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내가 고향에 갔을 때 이미 그 성은 없어진 뒤였다. 옛날 성이 있었던 자리는 반반히 닦여진 채 깨끗한 상가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두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는 듯했다. 어깨뿐 아니라 머리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나는 그 새로 난 상가를 덧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도 없는 울분과 허망과 설움 같은 것이 뒤엉켜서 머릿속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옛날의 서문 거리까지 와 있었다. 서문 거리의 외딴 오두막, 옛날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 쓸쓸한 오두막도 물론 없어졌고, 그 자리엔 새로 지은 양기와집 한 채가 <경주 양조장 서부출장소>라는 함석 간판을 이마에 붙이고 서 있었다.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나는 오던 거리를 향해 되돌아섰다. 서문 거리의 오두막 생각은 다시 성 가에 붙어 있었던 옛날의 다른 오두막을 내 머릿속에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일대는 다 상가로 변했어, 하지만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나 살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서문 거리에서 남쪽으로 한 마장쯤 나가면 성 안쪽으로 오두막 두 채가 성 가에 붙어 있었다. 보통 오두막 두 채로 불리긴 했지만, 앞에 앉은 좀 큰 편인 오두막은 방 한 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조그만 부엌과 헛간이 붙은 찌그러져 가는 낡은 기와집이었고, 거기서 다시 여남은 발 뒤에 엎드린 작은 오두막도 방 한 칸에 부엌이 따로 붙어 있었다. 앞의 큰 오두막에는 석씨 성의 홀아비가 살고 있었고, 뒤의 것은 무당 연달래가 쓰고 있었다.
내가 이 오두막들이 옛날 있었던 자리를 찾아보느라고 동쪽 상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 어떤 늙수그레한 사내 한 사람이 그쪽 이층 기원에서 층계를 내려와 인도 위에 나서고 있었다. 사내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듯했다. 나도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내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이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는 나를 향해 포도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내 곁을 다가오자 손을 내밀며,
“창봉이 앙이가?”
했다.
나도 물론 미소로써 손을 마주 잡았다. 서예가 김수권이었다. 수권은 나와 같이 교회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소년 시절을 남달리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같은 반이었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라고 했었다.
“거기서 뭐하노?”
수권은 또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기원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잖나?”
“오냐 잘했다. 내가 기원에 있는 걸 서울서부터 보고 있었제?”
그는 이렇게 받으며 나를 건너편 다방으로 끌었다.
우리는 커피를 시켜놓고 간단한 인사말들을 나눈 뒤, 서로가 상대를 조금도 늙지 않았다는 둥, 늙은 것 같지도 않다는 둥 격려를 아끼지 않다가, 수권이 다시,
“자네 일제 말 때 다녀가고 이제 첨이제?”
하고 물었다.
“그쯤 되네.”
“예끼 사람, 그럼 이십 년도 넘잖나?”
“그러니 나도 할 말은 없다마는, 여기 본디 성이 있었는데, 그 성 없앤 거 유감 천만일세.”
“잘한다, 그런 소리나 했다가?”
“왜?”
“여기가 바로 성터 아이가? 그런데 성을 와 없앴노 카먼 여기 상가 사람들이 좋닥 하겠나? 그뿐 아니라 그 바람에 경주가 비약적으로 개발이 됐다고 좋아 죽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 줄 아노?”
“그렇지만 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개발할 수도 있었잖아?”
“문화인 같은 소리 하네. 그런 생각하는 사람, 자네하고 나하고 또 몇 사람 더 있을 끼다.”
“그렇지만 나는 분해 죽겠어.”
“와,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고향이 없어진 거 같잖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고 그 성 가에 붙어 있던 오두막은 어떻게 됐나?”
“홀애비 영감하고 무당네 집 말이제?”
수권이 이렇게 되묻고 나서, 내가 입을 열 사이도 주지 않고 다시,
“그 오두막 얘기 같으머 내가 잘 알고 있네. 단지 추억이 아쉽닥 하는 거라면 별도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수권의 말에 나는 좀 놀랐다. 그 오두막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냥 관심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되던 사람도 나밖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믿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기심과 기대에 찬 눈으로 수권을 잠깐 바라보다가,
“그래, 얘기해 주게.”
했다.
