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엘리트와 통합된 엘리트

레몽 아롱 / 이동렬 번역[각주:1]

 

교정자의 앞글

   1955년이었다.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유전통을 레몽 아롱이 체계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고, 1938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책을 출간했으며, 40년대 후반에는 이미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197, 80년대의 프랑스에서 혁명적 마르크시즘이 자유주의로 무너져 내리는 “반전체주의적 회전”과 함께 그의 자유주의자로서의 명성은 도무지 확고해졌다. 지금, 아롱은 프랑스 자유주의와 거의 전적으로 동의어이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은 난무하고 학원은 무법지대화되었다. 아롱은 68혁명의 적대자로서 반공주의자 개새끼, 미제 간첩이라고 무턱대고 내려갈겨지거나, “아롱을 따라서 옳느니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겠다”라며 혁명꾼들의 이런저런 배척 여론에 몰리게 되었다. 아롱은 내내 외톨이로 돌았다. 비앙쿠르의 르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르트르에 마음이 낚였고, 스탈린 정권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는 서슴없이 일소에 부쳐졌다. 이후 혁명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솔제니친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며, 젊은 재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을 운위하기 시작해서, 프랑스 사회의 혁명적 좌익사상이 반전체주의적 자유주의를 향해서 전개되어 가던 197, 80년대에서 아롱은 엄연했다. 1981년에 발간된 대담집 『참여하는 방관자』는 아롱의 지적 영광의 정점이었다.

 

   이 번역에서 프랑스어의 “ouest”와 “occident”은 송두리째 “서방”으로 옮기어졌다. 그러하되, 소비에트 연방과 자유주의적 “서방”을 비교 대조하는 이 전후戰後의 강의는 공산당을 트집잡고 결딴내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종용하기 위한 지질한 수사학적 시도는 아니었다. 전체주의라는 민주주의적 모더니티의 기획 안의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뿌리부터 재숙고하려는 진지한 이론적 노고였던 것이다. 아롱이 시금석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반전체주의적인 운동이 어떤 적들과 어떤 자유주의의 개념들을 향해서 겨누어졌으며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재발견을 불러들였고 프랑스 지성계 내에서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의 잡탕의 헤게모니를 탈환해낸 사실에 대해서는 나는 더 부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강의를 포함한 『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이 내 미소한 모국어로 초역된 것은 1980년이다. 그때, 한국은 심란한 민족의 시절이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정치는 학문에 필적했으며 역사와 세계관은 구분되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인터내셔널리즘은 함께 가득하였다. 역사는 단일한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아롱의 피력된 신념은 이념과잉의 80년대 한국에서 전혀 무시되거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코옵트되었다. 의탁할 19세기도, 토크빌도 가지지 못한 이 빈약한 초토에서 이른바 자유주의는 못된 보수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안병직, 이영훈에서 윤소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마르크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개종한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임으로, 이동렬의 번역은 어떤 시차를 간직하고 있다.

 

   이 범조사 판은 80년대 그 희미하고 어수선한 “혁명”의 시대에 야스퍼스, 슈바이처 등과 함께 전집으로 포괄되어서 낙지 같은 중산층들의 “교양”으로서 통독되고 있었지만, 속물이니 교양비판이니 따위의 주지의 명제를 여기서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이제, 이 글 한 편을 음미하고 문득 자유주의적 의욕을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책임 운운의 엘리트주의로 점철된 아롱을 읽으면서, “자유주의”에 관해서 예습된 지식의 허망함을 느낀다면 그저 그것이 고작일 것이다. 이 회의주의의 진입과 그 지속은 “냉전”이라 불리고 있어서, 최근 아롱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단연 자연스럽다. (끝)

 

 

