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신라는 참 아직도 오리무중이군요

—시인 모윤숙 선생에게

 

안녕하십니까.

   ‘혜성’이라는 잡지사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장 써 달라고 하여서 붓을 들기는 하였습니다마는 무얼 썼으면 좋을는지요. 처음 생각엔 아주 용이한 일일 것 같더니만, 막상 종이를 펴 놓고 보니 이것 또한 결코 손쉬운 일은 아닙니다그려. 더구나 처음부터 중인 앞에 내놓을 것을 전제로 하는 이러한 따위의 공개서한이란, 참으로 쑥스럽고 무리한 것임을 처음 경험합니다.

 

   대개 편지라는 것은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서로의 심중을 호소하는 것이거나 혹은 무슨 부탁을 하거나 또는 거기 대한 회답을 하는 유일 텐데, 중인환시리에 전하는 안부 말씀이란 한두 마디면 족할 것이며, 지금 당장엔 편지로 여쭐 긴급한 부탁도 없고 보니 무얼 써야 좋을는지요. 들으면 서구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살로메라는 여자 친구에게 늘 장문의 편지로 자기의 심정을 고백하고 호소한 일도 있다고는 합니다마는, 제弟로 말하면 동양 사람이 되어서 그런지 근자 10여 년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나 간에 긴급한 용무 외엔 심중 호소류의 편지라는 것을 도모지 하지 않고, 심중에 일어나는 대소 사건은 제 심중에서만 썩혀 온 위인이 되고 보니, 이것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시심詩心에 관한 것이랄까—그런 것이나 한두 가지 적어 이 공개서신을 삼을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겠습니다. 깊은 양찰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에겐 지금 조수潮水처럼 간만干滿하는 몇 가지의 병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 저작류를 시정에 팔아 호구의 요를 거둬 가는 유의 행동만은 아직도 부득이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그 밖엔 별다른 행동이라 할 것도 없이 책상가에 앉았거나 자리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라 하오면 제 자신에게는 매우 중대한 생각이 몇 가지 계속되고 있기는 합니다.

 

   뭐라 할까, 하나는 저 ‘신라’라는 것인데요. 그것을 요즘은 소학생들도 모두 좋다고 하고 있지만, 제도 벌써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이 되어서 우리의 현대에 재현해 보고 싶은 지향이고, 또 하나는—이것 넋두리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 참으로 미안합니다만 그것은 현재도 나를 에워싸고 있는 꽤 오랜 세월을 누적해 온 이 나라 동포들의 소리입니다. 그중에서도 정형화되고 음률화된 놈—일테면 이동백이나 송만갑, 이화중선, 김남수류의 소리들입니다.

 

   그러나 모 선생, 누대 썩어 온 이 나라의 소리가 소리로나마 내 주위에서 나를 울리는 데 비해서는 신라는 참 아직도 오리무중이군요. 분명히 나의 현상과 가장 가까웁기 때문에 나를 울리는, 이동백이나 이화중선 등이 대표적인 모가지와 심금을 통해 울려오는 이 나라의 소리는 신라의 흔적이 담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닦아도 벌써 그 본바탕으로는 좀처럼 돌아갈 수 없는 녹이 잠뿍 낀 금속기나 아니면 이끼가 자욱이 앉은 암석과 같이만 느끼어지는 이 소리들은 신라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청산별곡」류와도 근사한 점으로 보아서 그 근원을 찾는다면 고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요?

 

   하여간 이 소리—이놈은 항시 나보고 서리 내리는 야삼경에 홀로 일어나라 하고, 보퉁이나 하나 꾸려 들고 홀로 떠나라 하고, 이별하라 하고, 늘 울라 하고, 술을 마시라 하고, 한을 품으라 하고, 살아도 별일은 없다 하고—늘 속삭이는 놈입니다. 어찌 이놈이 내게만 그렇게 속삭일 뿐일까요?

 

   아무리 생각하여도 역시 내 한스러운 과거 시작詩作의 밑바탕이 되던 이놈—잊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무슨 매력 때문인지 거기에서 손쉽게 떠날 수가 없는 이놈이 내게뿐만 아니라 많은 이 나라 남녀들에게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걸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런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그렇지만 이건 내가 신라란 무엇이라고 똑똑히 벌써 수개월 전부터 신라라는 것이 가능한 분위기를 내 속에 모아 보기 위하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타 신라에 관한 이야기가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은 손이 닿는 대로 모조리 주워다가 읽어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신라는 아직도 개념이요, 아지랑이처럼 그 주위가 아물아물할 뿐 어떠한 정체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채로 있을 뿐입니다.

 

   신라는 생각건대 저 서구의 상대上代인 그리스와 비슷한 것일까요? 그리스 신화의 기름진 윤기 흐르는 5월과 같은 것일까요?

 

   아마 그 비슷하겠지요. 그러나 신화 한 권으로도 그리스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있지만, 신라는 아무것도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있다면 『삼국유사』등에 전해 오는 몇 조각의 이야기들입니다. 김춘수의 씨를 처녀의 배 속에 지니고 장작더미 불 위에 얹혀져서도 오히려 한결같았던 김유신 매씨의 이야기는 요새 신문에 전해지는 정화情話보다는 너무나 큽니다. 뒤를 이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법민이 “내가 죽으면 호국룡이 되어 이 나라를 또 한 번 지킨다”고 임종에 유언하였다는 이야기도 현대인의 임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 같습니다. 총명한 지혜의 사람인 선덕여왕이 자기를 짝사랑하다가 미쳐 버린 지귀란 사내를 자기의 수레 뒤에 따르라 하고, 잠든 그의 가슴 위에 왕자王者로서 팔찌를 벗어 얹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물론 이조나 고려조의 일반 윤리로선 측정도 해 볼 수 없는 가화佳話이긴 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러나 주옥인 채 그대로 온갖 잡토 속에 묻혀서 우리들 속에 아무런 빛도 재생하지 못하고 있음은 웬일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제2의 호머’에 해당할 만한 시인도 이 나라엔 일찍이 고려에도 이조에도 없어서 그것을 재현하지 못한 때문이라 봅니다. 물론 문헌의 인멸이 심한 이곳이고 보니 혹시 그런 것이 있다가도 모두 타 버렸는지는 모르지요만.

 

   하여간 선인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보여 준 일이 없는 신라 정신의 집중적인 현대적 재현이 절실히 필요한 줄은 알겠습니다. 시로 소설로 희곡으로 이것들은 현대적으로 재형성되어서, 구미인들이 근대에 재활한 그리스 정신과 같이 우리가 늘 의거할 한 전통으로 화해야 할 것만은 알겠습니다. 요컨대 이지러지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신라에의 지향에 비해, 아직도 주위의 소리들은 너무나 절실히 내게 다시 이끼와 녹을 얹고 있을 뿐이로군요. 저 서럽고 한스러운 김남수나 이동백이나 이화중선 같은 사람들의 ‘석양판’을 “가자 가자 가자”고만 하는 것 같은 소리······ 신라가 반나마 개념인 대신 이 퇴락한 것들은 아직도 오히려 나를 더 많이 이끄는 매력임에 틀림없습니다.

 

 

   쓰다 보니 벌써 지정 매수가 훨씬 넘었습니다. 두서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현명하신 선생께서는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지금 제에겐 어디 지구의 끝 간 곳에 초막을 얽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한번 떠나면 선생이 최근 미국을 다녀오시듯 그렇게 쉽게 아니 오고 거기서 ‘조국이 가진 사랑의 뜻’이 무엇인가를 오래오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은 우선 이만큼 줄입니다.

(『혜성』 1950.5.)

 

 

신성성의 부흥을 위하여

서정주

 

   여기 이 제목에서 내가 나타내고자 한 뜻을 먼저 말씀하자면, 그건 무슨 초인간적인 의미나 느낌을 이 ‘신성성’이라는 말에서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그것이 언제나 당연히 구유해야 할—이것 없이는 인간의 존엄이나 바른 수준마저도 유지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다.

 

   영어로 ‘생크터티sanctity’라는 이 한 마디 서양말이 갖는 의미와 가장 큰 감동은 물론 지금으로부터 천구백수십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서양 사람들의 세계에 두루 퍼지기 비롯한 것으로, 그것이 문예 부흥기까지에 이르는 천 몇백년 동안을 헬레니즘이나 고대 로마풍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정화해 낸 큰 공적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오랫동안 서양 세계에서는 신성성이 그들의 천지에서 가장 큰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신성성이라는 것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성직자의 연설 속에서나 가끔 인용될 분, 휴머니티—인간성이라는 말의 위력의 그늘에 숨어 숨도 제대로는 못 쉬는 딱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주창된 이래 인간성의 자유해방은 나날이 그 도수를 더해 와서 오륙백 년 지나는 동안에 인제는 한 민족의 백분의 일의 AIDS 오염의 자유시대까지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중세의 신성성 대신에 우리가 개발해 온 휴머니즘의 이 인간성이라는 괴물도 인제는 재평가의 조상俎上에 올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긴데, 우리들 시인이나 작가들도 르네상스 이래 일삼아 온 인간성의 저차원에로의 에누리—특히 19세기의 자연과학주의 발흥 이래 더욱더 심해져 온 그 에누리 속의 인기주의를 현명하게 지양하고, 인간다운 인간성의 재정립을 위한 좀 더 고차원의 모랄의 추구부터 마음 써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령 순결한 처녀의 건전한 아름다움 같은 건 누가 뭐라 하건 지켜 줘야 할 것 아닌가? 성처녀성이라는 게 결혼 전까지 꽃다히 유지되게 한다 해서 민족 사회나 인류 사회에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가 될 것도 창피할 것도 없지 않은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천연성 같은 것도 유치하다고 하여 접어 두어 버리기만 할 것인가?

 

   혼란한 사회 상황은 열심히 다루어 표현하면서도, 혼란에 동요되지 않는 맑게 핀 꽃처럼 살려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지탄해야 하는가?

 

   인간성의 차원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모든 신성성, 모든 순결성, 모든 존엄성에 대한 긍정적 재수용은 오늘의 작가 시인들에게는 오늘이 오늘인 만치 더 한층 절실히 요청되는 걸로 내게는 생각된다. 경제나 정치, 각종 혁명 이전의 문제로서 간절히, 간절히 요청된다고 생각된다.

