탕스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8년, 알제리인들과 합작하려는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알제리에서 “유럽의 애국적 혁명가들은 장차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을 대비해 특수 부대원들을 모집하고, 유럽 내의 미국인들과 맞붙어 투쟁을 벌이도록 기술적인 훈련을 제공하고, 아랍 국가들 및 유럽 내에서 동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반미美, 반시온주의 정보기관을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1968년의 가을에는 티리아는 중동으로 여행했다. 이라크와 이집트 정부, 바트당[각주:7]의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방문 도중, 그는 나세르를 만났는데 소비에트의 외압으로 인해서 이라크 정부는 신생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아랍의 민족주의자들과 티리아의 유럽혁명군단 사이의 협력을 지지하기를 거부하였다.

 

   “젊은 유럽”에 대한 금전적, 물질적 협조는 바라던 것에 미치지 못했고, (19세기 중반 이태리 통일에 있어서 피에몬테와 같은) 범유럽적인 작전을 위한 튼튼한 베이스는 확보되지 않았다. 이것은 티리아의 혁명적 야심에 거대한 타격을 주었다. 나아가, 탈식민화 위기 이후의 유럽이 십수년 간의 경제적 풍요의 호기好期를 감내했다는 사실 역시 혁명적 움직임의 가능을 격감시켰다. 1969년, 운동의 지지부진함과 외부적 지원의 빈약함에 좌절한 나머지 티리아는 무장항쟁을 포기한다.

 

   그때, 그는 소비에트 연방 그 자체와의 협력에 대해서 숙고하게 되었다. 80년대 초반에 티리아는 『유로-소비에트 제국: 블라디보스톡에서 더블린까지』라는 책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그 책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 책의 제목은 소비에트 연방에 관한 그의 견해가 급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책에서, 티리아는 “워싱턴도 싫고 모스크바도 싫다”는 낡은 구호를 버리고 “모스크바와 함께 워싱턴에 맞서자”는 새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는 진작부터 프라하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 개입에 대해서 찬동했었고 “프라하, 소비에트 연방, 유럽”이라는 논문에서는 이른바 “프라하의 봄”에서의 시온주의적 계책을 성토했었다.[각주:8] “연합된 서유럽이나, 소비에트 연방과 제휴한 서유럽은 미국 제국주의의 종언을 뜻”하지 않을까, 그는 그 논문에서 희구했던 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했을 때, “젊은 유럽”을 계승하는 “유럽민족해방전선”의 창립에 그는 힘쓰고 있었다. 92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전선”을 대표해서 러시아 내의 보리스 옐친 반대세력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벨기에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티리아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에 비추어서 반미 투쟁의 필연적인 전개과정을 분석한 티리아의 여러 이론적 저작들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에 씌어진, 티리아 말년의 지정학적 견해가 드러나 있는 셋을 우리는 그 가운데서 추려볼 수 있다. “유럽: 정치적 민족국가”, “블라디보스톡까지 뻗어 있는 유럽”, “터키, 지중해, 유럽”.[각주:9]

 

   티리아의 범유럽주의 프로젝트는 코제브처럼 사회주의적 영감에 의한 것이고, 코제브가 라틴 제국의 형성에 관해서 제안한 여러 발상들을 공유한다. 티리아는 다만, 자신의 유럽 제국 내에서 모든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했던 것이다. 로마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티리아의 유럽 공화국은 공통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었다.

 

   제국은 내부에 협애한 내셔널리즘들을 용납하지 않는 크고 중심화된 정치단위여야 한다. 내셔널리즘은 미국과 같은 강대한 세력에 의하여 위성국衛星國으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티리아에 따르면, 제국의 지정학적인 조건은 천연자원과 연속적인 공간과 상당한 수효의 인구이다. 대체로 말해서, 소국분립주의Kleinstaaterei는 대국大國이 위험군의 국가들을 종속시키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마땅히 위험한 것이다. 독일이 장시간 분열되어 있으며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못하도록 프랑스가 챙겼었던 유럽의 30년 전쟁의 끄트머리가 바로 이러한 경우였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저희들끼리 다툴 때, 페르시아 황제가 그들의 상잔相殘을 흡족하게 굽어보았던 것에서도 소규모의 민족[국가]적 단위의 단점은 온통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로마인들만이 참된 제국을 건설하는 일에 성공하였고, 티리아가 자신의 유럽 제국 구상을 위해 채택한 모델은 로마제국이었다.

