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계급의 비교

레몽 아롱 / 이동렬 번역[각주:1]

 

교정자의 앞글

   현대 사회는 계급적이고 위계적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적은 수의 개인들만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아우성 쳤던 것은 학문은 엄격한 사실 위에만 바탕해야 한다고 보았던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와 같은 판연한 사회과학자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인민에 의한 통치는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하고, 아이러니를 섞지 않고 “국민” “인민”을 떠벌리는 학자는 얼치기,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대의제 운운은 다독거리는 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 대표자들은 금권주의를 형성할 뿐이다.

 

   자유주의적이거나 인민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란 과두제oligarchy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추구적인 태도에는 엘리티시즘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붙었다. 파시즘의 황야를 살았던 아롱은 이 과두제의 사실에 입각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언파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수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제임스 번햄을 따라서 저 현대 사회학의 거두들을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희망(규범)이나 환상(이념)과 같은 콩깍지가 아니라 까맣게 절망스러운 사실에 바탕해야 한다는 지론은 국제정치학에서는 현실주의realism라고 불린다.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권모술수의 대명사이다. 정치는 도덕에 절대적으로 대립되어 있으며 대중은 뇌동하고 양육받기를 주저없이 원한다고 이 핏발 선 눈의 인본주의자는 갈파하였다. 공화국은 온화하고 나약한 자들의 펑퍼짐한 천국이 되기 십상인데, 로마 공화국에서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귀족과 평민들의 발광적 투쟁과 충돌이야말로 자유를 확보하고 맹렬하고 심오한 창조정신을 고양하는 첩경이 되었다고 그는 『로마사논고』에서 칭송해 마지 않았다.

 

   아롱은 이 피렌체인에게 촌철의 진실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체제regime는 권력을 향한 투쟁에 의해서 각인되는 것이었고, 지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늘 소수일 것이었다. 그에게, 체제란 투쟁과 분규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가차없이 산문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전체주의는 투쟁을 위협으로 간주해서 주류 이데올로기와 동떨어진 모든 견해를 억압하였고, 자유민주주의는 투쟁을 인간의 근원적 조건으로 간주하여서 그 평화적인 표현을 제도화하는데 힘쓰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그것은 부패의 문제, 과두제적인 권력의 집중의 문제, 정당들의 데마고기와 정치인들의 무능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력이 돌아간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지배 엘리트가 엄존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제 사이의 간극은 아롱으로 하여금 냉소주의와 사회학을 넘어서는 판단과 정치철학과 정치적 사회학으로, 일당독재와 “통합된 엘리트”에 대립하는 입헌주의와 “분열된 엘리트”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분쟁적 다원주의야말로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도사린 파시즘에의 전율을 계속 흡수해줄 것이었다.      

 

   헛말은 쓰레기처럼 넘쳐나고, 세상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해져 간다. 터무니없이 지속된 저금리 시대와 지나친 유동성은 황홀경 같은 환각들에 불을 붙였다. 소비자대상 기술들의 난무는 볼썽사나운 스타트업 대표들 몇몇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부채질 했다. 그 한편으로, 일론 머스크 같은 자본가들은 “워크woke”한 “관리자”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밑으로 가라앉은 쪼다들의 반항력을 일론 머스크들은 “문화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감쪽같이 횡령해선 관리계급이 점유한 경제구조 못지않은 과두제를 이루었다.

 

   그 횡령의 방법을 규명하는 법은 불가능한 이상을 알(지 못했)던 파레토와 같은 우익의 맹장의 저서에 있다고 아롱의 “마키아벨리적” 글들은 증언하고 있다. (끝)

 

 