 

(『문학정신』 1987.11)  

숨은 독일 : 1933년 11월 14일, 교수 재취임에 부치는 강연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에크하르트 그뤼네발트 編]

 

   예비 수강생들을 모시고 하나의 강연으로서 직무의 새로운 시작을 공고하는 것은 학계의 오랜 관례입니다. 제 공식 강의가 중단된 지 고작 한 학기밖에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지난 몇달간 있었던 가공할 사건들을 두고 본다면 교육자로서의 직분의 재개를 기화로 삼아 제 자신을 청중들에게 새로이 선보이는 것이 반드시 폭이 맞지 않는 일만은 아닐겁니다. 취임강연의 형식을 빌어서, 이번 겨울학기의 본격적인 내용으로 옮겨가기 전에 오늘은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해 제군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해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고백이고자 하는 이 강연으로 해서—그나저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들에 고백하려는 용기를 작정할 수 없다면 교수라는 직함은 도대체 무슨 낯으로 이고 다닌다는 말입니까![각주:1]—그대들이 모든 교육의 궁극적인 원천과 목적에 대한 제 소견이 어떻게 항상 변함없을 수 있었는지, 그래서 제가 예전에 했던 것과 꼭 같이 오늘 그대들 앞에서 말을 늘어놓고 또 봄에 툭 끊어져버렸던 실마리를 다시 이을 수 있었는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얽어서 깊이 벌어진 틈들 위를 넘어가거나, 말솜씨를 부려서 곤란한 부분들을 회피하는 등의 일을 이 사람으로부터는 전혀 기대하실 수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오직 명징함과 이 땅의 불멸의 얼들과 그들의 약속에 대한 부동의 믿음만이 가히 오늘과 내일의 독일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발붙일 자리가 되기만 한다면.

 

I.

   이 취임강연의 주제는 숨은 독일입니다.

   아마 이 «숨은 독일»이라는 개념이 이미 하나의 내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파울 데] 라가르데가 창안한 이 개념은 «렘브란트적 독일인» [율리우스] 랑벤에 의해  차용되어 활용되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는 렘브란트, 베토벤, 괴테를 가리켜 «숨은 독일의 진정한 제왕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각주:2] 이후, 『정신적 운동을 위한 연감 Jahrbuch für die geistige Bewegung』의 창간호에서 «숨은 독일» 개념에 착목하여 그것에 사뭇 다른 의미를 주게 되는 것은 카를 볼프스켈입니다. 볼프스켈은 «숨은 독일»을 아직 잠자고 있는 일종 독일적인 힘, 즉 도래할 나라Nation의 고귀한 본성이 거기 예상되어vorgebildet 있거나 이미 내장되어 있는 그러한 힘의 담지자로 간주하였습니다. 그가 본 «숨은 독일»이란 불변하고 항구한 힘,  즉 시야로 흘러드는 독일 깊이에서 수줍게 배겨내는 암류로서 또한 오직 그림Bilder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는 그러한 힘의 의탁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볼프스켈은 감추어진 저 위력을 수호하고 보호하는 살아있는 공동체라는 뜻을 이 개념에 부과합니다. 그에게 있어 «숨은 독일»이란 전전 戰前 시대의 저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시가 자아낸 것으로서 당시 오직 슈테판 게오르게 언저리에서 피력되어 그곳에서 관철된 것이었습니다. 

   1910년 볼프스켈은 이렇게 씁니다. «이 숨은 독일이 고갈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산과 동굴의 휴거休居[각주:3]로부터 깨어 상승하기를 유례없이 원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틀림없이 삼엄하고, 고단하며, 위중할, 틀림없이 미증유의 격동으로 유난할 미래, 그런가 하면 어쩌면 심층의 위력들이 최종적으로 발동하기를 원하는 그 미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주고 있다.»

   처음에는 오직 소수에게만 속했던 이러한 확신, 숨은 독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겨레와 겨레의 찬연한 재생에 대한 믿음과 결합됩니다. 마침내 묵묵하던 갖가지의 현들이 다시 죄어지고 낮게 읊조리는 전후 독일의 극단적인 경제적 질곡 속에서, «숨은 독일»에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다만 그 수를 더하여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개념을 부풀렸을 뿐, 귀한 것에 치졸한 형태를 즉 전적으로 이질적인 빛깔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보람과 이득, 무리와 동맹Bund이 버무려지고, 끝내는 시인 [게오르게] 그 자신이 이지러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화적인 상Bild이 제시되고 그와 더불어 다른 나라[각주:4]의 신비가 창조된 것은 바로 «숨은 독일»이라는 시에서였습니다. 그의 둘레에 모인 지기들과의 개별적인 만남이 괴어놓은 그같은 영향 아래에서, 시인은 «숨은 독일»의 가장 낯설고도 괴이한 실질적 위력들을 여하한 궤란에도 불복하고 여하한 췌사Zerredung로부터도 비껴나있는, 삶의 그림들의 무진함Unhebbarkeit[각주:5]으로 휘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삶의 그림들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것은 과연 불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잡박한 것들을 알아보아야 별 의미가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시 자체보다 강한 인상Bild을 영혼에 아로새길 수 없을 것이며, 나아가 그 앎이라는 것이 비밀이 공연스레 된다는 결구의 의미와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숭엄한 대지의 

            보듬어내는 잠 속에서

            더듬어 범한 자 아직 없는 곳

            제일 끝자락 혈에 오래 들어 –

            오늘에는 묘연한 기적이 

            박두할 날의 운명으로 물드네

 

   시호詩豪가 살고 있고 또 살았던 협소한 «숨은 독일»이 아니라, 그가 평생 가르치고 가르쳤던, 또 그 가르친다는 것으로 해서 인식하려 했던 더 큰 «숨은 독일», 바로 그것에 대해 저는 오늘 말해보려고 합니다. 요컨대 그 내림Epiphanie이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웅혼한 «숨은 독일», 저는 이제 이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해 보이려는 것입니다.

 

II.

   그대들에게 이미 암시한 바 있어 거듭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마는, «숨은 독일»은 어디엔가 있는 금지된 비밀결사로 평가해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자리해본 일 없는 별천지적 가공물 운운 조소해주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숨은 독일»이란 최후의 심판이나 죽은자의 부활에 필적할만큼 사철 감돌고 현재적인 것, 그러니까 치사적tödlich-faktisch[각주:6]이고 실재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독일에서 터져나오고 독일을 위해 살라졌던 시인과 현자, 영웅과 성인, 사제와 제물 간의 내밀한 공동체이자, 여지껏 설핏한 모습을 했을지언정, 독일의 바른 얼굴을 창조해낸 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공동체로 친다면 올림포스를 방불하는 신국이며, 중세 성인과 천사의 나라에 통하는 혼령의 왕국, 또 단테가 «인세Humana Civilitas»라 칭한 바 세 부분으로 구획된 명계冥界와 견줄만한 사람의 나라인 것입니다.[각주:7] 그것은 위계와 위신을 기준으로 정돈된, 오늘의, 찾아들, 그리고 구원久遠의 독일적 영웅세계입니다. 마침 이룩된 독일적 범위에 연결지어져 있으나 거기에 간수되지 않는 이 «숨은 독일»에 대해서는, 모든 신비에 대해 그러하듯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ταῦτα δὲ ἐγένετο μὲν οὐδέποτε, ἔστι δὲ ἀεί, «이 일들은 결코 일어나거나 발생한 적 없으나, 영속하며 영구하다.»[각주:8]

   환언하면 결코 구현된 일은 없으되 영구한, 저 비장된 단국檀國은 무슨 신비처럼 극소하게만 자신을 내비친다는 것입니다. 최상급의 의미에서 «독일적인 것»이 있던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찰나, 그맘때의 형편이나 그맘때의 국체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독일, 그러니까 물리적 공공연한 나라 너머로 그 존재와 생이 부어진 독일이 항시 존속하고 있었음을, 눈과 귀에 값하는 자들이라면[각주:9] 누구든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혼들의 나라이겠으며, 그곳에서는 늘 똑같은, 제가끔의 서열과 개성의, 다분 독일적인 존자尊者들이 지배하고 군림하니, 비록 고매하고 우뚝한 그들의 왕홀 아래서 전 강역이 몹시 깊은 충심으로 조아린 적은 일순간도 없다고는 하나, 영속하며 영구한 그 제권만큼은, 현시의 외세에 정면해서 가장 황막한 은거 속에서, 그리하여는 영구한 독일을 위하여서, 늘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그 은은한 나라의 군장 중 하나인 괴테를 빌어보겠습니다. «최고의 것은 내가 구르고, 뼈를 굵히며, 또 세계에 대적해서 얻어낸 짙은 적요이며, 그것은 세계가 불과 칼로써도 내게서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다.»[각주:10]

   사실에 있어 «숨은 독일»의 군장들은 어떤 창검으로도 상해놓을 수 없으며, 그들의 영상을 길바닥으로 끌고 시세에 맞추어 빗대놓아, 이윽고는 자신의 살과 피로서 주워댄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억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림자가 풀어헤쳐진다면.. 그리고 호메로스의 네퀴아[각주:11]와 아이네이스의 여섯번째 책에서 얘기되어진 바대로, 그리고『신곡Divina Commedia』 에서 이미 얘기되어진 바대로, 음계에 들어서는 것은 오직 각별한 경우들에 적자들에 한해서만 허락되었으며, 그때조차 저 음영들은 말 상대하거나 설하기를 마지못해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저 «숨은 독일»을 심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다만 그것을 가지고 호기를 부린다거나, 글쎄 다만 어이없는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누되게한다면, 저 숨은 왕국은 흘깃거리지도 말기를. 생령들도 살인적이라 해야 하기에. 그 자체 판관인 그들은, 그들을 공연히 불러올림에 그들을 재보거나 그들에 비추어 자신을 어림하려는 이들이라면 빠짐없이 바숴버리는 것입니다. 하긴 별별 기를 내어도 저 구천으로 쳐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며, 물러터진 위선 가지고 지옥으로 가기는 쑥스러울 것입니다. «숨은 독일»의 주민들은 본디 고매하여 막된 손들의 침입을 승낙치 아니하고 «높이 사귀지 못하는 데야 생혼에 못 이르는»[각주:12] 부류의 부름은 그저 들어넘기기 때문입니다.

