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디스 골드먼

칼 슈미트와 중국: 슈미트 열풍의 병리학을 파헤침[각주:1]

 

   광적인 반유대주의와 나치와의 악착스런 유대관계에도 불구하고, 칼 슈미트 (1888-1985)는 20세기 법 · 정치 사상의 거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칸트보다도 날카로운 자가 슈미트다”라고 1923년에 휴고 볼은 썼다. “현인이자... 마치 스페인의 대심문관과도 같은 삼엄함이 [그에겐]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슈미트는 필생의 가톨릭 신자이자 감히 “법학의 신학자”를 자임한 자로서, 특히 낭만주의, 세계시민주의, 인민주권, 민주주의, 그리고 법치주의를 몰아세우던 [그의] 아득하면서도  치밀한 비판들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국가학의 중심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라는 선언으로 아마도 그는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대개의 가설들에 따르면, 『독재』 (1921), 『정치신학』(1922),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1923)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 (1932)을 비롯한 슈미트의 전전戰前 저작들은 바이마르의 헌법적 위기기간 동안 의회민주주의의 지적 토대를 난도질하였으며 또 1933년 히틀러가 수권법에 따라서 비상대권을 장악하는 것을 끝끝내 정당화하였다고 한다.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가 창궐하는 가운데 “거대한 자본주의 이익집단들”과 “패거리들의 작당”이 “국가의 다원주의적인 해소”로 파급되었다고 슈미트는 생각하였다. 전쟁 전의 그는 히틀러를 “소인잡배”라고 여겼으며 나치들은 “야만적”이라고 폄하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1933년 슈미트는 나치 당에 가입하였으며 헤르만 괴링에 의해서 프러시아의 추밀고문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히틀러의 게슈타포 전술을 “도저한 정의”라고 치켜세웠다. 기회주의의 혐의를 받아 당내의 경쟁자에 의해 그가 실각된 것은 1936년이었다.

 

   그의 “절대적 헌법”의 이론에 따르면, “인민”(Volk)의 의지는 “주권자”의 용출하는 꿈틀거림[각주:2]에서 과시되는 것이라 한다. 그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일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도자에게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쟁여져 있는 것이어서 법을 멎게 하거나 그것의 바깥에서 결정을 내리는 그의 권능은 그 자체 주권의 정의가 될 것이었다. 이 같은 “실존주의적”인 정치적 정당성 개념은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의 계보에 놓인 것으로 “결단주의”라고 불린다. 슈미트가 보기에 “법은 언제나 상황적”이고 사회의 “구체적 질서”로부터 돋아나는 것이었다. 그의 사나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잠언의 연장으로서, “친구”와 “적”의 분별이야말로 곧 정치행위의 궁극적인 정수이며 그러므로 준엄한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계관법학자가 내놓는 것은 독재권력과 종족문화적 “동질성”의 특질 [또는 덕성]들을 바탕으로 한 피와 토지Blut und Boden 타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인종적 동일성의 이념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공법에 베이고 거기 드리워질 것입니다.” 칼 슈미트가 1933년 내뱉은 문장이다.

 

   “차별화하는 전쟁 개념으로의 전회”(1937)나 『대지의 노모스』(1950)와 같은 그의 전시 및 전후의 저작들은 국제법과 지정학적 질서의 개념사를 발전시키고 있다. 일례로 슈미트에게 있어서 먼로 독트린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핵심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본주의적”이고 “범-간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목적으로 중세의 반구半球적 주권을 본뜬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이 독트린을 독일적 확장주의라는 대의에 복무하기 위한 “선례”로 전용하였던 바, 이는 [결국에는] 그의 Großraum (광역)의 “공간 이론”으로 귀속하게 된다. 광대한 독일 강토라는 저 자신의 개념에서 히틀러의 모험주의를 긁어내기 위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슈미트는 진땀을 내었다. 그러나 오늘날 광역은 단순히 먼로 독트린의 불가피한 귀결이나 윌슨의 보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Lebensraum (생존권圈) 즉, “국가가... 그 발전의 자연성에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기는 영토”라는 독일의 제국주의적 관념의 주요정식으로서 [가차 없이] 처분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평판이 얼마나 요사스럽든지 간에 슈미트의 사유가 정치적 스펙트럼을 막론하고 사상가들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각각의 사례들은 난해하다. 제가끔의 신념을 지닌 이론가들이 자유주의가 “탈정치화”와 “중립화”로 번져간다는 식의, 실증주의적-관료주의적 악의 평범성에 관한 슈미트의 사변에 [일제히]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이민자들과 미국의 사회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맹렬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고보수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 어빙 크리스톨의 말을 빌리면 “현실에 의해 지질린” 신좌파의 비판자들로 전신하는 데 있어서 슈미트의 영향은 완연하였다. 다니엘 벨이나 한나 아렌트, 또는 1950년대에 슈미트를 길잡이 삼아 프랑스의 맑시즘을 질타하였던 자유주의의 위대한 프랑스인 옹호자 레몽 아롱을 생각해보라. 슈미트가 레오 스트라우스와 “밀어”를 나눴다는 사실은 하인리히 마이어 같은 학자들에 의해 힘주어 말해진 바 있다. 두 사람 모두 곤죽이 된 모더니티에 대한 대안으로서 반계몽주의적 고전주의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피터 틸과 같은 인물은 테러에 대한 전쟁을 위한 불쏘시개로서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들쑤시던 끝에 [결국엔] 대체로 내팽겨쳤는데, 이것은 불과 2007년의 일이다.