본문

   지난번 강의의 끝 부분에서, 계급의 이론으로부터의 권력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세 개의 길을 나는 여러분에게 열거한 바 있었습니다. 그 세 개의 길은 동시에 우리에게 주요한 문제들을 지적해주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첫번째 길은 계급이 권력을 위해 투쟁한다고 생각하는 계급의 이론가들 (단지 마르크시스트들 뿐만이 아니라)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첫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각 체제는 거기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계급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정의되는 것이 사실인가? 두번째 길은 경험적 사회학의 길입니다. 이것은 각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능을 수행하며, 가장 높은 수입을 얻는 소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 산업사회의 지배계급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세번째 길은 지배계급에 관한 이론의 길입니다. 마키아벨리로부터 파레토에 이르기까지, 얼마간의 사회학자들은 모든 사회에서 주요한 구별은 사회계급들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통치받는 대중과 통치하는 소수 사이의 구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세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이론상 그리고 사실상 사회계급의 개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각주:2]

 

   순서에 따라 처리하기 위해서, 나는 <지배적 카테고리> 또는 명령의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학의 설립자인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상세하게 전개된 바의 세속권력과 정신적 권력 사이의 구별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강제하거나 설복해야 하기 때문에, 오귀스트 콩트의 눈에는 그러한 구별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말한 그런 분리는 결코 전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명령의 어떤 정당화를 동시에 갖지 않는,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자기의 동류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하면서 명령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다른 한편, 필요한 경우에는 설득을 강제로 대치代置하는 것이 주는 편리성을 정신적 권력의 소유자들이 전적으로 포기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이 증명해 줍니다.[각주:3] 진실 또는 선을 말하고, 가치 체계를 정하고 종교를 가르치는 소수와 그리고 힘의 도구를 사용할 능력이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다른 소수 사이에 설정되는 관계에 따라 여러 사회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권력에 종교사가인 뒤메질Dumézil 씨의 생각을 사용해서 세번째 종류의 권력을 덧붙일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뒤메질 씨는 인도 유럽의 사회는 사제 · 전사 · 근로자의 삼원적 구분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최고의 진리를 말하고 교의 또는 종교를 해석하는 사람들, 무기를 들고 전쟁을 행하는 사람들, 사회로 하여금 노동의 덕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포함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통치하는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적용됩니다. 노동이 본질적인 활동으로 간주되는 우리 산업사회에서는, 세 종류의 명령의 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즉 정신적 권력의 소유자들, 군사적 · 정치적 권력의 소유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단적 노동의 지도자들이 차지하는 지위가 있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내 생각에 비추어 민주적 유형의 산업사회를 특징짓는 명제를 즉시 공표하겠습니다. 즉 이 유형의 사회에서는 정신적 · 정치적 · 경제적 권력이 분리되어 있으며, 그 세 종류의 지배를 행사하는 그룹들은 항구적인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정신적 권력을 고찰해 봅시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혁명 후의 사회들은 정신적 통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병리학적이라고 오귀스트 콩트는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결합시킬 수 있는 종교적 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개혁의 최초의 임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의의 주위의 개인들을 결합시키는 일일 것입니다.[각주:4] 오귀스트 콩트의 목적이며 이상이었던 그러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서방 산업사회들은 정신적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초기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최고의 진리, 즉 초월적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종교와 그리고 과학에 의거하는 지식인 내지 교양인 사이의 갈등이나 분리가 분열의 기원이었습니다. 오귀스트 콩트의 눈에는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라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종류의 진리가 합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사제들이 대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자들이 대변하는 두 개의 사고방식이 그에게는 비양립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과학적 진리 위에 종교적 교의를 설정함으로써 통일을 회복시킬 것을 꿈꾸었습니다. 한 세기 후에도 그 두 사고방식 자체는 살아 남아서, 반드시 그 양자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에서 오귀스트 콩트는 잘못 생각했습니다), 서로 자발적으로 합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정신적 권력의 세번째 화신, 즉 <대중의 선도자들meneurs de masses>까지 있습니다. 철저한 이론적 무장doctrine을 갖추고서,[각주:5] 종교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보다 우월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과 동등한 진리를 가르치겠다고 때때로 주장하는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나는 그 <대중의 선도자들>이란 용어로서 지칭하는 것입니다. 양차 대전 사이에는 파시스트나 국가사회주의자 타입의 선동가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각주:6] 오늘날에는 노동 지도자들, 특히 공산당 지도자들에 의해 그 힘이 대변되고 있습니다. 대중의 선도자들 모두가 거의 종교적 주장에 맞먹는 교리doctrine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마르크시즘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과학적 진리 내지 종교적 진리와 동등한 것으로 해석됩니다.[각주:7] 어쩌면 마르크시즘은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습니다. 아무튼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습니다.[각주:8]그들은 종교란 미신이고, 무신론이 진리이며, 사적史的 유물론이 장래에는 전통적인 종교적 교리를 대치代置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동시에 그것의 진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인류가 거치는 단계를 엄밀한 방식으로 결정하는 과학적 진리에 합치시킵니다. 마르크시즘에 의하면, 인류가 자신의 구원을 행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입니다. 계급투쟁을 통하여, 역사적 투쟁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합니다. 세속종교의 일종인 그러한 교리는 전통적 종교와 직접적인 대립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초월을 부인하면서 인류의 운명이 행해지는 것은 내재성 속에서,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서방적occidental 스타일의 산업사회에서는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동국인同國人들의 찬성표를 획득한 민간 정치인들로서 정당의 경쟁에서 활동적인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두 범주인 군대나 경찰 (고전적인 군사적 힘)의 지도자들과 관리들의 협력을 얻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지배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합법성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인은 <공식>[각주:9]에 의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지명된 양식과 합법적 지명의 원칙 사이의 일치에 의해 자기 권력을 정당화해야 합니다. 민주적 사회에서는 선거가 그 원칙입니다. 따라서 민주적 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도자들이 정당의 지도자들입니다. 시민 전체가 아니라 최상의 경우에 다수를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행해집니다.[각주:10]