   제군들이 궁금한 것은 그대들에게 감당되고 닥쳐들 성싶은 그대들의 천신들과 판관들이 아닙니까? 자, 좋습니다. 여기 군들의 신들이 있고, 군들의 성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곳 갖은 부류들, 곧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돌이켜야 하는 법정입니다. 그런즉 인식은 고사하고 이러한 세계를 분간하는 노릇은, 정녕 유물론적 예정론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한 광명 다음으로는, 오롯이 그리고 정작으로 외경의 문제이자 사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숨은 독일»에 쐬어드는 성삼위에 대한 사랑, 즉슨: 아름다움, 고귀함, 위대함! 누구든지 이러한 사랑과, 그리고 그 반대로 말해도 틀리지 않을 터인데, 사랑에서 끌어내지는 외경을 추스르지 못하거나, 누구든지 자신이 그 생령들보다 낫다고 믿는다면, 그들과 접면하려는 시도는 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몇자락의 잡설 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며, 모든 신비와 신화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저 «숨은 독일»은 그를 두고는 잠잠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숨은 독일»이러한 나라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세의 것이면서 아닌 나라, 땅 위에 있으면서 없는 나라, 망자와 산자의 나라, 변전하면서도 영구하고 불멸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그 존자들과 군자가 경영하는 나라이니, 그들은 번식의 법칙이 아닌 가장 은밀한 박력의 창조로써 융성하고, 이로부터 운명들의 작용을 저변하는 것입니다. 

 

            걸출한 지위의 이인들이 설핏

            줄기없이 창생 가운데 돋으니[각주:13]

 

III.

   그러면 그대들에게 이제부터 저 존자들과 군자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저러한 은닉된 나라의 영웅들을 개관하고, 독일의 위계질서를 바로잡으며, 저 천병의 진풍경을 불러내는 일은 과연 매력적인 과업이기는 합니다. 그러하되, 제가 이러한 «독일 신곡Divina Commedia teutsch»을 집필할까 요량해 본다면 일평생으로는 부족할 뿐더러 이 사람은 일개 역사학 교수가 아니라 단테가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외람되지만 저러한 나라의 종사와 그것의 역사적 입지에 대해서 먼저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종족이고 군들만 같이 굳세고 신실하다면 그들 나름의 신계를 창조하지 않았던 종족은 없거니와 그곳에서는 신위들의 높고 낮음이 매겨져서, 그것들의 전일성과 다수성은 다시금 삶의 고리의 시원적 빛깔과 운행의 가능성들을 내비치는 것입니다. 즉, 보편이 표현됩니다. 가장 소박하고 또 고스란히, 자신의 신계인 올림포스의 풍요한 형상들 속에다 원초적인 인간적 활력들과 기색들을 안치하고 신화神化한 것은 헬라스였습니다. 더하여, 서구에서 헬라스는 결코 능가되지 못하는 원형으로 남게 됩니다. 실상은 이날 이때까지도 근저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본모습들에 관한 한 어떠한 새로운 것도 더해진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많은 것들이 마멸되었을 뿐.

   유일신의 지배도, 어떤 면에서는, 무엇을 바꿔놓은 것 같지 않습니다. 전체가 모조리 그것 [유일신 또는 유일신교]으로 추수되었으며, 살아있는 제의와 더불어서는 성자들과 생령들의 고을을 고안하는 일이 불가피하여, 기독교적 영원성과 기독교적 우주에 따르는 인간의 본모습들이 그 마을에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민족들은 고유의 민족성인들을 창조하였으며, 거의 모든 서구국가들의 역사의 초엽에는 민족적 성인과 국조國祖[각주:14]로 시성된 제왕이 있었던 바, 그들이 땅을 수호하는 가운데 인민들은 지극한 기독교적 표현으로써 그들을 받들었던 것입니다. 전 유럽 가운데 오직 독일만이 이에 대한 예외에 속합니다. 독일은 중세로부터 고유한 민족적 성인세계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후일 로마교회의 독점적 지배는 기진하고, 중세세계의 세속화는 신들을 거듭 인멸하였는데.. 초기 르네상스의 쓰릴만큼 달콤한 마법이 들이쳐서 현세로 뻗은 길이 터졌을 때, 기독교적 내세의 그늘에서 새로운 인간적 신계를 피워낸 것은 단테였습니다. 단테는 사방과 오토의 혼들의 품계를 망라하고, 간추렸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나라, 즉 «인세Humana Civilitas»라는 인류문화를 성취해냈는데, 숨은 능산적 힘으로서 그 나라의 영상은 르네상스를 통어하고, 유럽을 형성하여, 오늘날까지도 호소되어져 온 것입니다. 오직 독일만이, 신앙의 분열로 초기의 그 상서로운 출발이 쇠미하였지마는, 오직 독일만이, 단테의 «인세», 곧 르네상스의 인류문화에 미미하게나마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철학이 민족의 길라잡이들로부터 «헬라스 냄새 같은 것이 확 끼쳐나오는 할미쟁이»로 등한되는 곳에서는 아폴론조차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곳에 신계는 쉽게 움트지 않습니다.

   «숨은 독일»은, 헬라스의 신계,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 인간세를 위시한 신화적 도시들[폴리테이아Politeien]의 계열에,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모든 오래지 않을 날들을 위한 최후의 연결고리로서 덧붙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현장인만큼 바로 윗조상격인 단테의 나라와 스스럼없는 친연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럽은 보편적 기독교의 소산입니다. «숨은 독일»에서 가치의 표준이 되었던 것은 기독교적 사고가 아니며, 그것은 보편 인류공동체의 단일한 문화에 힘입은 바도 없습니다. 게오르게가 가르쳐 보이고 자신의 작품에서 포착한 대로 «숨은 나라»는 그것이 뿌리내리고 그것이 결실해야 하는 독일적 권역[각주:15]에 국한되어있습니다. 시인이 비좁은 강토 너머로 멀리까지 다른 인종과 시대의 생령들의 불멸을 끌어다오거나 독일화에 부심했음에도, 즉, 본질에 의거해서 독일적인 것으로 이해하였음에도, 그러할 것이었습니다.

   시인의 이같은 경계지음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가 언젠가 헬라스가 비좁은 강토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독일 또한 다시금 제 스스로의 국토에서 인간의 모든 본모습과 힘을 두루 움티울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선대의 약속에 좇은 것이었습니다. 형상들과 힘들의 넉넉함이 우주를 짓는데 필수적인 양 중세는 천사가 사는 마을들을 훑어냈고 단테는 오토의 지구Orbis terrarum를 쏘다녔습니다. 게오르게는, 누구라도 저 비밀스러운 것을 끌어내고 그 비밀에 햇볕을 쪼이는 법을 헤아린다면, 풍요한 인간적 원형들을 이곳 독일 안으로, 즉 «숨은 독일» 안으로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해본다면, 헬라스가 소위 «우주적 인간Makro-Anthropos»의 예감을 그들의 제신에 사무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적 자질의 우주적 인간도 «숨은 독일»이 불러일으킨 형상과 힘의 총화, 그리고 가시적인 나라에 대한 그것의 작용 안에서 또다시 소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슈티프터의 말마따나 «헬라스의 신상神像에 부합하게 될 독일»은 (실현되기에는 진실로 아득하지 않습니까!) 어떤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헬라스적 전형의 모방으로는 닳아 없어지지 않아서, 그것에 말미암는 원천적 인간존재의 삶은 그토록 풍족하고, 형상은 그토록 넉넉하고, 아우름은 그토록 절대해서 그것에 범접되는 것은 오직 헬라스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서식할 수 있으리라고, 그 마음은 복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힘들이 여기[독일]와 저쪽[헬라스]에서 각기 다른 이름과 다른 무늬로 나타나더라도 기어이 무방할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로부터 하나의 유럽이 솟아나고 신성제국Imperium sacrum으로부터 서양민족의 공동체가 솟아난 마지막 격변 이래로, 그 힘들의 명칭과 속살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신계와 모든 신화적인 나라가 보였던 바와 다르지 않게, 오늘날 우리는 으레 민족적인 유비 안에서 온 세상 즉 보편을 가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드러나는 인간의 시원적 힘들, 헬라스가 그 잡신들로써 인간적으로 묘파하였고,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에서는 신명神明에게서 흘러나온 덕Virtutes으로 사념되었으며, 단테가 죄와 덕의 화육으로 파악했던 저 섭력攝力들을, 대체로 (언제나는 아닙니다!) 상이한 민족들이라는 유비 안에서 오늘날 우리는 감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이탈리아적이다, 저것 프랑스적이다, 또 무엇 영국적이다, 또는 스페인적이다, 또는 북유럽적이다라는 식으로 감 잡습니다. 로마적 또는 헬라스적이다, 는 물론입니다. 양식화된 것Geartetes은, 단순히 낯설다는 이유로 배척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낯선 것과 고유한 것, 외부적인 영향들과 가장 깊은 내심으로부터 치받치는 원초적인 발현을 뒤섞어서는 안됩니다. «숨은 독일» 내의 로마적인 것과 헬라스적인 것, 이탈리아적인 것과 영국적인 것을 어떤 비독일적인 외래성이 아니라, 독일적 바탕의 인간의 원천적인 ‘있음’이라고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스페인이 있기 전부터 «스페인적인 것»이 있었다는 말은, 뚜렷한 모순[각주:16]입니다. 그것은 유럽의 본원들에서 피어나 당대의 현실 속의 국가 깊이에서 고갱이들을 거두고 또 밀어붙이는, 그리하여 여기와 저기에서 돌연 지구의 표층 위로 토해지거나 받아낼만한 그릇들[각주:17] 속으로 흘러드는, 한바탕의 저류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솟구치는 중에 어떤 독일인은 제우스, 다른 독일인은 아폴론, 또 다른 독일인은 디오니소스의 종자로 실어다주는, 독일의 웅숭깊은 힘들을 낮잡는 것입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그렇다면 이런저런 서구의 존재적 양태나 인간 본연의 기력이 독일적인 몸뚱어리를 입은 것이어서 «숨은 독일»의 진정한 지체와 존자들, 군자인 그들 속에서만 독일의 존재는 스스로를 들켜낼 것이었습니다. 저 깊은 섭력을 나누어 가지는 정도가 그들의 등차를 결정합니다.

 

IV.