본문

   지난번 강의에서 나는 소비에트 유형과 서방 유형의 두 산업사회에서의 지배적 카테고리에 대한 이론을 대강 설명했습니다. 그 이론은 다음 세 가지 주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요 카테고리들은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정치적 · 경제적 조직이 어떠하든 간에, 생산수단의 관리자들, 행정가들, 정치적 지도자들, 대중의 선도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사회는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없이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지배적 카테고리들이 단일 그룹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는가, 아니면 서로 분리되어 어느 정도 공개적인 경쟁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두 가지 이상적 유형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3. 세번째 명제는 분석 가운데 함축되어 있었는데, 나는 오늘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어떤 분리는 찬양되고 또 어떤 것은 저주됩니다. 좌파가 비난하는 지배적 카테고리의 분리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인 관리인들과 공동체들의 대표인 관료들 사이의 분리입니다. 이 분리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며, 그 명칭으로 혐오받는 것의 양상을 형성합니다. [각주:2] 순수한 상태의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동시에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인 사회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 하에서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제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이 이론상 공동체 전체의 대리인으로서 국가 관리와 구별되지 않습니다.[각주:3]

 

   반면에 서방사회에서의 세속적 권력과 정신적 권력의 분리, 또는 지식인 및 대중의 선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분리는 찬양을 받습니다. 이 분리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자유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이 됩니다.[각주:4]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하고 그것을 강제할 권리가 있다면,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감추어지는 영역들은 토론에서 제외됩니다. 사람들은 자본가와 관료 사이의 분리는 비난하고, 정치인과 지식인 사이의 분리는 찬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적 분리가 사람들이 애착을 갖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분리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닙니까?[각주:5]

나는 이 문제를 다시 취급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은 이 강의의 출발점에서 표명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우선 다루고자 합니다.

 

   1. 각 사회를 그 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하여 특징지을 수 있는가?

   2. 여러 산업사회의 상층 계급들에 관한 경험적 비교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가?

   3. 지배계급이란 개념 자체가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라는 반대 명제에 의해 두 지배계급의 대조를 사람들이 어떻게 공식화할 수 있었습니까?[각주:6] 역사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고찰로부터 마르크스의 생각 속에 이론이 탄생했습니다.[각주:7]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생산 관계가 봉건사회의 가운데에서 형성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각주:8] 앙시엥레짐의 내부에서 일정한 시기에 형성된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지배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옛 귀족계급을 추방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생산관계가 옛 틀의 내부에서 이미 성숙했을 때에만 정치적 혁명이 가능합니다. 경제적 성장이 그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는, 생산력의 발전을 구속하는 계급을 제거하는 마지막 행위를 수행하는 일만이 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계급은 경제 자체의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관계가 전에 부르주아지의 귀족 계급aristocratie에 대한 관계처럼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인 차이를 주목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귀족 계급noblesse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특권 소수층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는 비특권자들의 대중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과 앙시엥레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대립을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확인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시사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특권 소수층이 아니라 사회의 거대한 대중을 형성하기 때문에, 혁명을 수행한 다음 다른 소수층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지배하는 소수층을 소멸시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20세기의 역사적 현실에 의해 판단하건대, 소비에트 혁명은 그런 관점에서 이전의 혁명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그룹은 거대한 대중과 혼동되지 않으며, 그 그룹은 인민의 운동 덕분으로 자리잡은 하나의 새로운 과도 정치oligarchie를 형성합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은 부르주아지와 귀족계급의 대립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철학의 차이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존재했던 철학의 차이보다 더 약합니다.[각주:9] 일차적인 접근에서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명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봅시다. 20세기를 가득 채웠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비마르크스주의자들, 소비에트 사회와 서방 사회 사이의 강렬한 논쟁만을 국한해 본다면, 존재의 개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정치적 갈등은 진정시킬 수 없을 만하지만, 사고방식은 그 정도로 상이하지 않습니다. 옛 귀족계급의 기원은 전사들의 계급이었습니다. 군주 정치에 의해 길들여진 후에도 그 계급은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귀족계급은 노동이란 상류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으며 영웅주의와 한가loisirs의 가치관을 신봉했습니다. 활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철학과 권력을 장악한 마르크시스트들의 철학을 대조해 보십시오.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대립이 아니라 목표와 야심의 공통성인 것입니다. 양편을 막론하고 그들은 자연자원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며,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고자 하며, 양자가 다같이 일하지 않는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그룹의 각각은 이 원칙들을 상이한 방식에 따라 적용하는 것입니다. 두 철학이 다 노동과 풍요와 진보를 앙양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두 철학 전체가 사회의 확고부동한 표상을 이루는 앙시엥레짐과는 대립됩니다.[각주:10] 계층 질서는 어느 정도 운명에 의해서 부과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유지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르주아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 질서란 끊임없이 경신되어야 한다고 단언하며, 고위의 기능들은 그것에 가장 합당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기를 바랍니다. 고위의 기능에 가장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정의定義는 사회에 따라 변하는데, 사람의 선택은 덜 변합니다.[각주:11] 부르주아지의 철학과 귀족계급의 철학은 두 개의 상이한 양식genres에 속하는 데 반하여, 여기서는 동일한 양식genre의 두 종류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두 철학 사이의 진정될 수 없는 싸움은 결국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선전propagande의 궤변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싸움은 적은 수의 내깃거리를 포함하고 있을 뿐입니다.[각주:12] 우선 산업 발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사회의 생산성 증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빠르다고 은밀히 변호합니다. 다음으로 어떤 체제가 개인의 복지bien-être에 더 유리하냐 하는 문제입니다.[각주:13] 두 진영이 다같이 암암리에 동일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고, 주민 전체의 생활수준을 높인다는 동일한 목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토론은 합리적 논거에 의존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것이 정의正義에 가장 합치되며, 비경제적 가치, 예를 들어 문화의 가치에 더 유리하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논쟁의 공식적 내깃거리, 즉 소유의 규범statut을 제외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고전적 내깃거리는 사실상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실적으로 보아 그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의 거대한 규모의 집중에 관해 말하자면, 소유의 의미 자체가 변했습니다. 미국 스타일의 대기업이나 소비에트 스타일의 대기업 사이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방법에 따라야 생산이 가장 빨리 증가되는가, 어떤 체제에서 분배가 가장 공정한가, 어떤 사회가 개인의 복지와 지적 자유에 가장 유리한가를 아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두 사회의 상층 계급에 관한 경험적 비교라는 두번째 문제로 넘어갑시다. 어떤 의미에서 서방 사회는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릴 만하고 소련 사회는 그렇게 불릴 수 없는 것입니까?

