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in Order』 총서를 간행하며

크리스토퍼 도슨

박갑성 번역[각주:1][각주:2]

 

   유럽 문명은 오늘날, 일찍이 없었던 중대 위국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각주:3] 어떤 사람은 「유럽은 이미 성기盛期를 지난 것이다. 유럽 문명은 퇴폐에의 피치 못할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이제 겨우 근대 과학의 힘을 알기 시작한 것이며 사상 초유의 신사회는 이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낙관론을 품고 있다.[각주:4] 비관이든 낙관이든 간에 옛 질서가 몰락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옛 질서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옛날부터의 신앙도,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의 신뢰도 또한 따라서 약화된 것이다. 이들 신앙은 저 과학 만능시대라고 한 19세기에 있어서까지도 아직 강력히 인심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각주:5]

 

   여기에 발간하려고 하는 총서의 목적은, 이런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고찰하고, 가톨릭의 체제와 새로운 세계와의 사이에는 서로 제휴해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상극하는 위험이 있는가를 검토하는 데 있다.[각주:6] 따라서 어떤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대 생활의 일반적 원리 또는 구체적 문제를 다룰 생각이다. 실제로 현대의 사상적 혼란이라는 것은 문예나 사회 문제나 윤리 도덕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상 분야에 나타나 있는 까닭에 연구를 어떤 한 분야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총서는 이것 저것을 실험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본시 일관한 체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일이다. 또 이것에 의하여 결정적인 해결을 제시하려고 하든가 정석적인 <프로그램>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톨리시즘은 현대 세계의 물질적 해악에 대해서 만능약을 제공할 아무런 정책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또 이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자들과 경쟁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절대로 틀림없다는 확신 위에 살아온 자에 있어서, 현대의 문제가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린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청교도나 다른 종교의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들의 시대에서 이탈하여 자기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그에 적응하는 각자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나, 가톨릭교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가톨릭교는 본시 자연계 및 인간계에 있어서의 모든 선한 것과 참된 것이 각각 그 위치를 얻어서 존재할 하나의 보편적 질서를 이 세계에 행하려고 하는 것이 그 사명인 까닭이다.

 

   현대 세계의 혼란은 영靈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고, 또 영혼의 문제와 일상 생활의 영위와를 아무런 관계없는 2개의 독립된 세계로 하려는 데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가톨리시즘은 이 세계와 신의 세계가 분명히 다른 것이며 각각 독립한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 두 세계가 전연 관계없다는 설에 그대로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의 세계, 영원의 세계는 육의 세계, 유한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므로, 인간 생활 중에서나, 사회와 역사상에 있어서도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결국은 영원한 영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톨릭의 이상은 인생의 모든 내용을 통일하려는 데에 있다. 자연에 의하여 수여된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파괴함으로써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영의 진리와 실재와의 생명적 연관에 도입함으로써 통일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교도가 이에 필요한 노력, 즉 도덕적으로 공감하고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노력을 예비함으로써 능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가톨릭교도가 소극적으로 다만 자기들만이 진실을 파악하고 있으면 그만이라 해서 만족한다 해도 별로 교회의 신성하고 불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나, 이 세상에 있어서의 자기의 사명에 반하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이 이 세계나 사회의 멸망할 일부를 표시하고 있으면서, 이 세계와 이 사회를 버리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마리탱이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매몰된 번데기와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역사 중에서 출생되고 있는 새로운 속세에 섭리하는 신의 의지가, 어떠한 방식으로 현시되어 있는 것이다. 변전하는 여러 모습도 이런 뜻에서 이 지상의 영원한 이익에 유익한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유행 사상에 안일하게 동의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행 사상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신의 원리를 상실케 하고, 극히 <협소한 마음>을 배양하여 <인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역사에 있어서의 신의 일을 의롭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 일은 실로 곤란한 일이기는 하나 과거 수세기를 통하여 어떠한 시대보다도 이것을 성취하는 데 절호의 기회가 지금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옛 방벽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근대 문화의 파괴적, 부정적 경향은 과거의 전통에 있어서의 좋은 것을 무수히 파괴하였으나, 그것은 동시에 또한 많은 인습적 편견과 고정 관념을 일소해주었다. 이 편견과 고정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의 전통은 근대 생활의 진실한 모습에 직접 접촉하지 못하고 고립하여 있었다.

 

   현대인은 종교 문제에 관해서 극히 민감하다. 실제로 일반 영국인은 대체로 교회에 가지 않으며, 신학상의 확신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연하다. 벌써 전세기의 사람들과 같이 종교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세기에는 교회에 간다는 것은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는 표시이며, 종교라는 것이 국민 생활 중에서 뚜렷하고 국한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데에는] 옛 종파적 근성이 편협하며 어리석은 것이라는 인식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종교가 합리적인 인생의 희열에 대해서 지극히 엄격한 제약을 주며,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 착취케 하며, 부자가 되려고 경쟁을 시키고 인생을 염증나는 것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종교에 반항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그것이 실재의 여러 모습과 접촉하며 근대 세계의 사회적, 사상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고, 또한 종교가 인간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요구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가끔 진정한 종교적 이상에서 분리할 수 없는 절대적 초월요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 결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전세기보다 약화했다고는 하나, 오히려 널리 보급된 것도 사실이다. 종교는 설교단과 집회소에서 빠져나와, 신문과 방송국에 나타났다. 영국에 있어서나 미국에 있어서나, 종교라든가 근대라든가를 다룬 문학이 계속적으로 홍수와 같이 나오고 있으며 또 근대 과학의 광명에 비쳐서 그리스도교의 문제를 취급한 문학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문학은 대체로 그리 적극적인 가치가 없다. 과연 그것은 진실에의 요구를 표시하고 있기는 하나, 하등의 적당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런 철학적 원리도 없는 까닭에 공허한 기염이며, 시국의 참된 곤란을 겉도는 막연한 낙관론으로 인해서 경기景氣는 좋으나 겨우 <명석한 고찰>의 대용품으로 <천진한 선의>를 내는 것뿐이다. [각주:7] 종교는 근대 세계와 조화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 정통 신학의 전통을 던져버리고 아무런 확고한 지적 근저가 없는 도덕 관념과 사회 이상밖에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저 숱한 작가들은 가톨릭 사상에는 아무런 동정도, 이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톨리시즘>이라는 것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전연 무관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는 무능한 자가 도피하는 장소이며, 가톨릭의 철학자들은 중세기적 암흑의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과거에 사는 사람들이며 새시대가 시작된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마치 17세기의 강단학자가 천지5원설을 문제로 하여 논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우주론을 떠들고 있을 때 이미 뉴턴과 갈릴레오가 새로운 물리학설을 창조하고 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종교 사상가의 대종大宗들은 <도그마>로부터의 종교의 해방이라든가,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본질이라든가 하는 진부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 의외로 세계는 주관주의, 이상주의를 버리고 새로이 절대적 혹은 영적 실재를 구하고 있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사실 18세기 및 19세기에 있어서는 유럽 문명의 모든 조류는 가톨리시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철학의 절대주의 및 실재주의는 루소나 칸트 혹은 스펜서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것이었다. 비오 9세가 가톨릭 교회는 자유주의, 진보주의 및 근대 문명과 조화할 의무가 있다는 이론을 부정했을 때 이 선언은 유럽 각국에서 이구동성으로 갈채를 받았다. 이것은 교황이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물질 진보주의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이며 아무도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각주:8]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연 다르다. 자유주의, 진보주의, 근대 문명은 70년 전과는 전연 딴 조명 밑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벌써 진보가 필연적이며, 자동적 프로세스라고는 믿지 않으며, 또 인간이 제멋대로 연구해가면 인간은 반드시 더욱 현명하게, 더욱 행복하게, 더욱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물론 우리들도 근대 진보의 현실이 거대한 물질적 성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조부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을 의미한다. 딴 동물의 생활과 다르지 않게, 인간의 생활은 힘의 균형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 균형이 제약적 요인의 제거로 인하여 전복되면, 이것을 새로이 원상태로 복귀하는 경로는 극히 위험하고 곤란한 것이다.