   이렇게 말해진 연후에 «숨은 독일»의 지고한 군장들은 본래 민족의 대중적인 것과는 얽힌 바가 없다는 사실로써 피차에 친화한다는 사실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원초적 폭력의 떨림과 신의 몰려옴이 친밀하고 아늑할vertraulich-gemütsvoll[각주:18]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스스로 아득한 것이 «숨은 독일»이라면 그 군장들과 수호자들에 대해 특히 마땅하여,

 

            오로지 잔약한 싹들에게 후원자들은 감추어져 있다네[각주:19]

 

이렇게 해서 «숨은 독일»의 국권을 잡았던 자들은 거의 항상 물리적 공공연한 독일에게 «가장 낯선 자들»로 나타났다는, 숨막히는 정경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숨은 독일»과 그 나라에서의 서열에 구태여 관련하는 한 대중적 인기는 말라빠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원칙으로 세워져도 좋습니다. 다만 혼백들의 저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 참된 얼굴은 아닌지 또 짓눌린 저 영상이 거칠게 조여오는, 극력 밀어닥치는 영상은 아닌지, 이 질문만큼은 삼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르바로사를 생각해봅시다. 통념에 따른 상像 너머에서, 로마 황제들의 혼령을 처음 영접함에 소름은 쪽쪽 끼쳐오고 사내다운 감동은 장려한 로마적 질서를 향한 열망을 보채던 사람으로 그가 의식될 수 있겠습니까. 중세 독일의 제왕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탈리아에서 굽혀들고 힘겨운 국내정책을 부지하던 중에 그저 동방으로 달려드는 데서 그들이 위안을 찾았다고 해야 합니까? 그래, 많은 것들이 서투르게 좌절되었으며, 사람들은 비통하여 부르짖길,

 

            선인들의 산은 이렇게 열리는 것인가?[각주:20]

 

무엇으로 답을 하겠습니까. 참혹하고 또 참혹한 민중들의 팔자가 매달린 자로서, 그들 스스로 깊이 비극적인 인물들로서, 세계사의 한없는 무참함 속에 이 제왕들은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에는 낯선 빛을 한 세계의 형상들로서, 오토[家], 잘리어, 호엔슈타우펜은 «숨은 독일»에 너울져 있는 것입니다! 자문해보십시오. 지극히 요란한 선동가들의 시대에영합주의적인 루터와 파우스트적인 뒤러의 시대에하도 투명하여 속 모를 청아함에 놓여 다른 나라의 후원자로 내몰린, 좀체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홀바인이 있지는 않은가요. 이름 붙일 수 없는 저 고독은 또 어떻습니까. 독일의 구렁창에까지 프리드리히 대왕이 감내해야 했던, 그리고 창검으로 알겨낸 어떤 승리보다도 그와 그의 땅덩이를 «모조리 프로이센화»해 마지않았던 저러한 고독! 이들 모두와 받들리고 편들리는 위대한 영봉들에게는 괴테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알려진 바대로, 미심쩍은 면모를 괴테는 썩 많이 머금고 있었던 바, 

 

            그대들이 일러 영원이라 말하는 많은 것들이

            저 휘황하게 빛나는 자 속에서 사라져간다네[각주:21]

 

보다 고명한 인사들에게서도 아직 끄집어내지지 않은 수원水源이 궁성거린다고 한다면, 사력을 다해서 끝간 데까지 나아간 쪽, 곧 «숨은 독일»의 다른 군장들에 있어서 비독일적 외래성의 혐의란 그야말로 풍발한다는 것. 가령, «가장 위대한 프리드리히», 저 호엔슈타타우펜 제왕의 로마적 본새를 들먹여가며 «그는 독일인도 아니었잖소!»라는 둥 오늘날까지도 역사책들은 촐싹거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하만과 헤르더의 별스러운 총기, 그리고 빙켈만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며, 빙켈만의 비밀을 간파했던 괴테는 대독일에 있어서 그의 사후 시대에서와 꼭같이 오늘날까지도 몹시 이질적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괴테 또한 다를 바 없어서, 독일의 숭상으로써 기껏해야 낯설게 되었으며, 올림포스인Olympier이라 예찬되고 그 예찬됨으로 도리어 가장 고귀한 독일적 본령은 들치워진, 그리하여 무연하다는 시비가 걸리고 심지어는, 

 

            우리 조국의 적, 가짜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청맹과니[각주:22]

 

라는 말소리까지 엉겨붙고 있습니다. 횔덜린처럼, 장 파울처럼, 그리고 혹은 헤겔처럼, «절대한Allbenannten» 나폴레옹[각주:23]을 당대의 고대적 영웅에 견주고 가지런히 하는 세계혼[각주:24]에 그를 비겼다는 사실로 해서 괴테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횔덜린이 받은 대접도 다를 수는 없어서, 낭만주의적 그리스주의자라고 외면되거나, 독일인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독일물이 빠진» 것으로 좌우간 내팽개쳐져, 그는 «뒷사람들이 월계관을 쓰고 귀화할 만한, 무덤이자 신전»[각주:25]이라고 일러 스스로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미지의 순수로써 미의 제단을 야기시킨 플라텐 모양의 잔별에서부터 «미친 환장한 신»에 쩔쩔맸고 독일적 습속에서 백안시되던 니체를 위시한 굵직한 제성帝星들에까지, 또 공적 독일의 노른자위에 정녕코 접맥시킬 수 없음에 싸늘하다거나 괴팍스럽다고 흉보아진 게오르게에 이르기까지, 장 파울과 같은 거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지기수의 독일인들이 난감한 것으로 시종되었습니다. «독일적»이라 이름하면 그만인, 주책없는 마법의 솥단지 놀음과는 상용할 수 없을진댄 그 품과 몸가짐Geste도 굳이 딴판이었으므로, 가장 존엄한 생령들에게는 «비독일적»이라는 뒷공론이 들러붙었습니다. 민족의 가장 광막한 형상들을 점지하는 시인이 호엔슈타우펜-프랑켄 왕가를 형용하는 밤베르크의 기사Bamberger Reiter를  «가뭇없이 까마득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20세기 당년의 참으로 근후한 성품은 군색해져 이 기사의 박두는 이렇게 읊어질 만 했는데,

 

            가장 낯선 이여! 네 겨레의 옆구리에서

            천시에 참다운 새싹을 내어미는구나[각주:26]

 

밤베르크의 기사

그러하되, «숨은 독일»의 군장들의 소외가 그들을 주눅들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뻐해 마지않았던 풍광들이 그들보다 더 독일적이라고 하겠습니까. 웬만한 로마 황제가 베르크슈트라세의 낙토로 내닫으며 «여기가 어디지? 이탈리아가 아니냐?»는 탄을 발하듯.. 네카강의 골짜기가 여느 날 토스카나를 아뢰듯이..뮌헨의 장쾌한 알프스 양기가 남국의 청렬함을 뿜어내고, 슈바벤의 광경이 프랑스적 넉넉함으로 살큼 두드린다거나, 라인 강변의 언덕들 위로 넘실거리는 광영이 다른 꿈으로 상연히 기어든다면,

 

            그토록 고대하던 신성한 군도

            그 불빛이 더는 서럽지 않으니[각주:27]

 

독일적 풍정이 그만 유럽의 산하를 낱낱이 꼬드겨내는 가운데 거기에 아득하거나 비독일적이랄 것이 없는 다음에야, 그리고 독일적 정경이 자욱한 무밭쯤으로 그만치 성립된 것은 아님에랴, 그 풍정에 정다운 이들이 아득하다거나 비독일적이라고 뵈일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본성에서 최고도에 달한 것은 뭐든 자기본성을 넘어»섭니다. 그리하여 저 생령들도 «숨은 독일»의 저 풍정처럼, 제 본성이 숨가빠 초독일적인 것으로 치밀어오르고 진정 철두철미한 독일인으로 허리를 세우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가령 프리드리히 대왕의 샘솟는 프로이센성은,  프로이센적인 것을 범람해서, 독일적인 것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릴없는 것은 «극점에 다다른 독일인은 독일인 이상에로» 곧, 초독일적으로 «치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괴테의 진술입니다. «다시 더 독일적일 수 없이 독일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독일을 휘뿌려야 한다!»는 니체의 짐짓 괴벽한 역설 또한, ‘초독일적’이라는 뜻에 통해 있습니다.

   어림 턱도 없습니다만, 미적으로 예사로운 것, 부허浮虛한 «인간 일반»과, 한다는 소리가 범유럽적 협동체인 현대 문필가들의 심산과, 만세토록 독일적이고 독일을 초극한 영웅들에 바치는 우리들의 배례가 정작으로 비교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겨레에의 의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유럽의 세계시민» 행세깨나 하며, 무람없는 손을 들이밀어 «숨은 독일»의 신비를 떠들추는 자들 말입니다. «숨은 독일»은, 독일을 쪼개고 민족을 분절하는 분자들이 뻗대는 방편일 수는 없거니와, 겨레의 가장 흉중에 먹힌 정수가 다만 그 «숨은 독일» 속에 눌어붙어 있어, 거기 일별을 던졌다하면 국기에게 대한 군인처럼 누구라도 가슴이 콱 조여오는  것입니다. 이 정수에, 게르만족의 머리가 한때나마 얹어졌던 전유럽과 지중해 연안 나라들의 본성들이 적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참다운 독일상에 투신할, 개인의 엄정한 의무가 스스로 능히 자극받는 것이며..이것으로 독일에 세계가 맺히고..실러의 말로서 «전성기 없는 민족은 없다지만 역사의 모든 시간들을 갈무리하는 것은 독일이다»는 예언은 이것으로 피가 도는 것입니다. 좀 달리 본다면, «민족시»를 말하면서 횔덜린이나 게오르게 등을 괘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라블로트의 준마들»이나 «제킹엔의 나팔수»[각주:28]를 자부하려 한다면 정녕 그것만큼 송연한 오해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오류가 되었건 간에, 그것이 «숨은 독일»이 소담스레 내비치는, 독일의 교교한 얼굴로 흐르는 시선을 차단함에 있어서는 매일반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고 보면,  숨은 나라의 드높은 군장들이 월경하고 우리 민족과 시대의 것 아닌 생령들의 살점을 잡아당겨 독일에 포개는 것은, 박래품을 독일에 혼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동일한 인간 생짜의 헐벗은 충동들이 발랑거리고 있기 때문이며, 저 보편독일이야말로 과연 천혜의 충동들의 요람지인 것입니다. 인간의 원시적 힘의 일환으로서 그것들은, 독일혼의 윤무에 들이쳐 공명하기 때문이며, 보십시오, 순연한 그대로 독일에 편만해 있습니다. 헤르더와 괴테 없이는 독일 셰익스피어도 없을 것이고, 카톨릭 교회의 거벽들이나 슈테판 게오르게를 떠나서는 독일 단테는 있을 수 없으며, 카롤링거, 오토, 살리어, 그리고 특히 호엔슈타우펜조朝를 밀쳐두고는 독일 카이사르상은 아랑곳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빙켈만과 횔덜린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또, 다른 이들은 버려두고서라도, 니체와 게오르게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독일인과 헬라스간의 비밀한 결속이 과연 어디로부터 시현될 수 있었겠습니까? 헬라스와 독일이 기밀한 혈족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만, 그 연이 먼저 지어지기는 해야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 관계란 아들과 어버이의 관계가 아니요, 공통한 신상과 인간의 원형상을 향한 공통한 사랑으로 일시에 염통이 뛰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인 연고입니다. 비유컨대 그 계통성, 아니 계통성이라기보다는 그 혈속은, 천신과 생령들을 향한 사랑과 외경감으로부터만 연원하는 성싶습니다. 살붙이라고 이마에 써붙일 적이 아니라, 신단 앞에 외경과 사랑으로써 소년의 두 무릎이 꺾일 적에만 이런 대답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자, 내 아가야