우리는 다방을 나와 아까 내가 보고 온 서문 거리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문 거리에서 돌다리로 개천을 건너서, 이내 북쪽으로(개천을 끼고) 돌면 수문이 있고, 그 일대엔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이라, 두 사람이 얘기하며 거닐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성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성이라기보다 길고 큰 돌 무더기에 가까웠다. 돌 무더기의 높이는 한 길 반이나 되었을까. 거기다 개천 바닥이 또한 한 길 남짓 되어서, 개천 바깥쪽에서 바닥을 가늠하고 쳐다보는 높이는 두 길 반에서 세 길가량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돌 무더기로 성을 복구시킨다면 몇 길이나 된단 말이냐. 적어도 네 길이나 그 이상의 높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렇게까지 높았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동북쪽에 허물어지지 않고 옛날대로 남아 있을 부분으로 보아도 두 길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돌 무더기는 본디 그 자리에 성을 쌓았던 돌만이 아니고, 다른 데서 더 많이 옮겨 왔다는 얘기가 된다.
본디 경주성은 경주읍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그러므로 남문이 있었던 남문 거리라는 곳이 당시의 경주읍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이 남문 거리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엔 개천만이 남아 있고, 성도, 성을 쌓았던 돌 무더기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동남 귀퉁이에서 동북 귀퉁이까지도 대개 이와 비슷했다. 성이나 성을 쌓았던 돌 무더기를 찾아볼 길이 없었다. 개천도 중간쯤에서 북쪽으로는 절반가량 메워져 있어서, 남쪽이나 서쪽의 그것에 견주어 넓이나 깊이가 다 형편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똑똑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막연한 추측으로는 남쪽 성의 돌 무더기는 서쪽 성(돌 무더기)으로 옮겨지고, 동쪽 성의 돌 무더기는 동북 성 귀퉁이께와 북천北川 쪽으로 옮겨졌거니들 하고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서쪽 성의 돌 무더기는 그렇게 높고 컸던 것이다. 성이 그런 만큼 개천 바닥도 옛날대로 그렇게 깊고 넓은 편이었다.
이러한 서쪽 성 밖에 우리 집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동네를 가리켜 성 밖 동네라 하였다. 사실 성 밖의 동네는 서쪽뿐 아니라 동 · 남 · 북에 다 있었지만, 다른 데는 다 본디 성이 있었던 자리뿐이요, 서쪽에와 같이 그렇게 크고 길고 완강한 돌 무더기가 쌓여진 데는 없었기 때문에, 같은 읍내이면서도 유독 우리 동네만을 두고 성 밖이니 성서城西니 하고 불렀던 것이다.
이 성 밖 동네에서 성안으로 다니는 길은 남쪽에서 개천을 끼고 남문 거리 쪽으로 내왕하는 길과 서문 거리를 통하는 길과 둘이 있었지만, 그 중간쯤에 성을 넘어 다니는 손바닥 넓이의 지름길이 있었다. 보통 성을 넘어 다닌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넘어 다닐 만큼은 돌 무더기가 치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성 터진 데>라고 불렀다. 그래 이 성 터진 데를 넘어오면 개천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재 넘고 물 건너고 하는 꼴은 다 갖추어진 <성 터진 데>의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름길을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에겐 그랬다. 그 까닭은 첫째 길이 험하다는 것이요, 둘째 오두막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째의 길이 험하다는 말에는 까닭이 있었다. 성 터진 데란 것이 돌 무더기가 대강 치워졌다는 뜻이지만, 그 치워진 돌 무더기가 양쪽으로 더 높이 쌓여진 꼴인 데다 그 위에 잡초가 덮여 있었기 때문에 언제 독사나 지네 같은 것이 기어 나올지 모르도록 되어 있었고(그 돌 무더기에 뱀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좁은 길바닥이란 것이 거의 전부가 돌부리였고 그 위에 경사가 좀 급했기 때문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었고, 또 개천의 징검다리라는 것이 그렇게 반반하게 다듬어진 돌들이 아닌 데다 옆댕이엔 이끼가 파랗게 끼어서 자칫 돌 끝을 잘못 밟기나 하면 개천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그뿐도 아니었다. 성 터진 데를 넘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쪽이나 개천을 건너서 성 밖 동네로 나오는 쪽이나, 바로 곁에는 인가가 없고 보리밭을 몇 뙈기씩이나 지나서야 동네 끝이 시작되기 때문에 문둥이나 도둑의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통틀어 길이 험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밖에, 거기 있는 오두막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오두막에 문둥이가 사느니 거지가 사느니 했지만 이것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그 길을 피하도록 만들려고 어른들이 조작해 낸 헛소문이었고, 사실은 그냥 외로운 남녀가 따로따로 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여러 차례나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내가 물어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나는 내가 왜 이 길을 즐겨 자주 다니게 되었던가 하는 것부터 먼저 잠깐 일러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까 우리 집이 성 밖 동네였다고 했지만, 성 밖 동네하고도 동북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남문 거리 쪽으로 돌아 나가려면 길이 여간 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쪽으로 조금 더 나가 서문 거리 쪽을 통과하려면 남문 거리 쪽보다 길은 좀 더 멀지만 그 대신 무섭고 쓸쓸하기는 성 터진 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자주 들러야 하는 백모님 댁은 경주 객사 뒤였기 때문에 성 터진 데로 넘어다니는 쪽이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이 밖에 내가 그 길을 즐겨 다닌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 길의 쓸쓸함이 왠지 내 맘을 끌었던 것이다. 성 터진 데뿐 아니라, 성으로 일컬어지는 그 긴 돌 무더기에 나는 왠지 곧장 마음이 끌렸었다. 그래서 나는 백모님 댁엘 다닐 적마다 언제나 이 성 터진 데를 이용하곤 했던 것이다.
