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럽적인 종교를 열망한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의 병균으로 우글거린다. 2 그리스도교가 깔아뭉개지 않은, 전前그리스도교적인 인자야말로 우리가 기꺼이 신앙하는 것이다. 그나마의 천진성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축제들은 태양제들이나 춘분, 코퍼스[도미니]와 성요한[축제]의 전야[제] 3—해의 운행을 이것들은 헤아리거니와—리투아니아의 ‘리구아’의 4 외침과 5 라팔로의 6 바다로 몰려가는 부활절 아침의 인파들, 그리고 아도니스 정원이 7 교회로 운반되어지는 목요일에 괜히 버무려져 있을 뿐이다. 8 9
깍지끼워진 손 안에 곱게는 감춘 누에고치를 교회로 운반하는 촌부들[의 모습]이, 우리가 알기로는, 유럽적인 것일 수는 없다 해도, 그것은 식자들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은 대로 [무던히] 야생하기는 한 것이다. 10
컬트는 몇 안되는 [유럽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사원의 사유화와 함께 악惡은 틈입한 모양이다. 사원에서 완성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누린내 나는 벌거숭이들은 그것을 파괴하였다. 모르기는 하거니와, 유치찬란한 동방의 11 작희는 돈이 되는 것이고 광신과 위선의 물이 든 것은 무엇이건 밥을 먹여주는 것이리. [정작으로] 신앙되었던 컬트들, 아프로디테와 헬리오스의 컬트가 작금에는 어떠한 신전도 지니지 못하는 반면에, 기가 막히는 몰상식과 비신앙의 일련의 잔재들이 건재해 있는 것은 정녕 기담奇譚이라고도, 또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2
아아, 오늘부터 석상은 [모조리] 신들의 석상이어야 마땅하리라.
공자나 맹자의 넉넉한 가르침에 비하면 그리스도교는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13
- [역주] 이 토막글은 파운드가 “European Paideuma”를 작성한 달에 The Townsman에 발표되었으며, 여러모로 그 글의 축약판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두 글은 모두 모호한 암시로 들끓고 있으며, 맥락은 예고없이 자주 어긋난다.) 파운드에 따르면, 파이데우마란 한 시대에 주도적인 인자로서, 당대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조건짓고 추동할뿐 아니라 제 다음에 오는 시대에까지 가차없이 뻗쳐있는, 이념의 복합물이다. 파이데우마란 문화의 다른 낱말이다. 이 파이데우마를 장악할 수 있는 자가 전위의 예술가인 것이며, 파운드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시대와 문화의 “건설자”로 되는 것이다. 이렇듯 파운드의 관심은 문명을 버티어주는 뿌리들에 겨냥되었다. 그가 이 글을 썼던 1930년대의 유럽이라는 문명의 “꽃”은, 걸레처럼 썩어서 참혹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 [역주] 1930년대에 느리게 사위어가고 있었던, 유럽의 문화를 재생시키는 방안에 대해서 엘리엇과 파운드는 제가끔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의 도그마 (특히 지옥의 도그마)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엘리엇이 새로운 크리스텐덤에서 현대의 권태를 치유해줄 수 있는 벼락 같은 권능을 통찰한 반면에, 파운드에게서 그 방안은 “유럽적인 종교”의 난폭한 지향으로 드러났다. 엘리엇에게 그리스도교는 전통이 의탁할 수 있는 유일하게 연속적인 기억을 제공해줄 수 있는 반면에, 파운드에게는 기억이 시의 요구에 필수적인 이교의 종교를 재구축하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교에는 시가 요구하는 그 기억이 부지간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에즈라 파운드의 견해는 난해하고, 시기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그는 “유럽적인 종교”의 재생과 부활을 위해서라면 가톨릭 교회를 일종의 수단으로 써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다만, 신법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가정하는 “유대의 병균”과 “구약”의 갖가지 신화와 은유들은 깨끗하게 제거되어야할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파운드의 재평가가 고리대금업usury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로는 Erik Tonning, Modernism and Chirstianity, Palgrave Macmillan, 2014, Ch. 3 참조. [본문으로]
- [역주] 의심의 여지 없이, 파운드의 주적은 구약이다. “European Paideuma”에서 그가 구약이라는 “idiotic text”에 부여된 무오류적, 유대적 권위를 준열하게 비판하는 대목을 참조할 것. 이 글이 쓰여진 1939년에 오면, 파운드의 반유대주의적 수사는 독일 나치의 그것과 구별하기 힘들다. 파운드의 “유럽적인 종교”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정치종교들의 이교주의와 지니는 유사점은 분명 주목할만 한 것이다. [본문으로]
- [역주] 코퍼스 도미니는 파운드의 Three Cantos I에서도 언급된다. 여기 파운드가 계통없이 나열해둔 각종 축제들은, 그 축제들의 중요성에 대한 파운드의 확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럽 문화의 뿌리를 드러내는 동시에 파운드가 보기에는 드물게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인자였던 것이다. A. David Moody, Ezra Pound: Poet, Volume III: The Tragic Years 1939-1972, p.52. [본문으로]