   이로써 고대나 다른 번화한 시절의 겉모습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모든 «고전주의»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니체 또한 이 숨은 단국을 다스리는 중에서, 디오니소스를 빼어놓고 아폴론이 존재될 리 만무하며, «신령한 것das Dämonische»[각주:29]이 여기에 그뜩하지 않을 턱이 없습니다. 일생과 작품으로 검Dämon과 한데로 어우러졌다 할밖에 없는, 선현들만 헤아릴 것은 아닙니다. 그 일신이 그리스도적 새날의 군주, 지상의 적그리스도로서 옷깃을 떨친 호엔슈타우펜 프리드리히 2세, 위풍당당한 변모의 미소Lächeln siegender Verklärung[각주:30]를 드리우기 위해 괴세계를 함께해서 같이 들어 올렸던 그뤼네발트, 한오리 햇살을 틔워내기 위해 삿된 세계를 아울러 찢어냈던 렘브란트 말입니다. «숨은 독일»을 짐작 좀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독일적 별세계의 모든 천신들에게서그것들이 어떻게나 아폴론적인 가태假態를 내어놓는다고 하더라도검의 역광을 건너다보고 맙니다. 도저한 심연 속에는 일년 열두 달, 신령한 것이 짜여들어 있는 것입니다. 헌데, 독일적 정감으로 꾸며진다고 해서 그 헛것이 그대로 «파우스트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빛을 향해 깊이를 돋궈내고 일체의 것에 부신 햇발을 퍼부어대는 것이 아니라, 응달진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침윤되기가 일쑤인, 독불로 파우스트적인 자들은 외려 «숨은 독일»의 적대세력이라 해야할 것입니다. 확실히, «숨은 독일»의 영웅들 간의 공분모란 천연의 힘들의 심연에 형상을 입히고, 또 저 신령한 것을,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밝혀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독일인들에 대한 니체의 말을 군들은 떠올릴 것입니다: «남국과의 해후가 불러일으킬, 헬라스를 발할 수 있는 낌새가 저들에게는 있다.»[각주:31] 그러니까 «숨은 독일»이 헬라스적 신계와 한형제처럼 보이는 소이는, «숨은 독일»에서는 어머니들의 세계가 다시는 운명의 힘에 샛길을 내거나 그것으로부터 분립되지 않게끔, 아버지들의 세계의 안벽으로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서로를 통해서만 양 세계는 순화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파우스트적인 것은 외곬의 힘으로서 아버지들에게서 풀려나와 어머니들에로 끄달릴 뿐입니다.

   말하자면 소삽한 충동들과 꿈들의 형상화야말로 «숨은 독일»의 특색입니다. 이곳에 거하는 것이 저 «하나의 꿈을 위하여 죽음에 나아간, 바치는 자들»입니다. «세계의 경이»라는 오토 3세도 이곳에 회복되어 있으며 또 콘라딘, 막강한 황실의 마지막 종손들이었던 이 두 소년들 속에는 독일 패권의 꿈이 절실한 밀도로 서려서, 어린애들로 해서 저 꿈이 성취될 수도 있으리라고 여겨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또 제 기품에 의해 군자 삼아진 «숨은 독일»의 주민들도 여기서 자리잡아서, 큼직한 행복을 던지지 않고는 안 두겠다는 듯이 가슴을 뛰놀리던, 저 바치는 자들과 미묘한 친화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시칠리아 단국의 꿈에 약진하여 베네벤토전에서 삶을 내던진 만프레트를, 이들 고매한 자들 가운데 그 속절없는 대능을 다하여 창작에 진력했던 모차르트를, 떼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기품은 본시 심정心情의 고귀함과 합치며 순절에 묶여드는 것입니다.

 

            만인의 평등, 그 크고 큰 축복이

            경건한 잠꼬대가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랴!

            우리에게 기품이 스러지우면!

 

V.

   «숨은 나라»의 영웅들, 그들의 인물과 성업聖業으로부터 무던히 다른 것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군들은 순전한 독일의 멋Geste, 독일의 일관된 어떠함을 «숨은 독일»의 군장들에게서만 접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모든 멋은 백가지의 다른 모양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아흔아홉 가지의 거짓된 가운데 정작으로는 하나만이 참다운 것입니다. 인간을 새겨넣은 그리스 석비의 탁본이나 그리스 매병梅甁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이는 누구나, 손을 내어주는 꼭 하나의 방법만이 옳다는 것을 살필 것입니다. 독일적 멋이라는 말로써, 개개의 동작뿐 아니라 그보다도 기개와 감격Beseeltheit을 아울러 내비치는 어떤 신체적인 몸짓을 저는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격의 반면에는 살기도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감격키 쉬운 자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아킬레스.. «숨은 독일»로부터 나와 현세로 내어쏠 수 있게끔 호엔슈타우펜 엔지오왕도 마음껏 그에 필적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각주:32]

   일찍이 독일인들의 이러한 감격을 도운 것은 로마교회였습니다. 밤베르크 대성당의 호엔로헤 주교의 상이나 쿠자누스의 고아高雅한 혼령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특히 제 본래의 영역에서, 인간을 주조해내는 교회의 그 힘은 종내와 같이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바티칸 도서관에서 일하는 행운을 가져본 사람은 필경에는, 서리가 얹히고 양피지 사본을 향해 허허로이 굽어있는 몹시 아름다운 머리 한 점을 기억할텐데, 곧 슈바벤 출신 교회의 왕자 에를레 추기경으로, 그 또한 그의 일신에 머금은 감격으로 인하여 «숨은 독일»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하의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무사Μοῦσα의[역: 예술과 장단의]사람들 또는 무사와 교통하는 데서 저 귀기鬼氣 어린 멋은 지피는 것입니다. 이는 실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무지우는 혼교魂交이니, 어찌 여흥에 불과하다느니 우리 시대가 그보다 더 다부진 재목을 요한다느니 시비를 캘 수 있겠습니까? 아폴론의 금속성의 견고함에 견준다면 가장 어기찬 정치가도 변통없는 밀랍인형쯤으로 되는 것이되, 나라들을 열어내고 황금의 리라로써 온갖 법을 펼쳐낸 것은 오히려 이 아폴론이었던 것입니다. φόρμιγγ’ Ἀπόλλων ... ἁγεῖτο παντοίων νόμων.[각주:33] 그런지라, 학생제군들, 지난 날에는 «무사의 혈사血嗣»라는 부름을 들었던 자들이여, 귀 기울이십시오, 이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말입니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본래 그러함을 지키길 원한다면 «무사와 아무러한 관련도 없는 무리와는 부대끼지 않는다.» 여기에 교만을 일으키는 바는 터럭 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무사들과의 교섭을 관장하여나가는 인물이라야 더욱이 천하 만민을 두루 주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늘, 무사들뿐 아니라 카리스들Χάριτες[각주:34]로부터도 요람이 멀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밤베르크 신학교Bamberger Hochstift의 주교후 프리드리히 호엔로헤 1세

 VI.

   이렇게 해서, 땅 위에 있으면서 없는, 일찰나이면서 영원무궁한 «숨은 독일»의 별세계는 자라나는 독일의 마음을 굴지하는 장정들에 가득 채울 터입니다. 한옛날 장 파울이 말한 것처럼,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나폴레옹과 같은 영령Genius은, 영웅으로 제대시키기 위해서만 장부들을 모집한다»면, 영웅들에 곁하여 시인과 현자들이 더불어 군림하는 이 «숨은 독일»도 다르지 않아서, 그것 또한 독일의 청년들을 고귀함, 아름다움, 위대함의 존숭으로 이끌고, 나라와 겨레를 위한 보람을 다할 수 있도록 더러는 새로운 국선國仙들[각주:35]로 그들을 전역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겨레의 지극한 진리들은 대개 이 숨고 숨은 단국 가운데서만 간직됩니다. 그런지라, 그대들이여, 이 전후시대의 정치꾼 모양으로는 입을 놀리지 마십시오. «그 소위 무궁무궁한 진리들에 머리를 썩이려는 자는 도대체 서재에나 칩거하고 세상일의 싸움터에는 뛰어들지 말라» (막스 베버).[각주:36] 이것은 이렇게 엇세워 대척해줄 만합니다. «무궁한 진리들에 대해 무지한 자는 세상일의 싸움터에서 어느 것 하나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단테의 말마따나, 하물며는 정치인도 «하느님의 도성의 성탑들에 한번은 경례를 하고 지나»[각주:37]가야 하거늘..     