성 터진 데서 내가 뱀을 발견한 일도 두서너 번 있었지만, 뱀이 나에게 달려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달려든다 하더라도 뱀이 나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잘 살피기만 하면 된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성 터진 데를 넘을 때마다 돌 무더기 밑에 붙어 있는 두 오두막을 한참씩 바라보는 일도 거의 거르지 않았었다. 성 터진 데서 북쪽으로 여남은 발 떨어져 돌 무더기 곁에 붙어 있는 찌그러져 가는 기와집 오두막과 거기서 북쪽으로 좀 더 떨어져 있는 초가 오두막에서 문둥이나 험상궂은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대개는 빈집인 듯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한 달에 두서너 번씩은 샛노란 얼굴에 노르께한 콧수염이 달린 쉰살쯤 되어 뵈는 남자를 앞 오두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는 일이 결코 없었다. 내가 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두어 번 이쪽을 흘낏흘낏 쳐다보긴 했어도 그 다음엔 고개도 돌리는 일이 없었다.
뒤의 오두막에서 홀어민가 무당인가를 발견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한 달 잡고도 한두 차례가 고작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섯 살 때인가부터 어른들 몰래 이 길을 다녔지만 내가 그 홀어민가를 가까이서 만난 것은 아홉 살 때였다. 하루는 어두워질 무렵 서문 거리로 나오는데(어두울 때는 성 터진 데로 다니지 않았다), 오두막에서 서문 거리 쪽을 향해 밭둑 길로 걸어 나오는 그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서른 살 남짓 되어 뵈는, 꼬챙이같이 마르고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얼굴빛이 파르스름한 여인이었다.
내가 먼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채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 쪽에서도 별덩이 같은 굵은 두 눈으로 나를 한참 쏘아보며 지나갔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성 터진 데를 지날 적마다 그 여인이 사는 뒤의 오두막 쪽에다 더 오래 시선을 쏟곤 하였다.
그런 지 3, 4년이나 지난 뒤였다. 온 들판에 보리가 가득 실려 있는 이른 여름이었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나는 백모님 댁엘 다녀서, 입시 준비에 필요한 참고서 한 권을 사 들고 성 터진 데로 나오려니까, 그쪽(뒤의) 오두막에서 보리밭 사이로 나오는 나와 같은 반의 이영희李永姬를 만나게 되었다.
이영희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너무나 뜻밖의 일에 나는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영희 쪽에서도 물론 그 굵은 두 눈으로 나를 그냥 쏘아보고만 있었다.
“니 여기 웬일이고?”
한참 뒤에야 나는 겨우 이렇게 물었다.
“······.”
영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무섭게 빛나는 두 눈으로 그냥 나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순간 나는 야릇한 충동이 일었다. 그 보리밭 고랑에다 영희를 쓰러뜨리고 싶은, 일찍이 느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욕망이었다. 순간 영희의 입에서 야무지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져 나왔다.
“길 비켜 줘!”
이 소리에 나는 정신을 돌이키며, 무슨 말을 건넨다는 것이,
“너······ 너······.”
했을 뿐이다.
“길 비켜 줘!”
두 번째 명령에 나는 길을 비켜 주었고, 영희는 쏜살같이 내 앞을 지나 성내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뒤부터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영희는 언제나 그 무서운 광채를 가득 담은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을 뿐, 우리는 아무런 말도 서로 건네지 않았다.
그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영희는 나에게 접힌 종이쪽지를 전해 주었다.
창봉아 니는 나를 미워하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니가 날 미워할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워.
나는 어쩌면 니를 좋아하는지도 몰라. 니가 오라고 하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말 것 같다. 그 대신 니가
거기서 나를 봤다는 말 비밀로 해줘. 니가 그 말을 터뜨리면 나는 그날로 죽어 버린다.
영희.
내가 여기까지 대충 이야기했을 때 수권이 불쑥 물었다.
“그래 그 가시나 꼬셨나?”