 

   관리들foctionnaires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각주:11] 왜냐하면 그들은 합리성에 따라 통치하며 집단의 보편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범주 사이의 구분은 현대 민주사회의 깊은 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식>은 선거입니다. 선거는 개인들 사이의, 그리고 그룹들 사이의 경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출된 자는 그를 선택한 사람들, 즉 전체의 일부분을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가피하게 <당파적>입니다. 거기에 관리들과 정치인들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의 소지가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만을 인정하고자 하는 관리들의 눈에는 정치인들이란 집단 일부의 욕망을 해석하는 좌흥을 깨는 자들로 흔히 보이는 것입니다.[각주:12] 완벽하게 합리적일 수 있으나, 특수한 이익이나 선거에 대한 염려에 종속되지 않는 한 권력에 대한 꿈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나의 환상입니다. 관리는 정당성을 갖고 있지 못하며, 명령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는 정치인들로부터 명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정치인들은 또한 통치자로서의 시민들의 위임이란 형식을 필요로 합니다. 위임이 개입하게 되자마자, 공통의 이익의 희생을 부과하는 구분적 이해관계intérêts sectionnels의 가능성이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민주적 산업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은 군대 지도자들로부터 복종을 받아야만 합니다. 서구에서는 쿠테타의 시대가 경과헀음이 자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의회 민주주의의 기능을 위해 그것은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산업사회에 있어서조차도, 군대 권력의 정치개입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회중심제이든 대통령중심제이든 간에 어느 정도 빈번한 쿠테타의 사용에 의해 작용을 받는 체제들이 존재하는 대륙 하나를 우리는 적어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그 방법이 일종의 합법화 내지 습관화되어, 그것이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라기보다 오히려 당파간 경쟁의 거의 관습적인 에피소드가 될 정도입니다.