 

   이로써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증가한 부와 인구는 무조건으로 계속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제동력을 생기게 함으로써 자기의 극한을 만드는 것이다. 기계는 산업의 거대한 확장을 가능케 하였으나, 그것은 또한 생산 과잉과 실업을 가져왔다. 과학은 질병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가시켰으나 그것은 또한 전쟁의 파괴력을 격화했다. 식민지의 확대, 경제력의 확대는 유럽으로 하여금 세계의 지배력을 장악케 하였으나, 그것은 또 동양인의 적의와 항쟁심을 각성시켰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부의 원천을 만들어 냈으나, 동시에 그것은 착취와 사회불안을 조성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 표류함으로써, 방향도 없이 진보해 갈 수는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를 번영과 권력에 인도해 온 동일한 조류가 동시에 또 우리를 파멸에로 인도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만약 재액을 피하려고 한다면, 지도와 질서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된다. 문명은 결코 진화의 자연적 도정의 결과가 아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자연을 인간 정신에 의하여 완전 지배하는 데서 오는 것인 까닭이다. 문명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고 창조된 바 인공적 질서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 있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데는 문제가 없다.[각주:9] 다만 현재의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창조하는 질서가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냐, 혹은 그것이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냐에 있다.

 

   이것이 근대 세계의 주요 문제이다. 한편에 있어서 우리는 공산주의자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순전히 유물론적인 근거 위에 하나의 질서를 건설하려고 하는 유일하고 철저한 시도, 모순없는 노력이다. 그러나 이보다 일관성을 적으나 훨씬 인간적인 아메리카적 해결책도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전통에, 표준화된 집단 문명이라는 유물적 질서를 결합시킨 데에 기초가 된 것이다. 현실의 운영 상황으로 보면, 러시아의 실험보다는 훨씬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치 이상과 그 경제적 실천과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순당착이 있으며, 그로 인해서 지적 불만과 도덕적 불안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집단 문명의 메카니즘과 유물주의는, 정치적 자유 내지 사회적 민주주의의 옛 관념과 하등의 유기적 관계가 없다. 그 관념들은 옛날의 더욱 단순한 사회 경제의 상황 하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메리카적 해결책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한 지방 한 시대의 어떠한 상태와 관련되어 있을 뿐이며 그 진보는 아직 불완전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유럽 문화의 역사적 전통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결코 순전히 유물론적이었던 예는 없다. 과거에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연결되어 있었고, 전세기에 있어서도 그것은 자유주의적 인도주의, 자유주의적 국민주의의 이상과 동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의 혁명, 영국의 자유주의, 이탈리아의 사회개혁Risorgimento, 독일의 국수주의, 의회존중주의Parliamentarianism, 사회주의, 이러한 모든 운동이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며 그리고 이것들은 다 정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들만으로는 정신적인 질서를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보면 불순한 현상이며, 이상주의에다 이기주의를, 정신적 열망에다 유물적 목적을 혼입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기의 후반에 있어서 이들은 일종의 소극적 정화운동을 해 왔다. 마치니와 청년 이탈리아의 국수주의가 무솔리니 및 파시스트의 국수주의에로 전화하였고, 영국의 자유주의는 존 러셀 경과 글래드스턴의 손에서 로이드 조지의 손으로 옮겨갔다. 또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환상에서 웨스트민스터의 현실에로 내려왔다. 민주주의를 위한 안정된 세계를 만드는 일은 4년간의 집단적 살인행위와 언제든지 폭발할 위험을 내포한 평화를 가져왔다.

 

   아무튼 계속적으로 곤란을 받아온 것은 관념적 요소였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19세기의 영감이었던 모든 관념은 산산조각이 나고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어디에서나 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의회제일주의Parliamentarianism라든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각주:10]

 

   이상주의의 모든 힘이 이와 같이 퇴폐했다고 하는 것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유럽이 유물적인 세계관을 수락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유물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감은, 19세기의 관념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비례하여 감소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번영을 자랑하던 19세기, 자신이 만만하던 19세기보다는, 훨씬 간절하게 정신적 세계에의 요망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근대적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로서 올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모든 면에 있어서의 이 실망과 환멸의 비애의 그늘에는 더 심각한 무엇이 있다.—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것이다. 이 신뢰야말로 전全 근대발전의 중심적 도그마이며 영감이었던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상실한 것이다. 이는 아무튼 놀라운 일이다. 근대 세계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Weltanschauung의 반항의 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생각을 돌이켜 볼 때 실로 경탄할 일이다. 그러나, T. E. 흄이 통렬하게 말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가 주창했다는 변혁은 사실과는 정반대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인간은 그 중심이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유현幽玄한 강력한 것에서부터 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낙천주의에의 변화를 얻은 것이다. 이 낙천주의는 루소에 있어서 제 1단계를 경과한 후 점차로 전락해 가서 마침내 우리는 불행하게도 도탄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T. E. Hulme, 『Speculations』, p.80).

 