 

   좌파연하는 사상가들에 의한 슈미트의 전용은 제법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미 1950년대에 오토 키르하이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가들은 “좌파 슈미트주의자”로 불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진단가들은 현대 민주주의가 “선동적인 금권정치”를 은폐하는 “경제적 행정 공장... 그러니까 거죽[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슈미트의 정식화에 관심을 쏟았다. 2000년 출간된 『제국』에서 대책없는 포스트-맑시스트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전지구적 통치체제의 “사법적 구조”[각주:3]를 비판하면서 저 독일의 법학자를 소환하였다. 매튜 스펙터는 슈미트의 전시 및 전후 저작들이 “국제법과 유럽중심적인 세계질서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의 비판들을 예비”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슈미트가 “저 인류라는 개념”이 “윤리적-인도주의적 의장을 두른... 제국주의적 팽창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라고 아우성쳤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샹탈 무프는 “슈미트의 사유는 자유주의의 싹쓸이가 몰고온 자만심이라는 위험을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고 시사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의 여파 속에서 조르조 아감벤을 위시한 무수한 사람들이 테러에 대한 전쟁을 집행하는 부시 정권을 고발하기 위하여 슈미트의 “예외상태” 개념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슈미트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말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반동적 보수주의가 닥쳐드는 시대에 슈미트는 절박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롤랜드 패리스의 지적대로 “법 외적”이고 “유기체적인” 주권—즉, 문명화된 관념으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규범들을 향한 적의에 바탕하는 통치의 방식들—의 부상에 지식인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데마저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터키-이슬람적 정체성 정치에서부터 블라지미르 푸틴의 러시아-크리스찬 종족주의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르 두긴의 에세이 “러시아를 위한 칼 슈미트의 다섯 가지 교훈”을 참조[각주:4]하라) 또 도날드 트럼프, 로드리고 두테르테, 자이르 보우소나르의 쇼비니즘적인 선동질까지를 포함해서, “반자유주의”는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익숙한 서사 속에서, 고삐 풀린 글로벌리즘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슈미트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 것인가. 1990년대에 철학자 류 샤오펑[각주:5]이 슈미트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 · 출간하기 시작한 이래로 “슈미트 열풍”은 여러 기라성 같은 중국의 법학자들과 중국 공산당의 주류 이데올로그들을 사로잡아 왔다. 슈미트를 전용하였던 다른 어떤 경우들도 중국의 경우만큼 자지러지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창체[각주:6]가 최근에 아틀란틱 지에 기고한 “나치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하다”가 그 예이다.)

 