   그러나, 역사가인, 또는 역사가가 되기를 원하는 그대들, 군들의 소명에 의해서 과거를 판단하거나 논단하는 것이지 그것을 심판하도록 위임 받은 것은 아님을 용이히 아는 그대들이여: 영세한 일상환경과 적막한 서재, 칼바람 부는 골목길만을 좇아가지고 그대들의 판단이 안출되어야만 한다면, 아무려나 군들의 본분에 티가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독일인으로 난 다음에야 «숨은 독일»에 무지하고서는 역사가도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판단은 자격을 요구하»는 때문이며, 그 자격은 제 힘으로 매겨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독일적인 «먼 것», 곧 «숨은 독일»의 불후의 생령들에 의하여 겨우 점지되는 때문입니다. 문득, «숨은 독일»과 표면의 나라가 한데 뒤범벅이 되고, 부벼져서, 서로에 아롱지기까지, 역사는 영활로 가득 차고 역사는 현재와의 절실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바탕에 자리잡은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 고유의 색으로 바스라지는 현묘한 빛, 그 뒤에서 떨고있던 «우리의 입상의della nostra effigie» 무늬가 내다보였을 때 하느님 강생의 신비를 단테가 관상觀想했던 것처럼, 그렇게, 예언들이 이뤄지기라도 한다면, 일상의 독일은 «숨은 나라»의 뒤에서 같은 빛깔로 숫제 환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숨은 독일»은 끝이 나고 맙니다. «로마적»에 자못 방불하던 당대의 «숨은 독일»이 호엔슈타우펜 왕들에 의해서 공식적인 독일의 지위로 고조되고, 금시라도 떨쳐 일어나기 위해 산중에서 발돋움하던 호엔슈타우펜의 나날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기까지는 퍽 아마득하여서, 시간을 다할 때까지 «숨은 독일»은 감추어진 힘들을 가꾸어갈 뿐이니 고삐를 맬 수 없는, 무한무궁한, 이 누리의 군장들은 안과 밖의 모든 적들에게 두루 일갈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멈추어보아라! 만발하는 말은 사멸하지 않으니.

            우리를 홑으로 보고 마음껏 받아들여 보아라! 너희의 호의에도 피어난다.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간들, 피어나는 것은 더 활짝 만개하리!

  1. 역: Professor는 profiteri에서 파생한 말로,  문자 그대로 «고백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본문으로]
  2. 역: 1834년에 하이네가 이미 사용한 개념 -- EKa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언급하지 않음. Der Salon: Zweiter Band: «Äußerte ich mich in meinem Unmuth über das alte, offizielle Deutschland, das verschimmelte Philisterland, -- das aber keinen Goliath, keinen einzigen großen Mann hervorgebracht hat, -- so wußte man das was ich sagte, so darzustellen, als sei hier die Rede von dem wirklichen Deutschland, dem großen, geheimnisvollen, so zu sagen anonymen Deutschland des deutschen Volkes, des schlafenden Souverainen, mit dessen Szepter und Krone die Meerkatzen spielten.» 하이네의 문제적인 수용사: 칼 크라우스의 에세이 「하이네와 그 후Heine und die Folgen」 (1910) 참조. 실러는 일찌기 정치인들의 독일과 문예가들의 독일을 대립시켰다. [본문으로]
  3. 역: 여기서 쓰인 산중휴거山中休居라고 주로 번역되는 Bergentrückung은 게르만 민담의 모티프로 산에 첩거하며 때를 기다리는 민족의 위대한 왕이나 영웅을 지칭한다. 예로는 퀴프호이저산에서 자고 있다고 전해지는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 [본문으로]
  4. 역: 라이히Reich의 번역. 칸토로비치가 쓰는 “라이히”란 근대 법이론의 “국가” 개념과는 대립되는 뜻으로, 신성로마제국 등을 염두에 두어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단어일 것이나, 우리가 흔히 쓰는 임페리움의 뜻에서의 “제국”과는 동떨어진 독일적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하나의 시대와 장소에 뿌리한 구체적인 질서 개념으로서 우리는 이를  “나라” 및  “단국檀國” 등으로 맥락과 수사에 맞게 다르게 번역하였다. 라이히와 제국 간의 구분에 관해서는 칼 슈미트의 1942년작 참조. 예컨대, 칼 슈미트, “역외 열강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 국제법적 광역질서” (김효전 역, 568쪽) “라이히(Reich)와 임페리움(Imperium)과 엠파이어(Empire)는 동일물이 아니고, 내적으로 보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페리움」이 자주 보편적이고, 세계와 인류를 포괄하는, 따라서 초민족적인 형상의 의미를 가지는데 (보다 많은 그리고 성질이 다른 임페리움들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그런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되지만) 반하여, 우리의 Deutsches Reich는 본질상 민족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모든 민족성의 존중이라는 기초 위에서 본질상 비보편주의적이고 법적인 질서이다.” 특히, 칸토로비치의 용법은 게오르게 서클에서의 라이히가 지니는 의미에 통하는 것으로, 프리드리히 볼터스는 Geist의 친연성과 결합에서 유래해 어떤 시공간적 한계도 초월해 있는 정신의 영역의 의미로 라이히를 사용한다. 볼터스의 Herrschaft und Dienst 참조. 혹은,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 “보수혁명”과의 관계와 관해서는 Friedrich Hielscher 참조. [본문으로]
  5. 역: Unhebbarkeit의 경우는 게오르게-칸토로비치가 창조해낸 단어로 "들어낼, 벗겨낼 수 없는 성질"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참조 Stefan George: "unhebbar ist der lebensbilder sinn" Stern des Bundes 101. [본문으로]
  6. 역: 횔덜린, 『안티고네에 대한 관찰들 Anmerkungen zur Antigone』에서 빌린 표현. “그리스 비극의 언어는 치명적-사실적인데, 그것은 그것이 움켜쥔 신체를 실제로 타살하기 때문이다. Das griechisch tragische Wort ist tödlich-faktisch, weil der Leib, den es ergreifet, wirklich tötet.” [본문으로]
  7. 역: 칸토로비치가 후일 『왕의 두 신체』에서 중요시 다루게 되는 단테의 이 개념은 “인류(사회)” 혹은 “세계시민성”과 같은 뜻을 가진다. 467ff. 또한 그가 «빚을 졌다»는 말과 함께 인용하는 프릿츠 케른Fritz Kern의 1913년 출간된 연구서 Humana Civilitas: Staat, Kirche und Kultur를 참조. 게오르게서클의 단테숭배에 관해서는 Ulrich Raulff, Kreis ohne Meister: Stefan Georges Nachleben. 258ff 참고. 단테와 EKa의 관계는 Martin A. Ruehl, ‘In This Time without Emperors’: The Politics of Ernst Kantorowicz’s Kaiser Friedrich der Zweite Reconsidered, Kay E. Schiller, Dante and Kantorowicz: Medieval History as Art and Autobiography 추가로 참조. 마지막으로 게오르게의 시 참조. (“단테는 이를 인류 내지 인간 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또한 이를 구성하는 요소였던 시민에 그 역점을 두었다.” 발터 울만, 중세정치사상사, p.405) [본문으로]
  8. 역: 율리아누스 황제의 벗인 신플라톤학파 철학자 살루스티오스의 『신들과 세계에 관하여Περὶ θεῶν καὶ κόσμου』에서 발췌. 번역은 칸토로비치의 의역을 따랐다. [본문으로]
  9. 역: 에스겔 12:2 참고.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역: 괴테의 1780년 5월 13일자 일기에서 인용되었다. [본문으로]
  11. 역: 고대 그리스의 강령술을 뜻함. 오뒷세이아 11권 참조. [본문으로]
  12. 편: Stefan George, "Goethe-Tag", in: Der Siebente Ring.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617, Berlin 1931, 5.10. [본문으로]
  13. 편: Stefan George, "Neuen adel den ihr suchet", in: Der Stern des Bundes.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8, Berlin 1929, S.85. [본문으로]
  14. 역: «ἥρως ἐπώνυμος»: 한 민족, 부족, 도시국가 따위의 이름의 유래가 된 시조. [본문으로]
  15. 역: 독일권 [본문으로]
  16. 역: 연설문의 최초 판본에는 역설Paradox이라고 되어있던 것을 칸토로비치가 이후 모순Widersinn이라고 고침. [본문으로]
  17. 역: Emfangsberetein. Empfangsbereiten의 오기. [본문으로]
  18. 역: 뮌헨의 미하엘 폰 파울하버 추기경은 이 강연으로부터 거의 정확히 3년 후에 히틀러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Die Aussprache, bei der als dritter nur Herr Reichsminister Rudolf Hess zugegen war, dauerte drei Stunden: Die erste Stunde redete der Führer allein, freimütig, vertraulich, gemütsvoll, teilweise temperamentvoll.» 역자 강조. [본문으로]
  19. 편: Stefan George, "Wahrzeichen", in: Der Teppich des Lebens und die Lieder von Traum und Tod, mit einem Vorspiel.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5, Berlin 1932, S.56. [본문으로]
  20. 편: Ernst Kantorowicz zitiert hier ungenau einen Vers aus dem Gedichtfragment “Bismarck” von Stefan George, in dem es über den Reichskanzler u.a. heißt: In des ehrwürdig römischen Kaisertumes Sandgrube dieses reich gebaut, als mitte Die kalte stadt von heer- und handelsknechten Und herold wurdest seelloser jahrzehnie Von habgier feilem sinn und hohlem glanz? Tat so nach väter traum der berg sich auf? Dieses Fragment ist publiziert von Robert Boehringer, Mein Bild von Stefan George, München, Düsseldorf 21968, S. 82. [본문으로]
  21. 편: Stefan George, "Goethe-Tag", in: Der Siebente Ring.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and.617, Berlin 1931, S. II. [본문으로]
  22. 편: Stefan George, "Goethes letzte Nacht in Italien", in: Das Neue Reich.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9, Berlin 1928, S.ll. [본문으로]
  23. 역: 나폴레옹에 대한 횔덜린의 시 「모두에게 알려진 자에게Dem Allbekannten」의 유희적인 변조이거나 뜻하지 않게 잘못 인용한 것으로 보임. [본문으로]
  24. 역: 헤겔이 나폴레옹에게 부여한 «기마한 세계정신 Weltseele zu Pferde»이라는 유명한 칭호를 암시. [본문으로]
  25. 역: 게오르게의 횔덜린에 관한 시에서 인용. Bothe 200. [본문으로]
  26. 편: Stefan George, “Bamberg", in: Der Siebente Ring.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617, Berlin 1931, S.205. [본문으로]
  27. 편: Stefan George, "Vor-abend war es", in: Der Stern des Bundes. Gesamt-Ausgabe der Werke. Endgültige Fassung, Bd.8, Berlin 1929, S.74. [본문으로]
  28. 역: 니체는 실러를 두고 «제킹엔의 도덕나팔수Moraltrompeter von Säckingen»라고 한 바 있다. [본문으로]
  29. 역: 다이몬의 번역은 까다롭다. 서구적 맥락을 충분히 살릴 역어도 없거니와, 우리 맥락에 과감하게 접붙이기에도 저항이 큰 어휘인 까닭이다. 다이몬과 관련해서 괴테의 액커만과의 대화 참조.  “대화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의] 4권으로 흘렀고, 우리는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어느새 다이몬에 대해 말하기에 이르렀다. 괴테가 말하기를, ‘분명 시에는 신령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지. 의식의 밖에 있는, 어떤 이성과 이해력으로도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시, 그리하여 모든 개념의 너머에서 작용하는 시. 비슷한 것이 음악에도 마찬가지로, 아주 극도로 서려있는데, 이는 고매히 서있는 음악을 이해력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네. 게다가 그로부터 모든 것을 지배하는, 누구도 설명 붙일 수 없는 어떤 힘이 나온다네. 이 힘 없이는 어떤 종교, 제식 행위도 불가능한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놀라움을 일으킬 수 있는 첫째가는 수단이 아니겠는가. 걸출한 위인들에도 이 신령한 것이 발견되곤 하는데,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왕 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고인이 되신 대공께서는 워낙 두드러지게 다이몬에 사로잡힌 분이어서, 그 누구도 그를 거부 못했다네.Wir sprachen sodann über den vierten Band der Biographie und waren im Hin- und Widerreden über das Dämonische begriffen, ehe wir es uns versahen. »In der Poesie« sagte Goethe, »ist durchaus etwas Dämonisches, und zwar vorzüglich in der unbewußten, bei der aller Verstand und alle Vernunft zu kurz kommt, und die daher auch so über alle Begriffe wirkt. Desgleichen ist es in der Musik im höchsten Grade, denn sie steht so hoch, daß kein Verstand ihr beikommen kann, und es geht von ihr eine Wirkung aus, die alles beherrscht und von der niemand imstande ist, sich Rechenschaft zu geben. Der religiöse Kultus kann sie daher auch nicht entbehren; sie ist eins der ersten Mittel, um auf die Menschen wunderbar zu wirken. So wirft sich auch das Dämonische gern in bedeutende Individuen, vorzüglich wenn sie eine hohe Stellung haben, wie Friedrich und Peter der Große. Beim verstorbenen Großherzog war es in dem Grade, daß niemand ihm widerstehen konnte.« 초기, 중기 니체와 니체의 포르타Pforta 김나지움 동문들에게 이르러 다이몬은 세계관을 지탱하는 개념이 된다. 크게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적인 용법과, 디오니소스적 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아울러 헬라스의 종교를 논할 때, 음악론 내지 바그너론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으며, 게르하르트 리터에 따르면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인간상Bild des Renaissancemenschen 형성에 결정적인 「권력의 마력Dämonie der Macht」 까지 모두 어우른다. van Tongeren 외 編, Nietzsche-Wörterbuch 첫 권의 pp.521f. 참조. [본문으로]
  30. 역: 이젠하임 제단화에 바쳐진 Stefan George의 시 Kolmar: Gruenewald를 인용. [본문으로]
  31. 역: “어쩌면 독일인은 다만 잘못된 기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남국과의 해후가 불러일으킬, 헬라스를 발할 수 있는 낌새가 저들에게는 있다 – 빙켈만, 괴테, 모짜르트. 마지막으로, 아직 우리는 푸르청청하다Die Deutschen sind vielleicht nur in ein falsches Klima gerathen! Es ist Etwas an ihnen, das hellenisch sein könnte - das erwacht bei der Berührung mit dem Süden - Winckelmann Goethe Mozart. Zuletzt: wir sind noch ganz jung.” [본문으로]
  32. 역: Frederick the Second, 1194-1125. 469. “그의 모든 아들들 중에서 엔지오가 제 아버지를 가장 닮았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 아버지가 카이사르의 현신으로 나타났다면, 엔지오를 통해서 아킬레스의 무엇인가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순박하고 두터운 용사이자 가객, 그리고 왕으로서Of all the sons Enzio must have been the most like his father. [...] If the father appeared as a Caesar reincarnate, something of Achilles was reborn in Enzio. A simple straightforward soldier, singer and king [...] ” 아킬레우스와의 비교: Ernst Münch. König Enzius: Beitrag zur Geschichte der Hohenstaufen. Ludwigsburg: Nast, 1828. S.5. [본문으로]
  33. 역: «[일곱 목소리의] 포르밍크스를 아폴론은 [황금 플렉트럼으로] 훑어 내리며 갖가지의 법으로 이끌었네.» Νόμων은 여기서 선율, 곡조, 가락 따위의 뜻이나 본 맥락에서 Gesetze와 동일시되어있음. 편집자가 인용하는 (EKa와 비슷한 세대인) Oskar Werner의 1967년 번역은 단순히 다양한 방식들Weisen’로 표현. 역자 번역, 대괄호는 누락된 절을 역자가 추가한 것. 핀다로스의 다섯째 네메아 송가 24-25행. [본문으로]
  34. 역: 명랑한 기쁨의 여신들 [본문으로]
  35. 역: 칼로카가토스들Καλοκάγαθοι. “아름답고 고결한kalos kai agathos”의 의미를 갖는 이 희랍어 이사일이hendiadys는 고대에 귀족이나 위인들을 수사하는 말로 쓰였다. Werner Jaeger. Paideia: Die Formung des griechischen Menschen. S.782ff. 참고. [본문으로]
  36. 편: 칸토로비치는 여기서 막스 베버의 「신독일에서의 의회와 정부Parlament und Regierung im neugeordneten Deutschland」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다. Gesammelte politische Schriften, München 1921, S.260. 1917년 쓰여진 이 글의 끝자락에 베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적인 정치인이라면 무릇 미래에 대중들의 삶의 궤적의 공적안녕을 해할 수 있는 저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경향들에 반드시 신경써야한다. 그러나 그의 민족의 정치적인 운명이 그를 정치인으로서 움직이듯이 (반면에 저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경향들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임한다), 그는 다음 두세 세대, 즉 그의 민족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날지 결정할 세대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재설계를 하게 된다. 만약 이처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개 문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쪼록 정쟁에의 출전은 삼가고, 그 무궁한 진리들에 관심을 갖고 책에 파묻혀 살기를 바란다. 이 전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우리의 민족이 저 전지구적인 과정에서 어떤 결정권을 갖고 참여할 수 있을지 정하는 투쟁이다.» 역: 전후시대의 베버는 자유주의적 지식인, 정치인의 전범처럼 생각되었다. 베버가 하이델베르크대학 재직할 당시에 칸토로비치는 동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게오르게도 군돌프를 통해 이 대학과 지속적인 연을 맺고 있었다. 그 둘은 잠시 같은 건물에 거주했던 적도 있으며, 베버는 리케르트를 통해 게오르게를 처음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버와 게오르게의 미묘한 라이벌의식, 특히 게오르게에 대한 베버의 찬탄과 염오에 대해서는 Norton, Secret Germany. 407, 475. [본문으로]
  37. 역: 단테. 『신곡: 연옥편』 칸토 16. 95-96. «왕이라면 최소한 참된 도성의 성탑을 식별할 수 있어야했다convenne rege aver, che discernesse / de la vera cittade almen la torre.» 역자 번역. [본문으로]