   그러나 현세기에 이르러서부터, 이 인간 이상화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 일반화되어 왔다. 심리학자는 인간 영혼의 심해를 측정하여 거기에는 근소한 진흙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문학자들은 낭만적인 인생관 같은 것은 처음부터 비웃어버리고 말았다. 또 예술가들은 추상적 관념을 배척하고 자연주의를 가했으며, 물리학자는 낡아빠진 과학적 유물론의 극히 소박한 경험주의를 깨끗이 버리고 상대적 이론이라는 수학적 추상관념을 수립하고 말았다. 철학자들 간에서도 전통적인 주체성과 관념론을 폐이弊履와 같이 버리고, 존재론, 실재론에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반동은 전통의 성벽이 길게 계속된만큼 특히 독일에서 현저하다. 신칸트파의 학자들까지도 그들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여, 유럽 사상의 옛 전통의 광명에 비춰서 칸트를 재음미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의 철학은 이미 사멸한 철학이라고 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독일 사상계에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실유론(實有論, realism)에로 복귀하려고 하는 현저한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종교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태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가치를 극히 높게 보는 것과 자연을 관념적으로 이상화하는 결과로 정신적으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낮게 보거나 혹은 부정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형이상학과 교회의 도그마를 버리고 인륜적 관념에 이론을 집중시킴으로써 근대 사회에 교묘하게 적합할 수 있었던 것이나, 가톨리시즘은 주관적인 관념론과 도덕적 실용주의의 공기에 파묻혀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황야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페터 부스트Wust가 말하는 <가톨릭교의 추방 생활로부터의 복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가톨릭사상은 유럽문화의 중심에 지위를 발견하고, 근대 세계에 그 사명을 수여할 수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톨리시즘은 19세기 관념론의 파산으로 인하여 화의和議를 해버리지는 않았다.[각주:11] 그는 신교의 모든 파벌이 부정하듯이 자연 질서의 존재와 의의good를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신계의 질서는 절대적인 정신적 원리의 광명 하에 있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과거 25년 간에 있어서 가톨릭적 지성의 괄목할 부흥이 생긴 것이다.[각주:12] 반세기 전에는 프랑스 및 독일에 있어서는 인텔리는 무신론이고, 가톨릭 신자는 시대의 사상에서 추방된 유형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같이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식인들 간에 더욱 가톨릭의 영향이 가장 현저한 것이다. 이것은 또 철학의 분야에 있어서 극히 명백하게 예시되고 교황 레오13세에 의해서 시작된 토마스 부흥이 크게 결실되어 일반에게 수락되기까지에 이르른 것이다. 프랑스에는 쎌띠랑즈Sertillanges 신부와 마리탱이 있고, 두 사람은 근대 세계에 대한 성 토마스의 찬란한 해석자이다. 또 중세사상사가인 질송Gilson과, 고故 루스로Rousselot 신부는 명저 『성 토마스의 주지주의L’Intellectualisme de St. Thomas』의 저자로서, 우리의 자랑이다. 벨기에에는 루뱅파가 있다. 이것은 과거 40년간에 있어서 가톨릭 부흥의 선구자이며 이 파의 마레샤르Maréchal 신부의 『형이학상의 출발점Point de Départ de la Métaphysique』은 최근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독일에 있어서의 가톨릭 사상 부흥은 데니플레Denifle, 에를레Ehrle, 바움케르Bäumker, 폰 헤르를팅von Herlting 및 그라프만Grabmann 등의 역사 저작에 우선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세사상의 지식을 부흥시키는 데에 있어서 각자의 연구로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뉴먼Newman의 영향 및 막스 쉘러Scheler와 같은 최근의 독일 사상가도 가톨릭 사상 부흥에 많은 힘이 되었다. 쉘러의 가톨릭에 대한 개인적 귀의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칸트 윤리에 대한 비판 및 그가 윤리학, 사회학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영계靈界의 가치에 복귀한 것은 지식인의 세계에 가톨릭적 전통의 정신적 풍부성을 의식시키며, 가톨릭교도들에게도 그들의 지적 사명의 중대성을 새로이 인식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이 수개년 간에 종교 사상은 대단한 발전을 한 것이다. 즉, 오늘날에 있어서 가톨릭 철학이 근대 사상과 가장 밀접히 결합된 것은 독일이며, 현대의 요구가 가장 적합하고 있는 것도 독일이다. 이것은 프시와라Przywara, 부스트Wust, 칼 슈미트Carl Schmitt, 테오도르 해커Theodor Haecker, 폰 힐데브란트von Hildebrand와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순수 문학에 있어서도 가톨릭 운동의 부흥이 현저하다. 이는 프랑스에 있어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비교적 젊은 작가가 많이 가톨릭 사상의 보급에 정신挺身하고 있다. 원래 가톨릭 문예 운동은 대전 전부터 페기Péguy 와 클로델Claudel과 프시카리Psichari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다. 특히 모리스 바레스Maurcie Barrès의 영향이 많다. 그러나 바레스 자신은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이 운동은 작가, 극작가로서는 클로델Claudel과 앙리 게옹Henri Ghéon이 대표하고 비평가로서는 앙리 브레몽Henri Bremond, 샤를르 뒤 보Charles du Bos,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앙리 마시Henri Massis가 대표하고, 소설가로서는 프랑수아 모리악François Mauriac, 쥴리앙 그린Julian Green이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군소 작가들을 이끌고서 『금의 갈대Roseau d’or』, 『Cahiers de la Nouvelle Journée』, 『시사 문화론제Questions Disputées』, 『전야Vigile』등의 여러 논총에 기고하고 있다.[각주:13]

 

   독일에 있어서는 이 운동은 아직 최근의 일에 속하고,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독일의 사정은 많은 점에 있어서 영국의 사정과 흡사하다. 독일 문학에 있어서의 중심적 전통은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가톨릭 작가는 소수 반대당의 문학이라고까지 해서 거북스러운 분위기에 잠겨서 대단히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불리함들은 대담함과 지적 활동이 왕성한 새로운 정신에 의하여 극복된 것이다.[각주:14] 이 신문예 운동의 실력과 활약 상황은 『고지Hochland』와 『성배Der Gral』와 같은 가톨릭 잡지에 나타나 있다.

 

   영국에 있어서의 가톨릭은 독일과 같은 불리한 조건이며, 오히려 훨씬 고난의 길을 걷고 있으나 여기에도 역시 가톨릭 문예 운동의 현저한 부흥을 볼 수 있다. 사실 영국 가톨릭이 수행한 업적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또 수적으로 극히 열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예기한 것 이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가톨릭의 지적 부흥은 전체로서 전 유럽 대륙의 운동이며, 그 중요한 의의는 아직 영국에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철학의 존재까지도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낡은 안목밖에 가지지 않는 쿠울톤Coulton 박사와 반스Barnes 목사 같은 작가가, 가톨릭 사상을 다만 대규모의 미신적 발작 정도로 생각하고 또 현대의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 것은 무리도 아닌 것이다.

 

   본 총서의 주목적은 독일과 프랑스 등 대륙에서의 현대 가톨릭 운동의 소식을 영국에 소개하는 데에 있다. 벌써 영국은 현대에 있어서 다만 하나의 섬나라가 아니며, 또 문명의 외적 형식은 도처에서 단일 공통화 문화의 지적 공동체를 재흥再興하는 데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각주:15] 특히 가톨릭 신자에 있어서는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만이 오늘날의 세계 동포적인 기계문명의 유물적, 외면적 단일성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보편적인 영적 세계의 대표자로서 의연히 서 있는 것인 까닭이다.

 

   물론 우리는 가톨릭 부흥에 있어서의 지적 요소의 중요성을 과대시할 것은 아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지성의 문제를 가톨릭의 전매라고 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가톨리시즘은 결코 신기한 지식을 구하는 자에게도, 또 경기가 좋은 편을 들고 싶은 자에게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으로 영의 실재를 구하는 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장점은 결코 두뇌가 우수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지하는 주장의 견고함에 있는 것이다. 격언에 있는 토끼conies와 같이, 우리는 약할지라도, 우리는 견고한 암굴 속에 살고 있다.[각주:16] 우리의 사상은 자유라고 하지만 멋대로 주의 주장을 조작하여, 신을 제마음대로 적당한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의미의 자유는 아니다. 바로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야말로 근대 사회가 전락한 불신의 무정부 상태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19세기는 문학과 윤리 속에 정신적 이상을 삽입하려고 하였으나 한편 영적 세계의 객관적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에 우리는 오늘날 완전히 인간 생활에서 영적 요소를 추방해버리든가 혹은 영적 요소야말로 실재의 기초라고 인정하든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 사회가 후자의 원리를 인정하는 한 그는 가톨릭적 해결책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톨리시즘은 영적 세계 원리의 유일하고 위대한 역사적 대표자이며, 이 영적세계는 인간 정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배자이며 창조주의 창조물인 까닭이다.