 

   부르주아지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용어는 우선 귀족 계급이라는 용어와 대조되었고, 지금은 농부와 노동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인 인민peuple이란 용어에 대조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조는 오늘날 아직도 의미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지역, 예를 들어 서부 지역에서는 앙시엥레짐의 잔존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각 서방 사회의 특징의 하나는 경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한 사람들과 옛 귀족계급 사이에 설정된 관계라고 말할 수조차 있습니다.[각주:14]

 

   영국은 귀족계급과 경제의 지도적 계층의 대표자들 사이의 혼합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에 의해 특징지어져 있었는데, 몽테스키외는 벌써 그 사실에 놀란 바 있었습니다. 책의 페이지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 몽테스키외는 때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귀족계급이 전혀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귀족계급은 농업과 공업의 발전에서 행하는 역할의 덕택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각주:15] 반면에 프랑스의 귀족 계급은 얼마간의 시도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경우는 경제적 활동이 상류사회의 인사에게는 부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인 이외의 사람들이 즐겨 귀족계급이라고 부르고, 영국인들 자신은 중산계급middle class이라고 명명하는 혼합된 지배계급을 영국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르주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 계급은 옛 귀족계급의 생활양식으로부터 나온 생활양식의 한 부분을 간직해 왔습니다.

 

   반면에 미국에는 귀족계급의 자취가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귀족계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남부에서 대농장주들이 어느 정도 귀족적인 스타일의 사회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남북전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프러시아의 귀족계급이 본질적으로 공공적인 직무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귀족계급이 1914년의 전쟁 때에도 군대의 상층부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계급은 우리 시대에까지도 국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해왔습니다.