 

   이제 경제적 권력을 고찰해 봅시다. 시민들은 정치 권력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입니다. 시민들은 민주 정치의 민간 지도자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주체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객체입니다. 산업사회의 시민들은 근로자로서 <집단 작업의 관리자gestionnaires>라고 불리울 사람들의 더 밀접한 권위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관리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범주는 흔히 자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로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입니다. 다른 하나의 범주는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들입니다. 기업의 그런 지도자의 권위에 종속된 노동자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비앙쿠르에 있는 르노 자동차 공장에 가 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기업의 그런 지도자는 어떤 방식으로는 공동체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국가 자체에 의해 임명됩니다. 집단 작업의 그러한 관리 이외에, 근로자들은 두번째 조직에 통합되어 있는데, 역사상 거의 유일한 것인 이 조직의 항구적인 목적은 요구revendication에 있습니다. 산업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기업의 기술관료적 위계에 속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민주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또는 정당에 속해 있는데, 후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의 개선을 위한 요구입니다.

 

   이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산업사회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주요한 카테고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각주:13]

   1. 오귀스트 콩트에 따라 내가 정신적 권력이라고 명명하고자 하는 것을 두 카테고리가 주장하게 되는데, 하나는 사제들 (또는 전통적 종교의 대표자들)의 카테고리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 사상의 해설자인 지식인 내지 과학자들의 카테고리입니다.

   2. 정치적 지도자들관리들 (또는 행정가들)과 군대 내지 경찰의 지도자들 (그들은 흔히 단순한 관리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이라는 두 카테고리와 관련을 맺습니다.

   3. 공동 작업의 관리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일 수도 있고, (번함Burnham이 유명하게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오늘날 <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매니저>는 조직 내지 지휘의 능력을 본질적 성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대중의 선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현존 사회의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표현하고, 그 요구의 방향을 유도하며, 때로는 그와 동시에 정치 권력, 나아가 정신적 권력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교의가 절대적으로 진실이라고 믿는 데 따라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의 서기들과는 달리 정신적 권력을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하나의 예를 원한다면, 영국의 노동당 지도자들은 그런 종류의 주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회는 기꺼이 기도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현대의 대중운동에 의한 전통적 종교의 상징적 수락을 뜻합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회의가 그런 의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프랑스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회의에서 그것을 상상하기는 더욱 더 어려울 것입니다.

 

   민주적 산업사회에서 권력의 분리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정신적 권력의 다원성, 나는 오귀스트 콩트가 생각했듯이 그 다원성이 병리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마도 그 다원성은 현대 사회의 특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통해서,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최고의 진리에 관해 분열되어, 가치 체계를 공통으로 갖지 못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조차도 일치하지 못한 일은 드뭅니다. 인간 생활의 본질적 도식은 정치적 조직화와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된다고 마르크시스트는 생각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개인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개인의 구원과 나아가 인류의 구원이 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는 진보적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까지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근본적 전망인지, 아니면 반대로 원죄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도래를 거쳐 세상의 종말까지에 이르는 인류의 발걸음의 전망이 근본적 전망인지를 확실히 모름으로써 두 해석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2. 권력의 소유자들이 그들의 권력 행사가 일시적임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으로 민간적인 권력.[각주:14] 민주 정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이 선거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 번 선거에서 투표의 운수가 그들에게 불리하면 그들의 기능fonctions을 포기할 것을 미리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의 대표인 민간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힘의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의 복종을 기대합니다.