“에끼 사람, 그때 나는 중학 입시 준비한다고 정신 없을 때야. 그 대신 비밀은 지켜 줬지만.”
“자네 간덩이 가지고야 고작 그렇겠지. 그 뒤 그 가시나 자살했대이.”
“뭐, 자살을?”
“자네 공부 떠난 뒤에 그 가시나 경주 우편국 교환으로 취직해서 한 삼 년 잘 댕겼다. 열여덟 살 땐가 연애를 했지. 남자는 내 형뻘 되는 우리 집안 사람이야. 결혼을 할라고 가정 관계를 알아볼라고 하니, 이 가시나 곧장 고아라고만 하고 밝히지를 않아. 남자는 답답해서 가시나 뒤를 밟았단다. 황남리에 어떤 할머니하고 살더래. 그 할머니한테 매달렸던가 봐. 그 할머니한테서 밝혀졌지. 성 가 오두막에 사는 무당의 딸이란 게. 그리고 그 할머니는 무당의 친어머니더래.”
수권이 여기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니 결혼은 터졌지. 무당 딸하고야 어떻게 하노. 남자한테 채이자 가시나는 쥐약인가 먹고 뻗어 버렸고.”
수권은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나는 개천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경주성을 에워싼 개천 물은 모두 이 서북 귀퉁이로 모여서 수문으로 빠지기 때문에, 이 일대는 물이 깊고 넓을 뿐 아니라 바닥이 수렁져 있는 곳이었다.
“얘기는 끝났는가?”
“지금부터지.”
“뭐라고?”
“그 가시나 주었닥 하니 불쌍하다고 남자가 찾아갔을밖에. 거기서 저 서문 거리 주막 할망구를 만났거든. 얘기는 나중 그 할망구 입에서 나온기라.”
“아, 그렇겠군.”
나도 그때서야 얘기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 무당인가 하는 여인이 서문 거리 주막 아주머니와 가깝게 지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나같이 어린 나이로는 주막에 접근해 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수권은 자기의 집안 형뻘 되는 남자(영희의 애인이었던)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희 어머니가 무당이 된 것은 서른 살 때였다. 스물일곱에 남편을 여의고, 그해 세 살 난 영희와 단둘이 사는데 차츰 외로움이 무서움과 겹쳐져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남편을 여읜 허전함과 설움이거니 했는데 나중은 그것이 무서움증(공포증)이라는 증세로 바뀌어져 버렸다.
어미는 딸이 너무 외로워서 그렇거니 하고, 오릉五陵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와서 함께 살기로 했으나 증세는 가셔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량을 앓고 나니, 그 다음에는 눈만 붙이면 꿈이요, 꿈만 꾸면 귀신을 보던 것이, 나중은 깨어 있는 눈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입에서 절로 푸념 같은 것이 슬슬 흘러나왔다. 무당 귀신이 들린 거라고 했다.
서른 살 나던 해 봄에 유명한 시악 무당에게서 내림굿을 받았다.
시악 무당은 내림굿을 끝낸 뒤, 명도(明圖 · 冥途) 들린 사람처럼 입에서 쉿, 쉿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얄궂다 얄궂아, 니 몸주는 선덕 여왕님이다. 이런 일 누가 알까 봐 겁난대이.”
했다.
그리고 잇따라 쉿 쉿 소리를 내며,
“니 이름은 연달래다. 만자를 모시락 하신다.”
이렇게 덧붙였다. <만자>는 만자曼字라고 나중 밝혀졌다.
그녀는 시악 무당이 일러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채, 그 뒤부터 새무당이 되어 굿도 다니고 점도 치고 했다.
친정 어머니는 창피해 죽겠다고 울상이었지만 그런 짓 해서 신을 풀지 않으면 골이 깨어지는 것 같아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울상보다 시가 사람들의 압력은 더 견딜 수 없었다. 시삼촌 되는 이는 의관 정제하고 와서 방에 좌정한 채, 결판을 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나왔다.
연달래도 이제는 더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죽든지 떠나든지 하겠으니 영희나 맡아 달라고 빌었다.
그날 밤 꿈에 몸주 마님이 나타났다. 내림굿 때 들은 말이 있어 그런지, 훤칠한 키에 흰옷을 입고 머리에 왕관을 쓴 여느 여왕의 위풍이었다.
연달래가 질겁을 하고 일어나 그 앞에 꿇어앉으며, 대왕님, 대왕님, 하고 불렀으나, 몸주 마님의 얼굴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은 채,
“니한테 거울을 주마, 서쪽 성 밑에 가 찾아라.”
하고는 사라졌다.