   언뜻 보아 이 “계관 법학자”가 중국에서 누리는 영예의 이유는 자명한 데가 있다. 법과 정치 이론에 대한 슈미트의 개념적 기여와 세계질서 및 인간 통치에 대한 중국적 비전 사이에는, 도리없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홍콩중문대학의 법학교수인 라이언 미첼이 “1929년 이후 중국의 슈미트 수용사”라는 에서 탁월히 보인 것처럼, 정치와 문화, 법과 사회에 대한 슈미트 사유의 골자는 “국가의 전면적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시민사회의 도전을 으깨버리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서구 자유주의가 머금은 가능성에 대한 불만을 인문화하기 위해서” [기꺼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장제스의 고위 측근이었던 장 준마이[각주:7]와 쉬 다린[각주:8]을 위시한, 베를린과 쾰른에서 교육받은 중국의 고명한 법학자들은 1920년대에 이미 “국가 정당성의 기층에 있는 근거”에 입각해 있는 “안정된 정치적 · 법적 구조의 구체적 선결조건들에 관한 근본질문들의 [슈미트적] 정식화를 귀하게 여겼”다고 미첼은 쓰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건국되고 마오[의 치세]— 슈미트가 그를 존경하였던 것은 우연은 아니거니와—아래 맑시즘이 지성계에 압도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면서, 슈미트의 사유는 냉전 기간 동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덩샤오핑의 “개혁 · 개방”과 더불어 1980년대와 90년대에 슈미트의 사상은 “서구의 경제 사상의 바탕 위에 건설된, 시장중심주의적이되 국가주도적인 개발주의의 에토스”를 발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료주의적 국가주석이었던 후진타오는 도광양해 즉 “...바깥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낮은 기조를 유지하는 데 능숙해야하고 절대로 앞에 나서서 우두머리가 되려하지 말라”는 덩샤오핑의 지표를 준수했다. 21세기 중국이 “기적적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수 있도록 후진타오가 바탕을 마련한 데에는 이 같은 자세가 [적잖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15억 인구의 이 국가는 놀라울 정도로 부강해졌으며 대외적으로는 더 뻔뻔스러워 졌고 대내적으로는 더 막무가내로 되었다.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요란하였으며, “기술 민주주의”와 “기술 전제주의” 사이의 세기적 대결을 예고하는 “신 냉전”에 관한 논의들도 근래에는 들끓었던 것이다. 중국 국내의 국정운영과 외교적 행위에 대한 국제적 분노의 확산에 대치해서, 중국인들은 집요하게 슈미트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다.

 

   분석가들은 중국의 “국가주의자들”의 번창에 열화와 같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저 사상가들은 중국공산당의 주권적 특권에 대한 “치가 떨릴 정도의, 때로는 야비할 정도의 달변의 옹호로 해서 [특히] 두드러진다.” 지성사가인 세바스티앙 비그에 따르면 “(외부적 · 내부적 위협에 맞서는) 국가의 권력은 지고한 정치적 원리로서 필요하다면 헌법의 권력도 복속시킬 수 있다고 국가주의자들은 판단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비그의 동료 사가인 피터 재로우는 “국가주의” 아니, 중국판 정치적 헌정주의를[각주:9] “국가—혹은 통치 제도들—이야말로 자기 정당화하는 주권의 궁극된 서식지이며 선의 지고한 원천이라고 보는 견해”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국가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절대적 헌법”이라는 슈미트의 이론을 밀어붙이며, 그 이론에는 국가와 “해당 국가의 영토적 통일성과 사회질서의 구체적 충만감” 간의 실존적 통일성이 수용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상층부에는 국가주의자들이 산더미와 같다. 이 자들의 [악착스러운] 견해에 접한다면 슈미트조차 혀를 내두를 것이다. 베이징대학교의 법학과 교수이자 (그 이름에 미망이 없지 않을) “신좌파”의 성원인 첸 두안홍[각주:10]이 그 사례이다. “칼 슈미트는 가장 성공적인 이론가이자 정치이론을 헌법학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의 헌법이론은 우리가 숭상하는 것이다”라고 첸은 썼다. 2008년의 한 논문에서 그는 “중국공산당이 지닌 지도자로서의 권리는 중국 헌법의 근본사실이다”라고 부르짖기 위해 슈미트의 『헌법론』(1928)과 『정당성과 타당성』(1932)을 인용하였다. 정치의 “사법화” 즉 리버럴한 헌법재판소의 권한확대—첸은 이것을 근심하였다. 슈미트 모양으로, 첸은 “헌법의 타당성과 생명력은 주권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왕후닝[각주:11]은 또 어떠한가. 그는 중국 공산당의 흑막이자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시진핑 배후의 마스터마인드”로까지 칭해지는 인물이다. 80년대를 통과하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을 필요로 한다고 믿게 된 일군의 권세높은 중국 석학들의 모임에 왕후닝은 소속되어 있다. 비록 그가 그런 딱지를 거부하기는 하지만—그가 선호하는 레테르는 신보수주의자이다—그는 오늘날 “신권위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 치고, 라이언 미첼이 2017년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왕에 관한 , “중국의 계관 이론가”는 [한사코] 슈미트[와 왕후닝과의 연관]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왕후닝은 1980년대초 복단대학교에서 주권의 개념과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장 보댕과 프랑스의 가톨릭철학자 자크 마리탱을 주제로 해서 석사 논문을 썼다. 마리탱은 1941년 “자유의 진보에는 권위의 낙후가 내포되어 있다”고 떠벌렸던 인물이다. 보댕은 프랑스 왕들의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지배를 옹호했던 16세기의 군주제주의자로서 1576년에는 말그대로 주권론이라는 책을 쓴 인물이다. 1991년 쓴 미국에 대항하는 미국 이라는, 서구의 퇴락에 대한 토크빌 풍의 장광설에서 왕후닝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멸적” 관념들이라고 탄식하고 “미국 정신”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위기의 암류”를 통찰했던 것이다.