 

   마리탱의 본 논문은 이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양상에 있어서 취급한 것이며, 종교와 문화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마리탱은 『가이사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 Caesar’s』이라는 논문에서 영계의 것과 속계의 것과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논했거니와 본서에 있어서는 정치론을 초월하여 궁극의 영적, 형이상학적 기초를 논하고 있다. 이것은 낡은 주제이며 과거의 논쟁과 멸절된 이단들의 쓰레기débris 밑에 매몰되어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각주:17] 그러나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현실의 논제로서 존재한다. 이 논문이 주목표로 하고 있는 가톨릭의 독자층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원리의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실현을 신앙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생명적인 논제이다.

 

   마리탱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가톨릭의 지적 부흥에 있어서의 가장 대표적이며, 영적 세계의 실현은 그의 전全 문필 활동의 지도 원리였다. 그는 사상의 방향 교정을 「지식에 의하여, 영성의 우위를 위한 절대 실재에의 복귀」라고 하여, 이 방면의 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순수한 성 토마스의 전통에만 의거하고, 때로는 극단으로 근대 철학, 근대 과학을 멸시하는 것 같이 보이나, 그가 근대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베르그송Bergson의 제자이며, 근대의 연구에서 성 토마스에 이르렀고, 사실은 그가 근대 사상에 통달에 있기 때문에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인 성 토마스 철학의 객관성과 지적 강인성을 잘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각주:18]

크리스토퍼 도슨

영국, 1931

 

  1. 자크 마리탱의 『종교와 문화』에 첨부된 크리스토퍼 도슨의 서문이다 (도슨은 그 자신 『종교와 문화』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1931년, 도슨은 자신이 기획한 “Essays in Order” 총서의 첫 권으로 마리탱의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 소개했다. 따라서 도슨의 서문은 마리탱의 본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총서 전체에 대한 서문(“General Introduction”)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박갑성이 도슨의 권두언까지를 포함한 이 “Essays in Order” 판본을 국역해서 경향잡지사에서 출간한 것은 1955년이었다. 이 번역은 일부 수정되어서 1975년 신태양사의 “세계기독교사상전집” 제6권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신태양사 본을 옮겨 적었다. 박갑성의 번역은 원문의 자구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맞춤법과 명백한 오역들을 수정하는 것에 그쳤다. 다만, “마리탱”, “마리땡”, “가톨릭”, “카톨릭” 등 오락가락 하는 표현들은 모두 하나로 통일했다. 낡고 근사한 표현들은 그대로 두었다. [본문으로]
  2.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생기는(...) 문제를 고찰”하기를 목적했던 도슨의 이 총서는 얼마 전 미국의 Cluny 출판사에서 “The Persistence of Order”라는 제목으로 총 세 권으로 재발간 되었다. [본문으로]
  3. 원문을 직역하면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원리는 흔들리고 신용을 잃었으며, 우리는 무엇이 그 원리들을 대체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정도가 된다. [본문으로]
  4.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은 유럽은 이미 성기盛期를 지난 것이며 유럽 문화는 퇴폐에의 피치 못할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이제 겨우 근대 과학의 가능성을 알기 시작한 것이어서 세계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과감히 초월하는 초유의 사회질서는 이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박갑성의 번역은 의역이다. [본문으로]
  5. “저 과학 만능시대라고 한”은 박갑성이 덧붙인 대목이다. 무리없이 읽혀서 그대로 두었다. [본문으로]
  6. 이 총서란 물론 “Essays in Order”를 지칭한다. “essays in order”는 “essays on order”와 유사하게 “질서에 관한 에세이들”로도 읽히는 한편으로, “가지런한, 정돈된, 적절한, 유효한 에세이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질서에 관한 에세이들”이라고 상투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소 얼버무리는 번역이 된다. 어느 쪽이든, 후련한 정답은 없는 성싶다. [본문으로]
  7. 박갑성이 애호하는 이 “경기景氣”라는 단어는 빼고 읽어도 무방하다. [본문으로]
  8. [도슨의 원주] 자크 마리탱, 『가이사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The Things That Are Not Caesar’s』, 부록 V, “자유주의”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9. “이미 오늘날에 있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도로 새기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문으로]
  10. 다음 문장이 빠져 있다. “국수주의[민족주의]만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나, 그 음울하고 위협적인 모습은 문명의 기치에 별반 좋은 징조는 못 될 성싶다.” [본문으로]
  11. “화의和議를 해버리다”는 “compromised”의 주책없는 직역이다. [본문으로]
  12. 원문에는 “remarkable revival of Catholic intellectual life”라고 적혀 있으나 “life”를 너무 심각하게 여겨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13. Cluny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에는 『Vigile』 대신에 『베르길리우스Virgile』라고 적혀 있는데, 오타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4. 박갑성의 번역은 이 대목에서 불명확하다. 바로잡았다. [본문으로]
  15.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벌써 영국은 다만 하나의 섬나라가 아니며, 또 문명의 외적 형식은 도처에서 단일화되고 공통화more cosmopolitan되므로, 유럽 문화의 지적 공동체를 재흥再興하는 데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16. 이 문장은 오역이라고 할 만하다. “the proverbial conies”는 “격언에 있는 토끼”가 아니라 “잠언에 나오는 토끼[또는 사반/오소리]와 같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Proverbs 30:26. [본문으로]
  17. “extinct heresies”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져서 삽입했다. [본문으로]
  18. 페터 부스트의 논문을 소개하는 대목은 삭제되었다. 박갑성의 문단구분을 Cluny 판본의 문단구분에 따라서 수정하였다. Sheed & Ward에서 출간된 초판본은 미처 참조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암브로시우스, 다윗 시편 해설 中

제임스 핸킨스

이교인들 가운데

2022년 12월 14일

 

   기독교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기독교의 종말La fin de la Chrétienté』 에서 프랑스 철학자 샹탈 델솔은, 근대의 종교가 기독교 문명의 종말을 불러왔다는 논지를 폅니다. 두터운 가톨릭 신앙을 가진 델솔이 이로써 말하려는 바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끝장났다거나 언젠가는 끝장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장 지난 16세기 동안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로부터) 세워진 문명이 마침내 그 적들의 손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현하의 기독교인들은 요컨대 이교인들 가운데 거하는 셈입니다 — 전에 기독교의 땅이었던 이 곳으로 이제 이교인들의 미래, 우리 기독교인들이 참여할 수 없는 미래가 밀어 닥쳐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패배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필히 고민해야합니다.  적대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침묵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카타콤베로 후퇴하고, 하느님의 밀정密偵으로 활동해야 할까요?

 

   『First Things』의 독자들은 델솔의 비전을, 기독교와 라이시테laïcité 사이의 난투가 혁명시대부터 죽 이어져온 특수한 역사로부터 연원한, 그저 프랑스인의 견지로 치부할지 모릅니다. 우리 역사가들에게는 이것이 유럽사, 아니 더 나아가서는 세계사를 확장된 프랑스사 정도로 파악하는 프랑스 역사가들의 경향을 뚜렷히 나타내는 사례로 보여집니다. 아니 대체, 수건을 던지고 항복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가요? 유럽에서도, 헝가리나 폴란드, 어쩌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까지도 기독교 신앙을 받쳐주는 문명적 규범이 북돋움 받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제도화된 권력이 꼭 모두 기독교 건너편에 있는 윤리와 줄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돕스Dobbs 판결이 보여주었습니다. 훗날 우리는 워키즘의 과두제가 기독교를 광장으로부터 쫓아내는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날이 아직 아닙니다.