   3.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비특권자들의 상설조직,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우리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사회 현상입니다.[각주:15] 이 현상은 너무도 역설적이기까지 해서, 모든 독재적 혁명은 그것을 폐지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각주:16] 왜냐하면 그것은 질서에 대한 일종의 항구적인 위험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현상에 익숙해졌고 이 현상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가를 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의 노예들도, 봉건사회의 농노들도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상설 조직을 안출하지는 못했습니다. 비특권자들의 이러한 조직의 존재는 아마도 산업시대 민주사회의 가장 긍정적인 정의定義일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별로 어려움 없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혁명적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사회와 대중의 선도자들의 카테고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사실상 충분한 것입니다. 대중의 선도자들이 권력을 획득하면 그들은 동시에 최고의 진리의 해석자, 정치적 지도자, 공동 작업의 관리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의가 전통적 종교의 위에 있고 과학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중개에 의하여 통치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착취자로서의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배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동시에 그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를 그들이 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 대중의 선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들은 국가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민주정치의 우두머리들의 역할과 다릅니다. 민주정치의 우두머리들은 자신들이 <당파원partisans>이며, 직접적으로는 나라의 일부만을 대표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다른 부분의 대표자들인 다른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그들을 대치代置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혁명가들의 시점에서는 그러한 다원성이란 수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원성이란 그들이 소멸시키고자 하는 사회계급들의 다원성 내지 대립의 가정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각주:17]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그런 단일성을 완수하기 위해 정당의 다원성을 폐지시키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선출된 우두머리와 관리 사이의 구별은 후자의 보편성과 대조되는 전자의 특수성에 근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가 공동체 전체의 대표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그러한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서방에서는 개인 기업은 공동체와 구분됩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 후에는 회사가 그 자율성을 상실했습니다. 회사는 국가의 대표자를 지도자로 갖게 될 것입니다. 조작된 작업 전체가 동시에 국유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각주:18] 사회와 국가, 또는 독일어 용어를 쓰자면 게젤샤프트Gesellschaft와 슈타트Staat 사이에 더 이상 분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모든 독재적 혁명은 단일성을 복구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입니다.[각주:19] 최고의 진리의 단일성, 유일 정당으로 되는 사회계급의 단일성, 사회와 국가의 단일성.

 

   이러한 분석이 정확하다면, 산업사회의 두 유형 사이의 근본적 대립은 한 유형 속에 있는 지배적 카테고리의 분열과 다른 유형 속에 있는 단일화의 시도에 기인합니다. 민주적 사회는 외견상 분열되어 있으며, 소비에트 유형의 산업사회는 이데올로기의 해설자이며 대중의 선도자이며 동시에 관리인이기도 한 정치 지도자들과 더불어 외견상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 대조opposition는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한 이상적 유형들 사이의 대조antithèse입니다.

 

   이 강의를 끝내기 위해서, 한 편의 권력의 분열이나 다른 편의 권력의 통합이 다같이 완전하지 못한만큼, 한 유형은 통합을 향해서 그리고 다른 한 유형은 분열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각주:20]

 

   우선 서방의 사회를 고찰해봅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작업관리인과 관료들 사이의 분리가 현재에는 생산 도구의 국유화가 증가함에 따라서 점점 더 많은 경우에 그 두 직책이 혼동되어 가는 경향을 막지는 못합니다. 프랑스의 전기나 가스, 르노 공장 같은 것이 문제될 때에는, 그 지도자들이 개인적 이해관계의 대변인이 아니라,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특수한 사명을 위해 지명된 관료에 비견됩니다. 미국에서는 회사의 중역들이 공공 행정의 고위 직책을 받는 일이 빈번합니다.[각주:21]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프랑스에서는 많은 고위 관료들, 예를 들어 재무성의 고위 관료들이 관료로서의 정상에 다다른 다음에 사기업체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의 직책을 계속해 갑니다. 행정가와 정치인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한, 이론상en théorie 그 구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실상en fait으로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 그 구분이 완화됩니다. 한편으로 관료는 자기 상관의 선거에 대한 염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권력을 맡도록 선출된 사람은 반대파의 정치인과는 언제나 다릅니다.[각주:22]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는 집단적 이익의 대표자가 되어 항의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변모가 도덕가들에 의해서는 흔히 하나의 배반의 형태로 간주되고, 어떤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하나의 전향으로 간주됩니다.[각주:23] 반대자는 이성과 보편성의 필요를 모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인식함에 따라 진지하게 됩니다.