연달래가 신어머니(시악 무당)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시악 무당은 연달래의 어깨를 만지며 부러운 듯이,
“아이구 야야, 니 큰무당 될따, 선덕 여왕님을 몸주 마님으로 모셨으니 이 하늘 아래 그카마 더한 영광이 어딨겠노. 어서 성 밑에 가 봐라. 거기 가면 오두막이 두 채 있니라. 아무 데나 맘 내키는 대로 들어가면 그게 곧 니 집이다.”
이렇게 일러 주었다.
성 밑에 있는 두 개 오두막에서 뒤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발길이 향해졌다.
오두막 속에는 마흔 살쯤 돼 뵈는, 얼굴이 붉고 몸이 뚱뚱한 아주머니가 혼자 누워 있다가 연달래를 보자 비죽이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연달래는 방에 들어가 앉으며 이내,
“성님, 여기서 나하고 같이 삽시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렇게 말을 붙였다.
아주머니는 또 한 번 비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큰절꾸(아주머니의 별명)는 저녁밥을 먹으며,
“나는 동승(동생)이 무당이락 하는 거 첫눈에 알아봤대이.”
했다.
이에 대해서 연달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여인은 아무것도 서로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그날로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정다운 친구요 형제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 보름 지난 뒤였다.
큰절꾸가 여느 때처럼 비죽이 웃으며,
“동숭아, 니하고 나하고 이별해야 되겠대이.”
했다.
“성님, 와요?”
“저기 서문 거리 오두막 있제? 지금꺼지 내가 술을 담아(빚어)서 그 주막에 대 주고 안 있었는가베. 그런데 그 할매가 오두막을 나한테 맡기고 지 아들한테 들가 뿌랏다 앙이가. 그러니 천승 내 손으로 술을 담아서 팔아야 될 팔자제?”
“사람이 팔자를 못 속인다 안 캅니꺼?”
연달래는 큰절꾸의 팔자란 말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했다.
본디 큰절꾸는 남문 거리 근처에서 주막을 내고 있었는데, 인심이 너무 좋아서 파산을 하고 이 오두막으로 옮겨 왔었다. 그러니 아무리 서문 거리 오두막이라 하지만, 이제 또 주모 팔자는 면할 수 없이 됐다는 뜻이었다.
큰절꾸가 서문 거리로 옮겨 가고 이 오두막은 연달래 단독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연달래가 오두막을 지키고 있을 때는 흔치 않았다. 황남리에 두고 온 어머니와 딸이 보고 싶다고 사흘들이 들러야 했고, 굿이나 푸닥거리를 쉴 때는 서문 거리 주막의 큰절꾸를 보러 다녀야 했다.
연달래가 오두막을 차지한 지 달포쯤 지났을 때였다. 또 꿈에 몸주 마님(선덕 여왕)이 나타나더니,
“거울을 찾아라, 석가한테 가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연달래도 앞의 큰 오두막 홀아비의 성이 석씨라고는 큰절꾸한테서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먼젓번 꿈에 몸주 대왕님이 나타나셨을 때 서쪽 성 밑에 가 거울을 찾으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석 영감을 찾아가란 뜻이었구나 했다.
연달래는 꿈을 깨고 일어난 아침 얼굴을 깨끗이 씻고 새 옷을 갈아 입은 뒤, 먼젓번에 큰절꾸를 찾아갔을 때처럼 거침없이 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나이 쉰 살가량 되어 뵈는 얼굴빛이 노르께한 홀아비는 그때서야 아침 먹은 밥그릇을 들고 방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인 주이소. 지가 치워드리께요.”
연달래는 낯선 홀아비에게 달려들어 거의 빼앗다시피 남자의 손에서 밥그릇을 받아 들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연달래가 부엌에서 나올 때까지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연달래는 부엌에서 나오자 사내의 한쪽 팔을 붙잡으며,
“어르신네요, 방에 들어갑시더.”
했다.
그녀의 푸르스름하게 아리따운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하여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꾸밈없이 호의 같은 것이 넘치고 있는 것을 보자 말없이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바닥엔 낡고 모지라진 삿자리가 깔려 있었고, 네 벽엔 누렇게 뜬 묵은 신문지가 발라져 있었지만, 그 위엔 파리똥이 닥지닥지 앉은 데다, 군데군데 빗물이 새어 내린 자국으로 거멓게 썩어 있었다. 퀴퀴하고 지릿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이것은 먼젓번 큰절꾸네 오두막을 찾았을 때와 여간 대조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달래는 그런 걸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나오는 대로,
“어르신요, 지를 여기 살게 해 주이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뭐, 뭐라꼬요?”
사내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렇게 묻고 나서, 조금 뒤,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르신요, 지가 어르신네를 해롭게 하겠능기요? 고마 딸 삼아 각시 삼아 살게 내부리 두이소.”