 

   귀족들이 역사적으로 차지해온 위치에 따라 유럽의 국가들을 비교하는 분석도 흥미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폴란드와 헝가리 두 나라는 중부 유럽에 있는 한 귀족계급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맨처음으로 자신의 귀족계급을 상실한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입니다.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서열에 나타나는 많은 차이가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일체의 귀족적 잔재가 강력히 제거되었지만,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는 이 현상이 두 사회의 비교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옛 귀족계급의 생존자들은 위신에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힘과 영향력은 점점 더 상실해 갑니다. 주민은 도시에 집중됩니다. 그런데 귀족계급은 대토지를 소유하는 데 따라서만 현실적으로 지배적인 사회적 위치를 유지합니다. 토지 소유의 덕분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마지막 두 귀족 계급인 헝가리와 프러시아의 귀족계급은 2차 세계대전 후에 뿌리가 뽑히고 파멸되었습니다. 최후의 귀족들은 서유럽의 수도에서 레스토랑의 만찬을 장식하지만, 그들은 산업사회의 전형을 특징짓지는 않습니다.[각주:16]

 

   이제 부르주아지 (존재양식과 생활양식으로서의)와 농부 내지 노동자들의 대립을 고찰해 봅시다. 알랭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며, 재료와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않는 사람이며,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만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별다른 예외 없이 부르주아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모스크바 대학의 계단교실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똑같은 제안을 할 위험이 있음을 나는 덧붙여 두겠습니다. 아마도 그곳 학생들의 과거와 연관하여 보면 예외가 더 많이 있겠지만, 소비에트 사회가 오래될수록 그 예외는 줄어드는 경향을 띨 것입니다. 부르주아가 단순히 지적 또는 반지半知적 기능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소비에트 사회건 자본주의 사회건 간에 모든 산업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들에 의해 관리되며, 부르주아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입니다.[각주:17] 어떤 유명한 작가가 도발과 수치심을 곁들여 <나는 부르주아다>라고 외칠 때, 그가 소비에트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는 동일한 고백을 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규율을 지킨다는 조건하에서라면, 소비에트의 대작가는 서방의 대작가보다 우월한 특권을 누립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사회주의자인 앙리 드 만Henri de Man에게서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꿈꾸는 좋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몇 시간, 일년에 얼마동안, 그들 생애의 몇 년 간 공장에 일하러 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동질적이 될 것이고, 노동자와 관리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대조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한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날까지는, 알랭과 같은 의미로서의 부르주아의 개념, 즉 비육체 노동자는 서방 사회만의 특징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산업사회에서 (그런 의미로서의) 부르주아가 발견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육체적 노동자들의 대단히 방대한 카테고리는 서로 상당히 거리가 먼 다양한 그룹들로 세분됩니다. 그 그룹들은 수입의 차이와 동시에 직업의 성격에 따라 경계가 정해집니다. 대기업의 지배인과 중등학교 교사 사이에는 봉급의 차이와 생활방식의 거리가 대단한 것입니다.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통일된 계급이 아닙니다. 행위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위자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정치학 교수가 장관들을 모르며, 실제로 어떻게 결정이 취해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한 작가가 우리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한 사람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자는 일생을 통해 자기가 단 한 달 또는 단 하루에 만난 만큼도 정치인들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한 논쟁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각주:18] 여기에서 철학자는 하나의 순수성의 증거를 내보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각주:19] 그는 정치에 관한 직접적 지식이 없이 정치를 다루는 위험을 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수입의 불평등은 여러 구별 가운데 하나의 기준에 불과합니다.