 

   유럽제국은 서쪽으로는 아이슬란드와 동쪽으로는 시베리아까지 뻗어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튀르크 공화국들과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까지를 포함할 때 비로소 존립될 수 있을 것이었다.[각주:10] 유럽제국에게, 제1의 지리학적 목표는 오만만灣과 인도양의 따뜻한 바다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라비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은 유럽제국의 생사가 달려 있는 지역인 셈이다.” 티리아가 저 국가들을 유럽 제국으로 포용했던 것은 그들이 이미 프랑스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식민활동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유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저 아랍과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이나 중국의 헤게모니에 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고 생각했다.

 

   유럽제국의 국경은 또 방위하기에 용이해야 한다. 이 제국은 단지 북극해, 대서양, 사하라, 흑해, 인도양, 태평양에 접근할 수 있어야할 뿐 아니라 “중국과 우리 사이에 히말라야 산맥, 알타이 산맥과 고비 사막까지”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 눈부신 제국의 수도는 역사가 안드레 클로가 “흑해와 지중해, 남과 북, 슬라브의 영토와 무슬림 동방을 잇는 가교”라고 규정한 이스탄불일 것이었다.

 

   티리아는 “연방제”는 어떤 형태이든지 반대하였다. 연방국가는 어차피 분권주의로써 해소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부분적으로는 소비에트 제국을 출범시키지 않고 소비에트 “공화국들”을 설립하기를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했을 때, 저 공화국들은 대부분이 가뭇없이 사멸되었던 것이다. 티리아는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공화국”이라는 자코뱅적인 개념을 선호했으며, 내부에서는 자결주의가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임페리움”에 본질적인 정치적 단일성은 전체주의적 양태로만 확보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임페리움 내의 공동체들의 개인적인 “도미니언”은 시민들에게 [여실히] 자유롭고 개별적인 성장을 보장할 것이었다.

 

   티리아는 라틴 제국이나 독일 제국과 같은 관념들을 수락하지 않았다. 코제브의 라틴 제국 안에서 프랑스의 경우처럼 어느 한 국가가 압도하는 것은, 티리아의 유럽 제국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짓이었다.

 

   유럽 국가들의 모든 사소한 내셔널리즘과 연방적 연합들을 티리아는 사절하였다. 그는 또, 제국 내의 인종차별에는 어떤 형식이든지 단호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가 구상하는 제국은 광활해서, 아랍인과 터키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차별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었고 인종간의 통합은 결사적으로 촉진될 것이었다. 인종차별은 유럽제국의 안보에 정녕 위해를 주는 것이라고 티리아는 질책하였다. 이 주장을 그는, 식민제국 시기의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인들을 옳게 통합하지 못하였고 그처럼 알제리인들은 고국의 이슬람적인 낙후성 속에 방치되었으며 프랑스 제국의 합법적인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들이 박탈되었다는 것을 실례로 들면서 뒷받침하였다. 이토록 차별적 조건에 의하여 시달리는 식민지는 오래 버티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티리아에게 친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똑같이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그 둘은 모조리, 유대인들을 전체 인구 안에서 유별난 종족으로 인식하는 틀이다. 티리아는 프랑스 혁명가 스타니슬라스 드 클레르몽-토네르의 지침을 따르기를 선호하였다.

 

종족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무엇도 줄 수 없다. 개별자들로서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다. 그들의 판관은 청산되어야 하고, 오로지 우리의 판관만이 인정되어야 한다. 국가 내에서 그들이 정치구성체나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각기 한 사람의 시민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유대인이 있다면 입을 벌려서 그렇게 말하도록 하라. 그들은 꺼져버리면 되니까.[각주:11]

 

   유대인들은 인종이 아니라 다만 종교집단으로 취급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특권들이 제거되고, 그로써 저 유럽제국의 세속시민으로서 겨우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티리아는 설명하였다.[각주:12]

 

   종교적 · 인종적 차이는 무시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특권층들이 자신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강요하는 사회적 분열을 저 차이들이 도리 없이 부추긴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 주제와 관련해 오토만 제국의 모범적인 사례를 내세웠다. 정부의 허가 없이 재산이나 부동산을 획득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오토만 제국은 계급분열을 막아냈던 것이다.

