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성의 부흥을 위하여

서정주

 

   여기 이 제목에서 내가 나타내고자 한 뜻을 먼저 말씀하자면, 그건 무슨 초인간적인 의미나 느낌을 이 ‘신성성’이라는 말에서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그것이 언제나 당연히 구유해야 할—이것 없이는 인간의 존엄이나 바른 수준마저도 유지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다.

 

   영어로 ‘생크터티sanctity’라는 이 한 마디 서양말이 갖는 의미와 가장 큰 감동은 물론 지금으로부터 천구백수십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서양 사람들의 세계에 두루 퍼지기 비롯한 것으로, 그것이 문예 부흥기까지에 이르는 천 몇백년 동안을 헬레니즘이나 고대 로마풍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정화해 낸 큰 공적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오랫동안 서양 세계에서는 신성성이 그들의 천지에서 가장 큰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신성성이라는 것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성직자의 연설 속에서나 가끔 인용될 분, 휴머니티—인간성이라는 말의 위력의 그늘에 숨어 숨도 제대로는 못 쉬는 딱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주창된 이래 인간성의 자유해방은 나날이 그 도수를 더해 와서 오륙백 년 지나는 동안에 인제는 한 민족의 백분의 일의 AIDS 오염의 자유시대까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중세의 신성성 대신에 우리가 개발해 온 휴머니즘의 이 인간성이라는 괴물도 인제는 재평가의 조상俎上에 올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긴데, 우리들 시인이나 작가들도 르네상스 이래 일삼아 온 인간성의 저차원에로의 에누리—특히 19세기의 자연과학주의 발흥 이래 더욱더 심해져 온 그 에누리 속의 인기주의를 현명하게 지양하고, 인간다운 인간성의 재정립을 위한 좀 더 고차원의 모랄의 추구부터 마음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령 순결한 처녀의 건전한 아름다움 같은 건 누가 뭐라 하건 지켜 줘야 할 것 아닌가? 성처녀성이라는 게 결혼 전까지 꽃다히 유지되게 한다 해서 민족 사회나 인류 사회에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가 될 것도 창피할 것도 없지 않은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천연성 같은 것도 유치하다고 하여 접어 두어 버리기만 할 것인가?

 

   혼란한 사회 상황은 열심히 다루어 표현하면서도, 혼란에 동요되지 않는 맑게 핀 꽃처럼 살려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지탄해야 하는가?

 

   인간성의 차원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모든 신성성, 모든 순결성, 모든 존엄성에 대한 긍정적 재수용은 오늘의 작가 시인들에게는 오늘이 오늘인 만치 더 한층 절실히 요청되는 걸로 내게는 생각된다. 경제나 정치, 각종 혁명 이전의 문제로서 간절히, 간절히 요청된다고 생각된다.

 

(『문학정신』 19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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