“앤 될시더.”
사내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연달래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늘 저녁부터 여기 와 잘 겁니대이.”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저녁때 연달래는 일찌감치 쇠고기 한 근을 사 들고 사내네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사내에겐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상을 보려니까 밥상 다리가 찌그러진 채 쓸 수 없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네 오두막으로 가서 밥상을 가지고 왔다.
저녁상을 보아서 방에다 들여놓으니 사내도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들었다.
저녁을 마친 뒤, 연달래는 자기네 오막으로 가서 침구를 안고 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이녁 집 놔두고 와 이카노?”
나무라는 목소리였다.
“어르신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오막 하나씩 따로 차지하고 살 게 뭔기요?”
연달래는 그녀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며 이렇게 되물었다.
사내는 이 여인과 다투어야 소용이 없다고 체념을 하는 듯, 아랫목에서 벽을 향해 돌아눕고, 연달래는 윗목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밤, 둘은 잠자리에서 어우러졌다.
사내는 훌륭히 남자 구실을 치러 냈다. 연달래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어르신요, 이렇게 넉넉한 남자 어른이 와 자꾸 혼자 살라꼬 했는기요?”
이렇게 물었다.
“글씨, 나도 살다 보니 어찌 되는 긴지 모르겠구마.”
사내의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연달래에겐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석탈해왕의 후손이지만 선대부터 자손이 귀한 데다 자기 역시 아들 하나를 낳고 아내가 죽자 이날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부산서 제과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으며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늘 편지를 보내지만 자기는 답장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들 생각이 안 나는기요?”
“즈거나 잘살먼 됐지 뭐, 석씨는 언제든지 성을 비껴 살먼 안 되는기라, 아들이 부산서 그렇게 성공한 것도 내가 성을 지고 있는 덕인 줄 모르고······.”
“그러면 옛날 옛적부터 이 집에 살았는기요?”
“우리 시조왕은 반월성 안에 있는 궁궐 속에서 살았던 기라. 그 뒤에는 반월성 가에 붙어 살다가 우리 할배(할아버지) 때 이리로 옮겼닥 하오. 이 집도 그때 지은 집이지. 그러니 지금은 성이 돌 무더기가 되고 집은 도깨비굴 같은 외딴 오두막이 됐지만, 내가 여기를 떠나면 조상을 배반하는 기라요.”
“맞심더. 어르신 말이 꼭 맞심더.”
연달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런 지 다시 얼마 지난 어느 날 사내는,
“임자가 무당이락 해서 내가 어디 같이 지낼능아? 누구 보더라도 뭐락 할노.”
했다.
“그러니 내 굿할 때 입는 옷이나 기물들은 모도 저쪽 오두막에 그대로 두고 앤 와 있는기요?”
“그래도 우리 아들이 소문을 듣는닥 하먼!”
“소문날 게 있는기요? 밤에만 이불하고 내 몸하고 와 있는데······ 낮에는 작은 오두막에나 단골집에 가 있고······.”
사내는 그녀가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까 입을 닫아 버렸다.
이듬해 봄에 사내는 괭이로 밭을 일구고 있었다. 오두막 바로 앞에 붙은 꽤 넓은 밭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가장자리께를 묵히고도 혼자 먹을 잡곡과 채소는 충분했다.
그해엔 식구가 둘이라는 생각에서였겠지만, 사내는 가장자리에까지 삽을 넣고 있었다.
성 밑 쪽 밭 귀퉁이를 좀 깊숙이 파고 있을 때였다. 시커멓고 둥그런 놋쟁반 같은 것이 삽 끝에 얹혀 나왔다. 사내는 그것을 밭둑에 집어던지고 밭 귀퉁이까지 깨끗이 파헤쳐 놓고 들어왔다.
“밭이 더 커졌네요.”
연달래의 말에, 사내는,
“여적까지 가장자리에는 앤 뚜졌거든.”
했다.
“엄매, 그래요?”
“그러니까, 귀퉁이 좀 뚜지는 데 땀을 뺐지. 흙이 어찌나 딴딴한지, 전에는 한 번도 뚜져 본 일이 없었던 기라. 그러이까 얄구진 썩은 쇠붙이가 다 나오고······.”
사내의 말에 연달래는 눈이 커다래지며,
“어떤 쇠붙인데요?”
하고 물었다.
“모르지. 꺼멓고 뚱그런 놋쟁반 같은 기라.”
“어르신요, 그거 어쨌는기요?”
“와?”
“글씨 말임더.”
“어쩌긴 어째? 밭둑에 내뿌릿지.”
“어르신요, 그거 고마 저 주이소.”