 

   정치인들의 경쟁에 관해 말하자면, 다수 정당의 체제는 투쟁 (그것이 현실적으로 있다 할지라도)이 어떤 합치를 위장함에 따라서만 기능을 잘 발휘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각주:24] 다수 정당 체제는 유일 정당의 체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공공연한 투쟁conflits publics을 내포합니다. 그렇지만 아무것에도, 게임의 규칙에 대해서조차도 정당의 대표자들이 일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수 정당 제도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피상적일 것입니다. 우리 프랑스인들이 민주 정치의 모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 같은 나라를 고찰해 봅시다. 사고나 또는 나쁜 운수로 인해서 보수당과 노동당이 근본적인 사활의 문제에 대해 일치를 못 보게 될 때는, 체제의 기능이 어려워집니다. 권력의 좋은 분열 상태, 건전한 상태의 다수 정당 체제는 심층적인 일치와 제한된 강경한 대립을 내포하는 것입니다.[각주:25]

 

   마지막 카테고리에 관해 말하자면, 대중의 선도자들의 목표가 덜 야심적일수록 민주 정치 체제는 그만큼 더 잘 기능을 발휘합니다. 또다시 우리 프랑스인들은 앵글로색슨의 체제를 모델로 들어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각국이 자기 이웃나라에서 참고를 택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앵글로색슨 족은 프랑스에서 민주정치의 모델을 찾지는 않습니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 내지 정치 지도자들이 체제의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노동조합 위원들과 노동당의 지도자들의 최고의 진리의 대변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각주:26] 그들은 게임의 규칙에 찬동하며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이데올로기의 다원성이 생사를 건 싸움으로 변모되자마자 민주 사회의 기능은 위태로워집니다. 안정된 민주주의에서는, 비특권자들의 조직이 혁명적은 아니며, 요구가 체제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고, 정신적 권력의 분열이 진정시킬 수 없는 경쟁을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민간 정권이 그 고유한 정당성, 다시 말해 선거의 정당성 속에서 받아들여집니다.[각주:27] 그 순간부터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어떤 만장일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권력을 선택시킨 규칙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에 존재합니다.[각주:28] 모든 주제에 관해 논쟁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가 민주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자체의 조직이 근거해 있는 원칙을 만장일치로 또는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덕분에 권력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분열된 권력들 속에 존재하는 통합성의 부분을 여러분에게 지적하고 난 지금, 균형에 대한 염려 때문에 나는 통합된 사회에서 관찰될 수 있는 분열에 대해서도 여러분에게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소비에트 체제는 그런 종류의 체제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서, 예를 들어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내포하고 있던 것 이상의 단일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 단일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당이 교회보다 우월한 정신적 권력을 자임하고 있으나, 혁명 후 40여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과 동방 정교회 사이의 관계는 투쟁과 박해, 해빙과 화해의 교차되는 언어에 의해 지속되어 왔습니다.[각주:29] 전통적 정신권력은 어쩌면 억제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을 볼 것 같으면, 그들도 역시 강화된 규율과 상대적 자유주의의 교차되는 언어를 알고 있습니다.[각주:30] 이론상 당은 특수과학의 진리보다 우월한 이데올로기를 가져옵니다.[각주:31] 그러나 사실에 있어, 당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신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목적으로 그들의 지성을 사용하는 지식인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 자신이 어디까지 당의 진리가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릅니다. 당의 진리의 폭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언어학, 음악, 또는 예술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이 모든 시민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교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 음악을 작곡하고, 비사실적 소설을 쓰고, 서방의 타락한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막지는 않을 공식적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단일화가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강화되지만, 분열이 전적으로 소멸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치적 진실이 결국에 가서는 종교적 진실을 대치할 수 있다거나, 정치적 진실이 지적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정확하게 명령을 행사할 수 있다고 시사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각주:32]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카테고리들의 통합화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입니다.[각주:33] 생산 수단의 관리인들이나 정부부서의 관료들은 공산당의 당원인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양자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직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에게서나 상이한 사람들에게서나, 서방에서의 분리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불가피하게 다시 나타납니다.[각주:34] 한편으로는 당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자들이 있습니다.[각주:35] 기술자들은 프랑스의 재무관리들과 같은 방식으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당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국회의원이 선거에 대한 염려를 하듯이 이데올로기나 대중의 여론을 염려합니다. 재선출에 맡겨진 정치인의 관심과 하나의 교리에 충실한 지도자의 고려 사이에는 아마도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성 (여기에서는 민주적 정당성, 저기에서는 혁명적 정당성)의 덕분으로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과 그리고 생산성과 기술적 합리성의 법칙에 따라 작업을 조직하고 효율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기업체 내지 정부 부서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구별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생산 수단의 관리자들과 동일한 직업에 속합니다. 그들은 직업을 바꿈이 없이 한 직책에서 다른 직책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서방의 특징인 대중의 선도자와 직업 관리인 사이의 분리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각주:36]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기능에 의해 사고방식이 암시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든 간에, 어느 사회에서든,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관심과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필요성을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권력의 분리와 통합의 개념에 관해 내가 부여한 뉘앙스가 그 반대 명제의 가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정신 속에 들어있는 전형은 순수하지만, 그 전형에 대한 우리의 표상보다 현실은 항상 더 복잡한 법입니다.