 

   2021년에 모든 수준의 국가교육에서 “시진핑 사상”의 교수를 강요하는데 왕후닝은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시진핑에게 있어서 “중국의 혈액”은 모든 국민의 정맥을 관류하는 것이고, 이들에게는 “중국 문화의 특수한 브랜드”와 “문명”이 지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왕후닝에게 있어서 “시진핑 사상”은 “중국적 지혜”에 대한 “애국적 감정을 집결시키”기 위한 것인 동시에 “유기적 통일성을 통해” 국민적 “일체감”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 쓰공[각주:12]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내의 “대표적인 슈미트 통”으로서 그는 “시진핑 사상”의 명석함은 “국가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력을 제고하는 데 현대 법학을 복무시킨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중국의 자민족우월주의, 감시체제, 폭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 따위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그는 [칼 슈미트만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 미셸 푸코, 막스 베버 등의 저작에 기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 집안에서의 국가주의는 뒷마당에서는 새로운 지역질서를 건설하려는 중국적 접근법으로 치환된다. 칭화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중국 예외주의”의 대부 대접을 받는 후 안강[각주:13]은 중국이 [이제] “굉장한 국력”을 획득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완전한 부흥”과 “조화로운 아시아-태평양의 수호자”로 역할할 수 있는 중국의 능력이 “영토적 순결함, 국가의 주권, 안보, 그리고 개발에 관한 관심들”을 수호하는 데 달려있다는 식으로 2014년부터 언동해보였던 것이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제 나름의 먼로 독트린을 주장하였던 선례는 넘쳐난다. 여기서[도] 그들은 슈미트에게서 그야말로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그의 전전戰前 시기의 [공개]변호에서 슈미트는 오스틴 챔벌레인 경을 인용하는데, 그 쳄벌레인 경이라는 사내는 1928년 켈로그 조약을 위한 협상 과정의 도중에 영국을 대표해서 “세계에는 그 안녕과 순결함이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필수적이어서 날카롭고도 맹렬한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는 몇몇 지역들이 엄존한다”고 호언하였던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중국의 “맹렬한” 관심지역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견해 역시 다르지 않다. 그 지역엔 홍콩과 남중국해와 대만 등이 속하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들에 대해서는 국가 주권과 국가 안보를 이리덴티즘—“과거에 한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던 모든 영토의 수복을 옹호하는 정책”—과 버무리는 것이 당의 입장으로 되어 있다. 2020년 시행된 홍콩 국가보안법을 다급하게 옹호하면서 첸 두안홍은 “국가의 존립이 최우선이며, 헌법은 다만 이 근본목표에 종속될 뿐이다”고 절규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시진핑의 행위를 미국 남북전쟁 중 법의 지배를 중지시킨 에이브러햄 링컨[의 행위]에 빗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장 쓰공에게 국가는 곧 “윤리적 전체”였으며, 그가 작성에 관여한 백서는 홍콩에 대한 중국의 “온전한 관할권”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홍콩은 [중국과의] 합병을 통하여 그 어떠한 “주권의 찌꺼기”도 없이 성립될 것이었다.

 

   이제 남중국해 얘기를 해보자. [그것을 두고] 추잡한 실랑이가 벌어졌던 저 수역水域의 오랜 “주인”은 중국인들이라고 중국 공산당은 주장한다. 영국인들에 의한 “자유해”론의 무기화와 “공간적으로 이질적인”[각주:14] 열강들의 독일 라이히의 “광역” 안으로의 내습에 대응하려던 슈미트의 공세를 상기시키는 투로, 왕후닝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6)을 들먹여가며 서구의 “문화적 팽창주의”는 오직 중국의 “문화적 주권” 주장에 당해서만 제지될 수 있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대만에 대하여서도, 시진핑과 그의 국가주의자 군단은 중국의 안보이익을 실존주의적으로 설정하기 위해 친구와 적의 분별이라는, 몸서리치게 슈미트적인 포즈를 취해보였던 것이다. “대만의 독립·분리운동은 조국의 재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가장 중대한 장애물이며 국가의 쇄신에 대한 가장 엄중한 위협입니다”라고 2021년 10월 시진핑은 엄포를 놓았다.