“썩은 쇠붙이 갖다 뭐할라꼬? 맘대로 하라믄.”
“고맙심대이.”
연달래는 밭 귀퉁이께로 뛰어갔다. 밭둑 위에서 그 둥그런 쉬붙이를 발견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오, 신령님요!”
하며 그 위에 엎으러졌다.
두 손으로 쇠붙이를 집어 올린 연달래는 또 한 번,
“오, 신령님요!”
를 외치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혹시나 누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연달래는 쇠붙이를 두 손으로 가슴에 싸서 안은 채 작은 오두막으로 갔다. 거기서 그것을 대야에 담그고 오랫동안 깨끗이 씻은 뒤 명주 수건에 기름을 묻혀서 닦기 시작했다.
흙이 다 씻기고 꺼먼 때가 벗겨지자, 푸르스름한 녹이 나타나고 녹이 씌워진 사이사이로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부분도 군데군데 보였다. 신어머니(시악 무당)한테서 여러 번 들어 온 옛날의 구리쇠 거울이란 것에 틀림없다고 헤아려졌다.
뒷면에는 가운데 작은 동그라미가 쳐지고, 그 안에 해 · 달 · 산 · 물(一月山川) 따위가 그려졌고 작은 동그라미 밖으로도, 아래위 좌우로 같은 글자 넷이 돋을무늬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종이에 떠서 영희에게 맡겨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 보도록 했다. 영희가 전한 말에 의하면 그 글자는 만曼이라고 하는데, 멀 만 또는 아름다울 만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연달래는 하도 신기해서 다시 한 번, 그러면 그 글자가 옛날 여왕님의 이름 글자로 된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도록 했는데, 선생님이 며칠 동안 역사책을 조사하고 나서 가르쳐 주더라면서, 그 글자가 여왕 이름에 쓰여진 일이 세 번 있는데 처음은 선덕 여왕의 이름에 덕만德曼이란 만자가 그 자요, 두 번째는 진덕 여왕의 승만勝曼이란 만자가 또한 그 자요, 세 번째는 진성 여왕의 그냥 만曼이라는 이름의 만자가 또한 그 글자라 하더라고, 영희는 선생님이 적어 주신 쪽지까지 들고 와서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똑똑히 일러 주었다.
그렇다면 내림굿 때 신어머니가 선덕 여왕님이 너의 몸주 마님이시라고 일러 준 대로, 선덕 여왕께서 자기의 거울을 점지해 주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시악 무당이 특히 선덕 여왕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여왕이라면 선덕 여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러 주었던 것이었고, 연달래는 신어머니가 일러 준 대로 믿을밖에 없었으므로 꿈에 본 여왕 차림의 몸주 마님도 으레 선덕 여왕님이거니 했었던 것이다.
거울을 얻은 뒤부터 연달래의 푸념과 춤엔 신바람이 두드러졌고 굿이나 푸닥거리의 효험도 현저하여 그녀의 이름은 온 고을에 떨쳐졌다.
그때부터 5, 6년간이 무당으로서의 그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신나던 황금기였다.
“영희가 자살을 한 뒤부터는 연달래네 굿이 잘 안 되대이요. 와 그런지 신바람이 앤 난닥 하는 기라요. 딸이 즈거 엄마한테 들린 귀신을 데리고 갔을 리도 없는데 참 얄궂대이요.”
서문 거리 주막집(큰절꾸)이 하던 이야기를 자기 집안 형님한테 들었다면서, 수권은 이렇게 흉내를 내었다.
“그렇지만 워낙 이름이 나 있던 연달래라 그 뒤에도 성(돌 무더기)이 헐릴 때꺼지는 그럭저럭 팔려 댕겼지.”
“오막이야 옮겨 앉음 되잖나?”
“그게 좀 묘했던 기라.”
수권은 그 묘했었다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성(돌 무더기)을 치운다고 그 밑에 붙어 있는 오두막을 뜯어내라는 연락은 석 영감도 연달래도 다 같이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도 자기네 오두막을 치우려 하지는 않았다.
성을 치우기로 한 사흘 전에 다시 직원이 나와서 오늘 밤까지 오두막을 치우지 않으면 부득이 시에서 강제 철거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전했다.
“어르신네요, 어쩔랑기요?”
연달래가 사내에게 물었다.
“임자 갈 데나 정하라꼬.”
“싫심더, 내사 어르신네하고 안 떠날랍니더.”
연달래는 조금 전에 큰절꾸네 서문 거리 주막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한결 정겨운 목소리였다.
“내사 벌써 몇 해 전부터 부산 아들네가 같이 살자꼬 그렇게 성화를 대쌌지만 몬 떠난 거 앙인가베. 나는 죽어도 이 성 밑을 안 떠난다고. 여길 떠나서 아무 데도 가 살고 싶은 데가 없는 걸 어짜노?”