 

   기독교의 종말이 말해진 것은 무론 처음이 아니지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전 (674-678) 때 이미 몇몇은 최후의 날이 임박했다고 울부짖었고, 예언자 마호메트의 군대가 이제 머지않아, 사사니아 왕조의 페르시아와 그 고대종교를 말살시켰던 것처럼, 기독교권 또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또 마키아벨리의 관찰에 따르면, 13세기에 부패와 이단의 수렁에 빠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성 도미니코와 성 프란치스코의 성결聖潔의 덕분이었습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튀르크인들에 의해 함락된 후로 점쟁이들은 기독교 유럽의 붕괴를 예고했으나, 두 세기 후에 비엔나에서 패전하여 (1683) 유럽으로부터 쫓겨난 것은 오히려 튀르크인들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기어코 프랑스로부터 기독교를 지우는 일에 매달렸으나, 그 헛노릇은 12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개혁reformatio과 쇄신renovatio은 초기 교부들이 발명해낸 개념으로, 유사 이래 교회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무릇 기독교는 미처 소모되지 않은 탄력성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궁극에 가서는 하느님이 주시고, 하느님이 불허하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소모될 수조차 없습니다.

 

   델솔은 “역사로부터 버림받은 쪽의 운명이란, 더 극단으로 치닫고, 남아있던 세련된 변호인들을 잃게 되는 것, 그리하여 종국에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어떤 파국적 과정들을 지나, 적들의 희화를 시나브로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문명이 비틀대듯이, 그 문명을 변호하는 이들 역시 유치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디까? 델솔의 책은 지혜와 통찰력으로 넘쳐나고, 개중에 태반은 수긍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공적인 영향력에 관해서 너무도 비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현 시대에 기독교의 변호인들이 보여주는 이 품위입니다. 『First Things』의 지면만큼 이 품위가 내보여지는 곳도 없습니다.

 

   이교인들 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어찌 되었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이교인들의 학교로 보내고, 우리가 거주하는 도시는 그들이 다스리며, 우리가 다니는 직장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조차도 그들의 지배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만큼 유대-기독교적 사고관을 보전할 필요성이 절절했던 적이 있을까요. 『First Things』는 기독교 문명의 보존 및 재건에 기여할 도구입니다. 구원久遠한 종교의 적들 가운데 삶을 영위해 나가야하는 젊은이에게 구독권을 선물해주십시오. 혹시 영혼을 구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도성의 닳아가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고전부흥의 의의—새로운 창조와 건설을 위하여

박종홍

 

1.

   우리네가 역사에 있어서 특히 전환을 말한다면 그것은 순조로운 유기적 발전으로서의 변천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과거의 전통적 타성에 끌리어 윤체輪替되는 안일한 관습적 반복을 의미함도 아닐 것이다. 문화의 고정화로부터 필연적으로 주출做出되는 자기소외라는 모순된 현상이 종전의 구각舊殼을 보수할 수 없게 된다는 곳에 비약적인 비연속적 전환을 보게 되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 갈망되는 것은 새로운 지평의 전개, 새로운 원리의 파악, 그러나 기성적 규준으로 헤아릴 수 있는 과거의 자연생장적인 확대나 연장이 아닌지라 앞으로 닥쳐드는 것은 인습적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불안, 안정된 지반의 상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공허감뿐이요, 미래에 대한 초조로 마음을 태우는 정열과 성실이 오히려 아찔한 혼란에 사로잡히기 쉬운 시대다. 이러한 때에 고전이 문제됨은 무슨 까닭인가? 일견 모순된 기현상이 아닐까. 더욱 외래의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 내면적으로 소화도 되기 전에 성급한 형식적 추종에만 급급하였던 이 땅의 특수 사정은 다시금 세계적인 이 전환에 임하여 일층 착잡한 정황 속에서 헤매게 된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과조차 예측키 힘든 긴장으로부터 차라리 일탈하여 일시적 안온이나마 탐하기 위하여서 회고적 자위가 고전의 부흥이라는 미명을 가장하고 나타난 것도 아님직하다. 골동적 취미로서의 수집과 정리가 가지고 있는 소극적 의의조차 무시할 것은 아니나, 그 한만閑漫한 퇴영적 태도가 우리의 문제가 지니고 있는 긴박한 진지성과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무기력한 전락顚落을 창연蒼然한 옛빛으로 부질없이 호도하여 홀로 초연한 듯이 꾸미려는 것도 아니요, 마치 전형적인 동경의 이상향을 고대에서 다시금 찾아보려고 하는 호고벽好古僻을 이름도 아니다.

 

2.

   고전이 인습적 전통이나 골동품과 달라 높은 평가를 받는 소이는 언제나 그 생생한 근원성에 있다. 발랄한[각주:1] 생의 근저에서 용솟음치는 박력이 그 자신 영원히 새롭기 때문이다. 본연적인 인간성이 새로운 <티푸스>에 있어서 건실한 발로를 보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계박繫縛을 벗어나 창조와 새로운 건설을 위하여 씩씩하게 싸운 그들의 오리지날한 의기가 오히려 현대인의 심정에 공명되는 바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옛것이면서도 가장 새로울 수 있고, 먼 것이면서도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 고전이 가진 바 특성이 아닐 수 없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여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최고봉으로부터 최고봉으로 비약적 단절을 넘어 새로운 연결을 짓게 되는 것이 곧 고전 부흥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로 돌아가려고 공연히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정열이 과거로 하여금 이 순간에 있어서 소생케 되는 것이요, 과거의 의미가 미래에 대한 결단을 통하여 각각으로 새로운 힘으로 새로운 운명을 걸머지고 긴장된 현재의 없지 못할 일계기로서 등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비로소 참된 과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현재에 있어서 과거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은 마치 무조건하고 두들기기만 하면 황금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마술 방망이도 아니요, 용지불갈用之不竭하는 영천靈泉의 근원지도 아니다. 고전이 고전으로서 나타날 때에는 벌써 그 시대 정신이 객관화된 것이요, 로고스화라는 고정된 형식을 가지고 나온 것임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 시대와의 관계에 있어서 전체적 통찰을 소홀히 하고 한갓 지엽적 자구에 구애되어 유사한 외양만 들추어 오로지 자기 주장의 강조와 권위를 붙이기 위하여서의 한낱 수단으로 오용한다면 그야말로 고전에 대한 헛된 신뢰라기 보다도 차라리 일종의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고전을 단지 로고스화된 차원에서 고핵考覈 천착함에 그친다면 그것은 훈고학자나 문헌학자의 학구적 취미에 일임하여도 무방한 일이다. 일층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다시 살려내어 지양 전승하는 곳에 고전 부흥의 본의가 있을 것이다.

 

   인습적 전통을 일거에 단절함은 무서운 일이다. 목전의 안일을 택하는 약자의 비겁을 그 누구가 감히 비웃을 용기를 가졌으랴마는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전통의 압력에 휩쓸리어 전통과 더불어 몰락을 같이하게 될 뿐이요, 미래에 대한 정열과 성실을 끝끝내 잃지 않는 굳센 힘만이 전통과 싸워 가며 절대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도리어 참된 유산의 생명을 살리며 전승을 확보하는 것이다.

 

   참말로 시대의 첨단에서 용감히 싸우는 젊은 힘만이 진정한 고전의 부흥도 가능케 한다는 모순의 진리가 비로소 역사 전환의 추진력인 것을 또한 생각 아니할 수 없다.