  1. 이동렬의 번역으로 1983년 범조사에서 출간된 『산업사회와 사회계층』 현대사상신서 판을 베껴 적은 것이다. 제9장이다. 1980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범조사상신서” 시리즈로 출간되었던 것을 재발간했다. 필사를 원칙으로 하되, 명백한 오탈자의 경우에는 첨삭을 가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을 달아서 전격적으로 수정하였다.

    일반독자는 물론 학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으로서, 1955년에서 1958년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행해진 강의의 강의록이다. 여기 제시된 본문은 서구권 및 소비에트 사회에서의 사회적 투쟁들(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서 이른바 “파워 엘리트”들에 대한 재정식화의 시도, 또 소비에트의 정치경제적 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이 책의 허리 부분에 해당한다.

    아롱의 원문은『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라는 제목으로 1964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1962년 출간된 강의록 『산업사회에 관한 열여덟 개의 강의Dix-huit Leçons sur la société industrielle』의 일종의 후속작으로서, 1965년에 출간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Démocratie et Totalitarisme』와 함께 산업사회에 대한 삼부작으로서『자유를 생각하다, 민주주의를 생각하다Penser la liberté, penser la démocratie』에 나란히 묶여서 재출간되었다. 이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그 문단구분에 따라서 국역본의 문단구분을 수정하였다.

    “원주”의 표기가 없는 모든 주석은 교정자인 나의 것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에는 별도 언급없이 원문을 병기했다. [본문으로]