피어오르는 산양의 노래[각주:1]

슈피겔 1993/6

 

   자유 사회, 그 총체에 거리낌을 느끼는 자 – 그것을 은연중에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솜씨 좋은 예술가도 결코 창조할 수 없고, 그 어떤 은총을 받은 통치자도 다스릴 수 없을 뜨임새의 저 장엄하고 민감한 유기체, 그것의 어수선히 얽섞인 경로와 맺어짐에 대하여 너무나 큰 경탄을 품고 있기에.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근저의 악성 앞에서 둥둥 떠다니듯 서로를 지나치는 것, 다시 말해 서로 교제하는 것을 경외심으로 얼떨떨해 그저 관망만 하고 있는 자. 사람들의 사업과 운동 곳곳에서 한갓 줄타기, 춤추며 맴돌아가려는 포즈, 놀이, 교활한 눈속임, 가식이나 기교의 작태를 발견하는 자 – 이 결집은 과연 모든 외부인에게, 정치의 병통에 사로잡히지 않은 다음에야, 끓어오르는 샘[각주:2], 「타인의 지옥」[각주:3]이라기 보다는, 숫제 불가해한 곡예로 보일 수 밖에 없다 . . .

 

   그러나 이따금 그에게는 마치 이제 최후의 체념의 사각거림이 들리는 듯하며, 최후의 인간들이 도피처로 달아나는 모습이 어물대는 듯하고, 저울추의 균형이 맞추어지는 소리가 마치 자물쇠가 철컥 잠기듯 나직히 들려오는 듯하다. 잇따르는 것은 오로지 밧줄,[각주:4] 맞잡은 손들, 연계들, 접촉들, 꿈들이 미끄러져 풀러짐 뿐이다.

 

   우리가 벌려놓은 이 판은 얼마쯤의 가변성을 지니고 있는가? 어느 모로 보나 게걸음만 치는 모양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선하는 체계의 불변성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이것이 민주정치일지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일지, 인공두뇌학적 모델, 학술 담론, 정치기술적 자기감시동호회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이, 마치 자연의 생물처럼, 곁길로 새어나가서 지리멸렬하곤 하는 자신의 힘들을 다시 거두어 모으기 위해서는, 거듭해서 위험과 곤경에서 오는 내적 · 외적인 압박을, 심지어는 심각한 약화를 겪는 위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일테면 전체주의나 신정국가로서는 이 확실히 겨냥된 자유의 체제보다 최대 다수의 안녕을 위해 더 나은 어떤 것을 이루어낼 수 없었으므로, 이것에게는 지금까지 어떤 경쟁상대도 없었다.

 

   물론 이는 경제적 번영만이 대중을 형성하고, 이어주고, 비춘다는 확신 내에서만 유효하다. 현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주의가 만사의 원동력으로 구실하지 않는 사회들에서는, 그들의 잘 통제되고, 굳은 믿음에 근거한 욕구 억제력이 갈등시에 적잖은 장점일 뿐 아니라, 그로인해 어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그사이 점차 번지고 있다.