(1938.6.1.)

 

  1. 원문에는 潑이라고 쓰여 있으나 潑剌의 오기인 듯하여 바로잡는다. [본문으로]

천도교의 현대적 의의

박종홍

 

   저는 천도교에 대하여 문외한입니다. 그러한 저로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할 때 외부사람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였습니다. 중학 2, 3학년 때 친구 중에 독실한 신자가 있어서 교당에 드나들었고 야뢰夜雷 이돈화 선생의 강연이 있을 때는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제가 철학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천도교와 깊은 관계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인내천人乃天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리 저리 생각하다 보니 철학 비슷하게 생각하게 되고 차차—깊이 들어가 결국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그런 관계로 인내천에 대하여 철학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신앙이라든가 체험으로써 인내천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외람스럽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이랄 것까지는 없으나 천도교가 현대적인 사조와 어떻게 맞먹어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평소부터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하여 볼까 합니다.

 

   한울님을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것은 동양은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로서 어떤 특색이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어디서나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에 대하여 공통적이면서도 어딘가 달라져 온 것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임사호천臨死呼天>이라고 절박한 처지에 하느님을 부르지 않느냐 하는 것을 천주교 신부도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하면 <이스라엘>에서 나왔는데 지중해에 삐죽 나온 이 땅이 북쪽으로는 <바빌론> 같은 큰 종족이 살았고 남쪽은 <아프리카>의 <이집트> 같은 강국이 있고 그 틈바귀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니 남쪽 북쪽에서 내리밀면 올데 갈데가 없게 되어 동쪽으로밖에는 못 가는데, 동쪽은 사막이라 사람이 못 살 곳이고 서쪽은 바다이고 그 틈바귀에서 살다보니 아마 이 세상은 살기 어려운 세상이고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을 생각하게 되고 내세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되어 하느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여 달라는 것보다 저 세상에서나 잘 살게 하여 주시오 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이 없어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거기서 본 하느님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봅니다.

 

   불교를 생각할 때 인도 역시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이 못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가 곤란하니까 역시 내세를 생각하는 그런 신앙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하느님은 그런 절망에 빠졌을 때 보는 하느님과는 좀 다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대체로 만주나 기타 북쪽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반도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우랄 알타이의 언어 구성으로도 그렇고 <석기시대>의 유물을 보아도 공통점이 있고, 남쪽을 앞이라고 그러는 점 등으로 보아 거의 사실일 것 같고 확실히 이 땅이 만주나 기타 북쪽나라보다는 살기 좋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에 살 때는 몰라도 외국 같은 데 나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땅에 들어서면 어쩌면 그렇게 하늘이 맑으냐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너무나 맑기 때문에 좀 흐릿하여야 격에 맞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장마가 지루하다지만 동경같은 데 가면 무덥고 지루한 게 비교가 안 됩니다. <런던>에 가면 우산들을 들고 다니는데 무시로 비가 주룩주룩 와서 우산을 안 가지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 점에서 구태여 우리나라와 비슷한 데를 찾는다면 <이탈리아>나 <그리스>가 비슷합니다. <그리스>는 고대문명의 발상지고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근세문화가 발단된 곳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하늘을 가진 것이 서양문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반도니까 늘 시달려서 약하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가 반도이니까 대륙도 아니요 섬나라도 아닌 그것을 넘어선 <그리스>가 그랬고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대국적인 판도가 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여간 태양과 맑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특별히 하늘에 대해서 관심이 깊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경천敬天이니 애천愛天이니 순천順天이니 하는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말이 많지만 중국과는 좀 다른 데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좀 아기자기한 것이, 무서운 자연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자연을 생각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은 대강 농사 아니면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아침 저녁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늘을 의지해 살면서도 <이스라엘>과 같은 무서운 한울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자연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인연을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연 두려움을 안 느낀 것은 아니겠지만 대륙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것을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땅에 나는 물건도 아름답다는 것보다 모든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국사람이 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국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같은 고기를 먹어도 소고기도 우리나라 소고기가 좋고 돼지고기도 우리나라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은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닭도 그렇고 계란도 알은 작지만 고소한 것이 외국 것이 따라올 수 없고, 외국사람이 그러는데 배梨는 우리나라 배를 따라갈 수 없다더군요. 인삼은 중국에 없을 리가 없는데 우리나라 인삼이라야 약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는 인간만 못났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깨끗한 하늘을 이고 좋은 산천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인지 아기자기한 인간미가 꼭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남을 잘 속이고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이탈리아>나 <그리스> 같은 나라에 가 보니까 별로 나은 것이 없어요.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이 이렇게 하늘을 숭상하고 자연을 사랑하면서 살아오다가 그것이 죽—내려와서 인내천이 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변혁입니다. 고전을 따져본다면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이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많지만 이렇게 드러내놓고 대담하다 할까 용감하다 할까 그것을 근본입장으로 삼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 온 것은 우리나라밖에는 없습니다. 서양사람은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심판하는 임금님으로서의 하느님, 벌을 주는 하느님으로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나와서 이것을 조금 다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이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심지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서 인류의 죄를 구해 주셨다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상당히 변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과의 사이는 굉장히 먼 것이었습니다. 서양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 하면 놀라 자빠질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드릴 자격도 없는 것을, 가만히 주의해 들어보면 나는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드릴 자격도 없는 죄인이올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격차가 굉장히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톨릭>이 오랜 역사를 지나 오면서 교회를 통해서 신부의 조력을 받아 하느님과 통하게 되었고 차츰 지나니까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는 등 자꾸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의 매개자가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곤란하니까 가족을 통한다든가 뒷문을 통해서 접근하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교 개혁을 들고 일어난 <루터>는 내가 보기에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좀 직선으로 하여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교회라든가 신부라든가 하든 복잡한 매개체가 많기 때문에 면죄부니 뭐니 하는 것이 생긴 것이니 이것을 좀 간소화하여 직선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직접 하느님을 통해보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천도교에서는 인내천이라고 하니까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내천이 어째서 현대적인 의의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훌륭한 것이니까 인간과 간격을 두어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텐데 좀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도 되지만 그 점에 있어서 요사이 사람들의 생각이 좀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서양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의지하고 하늘을 우러러 살아왔지만 차츰차츰 문화가 발달되어 근대화되니까 기계를 만들고 동력을 이용하게 되어서부터 전천후全天候 농사를 하게 되니까 별로 자연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기계를 만들어야겠다, 기계가 잘 살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독일에서 전자계산기를 보았을 때입니다. 이 전자계산기를 우리가 살 수 없으니까 세를 내고 빌려 쓰는데 그 세가 우리나라 농민이 수천명이 몇 달 몇 해를 일을 해서 거두어 들일 돈만큼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계를 만들면 애써 땀을 흘리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늘을 무서워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것이 기계를 가지고 달나라에 로켓을 쏘아 올리게 되고 보니 하늘과 인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기계를 만들고 기계만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상점도 대규모가 되고 공장도 대규모의 자동조절이 되고 모든 게 공업화하게 되니까 직공이나 백화점의 여점원이나 할 것 없이 밖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별로 관심이 없고, 손님이 많은가 어떤가 관심이고 어떻게 하면 손님을 끌 수 있을까 하는 게 문제이지 생활과 관계가 없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옛날식의 하느님이나 신앙이 그들 머리에 잘 들어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한 10여년 전에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세계의 청소년의 타락을 막기 위한 대책을 이야기하는 세계 고등교육자회의가 있었습니다. 한 일주일 회의를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서 퍽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들어보니까 어떻게 하면 청년들을 예배당에 잘 나오게 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파티나 놀이를 해서 재미를 붙이게 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정도의 결론밖에 안 나와 매우 실망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요새 소위 근대화란 말을 많이 하는데 나 역시 그것을 찬성을 하기는 하나 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이 근대화했다면서 무엇을 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잘 살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사람들의 식민지를 개척한 역사라고 봅니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한 일이란 자기보다 못한 민족에게 대포를 들이대서 정복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동양에서는 일본이 재빨리 그들의 흉내를 내고 동양천지를 뒤흔들다 망해버리고 말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거기서 근대는 막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화해서 잘 살았다는 나라의 역사를 본다면 침략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옳은 길로 인도해서 잘 살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는 이성과 관련이 됩니다. 그 전의 중세기에는 교회중심에서 자아의 자각으로 발전해서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데서 독일에서 신비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내가 열심으로 기도하여 황홀한 지경에 가면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성하고 결부되면서부터 철학적으로 <데카르트>의 <내가 생각하니 내가 있다>는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니까 이성이 지성과 관련되고 인정적인 면이라든가 아름다운 면이 없어지고 과학적인 냉철한 이치를 따져 들어가 근대화라고 하면 인간미가 없는 논리적인 면을 말하는 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에 반발하고 일어난 것이 실존주의 사상인데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라는 데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계상황에 들어가면 <나>라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심리는 이상해서 6 · 25와 같은 때에는 여기 저기 폭탄이 떨어져 사방에서 사람이 죽지만 어쩐지 내 머리 위에만은 안 떨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몇 번 겪으면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막상 부닥쳐 보면 내가 죽는 것이지 남이 대신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개체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인데, 2차대전을 겪은 구라파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겪고 보니 가장 틀림없는 것이 죽음이지만 가장 막연한 것도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내면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지성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보통 가치를 <진선미>라고 하지만 <진선미>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뭣인지 좀 더 성스러운 것, 좀 더 원자리까지 들어가서 인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철학의 한계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이 발달하고 기계문명이 발달해서 전자계산기가 가정교사 노릇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의 지력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지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한계선을 넘어선 데 가치가 있습니다.