  2. 단어 몇 개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론상 그리고 사실상, 사회계급classe sociale과 지배계급classe dirigeante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본문으로]
  3. “대치”의 한문을 추가했다. “설득을 강제로 대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강제”는 명사로서 사용되었음으로, “설득을 강제로서 대체하는 것”이라고 쓰는 편이 더 명료할 것이다. [본문으로]
  4. “주위의”는 “autour de”의 번역이다. [본문으로]
  5. “교리로 무장해서”라고 하는 편이 더 일관성이 있겠다. [본문으로]
  6. “국가사회주의자”는 “민족사회주의자”, 곧 나치들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7. 필적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의 뜻이다. [본문으로]
  8. “교회”는 “교의”의 오자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교의보다 높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도의 뜻이다. [본문으로]
  9. [아롱의 원주] 모스카Mosca의 표현임. [본문으로]
  10. 문장이 난삽하다. “통치는, 시민의 전체가 아니라, 최상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시민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11. 요즘의 표현으로는 “관료” 나 “공무원”이 더 적합할 듯하다. [본문으로]
  12. 말이 어렵지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인식하려고 하는 저들[관리들]의 시선으로는, 이들[정치인들]은 집단의 일부의 욕구들에만 귀 기울이는 말썽꾼처럼 흔히 보이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13. 이하 범조사 판에는 빠져 있는 강조표시 (원문의 이태릭)들을 추가하였다. [본문으로]
  14. “일시적임”은 “précaire”의 번역이다. “임시적임”이라고 옮겼을 수도 있겠다. [본문으로]
  15. 군말이지만, 다르게 읽힐 여지가 있어 첨언해두자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우리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사회현상입니다.”의 뜻이다. [본문으로]
  16. “독재적 혁명”은 “권위주의적 혁명révolution autoritaire”이라고 번역했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17. 다시 옮긴다면, “그것[다원성]은 사회계급들간의 다원성이랄까 대립을 전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다원성 또는 대립]이말로 저들[혁명가들]이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18. 여기서부터 이동렬은 “관리” 대신 “관료fonctionnaire”라는 번역어를 쓰고 있다. [본문으로]
  19. 각주16번 참조. [본문으로]
  20. 원문을 의역한다면, “이 강의를 마치기 전에, 한 쪽[민주사회]에서의 권력의 분열이 다른 쪽[소비에트사회]에서의 권력의 통합보다 더 전적일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유형은 분열을 향한 경향을, 다른 유형은 통합을 향한 경향을 지닐 뿐이라는 것을 저는 여러분께 보이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21. 정부 내의 고위 직책을 부여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2. “그 반대의 의미에서dans le sens contraire”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졌지만, 의미 전달에는 지장이 없다. [본문으로]
  23. 뜻을 풀자면, “그[선출직]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집단[전체]의 이익의 대표자가 됨으로, 반대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변모는 도덕주의자들에 의해서 때때로 배신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사색가philosophes들에 의해서는 전향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24. “정치인들의 경쟁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알아두어야 할 점은, 투쟁이 (그것이 얼마나 실질적인지와 무관하게) 어떤 합의accord를 감출 때만 다당제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25. 의역하자면, “권력의 긍정적인 분리, 다당제는 그 합의의 깊이 속에서 제한되고 명랑한 대립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26. “제 언어로 풀면dans mon langage”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져 있다. [본문으로]
  27. “민간 정권”이라는 말은 “군사정권”의 반대말처럼 들린다. 여기서는 “시민적 권력Le pouvoir civil”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본문으로]
  28. “권력을 선택시킨”이란 “권력이 부여되는dévolu”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9. 이동렬이 “언어”라고 옮긴 말의 원어는 “phase”이므로, 이는 그가 “phase”를 “phrase”로 오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문에 따라서 다시 옮기면, “당과 [러시아] 정교 사이의 관계는 투쟁과 박해, 해빙과 화해의 번갈아드는 단계들을 거쳐왔습니다.” [본문으로]
  30. 마찬가지 이유에서 오역이다. “교차되는 언어”가 아니라 “교차되는 단계들” 혹은 “번갈아드는 단계들”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본문으로]
  31. “특수과학”으로 옮긴 “sciences particulières”는 그저 “특정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질 뿐이다. [본문으로]
  32. “진실”이라는 말은 몽롱하고 혼곤하다. “진리vérité”라고 옮기는 편이 좋았을 성싶다. [본문으로]
  33. 이동렬이 “통합화” “단일화”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하는 것은 “unification”이라는 단일한 단어이다. [본문으로]
  34. 알아듣기 쉽게 풀자면,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관리인들과 관료들이] 같은 사람들이든 다른 사람들이든 [간에 관계없이], 서방[세계]에서 이 분열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이곳에서도] 여여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35. “기술자”는 “technicien”의 번역이다. [본문으로]
  36. 트집을 잡자면, “서방의 특징이라고 할, 대중의 선도자와 노동 관리인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는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옮겼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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