[각주:20] 부르주아가 봉급생활자냐 독립적 생활자냐에 따른 다른 구별들이 있습니다. 이때 독립성이란 대단한 중요성을 갖습니다.[각주:21] 의사의 직업상태에 관해서 독립생활이냐 봉급생활이냐 하는 전형적인 논쟁으로 신문들은 가득 차 있습니다. 논쟁에서는 놀라운 논거들을 사용합니다. 어떤 의사는 의술이란 하나의 성직이라고 선언하며, 환자와의 직접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진료비를 결정할 자유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논법들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업으로 남고자 하는 직업은 동시에 도덕성의 논거, 경제적 논거, 진료당 수천 프랑을 받는 성직성 등에 의하여 직업의 규준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고찰들이 문제 자체를 일도양단하겠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다른 구별은 직업의 위신prestige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보르도, 르아브르, 스트라스부르 같은 지역적 범위에서의 성층 구조는 활동의 화려함이나 가문의 유래에 따라 높고 낮은 수준에 위치하는 부르주아지의 여러 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방 유형의 부르주아지와 소비에트 유형의 부르주아지를 근본적으로 대립시키는 단 하나의 방법만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앙드레 지그프리드André Siegfried 씨의 정의를 사용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각주:22] 부르주아는 본질적으로 예비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일상생활이 자기의 노동 수입에 의존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덧붙이는 것은 없습니다. 소련 같은 나라에서 국가화된 상층계급이 서방의 상층계급과 동일한 상황을 가질 수는 없다는 우리의 출발점의 생각으로 그 차이는 우리를 다시 이끌어갑니다. 한편에서는 자본의 수입이 받는 봉급에 덧붙여지는데, 소비에트 편에서는 많은 유산을 축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소비에트 유형의 체제에서도, 비육체적 직업에 속하는 사람들의 그룹 내부에 구별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서방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구별과 비견될 만합니다. 일시적으로 볼 때는 대중과 특권자 사이의 거리가 서방에서보다 동방에서 더 큰 것처럼 보입니다.[각주:23] 소비에트의 비숙련 노동자의 생활방식과 기업인의 지배인의 생활방식은 미국에서의 양자의 차이보다 더 현격합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반드시 체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두 사회의 부의 차이에 기인될 수 있습니다. 1세기 전에는 미국 · 영국 · 프랑스에서의 수입의 격차 및 생활방식의 격차가 오늘날보다 더 현저했습니다. 생활방식의 차이는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완화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계는 서방 사회에서보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더 분명합니다. 소련에서 점점 숫자가 늘어나는 중간 간부들 내지 지도자들이 이제는 계급을 나타내는 표지를 단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광산에서는 일꾼들, 노동자들, 십장들, (카테고리에 따라 여러 지위로 된) 기사들의 위계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으며, 각자의 위치가 분명하고 잘 인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아마도 구별이 더 쉽사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별은 재산이 아니라 기능과 연대적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서방의 위계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소비에트의 위계는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한쪽에서는 재산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해주고, 다른 쪽에서는 반대로 지위가 재산을 확보해주는 것으로 그들의 눈에 비치기 때문입니다. 소련에서 국가 기업의 지배인은 높은 봉급을 받지만, 그러나 그는 커다란 책임을 맡고, 필요불가결한 직무를 수행하며, 공동체에 결정적인 봉사를 행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그가 기여하는 바의 반대급부로서 그가 갖는 특권을 여론이 수락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서방 사회와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문제될 때에는, 개인에게 그의 위치를 확보해주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재산이나 또는 그의 부모가 소유했던 재산이라는 인상을 여론이 흔히 갖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공동체에 봉사하기 때문에 부유해지고, 다른 쪽에서는 부유하기 때문에 우월한 지위를 얻는다는 것이 에피날Épinal의 기술입니다. 물론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합니다.