- [역주] ‘Ligo’의 음역. 리구아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하지夏至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 [역주] 라트비아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리구아는 중요한 명절로서, 그들은 머리에 잎사귀로 엮은 화환을 쓰고 “리구오”를 절규하며 밤새 노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역주]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주에 속한 도시로 바다에 인접해 있다. 전전戰前에 쓰여진 파운드의 칸토스는 대부분 이곳에서 작성되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회임한 곳이기도 하며, 엘리엇 또한 이곳에 짧게 방문해 라팔로를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에 빗대놓은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I will arise & go NOW, & go to Rappalloo / where the ink is mostly green and the pencils mostly blue.”) Stephen Romer, “One Eucalyptus Pip”: Rapallo of Mind and Memory, Time Present, Spring 2016 참조. 앞서 언급한 파운드의 “European Paideuma”라는 글에서도 라팔로의 제의에 관한 언급이 있다. [본문으로]
- [역주] 아도니스 정원이란,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매년 여름에 그리스의 여인들이 작은 테라코타 화분이나 젖은 플란넬에 심었던 식물을 지칭한다. 아테네에서는 이 작은 “정원”을 작열하는 태양빛에 쬐여 시들게 한 후,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렸다고 한다. 그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아도니스 정원은 라팔로의 교회에서 부활절 장식으로 흔히 쓰였다. 아도니스는 파운드뿐 아니라 엘리엇에게도 깊은 영향을 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프레이저의 요점은 이집트나 동방의 식물 신들이 (타무즈나 아도니스가 대표적이다) 상당수의 그리스도교 제의들의 기층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 둘뿐 아니라, 스펜서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무수한 시인들이 아도니스를 노래했다. [본문으로]
- [역주] 파운드가 여기 종잡을 수 없이 나열해둔 이 요소들은, 이교주의의 잔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끝이 있는/종말론적인 시간관에 대비해서, 종결의 순간에 세계를 재생하고 신생시키는 순환적 시간관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문으로]
- [편자주] Canto XCI를 참조하라. [역주] 타무즈를 기리는 축제 도중 앞치마 속에 누에고치를 숨기어 드러내놓지 않는 촌부들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것은 파운드가 라팔로에서 목격한, 그곳에 고유한 부활절 관습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 타무즈Tammuz/Tamuz는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Adonis라고 불리게 되고, 타무즈와 이시타르Ishtar와의 관계는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연애담으로 변용되게 된다. 타무즈 (또는 아도니스)의 죽음은 수확기인 여름에 기려진다. 감추어진 누에고치는 땅에 들러붙어 있는 들짐승에서 날개달린 짐승으로의 변신을 상징하거니와, 그것은 타무즈의 재생 혹은 귀환의 예표로도 된다. 타무즈에 관한 언급은 다른 칸토, 예컨대 Canto XLVII에서도 등장한다. 누에고치의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Richard Sawyer의 “‘Coition the Sacrament’: The Odyssean Mysteries in Canto 47”을 참조하라. 파운드는, 그의 편지에서 이 누에고치의 이미지에 관해 의식에서 중국 황후의 역할을 환기시킨다고 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추어 간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 [역주] enclosure의 번역. 종획으로 달리 번역하거나, “인클로저”라는 영어식 표현을 그대로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파운드는 사원의 인클로저를 문제삼고 있지만, 인클로저는 자본의 사유화 기제인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적인 욕망으로서, 파운드가 이 글을 쓴지 80년도 더 지난 우리의 당대에 디지털 플랫폼과 관련해 다시금 문제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본문으로]
- [역주] 여기에서 “동방”은 그리스의 순수와 대비되는 미트라교나 영지주의적 혼합/혼성주의를 지칭한다. 사원들이 몰락하는 시점을 “유치찬란한 동방의 작희는 돈이 되는” 때로 특정한 본문이 그것을 시사하거니와, “Terra Italica”라는 다른 글에서도 파운드는 그리스도교가 미트라교에 의해 퇴락되었음을 설파하면서 “the grace of the well-curb of Terracina”를 미트라교의 희생제의와 대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Peter Crisp, “Pound as Gnostic? Creative Mythology and the Goddess,” Paideuma: Modern and Contemporary Poetry and Poetics , Fall & Winter 1994, Vol. 23, No. 2/3 (Fall & Winter 1994), pp. 173-193 참조. [본문으로]
- [역주] “유대의 병균”은 박멸되어야만 하는 “유럽적인 종교”에,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스코투스 에리게나와 카발칸티뿐 아니라 공자와 맹자까지가 포함될 수 있는지는 물론 썩 논쟁적인 주제일 것이다. 하여간, 부스러져 내리는 서구를 개혁하기 위해 파운드는 공자의 파이데우마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