 

   미 제국이 기본적으로 착취하는 제국인 반면에, 유럽 제국은 통합하는 제국일 것이었다. 유럽 내의 편협한 내셔널리스트 운동가들은 진짜 적을 향해서 자신의 분노를 겨냥해야 할 것인데, 그 적은 미국과 NATO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동유럽에서, ““유럽에서 NATO를 철수”시키기 위한 가차없는 정치적 투쟁”이 일어나야 한다고 티리아는 독려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러시아의 위기는, 유럽연합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의 확보를 위해서 분투하지 않고 러시아 연방 내에 국제금융자본을 유치하고 미국의 힘을 동경했다는, 얼빠진 사실에 있는 것이다. 산업화 없이는 정치적인 패권도 없다면, 제국에 함입된 러시아의 산업화는 서유럽에 의해서 지원되어야 할 것이고 러시아와 서유럽과의 결속을 위한 공공사업 프로젝트들에 서유럽은 속히 착수해야 할 것이었다. 제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과학 및 기술 방면의 엘리트들은 제국 곳곳에서 차출되고 기용될 것이었다.

 

   옐친의 러시아에서 올리가르히[재벌]의 역할에 대해서는 티리아는 침묵해 있었다. 저들 중 상당수는 미국의 금융재벌들과 합세하고 싶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자립과 관련되어서, 그것은 될 일이 아니며 되기에는 미국은 너무도 간교한 경쟁자라고 티리아는 단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미국의 지정학적 야심을 비껴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와 협력함으로써 NATO를 유럽대륙에서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현재의 유럽연합은 강고하게 단결되어야 하고 전유럽에 걸쳐서 하나의 통화가 채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럽공동체가 통과시키는 모든 사회경제적인 법안은 지지되어야 한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십이국의 공동체는 단일한 화폐[통화]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티리아는 우리가 우리의 당대에 목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온주의의 발흥을 내어다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미국인 복음주의 [개신교] 작가 진 H. 호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표현된 이스라엘에 관한 그의 생각은 오늘날 기어코 몽상적으로 비친다. 이스라엘은, (그 둘이 일체가 되기 전까지는) 유럽이나 러시아 중 하나의 피보호국으로 되어야 한다고 그때 그는 떠들었던 것이다. 통일된 유럽은,

 

“작고” 목가적인 이스라엘 (유엔에 의해서 국경이 구획된), 그리고 “키부츠와 자몽의 나라” (…)

 

만을 용납해야 한다.

 

(동시에) 유프라테스 강까지 뻗어있는 대大 이스라엘을 꿈꾸는 (이스라엘) 극우파의 성서적 편집증은 타파되고 극력 저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각주:13]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친밀한가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친미 집단을 유럽제국 내에 수락하는 일이 얼마나 퇴행적인가에 대해서 섬세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든 유대적 정치연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제국의 시민권을 주자는 그의 주장이 엉뚱했던 것처럼, 자신의 유럽제국 내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위상이라는 문제에 부딪혀서 그는 변변한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특유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관철시키어, 어떠한 형식의 종교도 임페리움의 업무를 주재하도록 그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세 그리스도교 교회 간의 차이들을 뭉개버렸고, 그로써 저 교회들의 신도들 사이의 뿌리깊은 문화적 차이들을 뒤섞어 버렸다. 철학적 · 역사적으로 볼 때, 제국이 영성적인 기반을 지녀야 한다는 코제브의 발상은 티리아의 무신론적 모험보다 뚜렷이 우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틴제국의 거주민들의 귀족적 · 예술적인 특질에 관한 코제브의 인식은, 저 자신의 유럽제국을 관리하는 흔히 기술관료적인 엘리트들에 관한 티리아의 몰두에서 안타깝게 탈락되어 있는 것이다.

 

   세속주의를 무신론으로 조급하게 환원시킨다거나, 유대인의 정치적 종족주의를 얕잡아본 것은, 분명히 티리아 체계의 결함들이다. 저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에 버금가는, 그리고 문명력으로서는 몇 길은 더 위인 하나된 유럽에 관한 그의 비전은, 라틴 임페리움의 에센스에 대한 코제브의 환기와 더불어서, 작금의 지정학적 현실을 보다 계몽된 유럽적인 지향점으로 재편하려는 이들에게 간단없는 영감으로 연동蠕動하고 있는 것이다.