 

   시진핑은 [단순한] 지역적 이해를 넘어선 새로운 종류의 국제체제를 구상하고 있다. 그것은 “열강 [또는 세력]들의 관계에 대한 새 모델”에 바탕한 “공동운명체”으로서, “평등과 공정을 강조하는, 패권에 대한 중국적 이해를 육화”하는 “윈윈하는 경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장 쓰공의 말을 빌자면, 고대 중국의 제국들은 “보편·동질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좀체] 차이를 허물어내지 않는 평화적인 공존의 모색”으로 특징지어진다고도 한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이른바]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라는 외교적 독트린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지정학적 질서와 문명의 다원주의에 관한 중세적 관념을 향한 슈미트의 호소와 많이 닮아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의 형상에 입각해서 국제 체제를 빚어내는 일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당장은, 근대 국가체계의 한계에 시진핑은 편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특히 제 뒷마당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베스트팔렌적인 [의미에서의] 주권을 휘둘러 마지않았다. 장 쓰공은 “지리와 법권法权: 맥킨더와 슈미트가 제국간의 충돌을 논하다”라는 2018년의 논문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질서의 비전과 핼포드 맥킨더의 “심장지역 이론”과 칼 슈미트의 광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슈미트가 말하는 광역이란, 어떤 반구적 헤게모니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 안에서는 “생의 민족적(völkish) 질서” 즉 이데올로기로 팽팽해진 종족문명이 저 자신의 힘과 위력을 바깥으로 “뿜어낼” 것이었다. “국제법의 광역 원리”라는 1939년의 강연문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국가”가 “경제적인 팽창의 과정”에 의해서 “가공할 거리를 관통해내는 네트워크”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적-산업적-경제적 질서”를 건립하게 되는 발전의 추이를 서술하였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라이언 미첼이 지적한 것처럼 “슈미트의 중국에 대한 최대 기여는 국내 문제에 국한한 것이라기보다도 마침내 아시아적 ‘광역’의 조직과 관련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실크로드 경제벨트” 혹은 “일대일로 사업”은 광역의 “원리”에 비추어 가늠해 볼 수 있다. 일대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과 유럽을 포함하는, 국가간의 선의의 인프라 · 경제 개발 프로그램이라고 [흔히]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대개의 서구의 분석가들에게 일대일로는 지정학적 · 전략적인 트로이의 목마와 흡사한 것이며 [가히] “중국몽”의 육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중심이자 문명화된 제국의 수도[즉 북경]로부터 번져나와 주변부를 가지런히 하고 상호의존과 공동번영과 공존의 무늬를 추슬러 나가는, 동심원들의 고전적 ‘조공 체계’”를 중국인들은 부활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이코노미와 같은 관찰자들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뜨는 바, 그에게 일대일로는 천하 (“바깥이 없다”)의 부활에 다름 아니었다. 이 천하는 “천명”으로 부풀어있는 북경의 패권과 유교적 가치가, 유사 위성국가들로 구성된 위계적 세계질서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던, 과거의 황금시대에 대한 고대 제국적인 중국의 비전을 의미할 것이었다.

 

   유라시아 전부를 포괄하는 중국 중심의 광역—아니, 중국-라이히라고 불러야 할까—은 아직 [유효한]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충칭 시당위원회의 당교党校에 소속된 학자인 팡 쉬[각주:15]가 2018년에 쓴 “대공간의 질서로써 보편제국에 이별을 고하기”는 어떤 [세간의] 추측들을 바숴버리기는 한다. 오컴의 면도날 얘기를 하는 것이다. 만일 국내정치에 관한 중국의 해법이 그들의 지정학적 야심을 내비치는 것이라면, 열강 간의 세기적 충돌은 [마침내]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접을 떠는 일이나 [터무니없는] 과장은 피해야 옳지만, 중국이 [모처럼] 하는 말은 그대로 믿어주는 편이 합당할 성싶다. 특히 그 말이 칼 슈미트의 환장할 언어에 끄달리고 있다면 말이다.