“그렇지만 어짭니꺼? 어디든지 지하고 떠납시더, 지가 끝까지 모실낌더.”
“임자 속이사 내가 모르나? 그렇지만 나는 명색이 석씨 왕손인데 어디 간들 임자하고 내놓고 살 수야 있나. 임자 듣기에 섭섭하닥 하겠지만, 그락 하면 내가 조상을 배반하게 되는 기라. 어짜노? 섭섭하닥 하지 말고 임자 살 생각이나 하라꼬. 아까 그 사람들이 와서 오늘 밤에라도 여기를 헐어 뿌린닥 하니까.”
“몬 합니더. 어르신네 혼자 두고 지는 못 떠납니더.”
“글씨 임자하고 나하고는 다르다고 멧 번이나 말하면 알아듣겠노? 석씨 왕손이락 하먼 임자하고 내놓고 몬 산닥 하이까.”
“석씨가 왕손이면 김씨도 왕손 아잉기요? 내가 어쩌다가 무당이 됐닥 하지만 조상은 나도 왕손인기라요.”
“글씨 조상은 조상이고 무당은 무당 아닌가베. 임자는 어쩌면 남의 속을 그렇게 몰라 주노. 나는 여기다 왜지름(석유) 한 병 들이붓고 불처지르면 그만인데 임자가 꼭 날 따라 같이 가야 될 게 뭐꼬?”
“그러지 마이소. 사람 사는 게 다 뭔기요? 정 들면 살고 몬 살먼 죽는 거 아잉기요? 어르신네는 우리 몸주 대왕님이 선몽(현몽)해서 점지해 주신 대주 어른인데 내가 어르신네를 여기 혼자 두고 어떻게 떠나는기요?”
연달래는 설움과 노여움을 가눌 수 없는 듯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더니 자기의 요를 내려서 깔고는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석 영감은 연달래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그는 움직일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밤중까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닭 울 때나 되어 석 영감은 방에서 나갔다. 그리하여 풀 덤불 속에 감춰 두었던 큰 병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큰절꾸가 달려왔을 때, 큰 오두막이 있었던 자리에는 시꺼멓게 타다 남은 나무토막들과 부서진 숱한 기와 조각들과 그을린 흙더미와 재와 흩어진 그릇 조각들이 범벅으로 뒤섞인 속에 타다만 남녀의 시체가 반쯤 묻힌 채 드러나 있었다.
허물어지다 남은 벽 귀퉁이와 흙과 재가 뒤범벅이 된 사이사이로 여기저기서 아직도 연기가 퍼렇게 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큰절꾸는 두 손으로 땅을 두드리며,
“동숭아, 동숭아, 내 동숭아, 불쌍하고 불쌍한 내 동숭아.”
어느 때까지나 목을 놓고 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체를 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큰절꾸는 작은 오두막으로 가서 연달래가 쓰던 무당 옷과 기물들과 거울을 보자기에 싸서 서문 거리 주막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무당 물건을 집 안에 두면 반드시 귀신을 보게 된다는 술꾼들의 말이요, 그녀 자신도 그렇게 여겨졌으므로, 하는 수 없이 주막 곁의 돌다리 위에다 내놓고 불을 질렀다.
재 속에 그냥 남은 꺼멓고 둥그런 쇠붙이는 수렁진 개천물 위에 집어던져 버렸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수권은 개천을 가리키며,
“이쪽은 모두 수렁이 져서.”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가리킨 수렁이 진 개천물을 어느 때까지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2
- 제목의 “동경銅鏡”은 구리로 만든 거울을 의미한다. 이 단편은 계간문예에서 출간한 김동리 문학전집 14권에 실려 있다. 그 편집원칙을 따랐다. [본문으로]
- 1979년에 발표되었고, 1986년에 개정되었다. 큰절꾸의 울음소리에 이끌리어, 김동리는 일흔넷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돌 무더기를 맴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동리는 1995년에 죽었다.
문학은 절대적이었다. “수렁이 진 개천물” 속에서, 근대와 근대를 무화시키는 하염없는 섭력攝力은 구분되지 않았고 오직 먼 것만이 아름다웠다. 허깨비에 미쳐 날뛰는 샤머니즘의 미망 속에서, 연달래와 석 영감은 천년고도의 오두막 둘처럼 행복했다.
나는 보릿자루처럼 주저앉아 날을 샌 석 영감의 모습에 마음이 얹혔다. 절대적인 것들은 그것에 대응될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이념” “동양” “민족” “천지신명” 등 나는 그것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