  1. [역주] 유튜브를 위한 강연문. 강연의 원문을 보내주시고 번역문의 게재를 허가해주신 알렉산더 제이콥Alexander Jacob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2. [역주] imperium을 “제국” 등으로 옮기지 않고 “임페리움”이라고 음차한 이유에 대해서 구태여 군말을 보탠다. 두 가지다. 하나는 imperium이 요키의 주저의 제목이고 저자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그리고 dominion을 “도미니언”이라고 표기한 것도 마찬가지인데—저자가 empire이 아닌 imperium으로 썼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전자는 imperium이라는 고대 로마의 어휘에서 파생된 여러 단어 중 하나이지만 (그래서 코젤렉이 주도한 개념사사전의 “제국주의” 항목은 고대 로마의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디터 그로,외르크 피쉬,루돌프 발터 (2010),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제국주의』, 황승환 옮김, 푸른역사 참조) 라틴어로 imperium이라고 할 때에는 고대 로마에서나 17세기에나 명령권이나 지배권의 뜻을 지니게 된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윤리학』 3부에서의 imperium은 “제국”이 아니라 마땅히 “국가”라고 옮겨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imperium은 오늘날의 어휘로는 “제국” 보다 오히려 “주권”나 “지배”에 더 가깝고, 오랜 시간 “dominion”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다.) 물론, 이 글에서 도합 다섯 번 사용된 imperium은 모두 empire나 “제국”으로 치환해 읽어도 큰 무리가 없으나, 모두 “주권”이나 “지배”의 뜻이 보다 부각된 사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들을 나는 “임페리움”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제국”의 이미지에 일종의 중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본문으로]
  3. [역주] nation을 “민족Volk”이나 “국민Nation”나 “국가” 중 하나로 통일해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맥에 맞게 “민족국가”나 “(국민)국가”나, “nationalism”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 등으로 옮겼다.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공동체들』, 박성환 옮김, 나남출판, 2009의 「권력위세와 국민감정」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4. [역주] 앵글로-아메리칸 제국 [본문으로]
  5. 내가 영역한 Jean Thiriart, Europe: An Empire of 400 Million, Arktos Media, 2021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6. Jean Thiriart, The Great Nation: Unitarian Europe from Brest to Bucharest, translated by Alexander Jacob, Melbourne: Manticore Press, 2018. [본문으로]
  7. [역주] 단일 아랍사회주의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아랍 정당. [본문으로]
  8. La Nation Européenne, n. 29, November 1968. [본문으로]
  9. 첫째는 1992년 6월 Nationalisme et République에 수록되었고, 둘째는 같은 잡지의 1992년 9월 호에 수록되었으며, 세번째는Conscience Européene의 1987년 7월 호에 실려 있다. 이 논문들의 영역은 나의The Geopolitical Unification of Europe, Russia and Central Asia: Creating a Unitary Transcontinental Multinational State, Edwin Mellen Press, 2019과 Istanbul, the Geopolitical Capital of the United States of Europe, Russia and Asia, Edwin Mellen Press, 2019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10. 인도제국에 관한 티리아의 비전도 이와 유사하다. 그것은 파키스탄, 인도, 스리랑카를 포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체로 현재의 힌두교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되, 북서쪽의 파키스탄과 북동쪽의 방글라데시를 위시한 소수의 무슬림 국가들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11. Jean Thiriat, “Europe: the Political Nation-state.”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오이겐 뒤링 (1833-1921) 역시 『유대인 문제』라는 유대인에 관한 중요한 저작에서, 모든 공직에서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해결책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뒤링의 철학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주의적, 혹은 “공익사회적/공동사회적socialitarian” 정치는 티리아의 “공동체주의적” 독트린들과 많은 유사점들을 가진다. Eugen Dühring, The Jewish Question as a Racial, Moral and Cultural Question, with a World-historical Answer, tr. A. Jacob, London: Ostara Publications, 2017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12. [역주] 유대 민족과 인종은 19세기 유럽 내셔널리즘 속에서 발명된 것이며, 유대인이란 유대교도일 뿐 “민족”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견해에 관해서는 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김승완 옮김, 사월의 책, 2022 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13. 영역.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