  1. Addis Goldman의 “Why Schmitt Matters to China: Uncovering the Pathology of Schmitt Fever” 의 번역. 제목을 수정했다. 해당 주제와 관련해 읽을만한 기사로는 (1) , (2) 등이 있다. 또한 열린책들에서 번역 출간한 에번 오스노스의 『야망의 시대』도 도움이 된다. 특히 중국의 레오 스트라우스 수용과 관련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송인재의 “중국의 길과 문명/문화”도 유용한 논문이다. [본문으로]
  2. 엘랑 비탈. 베르그송의 용어로 잘 알려져있으나, 다소 이색적으로 번역해보았다. [본문으로]
  3. 관련해서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법현상학 참조. [본문으로]
  4. 원문은 여기, 영역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본문으로]
  5. 刘小枫 (1956-) [본문으로]
  6. Chang Che [본문으로]
  7. 张君劢 (1887-1969) [본문으로]
  8. 徐道邻 (1907-1973) [본문으로]
  9. “정치적 헌정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Richard Bellamy 의 동명의 책 참조. [본문으로]
  10. 陈端洪 (1966-) [본문으로]
  11. 王沪宁 (1955-) [본문으로]
  12. 強世功 (1967-) [본문으로]
  13. 胡鞍钢 (1953-) [본문으로]
  14. 또는 슈미트의 번역자인 김효전의 번역에 따르면 “역외의.” [본문으로]
  15. 方旭 (1984-) [본문으로]

윌리엄 F. 버클리 Jr.

보수주의의 경험적 정의

 

. . . 그만 못 이기는 체로, 변호인의 마음으로

 

