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F. 버클리 Jr.

보수주의의 경험적 정의

 

. . . 그만 못 이기는 체로, 변호인의 마음으로

 

   제가 청중으로부터 가장 빈번히 받는 두 질문이 있습니다 – 어느 쪽에도 탐탁한 대답을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만. 첫째로, 제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위기감, 망국의 기미를 공유하는 편에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소?」 하고 묻곤 하는데 – 이에 대한 답을 저는 모를뿐더러, 금언을 빙자한 해답을 지어내기에는 제 비위에 영 거슬립디다. 둘째로는 청중이 때로는 호의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던지는 「보수주의는 무엇이오?」라는  질문입니다. 또 어쩌다는 강연자의 대답으로부터 예상할만한 장황한 얼버무림을 예방이라도 하듯, 「간추려 한마디로 말해주십시오」라고 까지 보태곤 합니다. 그럴 적에 저는 이런 답을 꺼내곤 했습니다. 「제가 기독교의 정의를 한마디로 간추려 내릴 수 없을진댄 기독교가 정의 불가능한 것은 아니외다.」 대개는 가지런히 포장된 보수주의의 정의를 희망했다가도 이런 답을 듣고 나면 여간 단념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제가 간결한 뜻풀이를 해주었을진댄, 저들은 칸막이식으로 분할된 머릿속에 점성술, 시체 성애, 외래인 혐오 그리고 속취philistinism 따위의 단어들의 정의 옆에 (혹은 치워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정리해두기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그래도 끈덕지게 조르는 치들에게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리처드 위버 교수가 내린 보수주의의 정의로 엄벌을 줍니다 : 「세계의 현상학이 시나브로 닿아가고 있는 본질들의 어떤 전형」 – 자, 그 어떤 시도 못지않게 장렬하지 않습니까. 물론 요지는 이 시도 자체가 단순 말씨름에 위험하게 인접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제가 보수주의의 의미를 구하는 청중을 실망시키기를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보수주의가 무언지는 모르겠다손 해도,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얼추 알 것도 같습니다. 고백하건대,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보다도 저는 자유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저를 팽이 돌리듯 빙빙 돌리셔도, 저는 방 안의 한 명의 자유주의자가 있는 그곳으로, 심지어 그가 화분 뒤에 꼭꼭 숨어 있을지언정, 방황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저로써는 이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신통한 후각을 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시대의 압력 하에, 목전에 닥친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을 대열에 끼게 해 줄 수밖에 없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고, 보수주의자라서 응당 갖추고 있을 정중함이 저들을 보수주의의 친위병janissaries이 아니라 동료로 여겨 준다는 사실도 저는 잘 알기 때문에, 저 유혹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순 경험적으로 말하건대, 저 카키 바지를 꿰뚫어 보기가, 즉 저만치서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보수주의자인지, 급진주의자인지 아니면 순 수선쟁이인지, 아니면 불장난쟁이인지 확신을 갖고 구별하기가 제법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우리의 오합지중 군대가 놀랍게도 마치 잘 통솔된 부대처럼 한결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흐뭇한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저조차도 제가 참된 보수주의자가 정녕 맞는지 혹 의심해본 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그 명칭의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만, 저는 기질적으로 종자가 원체 다른 까닭에, 기질이 그렇다면 얼마나 결정적인가, 하는 질문 또한 스스로에게 던질 밖에는 없습니다. 혼란의 여지는 이것 외에도 더 있습니다. 예컨대 위태커 챔버스는 보수주의자와 「우익man of the Right」 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직에서 사임하며 그가 저에게 쓰기를, 「당신은 보수주의자이고, 당신만큼 그 명함에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하오. 하지만 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소. 이런 질문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우익」이라 칭할 수 밖에는 없소.」 저는 이 편지에 대해 깊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위태커 챔버스가 사임한 잡지의 편집장이라면 그래야 하듯이, 특히 그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 이르건대 5년 된 우리 잡지의 역사상 도저히 더 이상 편집부의 이념적 나침반 내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선임 위원회에서 사직한 사람은 챔버스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챔버스는 저희 잡지의 지면에 (혹은, 제가 아는 한 그의 삶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어떤 지면에도) 『내셔널 리뷰』의 노선에 어긋나는 글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참, 물론 이것도 다 예삿일입니다. 이렇고 저런 불쾌한 기사나 사설, 서평을 빌미 삼아 사임을 하고, 편지를 써대고, 비난해 재끼고, 어디 당신 무덤에 풀 잘 자라나 두고 보자, 하고 막말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실失은 일체 기탄없는 저널리즘의 결실이고, 인간사의 숱한 손실에 다름 아닙니다. 그 따위 일들은 우리의 이념적 빈약성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주의의 근본입장The Conservative Position을 명료히 표현하는 데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내셔널 리뷰』가 발간되기 전에 우리가 넘치게 받던 의심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내셔널 리뷰』의 노선은 창간호부터 즉각 뚜렷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당신과 당신 잡지의 선전에 도움이 되는 다음에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시겠지」 트집쟁이는 이런 식으로 흠잡으려고 하겠지만, 제 말은 경험적인 근거를 둔 주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에세이에서 제가 곧 제기할 보수주의의 뜻에 관한 주장들도 후험적a posteriori으로, 즉 경험적 사실로부터 이론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논증될 것입니다 – 순전히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으로서 저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반복해서 언급 않을테니 여기서 확실히 하겠습니다 : 이 에세이는 『내셔널 리뷰』의 경험에 대한 것이고, 여타 방법들을 배제하는 절차를 통해 이 경험이 현대 보수주의의 쓸만한 정의를 세우는 데 있을만한 유용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결코 오로지 『내셔널 리뷰』만이 멀쩡히 작동하는 현대 보수주의의 증류기alembic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저로서는 어떤 전문성을 갖고 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고, 이 경험이 서술할 가치가 있을 만큼 흥미로울지 모릅니다.

 

   『내셔널 리뷰』의 주요 필진은, 특정한 이념과 태도에 헌신적인, 창간때와 거의 같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잡지가 창간되자마자 얻은, 그리고 머지않아 확대할 수 있었던 독자층은 본능적으로 우리 잡지의 지도적 원칙들이 이루고 있는 흐뭇한 절충주의를 반색하고 납득해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반면에 비평가들은 처음에는 촌평이랍시고 「이 나라가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보수성향의 잡지인데, 『내셔널 리뷰』를 읽어보니,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여전히 보수성향의 잡지라 해야겠군」 혹은 이 엇비슷한 생트집을 잡다가, 지금에 와서는 일부 억척빼기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단념하고 『내셔널 리뷰』를 간단하게 「보수성향 잡지」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말했듯이 몇몇 고집 센 억지꾼들은 꼭 의례적인 멸칭을 앞에 덧붙입디다 : 「매카시즘 성향의 잡지 『내셔널 리뷰』」 아니면 「극우파 『내셔널 리뷰』」 따위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모름지기 언어라는 것에서 지도원칙이란 그 용법이므로, 피터 비어렉Peter Viereck이나 클린턴 로시터Clinton Rossiter, 월터 리프먼이 미국 보수주의의 참된 설계자들이라 믿고 있는 분들이 유별난 인사 취급받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세상과 의사소통의 단절을 자초하는 우익 신사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벌써 두 세대가 지나도록, 적어도 「오늘날의 자유주의자modern liberal는 인간을, 다른 어떤 구속보다, 혼인계약서로부터 해방liberate시키고자 한다」는 산타야나의 논평 이래로, 자유주의를 숫제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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