 

   서방 사회에서도 역시 많은 수의 특권자들이 그들이 가치 덕분에 그들의 상황을 얻게 됩니다.[각주:24] 특권자들이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체제는 오래 전에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각 사회에 고유한 선별제도가 갖는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은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의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방법이 소련에서 더 나은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나은지를 나는 여러분에게 말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경쟁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선택은 거의 소규모 기업에서만 적용됩니다. 제너럴 모터스 같은 회사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행정적 내지 관료적 조직의 내부에서 승진이 행해집니다. 이론상으로는 소련에서도 선별이 같은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 승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지, 판단하는 사람들이 공정한지, 지적 정통성이나 이단성의 정도가 개입되는지 등등을 알아보아야 할 일이 남습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이점의 하나는 최상의 사람들을 찾는 일이 서방 사회에서보다 더 넓은 계층에 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사회적 유동성이 더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의 양상을 얘기하는 것을 끝마치기 위하여, 양 진영의 지배계급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존재방식 사이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여러가지 비교를 몇 마디로 지적합시다. 예를 들어 학자들savants의 상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과학자들les scientifiques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에서 더 우월한 상황을 누리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카데미 회원, 전문가, 물리학자는 임금계층의 최상층부에 위치합니다. 재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생산수단의 관리자들 아래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는 위세는 대단합니다. 반면에 성공한 작가의 상황은 이점avantages과 더불어 독특한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의 수입은 때때로 연간 수십만 루블에까지 이르지만, 그는 서방사회에서는 알지 못하는 표현과 창조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한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에 관해서는, 유일한 위계를 갖는다는 것이 소련의 독자성입니다.[각주:25] 그 유일한 위계는 권위, 수입, 위신의 동시적인 계단을 가지고 소기업의 지도자로부터 정부부처의 국장에까지 나아갑니다.[각주:26]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적어도 수입에 관한 한 관계가 상이합니다. 국영 회사들을 통할하는 정부부처의 국장이 그 회사 지배인들보다 수입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관리자들과 행정가들의 유일한 위계 대신에 서방사회는 두 개의 위계를 내포합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수입이 상대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관료들의 위계와, 봉급의 폭이 더 벌어져 있는 사기업 내지 공공기업의 위계가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 두 상위계층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정치 지도자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련 · 프랑스 · 영국 · 미국에서 통치하는 사람들의 인간형과 생활양식에 관한 비교가 가장 교훈적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민주 정당과 의회 정치를 중개로 하여 길을 연 현재의 우리 국회의장[각주:27] 같은 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한 정당의 제일서기나 서방의 사회당과는 거의 비슷한 점이 없는 정당을 관리하는 흐루시초프 같은 사람의 존재양식, 성공방법, 사고방식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각주:28] 아마도 우리는 계략과 웅변에 능한 사람과 난폭함을 수반하기 쉬운 행동인 사이의 마키아벨리적 반대명제를 막연히 상기시킬 대조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생활방식의 비교를 더 밀고 나가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사생활이 공적 생활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고위층 인사의 가족관계는 완전한 비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기자들이 X씨의 부인과 최고회의 간부회 임원인 어떤 다른 사람 사이의 친척관계를 창작해내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특징적 창작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비에트 지배계급의 사회생활은 서방의 관습에 비하여 놀라운 스타일에 속합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차이인가, 아니면 모체인 볼셰비키당의 관습 (심각한 일과 정치는 사적인 사항과 연루될 수 없다는)을 간직한 계급의 혁명적 과거에 기인하는 단순히 과도기적인 차이인가? 어쩌면 양 진영에서 성공하는 인간형의 대조가 결정적인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프랑스의 체제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 다른 무엇보다도 성공을 확보해주는 자질입니다. 그것은 전혀 경멸할 만한 자질은 아니지만, 지적인 우수성이나 의지나 단호함과는 다른 자질입니다. 의회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동류에 대한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의원 상호간의 행동을 예견하는 정말로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회에서 어떤 후보자가 몇 표를 획득할 것인지를 세 표 정도의 오차로 계산해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직감 · 계략 · 타협의 기술을 증명해 보여주는 전혀 경멸할 점이 아닌 능력입니다.[각주:29] 유일 정당 속에서 성공을 확보해 주는 것은 그와 똑같은 능력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서는 우월한 행정능력, 특히 의지와 강인한 지탱능력, 결정의 감각과 어쩌면 난폭성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체의 일반화는 어렵습니다. 어떠한 선별의 체계도 권력이 최상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보장하지는 못하며, 또 어떤 것도 항상 훌륭한 결과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체제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면밀히 연구하면 성공이나 실패의 불변하는 인자가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론에 합치하지 않는 경우들과, 성공하지 못해야 했을 사람들이 성공한 경우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존재합니다. 정치에서는 독단론을 삼가야만 합니다. 모든 체제는 놀라운 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문제, 즉 마키아벨리적 의미로서의 지배계급의 문제에 관해 몇 마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마르크스적 이론은 생산수단의 관리인들이나 소유자들이 그 자체로서 소수 지배층을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사擬似 이론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상의 명제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단정에 귀착합니다. 서방 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이 현실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신화적 형태로서는, 국회의원과 통치자들을 조종하는 월스트리트나 시티City라는 표상에 귀착됩니다.[각주:30]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사실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그룹이 지배계급을 형성한다고 단언하는 대신에, 객관적인 분석에 의하여, 여러 서방 사회에서 그 그룹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그 그룹은 사실상 어느 정도까지 공동체 전체를 지배하거나 통치하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각주:31]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그들 자신이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기능은 귀족이나 선량들이 맡아 왔습니다.[각주:32] 자본가들이 정치 지도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논증을 요구합니다.