   제가 청중으로부터 가장 빈번히 받는 두 질문이 있습니다 – 어느 쪽에도 탐탁한 대답을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만. 첫째로, 제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위기감, 망국의 기미를 공유하는 편에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소?」 하고 묻곤 하는데 – 이에 대한 답을 저는 모를뿐더러, 금언을 빙자한 해답을 지어내기에는 제 비위에 영 거슬립디다. 둘째로는 청중이 때로는 호의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던지는 「보수주의는 무엇이오?」라는  질문입니다. 또 어쩌다는 강연자의 대답으로부터 예상할만한 장황한 얼버무림을 예방이라도 하듯, 「간추려 한마디로 말해주십시오」라고 까지 보태곤 합니다. 그럴 적에 저는 이런 답을 꺼내곤 했습니다. 「제가 기독교의 정의를 한마디로 간추려 내릴 수 없을진댄 기독교가 정의 불가능한 것은 아니외다.」 대개는 가지런히 포장된 보수주의의 정의를 희망했다가도 이런 답을 듣고 나면 여간 단념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제가 간결한 뜻풀이를 해주었을진댄, 저들은 칸막이식으로 분할된 머릿속에 점성술, 시체 성애, 외래인 혐오 그리고 속취philistinism 따위의 단어들의 정의 옆에 (혹은 치워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정리해두기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그래도 끈덕지게 조르는 치들에게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리처드 위버 교수가 내린 보수주의의 정의로 엄벌을 줍니다 : 「세계의 현상학이 시나브로 닿아가고 있는 본질들의 어떤 전형」 – 자, 그 어떤 시도 못지않게 장렬하지 않습니까. 물론 요지는 이 시도 자체가 단순 말씨름에 위험하게 인접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제가 보수주의의 의미를 구하는 청중을 실망시키기를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보수주의가 무언지는 모르겠다손 해도,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얼추 알 것도 같습니다. 고백하건대,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보다도 저는 자유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저를 팽이 돌리듯 빙빙 돌리셔도, 저는 방 안의 한 명의 자유주의자가 있는 그곳으로, 심지어 그가 화분 뒤에 꼭꼭 숨어 있을지언정, 방황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저로써는 이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신통한 후각을 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이 시대의 압력 하에, 목전에 닥친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을 대열에 끼게 해 줄 수밖에 없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고, 보수주의자라서 응당 갖추고 있을 정중함이 저들을 보수주의의 친위병janissaries이 아니라 동료로 여겨 준다는 사실도 저는 잘 알기 때문에, 저 유혹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순 경험적으로 말하건대, 저 카키 바지를 꿰뚫어 보기가, 즉 저만치서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보수주의자인지, 급진주의자인지 아니면 순 수선쟁이인지, 아니면 불장난쟁이인지 확신을 갖고 구별하기가 제법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우리의 오합지중 군대가 놀랍게도 마치 잘 통솔된 부대처럼 한결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눈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흐뭇한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저조차도 제가 참된 보수주의자가 정녕 맞는지 혹 의심해본 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그 명칭의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만, 저는 기질적으로 종자가 원체 다른 까닭에, 기질이 그렇다면 얼마나 결정적인가, 하는 질문 또한 스스로에게 던질 밖에는 없습니다. 혼란의 여지는 이것 외에도 더 있습니다. 예컨대 위태커 챔버스는 보수주의자와 「우익man of the Right」 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직에서 사임하며 그가 저에게 쓰기를, 「당신은 보수주의자이고, 당신만큼 그 명함에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하오. 하지만 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소. 이런 질문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우익」이라 칭할 수 밖에는 없소.」 저는 이 편지에 대해 깊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위태커 챔버스가 사임한 잡지의 편집장이라면 그래야 하듯이, 특히 그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 이르건대 5년 된 우리 잡지의 역사상 도저히 더 이상 편집부의 이념적 나침반 내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선임 위원회에서 사직한 사람은 챔버스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도 챔버스는 저희 잡지의 지면에 (혹은, 제가 아는 한 그의 삶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어떤 지면에도) 『내셔널 리뷰』의 노선에 어긋나는 글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참, 물론 이것도 다 예삿일입니다. 이렇고 저런 불쾌한 기사나 사설, 서평을 빌미 삼아 사임을 하고, 편지를 써대고, 비난해 재끼고, 어디 당신 무덤에 풀 잘 자라나 두고 보자, 하고 막말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실失은 일체 기탄없는 저널리즘의 결실이고, 인간사의 숱한 손실에 다름 아닙니다. 그 따위 일들은 우리의 이념적 빈약성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주의의 근본입장The Conservative Position을 명료히 표현하는 데 있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내셔널 리뷰』가 발간되기 전에 우리가 넘치게 받던 의심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내셔널 리뷰』의 노선은 창간호부터 즉각 뚜렷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당신과 당신 잡지의 선전에 도움이 되는 다음에야, 당연히 그렇게 말하시겠지」 트집쟁이는 이런 식으로 흠잡으려고 하겠지만, 제 말은 경험적인 근거를 둔 주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에세이에서 제가 곧 제기할 보수주의의 뜻에 관한 주장들도 후험적a posteriori으로, 즉 경험적 사실로부터 이론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논증될 것입니다 – 순전히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으로서 저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반복해서 언급 않을테니 여기서 확실히 하겠습니다 : 이 에세이는 『내셔널 리뷰』의 경험에 대한 것이고, 여타 방법들을 배제하는 절차를 통해 이 경험이 현대 보수주의의 쓸만한 정의를 세우는 데 있을만한 유용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결코 오로지 『내셔널 리뷰』만이 멀쩡히 작동하는 현대 보수주의의 증류기alembic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저로서는 어떤 전문성을 갖고 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고, 이 경험이 서술할 가치가 있을 만큼 흥미로울지 모릅니다.

 

   『내셔널 리뷰』의 주요 필진은, 특정한 이념과 태도에 헌신적인, 창간때와 거의 같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잡지가 창간되자마자 얻은, 그리고 머지않아 확대할 수 있었던 독자층은 본능적으로 우리 잡지의 지도적 원칙들이 이루고 있는 흐뭇한 절충주의를 반색하고 납득해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반면에 비평가들은 처음에는 촌평이랍시고 「이 나라가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보수성향의 잡지인데, 『내셔널 리뷰』를 읽어보니,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여전히 보수성향의 잡지라 해야겠군」 혹은 이 엇비슷한 생트집을 잡다가, 지금에 와서는 일부 억척빼기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단념하고 『내셔널 리뷰』를 간단하게 「보수성향 잡지」라고 일컫게 되었습니다. 말했듯이 몇몇 고집 센 억지꾼들은 꼭 의례적인 멸칭을 앞에 덧붙입디다 : 「매카시즘 성향의 잡지 『내셔널 리뷰』」 아니면 「극우파 『내셔널 리뷰』」 따위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모름지기 언어라는 것에서 지도원칙이란 그 용법이므로, 피터 비어렉Peter Viereck이나 클린턴 로시터Clinton Rossiter, 월터 리프먼이 미국 보수주의의 참된 설계자들이라 믿고 있는 분들이 유별난 인사 취급받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세상과 의사소통의 단절을 자초하는 우익 신사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벌써 두 세대가 지나도록, 적어도 「오늘날의 자유주의자modern liberal는 인간을, 다른 어떤 구속보다, 혼인계약서로부터 해방liberate시키고자 한다」는 산타야나의 논평 이래로, 자유주의를 숫제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Quamobrem ortamur vos litterarum studia [...]