 

   우리 넉넉한 사람들은 행여 쥐고있는 부의 극소량을 잃기라도 하면, 이는 우리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기구의 국내정치적 화로 귀결될 뿐 아니라, 정치의 내면에 비약적인 결과, 즉 조급성과 공격성의 우발적인 돌발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에 적이 도취해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신진 국가들의 민족주의 조류들을 경계한다. 우리가 우리의 하천을 보존하려 하듯이, 타지키스탄의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언어를 보존하는 것이 정치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한 민족이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낯선 관습에 맞서 견지하고자 인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자아도취 속에서 그런 것들이 괴이쩍은, 그릇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부유한 서유럽인이, 윤리의 영역에서야말로 「할 수 있는 것」이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윤리적 형편에 맞지 않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과연 불리하게 작용할는지 모른다. 우리의 판단과는 전연 무관하게도, 옛것들이 단순히 노폐물로 전락하거나 괴멸하지 않았으며, 인간이 – 개인이든, 민족의 일부든 – 비단 오늘만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싸움, 힘든 씨름이 될 성싶다. 재래의 세력과 끊임없는 추동의 세력 사이에, 보존파와 말소파 사이에 전쟁이 치러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네 것을 위해 벌이는 이 투쟁은 오로지 내부로 향해있다. 어떤 적국의 정복자도 우리를 이 싸움판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망명자들과 고향 잃은 이들의 무리를 동정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태도를 취하기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법적으로 선을 행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가 (겨우 유권자들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강바닥에 퇴적되기 위해서는 더도 덜도 아닌 우리 근대 자기중심주의 이교의 재기독교화가 필요할 것이다. 역사의 비극적 설계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비폭력성이 이 전쟁을 우리의 후생에게 넘겨씌우게 되지 않을지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다.

 

   공중도덕의 위선이 언제나 행해왔거나, 최소한 용납해온 것: 에로스의 경멸, 군인들의 경멸, 교회, 전통, 권위의 경멸. 그러니 얄궂게도 위급한 상황에서 말발이 서지 않는다고 해서 의아해할 이유 무엇이랴.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더 심한 악으로부터 면케 해주는 실권, 언권은 대체 누구의 손에, 누구의 입에 달려 있는가?

 

   누군가 본인이 놓여 있는 처지를 사회적으로 가능한 공생 형식의 궁극적인, 최상의 실현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과연 누가 떠살이, 막-방금까지만해도의 변호를 그럴듯하게 표현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발원지(히틀러)서부터, 독일 전후 지식층은 오로지 지배 조건의 결함만이 인식될 수 있다고 역설해왔다.[각주:5] 심지어는 가히 수상스러운 대안들을 그럴싸한 것으로 납득시키려 부단히 힘썼으며, 우리에게 급진적인 선과 타재他在를 세속적인 종말론의 형태로 제공하기도 했다. 웬 사이비교가 기약한 종말의 날과 같이, 이 세속적 종말론 또한 저절로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더 이상 자유주의자는 본인 스스로에 근거해서 자유주의자인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 완고한 자유주의로 무장해서 반자유주의를 대적하려는 성싶다: 이렇게 그는 자유주의자 노릇을 한다. 스스로 자유주의자로서의 정당성을 쟁취한 그는 이 관직에 임함에 있어 인정을 갈구하며, 그러므로 해서 점차 더 거리낌 없는 자유주의자가 된다.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선포하며, 내적으로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기실 그는 제 적수에 썩 닮아 있는 반자유주의의 대항자에 다름아니다.

 

   이따금 우리는 관용에 있어, 무엇이 진실되고 자생적인 것이며 무엇이 바로 이곳, 증오 받는 조국에서의 현 상황의 허물을 벗겨 마침내 그것을 저 유명한 – 한때 좌익 공포정치의 범죄자-변증법에서 일컬어졌듯, 그리고 필시 암암리에는 아직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을 – (「준-파쇼」들의) 정체를 들통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독일인의 경직된 자기혐오에 근거한 것인지 정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텔리겐치아가 이방인에게 보이는 친절함은 이방인을 위함에서 아니라, 다만 우리 것을 향해 표독부리는 짓이며, 우리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쌍수 들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인데 – 혹 이런 심기 도착증의 소문이 들려오면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수면 밑으로 일어난다) – 완전한 도착, 난폭한 확신으로 철컥 닫아버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듯하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혹자는 독일인 다수의 대표자로서의 독일인 「전형」을 향해서 충분히 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구걸하는 집시의 존엄성은 대번에 눈에 보이는 반면에,  나의 기형적인, 듣그러운 동포, 잔치라도 벌이는지 요란법석한 나의 동포의 존엄성은 – 오호라, 궁중에서 빌어온 저 상투의 말이란! – 그의 뻔뻔스러운 요구의  총체 앞에서 주도면밀히 뜯어보고 나서도, 재수가 퍽 좋아야 어렵사리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가끔 상상해 보건대, 같잖게 짓까부는 나의 이웃에게 예상하지 못한 고통거리, 걱정거리가 찾아들거든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짐짓 그의 존엄성이 비쳐질 수 있지도 않을까. 그 존엄성이란 것을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의무화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본 적 있어야할 것 아닌가.

 

   오늘날 점점 그 숫자가 불어나는, 자기확신에 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Nächsten을 난란한 조명을 받는 같은 토크쇼 출연자Nachbarn 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들은 다른 모든, 혹은, 자신 스스로의 동포들의 이성異性에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 이 감각은 때로 감각의 꺼림칙함, 감각의 경악이기도 하다.

  1. 역: 원문. τραγῳδία는 ‘산양의 노래’라는 뜻. [본문으로]
  2. 역: 고대 노르드어 이름 흐베르겔미르Hvergelmir는 일반적으로 “끓어오르는 샘”으로 번역되며, 모든 강의 출처인 심연이나 샘으로 이해된다. 『고 에다』 Grimnismál 26 참조: Eikþyrnir heitir hjörtr, / er stendr á höllu Herjaföðrs, / ok bítr af Læráðs limum: / en af hans hornum drýpr í Hvergelmi; / þaðan eiga vötn öll vega: 출처: 『Edda Sæmundar hins fróða 』 Theodor Möbius 編, 라이프치히: J. C. Hinrichs, 1860. 36. [본문으로]
  3. 역: 사르트르의 「L'enfer, c'est les Autres.」 Huis Clos. Paris: Gallimard, 1947. 93. [본문으로]
  4. 역: 숙어 wenn alle Stränge reißen에 빗댄 표현으로,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5. 역: 1945년에 벌써 윙어Ernst Jünger는 네벨Gerhard Nebel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비록 히틀러의 몸뚱아리는 민멸泯滅했을지언정, 그의 수법은 전쟁을 이긴 모양새네. 도처에서 그의 제자들이 불같이 발호하는 꼴이 워낙 사나워, 천하에 몇 남지 않은 공평무사한 지성인들이, 이성의 대의를 위해 다시금 창을 빼드는 일이 – 돈키호테 노릇이 되지 않고서 – 과연 가능할 지에 대해서, 마땅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 Obwohl Hitler ja physisch ausgelöscht wurde, hat es den Anschein, dass seine Methodik den Krieg gewann. Seine Nachfolge wird überall mit solcher Leidenschaft betrieben, dass man billig zweifeln darf, ob es den wenigen unbefangenen Geistern, die auf der Welt noch leben, gelingen wird, für die Vernunft noch eine Lanze zu brechen, ohne dass das gänzlich den Anstrich der Don-Quijoterie gewinnt.」 [본문으로]

벤저민 디즈레일리

교회와 여왕[각주:1]

 

   자, 이 새로운 종파는 권위의 원칙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저 원칙 위에, 이제껏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모든 나라들의 모든 교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파는 아주 독특한 원칙 위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비판의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심은 비판의 한 요소이고, 비판은 필연적으로 회의적인 경향을 지닙니다. 저는 [회의라는] 이 낱말을 철학적인 뜻에서 사용하는 것이지 일상적이거나 혐오스러운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판의 원칙 위에 세워진 종파가 우리가 목불인견目不忍見하다고 여기는 결론들에 도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영감inspiration의 원리를 부정한다거나 기적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들에 도달하여서, 교리와 신조가 영감의 원리나 기적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지탱될 수도 없다는 이유로 해서 교리를 부정하고 신조를 거부하게 되는 것도 충분히 논리적인 귀결일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오늘 함께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과 국민 여러분에게 특별히 힘주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러한 결론들에 도달하여서, 각자의 소신을 좇아서 교리를 부정하고 신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양심적으로 도달한 이후에도, 그들이 저 자신들의 원칙들을 합당한 귀결로 끌고 가지 않아서, 교리를 부정하고 신조를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국교회의 완고한 옹호자들로 남아 있으며 주임사제와 보조사제[각주:2]까지를 포함한 교회의 목회자들의 열렬한 지지자들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신자들과, 의견이나 신앙의 형태를 막론하고 우리 국민들 전체에게 들이닥친 것으로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 [문제의] 결과들은 그야말로 사활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신앙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버렸다면, 우리가 우수한 교양과 탁월한 재능과 현란한 언변과 아마 어느 정도의 야심까지 있는, 그러나 별다른 독특한 견해는 없는 인재들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풍요한 상류층을 가지는 것은 전혀 무해한 사태일 수도 있고, 그다지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경우는 기어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신앙의 시대가 흘러 지나가버렸다고 믿기보다는, 제가 저희들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들—우리 나라와, 우리 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심지어는 전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볼 때에, 신앙의 시대가 흘러 지나가버렸다고 믿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극명한] 특징은 믿음을 향한 갈망에 있다고 생각하게만 됩니다. 주님…, 인간은 믿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까. 만일 그를 인도할 성스런 시대의 전통과 조상전래의 신념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진리의 등기부를 자긍自矜하는 교회가 없다면 인간은 저 자신의 심장 속에서, 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제단과 우상들을 찾아내야만 하겠지요.

  1. 원문. Benjamin Disraeli, “Church and the Queen”: Five Speeches Delivered by the Rt Hon B. Disraeli MP, 1860-1864. (London: G. J. Palmer, 1865). Contemporary Thought on Nineteenth Century Conservatism, eds. Richard A. Gaunt & Angus Hawkins, Routledge, vol IV에 재수록, 43-44. [본문으로]
  2. rectors, vicars, curates의 번역이다. 성공회의 경우 교단의 지침이 따로 없기 때문에 직제에 관해서도 여러 번역어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rector는 재정이 독립된 해당 지역교회가 청빙하여 사례를 지불하는 관할사제(주임사제)를 의미하고, vicar는 교구에 의해서 파송되는 관할사제(주임사제)를 의미하여, 한국어 번역으로는 이 두 직제 사이의 의미 차이를 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curate는 주로 부제를 의미하는데, “보좌사제”를 비롯해서 부교역자의 의미를 지닌 다양한 호칭들로 번역되는 것 같다. 당대의 한국에서, 성공회 사제들은 “목사”가 아닌 주로 “신부”로 호칭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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