 

   이른바 마키아벨리적 이론은 조잡하고 불충분하지만, 도처에서 그리고 항상 정치 권력이 소수에 의하여 행사된다는 것과 정치 권력도 경제적 힘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적절하게 상기시킵니다. 이 이론은 서방 사회에는 잘 적용되지 않으나 소비에트 사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적용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싫어합니다. 마키아벨리적 이론가들도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권력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들에게는 권력이 일차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적 도식에 가장 잘 들어맞고, 마르크스적 도식에 가장 잘 안 맞는 혁명이 소비에트 혁명입니다. 소비에트 혁명은 전형적으로 소수가 권력을 장악한 경우입니다. 그 소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인민 대중의 대변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표현도 아니었으나, 당으로 조직되어 국가를 장악했습니다. 뒤이어 경제적 · 사회적 혁명이 소수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키아벨리적 이론은 불충분합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우월한 기능을 행사하고, 최대한의 수입과 위신이 수반된 위치를 차지하는 소수가 모든 사회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특징은 지배계급의 통합화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각주:33] 법률적으로 구분되는 계급이나 신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군사적 기능과 토지소유의 결합이라는 과거의 귀족 사회의 전형은 사라졌습니다. 인민 대중이 도시에 살게 될 때에는,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다양화가 불가피하게 생겨납니다. 노동을 조직하는 사람들, 여론을 조종하는 사람들, 행정이나 기술의 지도자들, 정치의 우두머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떠한 군사계급도 힘의 수단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지 못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산업사회에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다양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지배계급이란 개념은 문제를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숨깁니다. 지배적 카테고리들은 어떻게 조직되며, 어느 정도까지 분리되어 있거나 통합되어 있는가, 그들의 경쟁의 스타일은 어떠한가를 각 공동체 별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회계급의 분석은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분석으로 유도되며, 지배적 카테고리들에 대한 연구는 또한 정치 체제의 분석을 불러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도시들의 구조를 연구했을 때, 그는 그룹들의 구분이나 체제들의 다양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담겨있는 사회학과 같은 양식의 사회학에 귀착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산업사회에 공통된 특징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구성과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상이한 양식을 추출해 내고, 마지막으로 정치 체제의 성격과 기능을 파악하고자 애씁니다. 경제적 및 정치적인 궁극적 체제를 향한 필연적 전진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끊임없는 반대 명제의 개념, 산업사회의 성격과 양립되는 경제적 · 정치적인 조직의 다양한 방식의 개념으로 대치합니다. 어떤 유형의 체제는 경제 성장의 어떤 국면에 의하여 조장됩니다. 그러나 <조장된다>는 표현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결코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하여 전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1. 아롱의『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의 제10장에 해당한다. 현대어로 일신했으며, 명백한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대체로 따랐지만, 그 쓰임이 굳어진 것은 관례적인 표현을 따랐다. 의미파악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 원어병기했다. 주석은 이동렬이 아닌 나의 것이다. [본문으로]
  2. 다시 번역하자면, “이 분리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것—그리고 그러한 명칭으로서 혐오되는 것—의 한 양상을 구성한다.” [본문으로]
  3. 이동렬이 “관리”와 “관료”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파악하기 힘들다.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리인들은 이론상 [곧] 공동체 전체의 대표이기도 한 것이어서, 국가 관료들foctionnaires과 구별되지 않습니다.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이동렬은 원문의 이탤릭을 화살표 처리했으나 여기서는 볼드체로 바꾸었다. [본문으로]