 

   <수심정기守心正氣>라는 말을 나는 대단히 묘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가령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할 적에 내 맘속에 모셨으니 하지 않고 내 몸에 모셨으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몸이란 묘한 것이라 보통 눈이 밝은 것은 명明이라고 하고 귀가 밝은 것을 청聽이라고 하는데 결국 사람의 지식이란 눈하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별것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지만, 그러나 한걸음 더 들어가 우리가 사는 것이 눈과 귀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侍 자를 이야기할 때 지기라고 할까 몸 전체로써 느끼고 생각하는 경지가 인내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존철학에서 개인을 정적인 면에서 살리려고 하였지만 개인을 독자적인 면에서 고독한 나로밖에 안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독특한 면은 인내천할 적에 인人이라고 하면 개인주의적인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기至氣라는 면에서 전체적인 기운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젊은 사람들이 종교 문제에 관해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해 내려오는 기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그런 생활양식 속에서 살아나오고 있으나 현실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면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것을 심각하게 지적한 것이 <수운>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사람은 천주의 뜻에 의해서 온 세계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공취천하攻取天下라고 하지 않으냐. 천주의 뜻이라니, 천주의 뜻이 어디 원자탄을 떨어뜨리라는 것이겠느냐. 그러나 살아가자니 원자탄을 안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물 우물하다가는 다 죽을 판이다. 이러한 곳에 현대의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한울님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세계의 현대적 사조가 필연적으로 근대가 지나고 현대에 이르러보니까 한울님을 저 하늘에서 찾고 죽어서 천당에 가자는 종교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한울님을 찾는 종교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천도교>가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절을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를 향해서 설위를 하라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혁명이 아닙니다.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지 말라, 나를 믿지 말고 네 몸에 모신 한울님을 왜 위할 줄 모르느냐 하셨으니 그 극치에 가서 생각하면 나를 향하는게 옳을 것입니다. 그럴 때의 나는 어떤 지적인 나, 진선미의 나, 감정적인 나가 아닌 거룩하고 신성한 나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의 존중은 서양철학에도 얼마든지 나옵니다. <데모크라시>—하고 인권선언하며 여기서는 인간의 권리의식과 정치적 입장에서 인간을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인내천은 이런 것을 포괄한 더욱 거룩한 입장에서 보는 것이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런 것을 안다면 서양사람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사이 근대화 근대화 하는데 현대에 살면서 언제 근대화해서 그 뒤를 쫓아가겠습니까. 악착같이 지름길을 찾아 앞장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내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양사람의 사상이란 별 게 없습니다. 신념을 가질 때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외람되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철학을 집어치워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새 와서 특히 정신적인 자세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남의 것을 배운다는 것보다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그 전의 신화를 가지고 억지로 머리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하여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천만은 틀림없이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천도교>에서는 장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것은 살아서 잘 살자는 말이지 죽어서 오래 살자는 말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에 간다고 해요. 언제인가 불교관계자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당신이 철학을 한다는데 철학에서는 죽어서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라고 물어요. 그래서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하니까, 그걸 모르고 어떻게 철학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기에, 나는 철학을 잘못해서 그런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할 수 없지만 당신네는 죽어서 극락간다고 믿지요, 제발 그렇게 믿기 바랍니다, 만약 다 죽게 되어 목숨이 경각에 있을 적에 아차 내가 잘못 믿지나 않았을까 할 적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니 조심하시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새 불교 중에는 참선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깨치면 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인내천과 접근하는 말인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이 있는 자리가 극락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있는 자리면 당연히 극락일 것이고 깨달으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초월했을 때 극락이 거기 있고 영원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영원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 깨닫고 초월했을 때 거기에 극락이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내천이 여기까지 깊이 들어갔을 때 장생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동시에 몸을 천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천도교당에 무슨 식이 있을 때 들어서면 어딘지 향토적인 냄새가 물씬하게 납니다. 이것은 머리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땀내가 물씬물씬 나는 어머님 품에서 젖을 찾아먹는 온몸으로 느끼는 체취에서 오는 감정, 이것이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 체취로 느낄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힘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그 방향을 노리고 있습니다. 요새 노이로제가 많지요. 노이로제를 치료하려면 그 채취[각주:1]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지요. 그것이 잠재의식의 세계입니다. 나는 모르지요. 그러나 다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먼 곳에 떨어졌을 때 이상하게 느끼지요. 꿈자리에도 나타나지요. 그러한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속 깊이 깊이 들어가서 우리를 움직이는 무엇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인내천>을 살리고 같이 단결하여 나아갈 적에 무엇보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세계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막대한 투자를 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데 한번 지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하의식下意識, 즉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근대화 근대화 하는데, 근대화라고 하면 서양을 연상하게 되는데, 서양사람 흉내내는 것이 근대화가 아닙니다. 좀더 새롭고 우리 독자적인 창의를 발휘하는 것이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비약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남의 뒤만 쫓아가다가 천생 남의 종노릇밖에 못합니다. 내가 외국에 갔을 때 컴퓨터(電子計算機) 만드는 공장을 가 보았습니다. <피아노>만한 것, 조금 더 큰 것, 작은 것 등이 있는데 저것을 우리나라에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우리는 살 염도 못합니다. 겨우 세를 내서 빌려 쓰는데 그 세가 또 굉장히 비쌉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싼 것을 무엇에 쓰느냐. 안 쓰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쓰면 그 몇 배의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대가로 얼마를 가져갈까, 우리나라 농부들 수천 명, 수만 명이 몇달을 땀 흘린 것과 같은 값어치를 가져갑니다. 미국에서 한국의 기계도 수입한다더군요. 그 사람들은 창의성을 발휘해서 잠시 동안 뚝딱뚝딱 해서 만들어 내서 돈 버는 것이나 하지, 애써 땀 흘리고 일해서 한푼 한푼 모으는 그런 식 돈버는 것은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나도 땀을 흘리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방학 때 계몽대에 나가는 학생들에게 가서 땀을 흘려라, 머리에서 머리로 옮기는 것도 있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땀에서 땀으로 통하고 체취에서 체취로 통하고 같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할 때 힘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전쟁을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미국무성의 전자계산기가 분석하고 평가하고 대항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지금은 각 기업체에서 세계 각처의 정보를 꿰뚫고 경제경쟁을 하는데 전자계산기를 쓰고 있습니다.