카롤루스 대제

풀다 수도원장 바우굴프에게 (ca. 784)

 

장학을 위한 칙서Encyclica de litteris colendis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입어 프랑크인들과 랑고바르드인들의 왕, 로마인들의 군주 카롤루스가 바우굴프 수도원장과 자네에게 일임된 모든 신도들에게, 짐의 칙사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안부를 전하노라.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는 너희의 지극한 마음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짐과 짐의 신자들이 살피건대, 자애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짐에게 통제를 일임하신 관구와 수도원들은 규범에 따른 삶을 꾸리고 거룩한 종교를 논하는 것 외에도, 배울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들이 제각각의 능력에 따라 학문의 연마에도 힘쓰도록 이끌어야 하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수도원의 규범이 덕의 강직함에 질서와 품위를 부여하듯이, 가르침과 배움의 견실함으로 말의 순서가 질서와 품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구든 바르게 삶으로써 하느님을 즐겁게 하고자 한다면, 바르게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 역시 건성으로 할 수 없지 않은가! 성서에 쓰여있는 바 : 「대개 네 말로 인하여 발명도 할 것이요 또 네 말로 인하여 죄안도 받으리라」 (마 12,37). 올바른 행동이 지식보다 비록 나을지언정, 순서로는 아는 것이 하는 것에 앞서매, 제각기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우선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함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입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머리로써 더 넉넉히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거짓된 언사를 피해야 한다면, 다름 아닌 이 취지에서 선택받은 이들은 더욱이, 오로지 진리를 섬기기 위하여, 힘이 닿는 곳까지 거짓을 물리쳐야 하지 않으랴. 근 몇 년간 적지 않은 수도원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보아, 수도원의 형제들이 짐을 위하여 거룩하고 독실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쓰여있긴 하건마는, 꽤 많은 서한의 헌사에는 엉성한 문투가 올곧은 신심과 뒤섞여 버무려져 있다. 제아무리 지극한 독실함으로 충실히 머릿속에서 뭘 구술해 보아야, 배움을 태만히 한 소치로 문장이 거칠어지다 못해, 그것을 말본에 비추어 나무랄 여지없이 올바르게 표현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게 아니겠느냐. 글의 됨됨이가 변변치 아니한 만큼, 성서의 이치를 깨닫는 데에 불가결한 지혜 역시 도통 마뜩잖은 수준일 것이라는 짐의 우려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도다. 말의 잘못이 주지하다시피 위험하다면, 이해의 잘못은 정녕 얼마나 더 위험할 것이뇨. 그러므로 짐은 너희가 글공부를 소홀케 하지 않기를 격권하며, 너희는 성서의 신비를 더 쉽고 더 정확하게 꿰뚫어 보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는 겸손한 마음으로 면학하여라. 성서는 게다가 매 장마다 수사적 장치나 비유 따위로 넘쳐나니, 독자가 앞서 문학에 통달해 있다면 그만치 더 기민히 영적인 이해에 달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자못 엄연하도다. 배울 자세와 능력, 다른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갈증을 두루 지닌 바로 그런 인물이야말로 이 일을 위해 선택받았노라. 이것이 짐의 명령의 견결함과 같은 마음으로 행해질진저. 짐은 너희가 교회의 전사에 걸맞은 내면의 독실함과 외면의 학식을 갖춘 이들로서 바른 삶으로 순결하고 바른 말솜씨로 박학하게 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들과 얼굴을 맞대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이, 너희의 겉모습을 본보기 삼아 깨우침을 얻는 것처럼, 경전이나 성가를 읊조리는 너희의 지혜를 귀담아 들어 감화되기를 바라마지 않노라. 오직 보기만을 간청했던 이들이 눈과 귀로 고루 감화되어 기쁨에 한껏 차서 전능한 주님께 찬사 드리며 물러날 수 있기를. 짐의 성총을 구한다면, 이 서신의 필사본을 모든 부주교들, 자네의 동료 주교들을 비롯 하늘 아래 모든 수도원들에 부치기를 등한하지 말라.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ed. Pertz. Legum. Tomus I. 52-53.

원문

보들리안 M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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