  5. 다시 번역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비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분리야말로 우리가 극구 매달리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분리에 필수적인 것은 아닐까요? [본문으로]
  6. 어색한 직역이다.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의 안티테제로부터 어떻게 두 지배계급 간의 대립을 정식화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정도가 자연스러우리라 본다. [본문으로]
  7.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마르크스의 사유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고찰로부터 그 이론은 탄생하였습니다. [본문으로]
  8. 아롱의 원문에 따르면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생산관계...라고 읽히지만 이동렬의 감각도 무리 없다. [본문으로]
  9. 차이가 “약하다faible”는 것은 물론 그 차이가 더 미세하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10. 원문을 직역하면, “동시에 이들[두 철학들]은 공히, 사회의 안정된 표상을 이루는 앙시엥레짐을 거부합니다.” [본문으로]
  11. 번역문이 명확하지 않아서 부연한다. “누가 그것[고위직]에 가장 합당한가에 관한 정의는 사회에 따라서 변하는 데 [비해서], [실제로] 선발된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2.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프로파간다의 견강부회를 제외하고 생각할 경우, 이 싸움에 걸려있는 쟁점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13. “어떤 체제는”을 “어떤 체제가”로 은밀히 바꾸었다. [본문으로]
  14. “경제를 일구고 관리하는 자들과 고대 귀족[계급] 사이에 설정된 관계는 모든 서방사회의 특징 중 하나라고까지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15. 책의 페이지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Selon les pages et l'humeur는 다소 희극적인 직역이다. 문장의 중반부의 몽테스키외는 때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귀족계급이 전혀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는 오역이다. [몽테스키외]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만큼 귀족계급을 파괴시키는 것은 없다고 때때로 말하기도 했고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본문으로]
  16. 이동렬은 “gentilshommes” “noblesse” “aristocratie”를 모두 구분없이 “귀족”으로 옮기고 있다. [본문으로]
  17. “반지半知적”은 “유사지성적semi-intellectuelle”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18.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한 데 대해서 응답한 논쟁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에 가깝다. [본문으로]
  19. 미흡한 번역이다. 나라면 “철학자는 그것을 정결성[순수성]의 증좌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는 없습니다만.” 정도로 번역하겠다. [본문으로]
  20. “수입의 불평등은 여럿 가운데 하나의 구분기준일 뿐이다.”  [본문으로]
  21. 원문의 이태릭을 볼드체로 처리하였다. [본문으로]
  22. “...그것은 앙드레 지그프리드 씨의 정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동렬이 덧붙인 부분은 사족이다. [본문으로]
  23. “일시적으로 볼 때는Provisoirement”는 “우선” “일단” “첫 눈에는” 등의 뜻이다. “동방Est”는 역시 소비에트 연합의 “동구권”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24. 이동렬이 “가치”로 번역한 “mérite”는 요새말로는 “능력”이 낫겠다. [본문으로]
  25. “유일한unique 위계” 뿐 아니라 “독특한 위계” 또는 “고유한 위계”라는 뜻도 지닌다. [본문으로]
  26. 이동렬의 용어법을 존중하는 한에서 다시 번역해 보자면, “생산수단의 관리자들과 관련해서 소련의 독창성은 고유의 위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구멍가게에서부터 부처의 국장에 이르기까지, 권위, 수입, 지위의 동일한 단계를 따르는 것이지요.” [본문으로]
  27. [아롱의 원주]1957년에는 기 몰레Guy Mollet 씨였음. [본문으로]
  28. “... 서방의 사회주의적 정당과는 조금도 비슷한 점이 없기는 하지만, 역시 한 정당의 서기장이기는 한 흐루시초프 씨의...” [본문으로]
  29. “그것은 직감과 요령과 타협의 기술이라는 꽤 매력있는 재주를 거듭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30. 여기서 아롱이 말하는 “시티la City”는 영국 금융계의 환유법이다. [본문으로]
  31. 이 문장의 전반부의 “지배계급”에는 이태릭으로 표기된 정관사가 부착되어 있음으로, “그러나 그 그룹이 지배계급 그 자체라고 확언하는 대신에...” 정도의 뜻이 된다. [본문으로]
  32. “선량”은 오탈자인 듯하다. “선출자élu” 또는 “피선자”가 합당한 번역이다. [본문으로]
  33. 이동렬의 번역문에는 원문의 이태릭이 빠져 있다. 이하 볼드체를 가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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