 

   땀을 흘리는 것도 귀중하지만 머리도 최대한으로 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초비약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근대에서 근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서 근대화하려고 하고 있는데 걸핏하면 현대화한다고 유행만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전자계산기에 의한 자동조절에 의해서 모든게 움직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동조절에 의한 전자계산기를 쓰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상대방의 자동조절을 능가하는 자동조절을 발견하는 데 승패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의 자동조절의 버튼을 누르는 것은 잘 들여옵니다. 그러나 이 버튼만 누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버튼을 만든 사람에게 홀딱 넘어갈 것입니다. 땀 흘리는 것도 좋지만 창조성을 배워야 하고 그것은 배우기만 하여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새 큰 기업체는 기업체 나름으로 <엘리트>를 선발하여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합숙을 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이제는 전자계산기가 기억해 줍니다. 전자계산기 속에는 백과사전을 몇 권이라도 넣어둘 수 있습니다. 어떤 원리만 발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도 전자계산기가 다해줍니다. 분석도 다해줍니다. 몇백년 걸려야 할 계산도 몇초에 다해줍니다. 지식이나 기억이 필요치 않습니다. 창의성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창의성이란 어디에서 나오느냐. 머리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땀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밑바닥에서 우리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근본적인 생명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천의 경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채취”라고 되어 있으나 “체취”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본문으로]

<우리>와 우리철학 건설의 길

박종홍

 

1.

   내가 왜 이 시대에 이 사회에 그리고도 하필 이 땅에 태어났는가를 나는 묻는다. 그러나 하여간 나 역시 금일의 조선 사람의 일원으로서 이미 생존하였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 사실은 내가 철학을 함으로부터 비로소 발견된 것이 아니요, 이러한 말 자체가 도리어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리 만큼 평범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나의 생이 최중最重하니 만큼 내가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보다도 더 엄숙한 사실을 또한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랴. 평범하고도 엄숙한 이 사실이 나로 하여금 철학에 대한 애착이라기보다도 정열에 불을 질러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라고 하는 독특한 나이기 전에 이러한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로서의 나로서 먼저 생존하고 있다. 그것이나마 무슨 색다른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대중의 일원으로서 항다반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남과 같이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거듭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도 이 사실은 나 개인의 주관으로써 임의로 좌우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벽을 박차는 수밖에 없게 된 절박한 정세도 허공에 매어달린 채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미와도 같은 막가내하莫可奈何의 고민도, 우리의 이 평범한 사실이 절대적인 객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실이 곧 엄숙한 사실이라는 소이도 그 근거가 결국은 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2.

   구름을 타고 안개를 마시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조才操라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 모르거니와 적어도 대지에 땅을 붙이고야 살 수 있는 우리로서는 죽는 날까지 이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 속에서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도 이 사실이 나에게만 유독히 품전禀傳된 것이 아니요, 이미 대중적으로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니 도리어 나의 일상의 평범하고도 엄숙한 사실이란 곧 나의 것이라기보다도 먼저 대중의 존재성인 이상, 이러한 사실을 지반으로 하려는 나의 철학은 나의 철학이라기보다도 우리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철학하는 것의 주체이며, 동시에 과제인 것은 위선爲先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라고 파악할 수가 있다. 이것은 고립된 개인적 주관을 속깊이 파내림으로부터 홀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요, 또는 만인공통의 인간성을 추상함으로 말미암아 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때에 여기에 있는 이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가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철학이 진실로 가장 구체적인 <우리>의 철학이어야 할 것이라면 우리의 철학은 단지 공막空漠한 인간학일 수가 없게 된다.

 

3.

   과연 우리의 철학은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들 속에 움트고 있다. 우리의 철학은 독일서 차를 타고 왕림하는 것도 아니요, 미국서 배를 타고 내왕來降하는 것도 아니다. 석가도 공자도 우리들 속에 이미 뿌리박고 있는 우리의 철학의 싹을 북돋워 주는 역할은 도울 수 있을 법하되 그네들의 교설敎說이 곧 우리의 철학은 아닌 것이다. 만권의 철학서를 독파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곧 우리의 사상으로서 진실된 힘이 못 되는 바는 우리의 철학이 우리들 속에서만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의 철학적 유산을 이 시대의 이 사회의 이 땅의 우리의 현단계적 입장으로부터 전승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드는 때에 우리의 철학이 비로소 건설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매 우리는 선각을 세계에서 구하는 동시에 좀더 우리들 자신의 철학적 유산을 천착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철학이라면 마치 <칸트>나 <헤겔>을 말하여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구폐舊弊를 일소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철학의 근원인, <우리>를 잊어버린 철학이, 감성 오성을 논하며 변증법을 운위한들 우리에게 무슨 관여되는 바 있을 것이랴.

 

4.

   그렇다고 하여 외인의 철학을 배척하여야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배우자. 각기 소장所長을 따라 힘껏 배우자. 마음껏 섭취하자. 우선 우리의 철학의 건설은 진지한 태도로 꾸준히 배워 마지않는 학도들의 배출을 요구한다. <칸트>학자여 나오라. <괴테>학자여 나오라. 우리 세대의 원효, 우리 세대의 퇴계될 사람은 그 누구인가. 모든 방면에 있어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학도여 나오라. 그리고 더욱 우리의 철학적 유산을 조홀粗忽히 보려는 금일에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의 철학적 업적을 연구하는 우리의 독학자篤學者가 나오기를 또한 고대하여 마지않는다. 우리에게는 위의 철학사, 아니 사상사 한 권인들 이렇다 할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여기서 또 한 번 특히 주의하여야 될 것은 이 시대의 이 사회의 이 땅의 대중적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현단계적 입장으로부터 하는 섭취며 전승이어야 될 것을 수유須臾라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철학을 건설할 때는 먼저 철학하는 사람들 자신의 책임임은 물론이겠으나 어떤 개인의 철학이 아니요, 우리의 철학인 이상, 배후에서 그들의 연구를 지지하며 후원하는 일반사회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또한 아울러 있어야 될 것을 다시금 생각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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