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어트를 번역하기 위하여

1.

   낙후된 팸플릿 하나를 번역한다. 독일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던 1938년 말에 이 팸플릿은 작성되었다. 영국, 이태리, 프랑스는 나치에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일부를 건네 주었고, 이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배제되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 국토를 독일 나치에게 자진납부하였다. 크고 힘센 나라들이 가난한 약소국을 찢어발기는 폭력과 야만과 모욕의 야바위판이 “우리 시대의 평화”로 둔갑되어지는 체임벌린 수상의 황홀한 연설을 청취하면서, 엘리어트는 영국을 미워하지도 나치들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골방에 처박혀서 저 “기독교 사회”에 관한 강연 노트를 끼적거리고 있었다. 늙고, 까맣게 지친 수상의 목소리에서 시인은 서구문명 전체가 무너지는 굉음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엘리어트는 그 자체가 추문이다. 지금 그의 이름은 반대파의 저주 속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압도적인 첫 구절의 위력으로 문청文靑들을 감염시키고 자의식과 모더니티를 반씩 섞은 섬광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들로써 잘 해석되지 않는 시를 읊조리게 했던 엘리어트는 1920년대 중반 어드메쯤부터 늙고 병든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땅이 찢어지고 라일락이 올라오는, 허무의 반복을 허물어뜨리는 애욕과 집착의 법칙을 작동시키는 사월의 잔인하고 가혹한 관능을 규탄하고, 봄이면 자기 몸 속에 피어나는 생生에의 환상으로 고통받았던 엘리어트에게, 무럭무럭 늙다가, 병들어 뒈지고, 끝내는 잊힌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올이 김지하 씨의 작고에 당하여 적은 축문祝文에서 애꿎은 엘리어트를 “뭔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타박하고, 엘리어트를 혐오하면서도 사랑한 버지니아 울프가 젊음을 늙히기가 힘이 들어서 나이 스물에 이미 마음이 썩었던 저 숫기 적은 도반의 초로를 두고서 “...차라리 송장이 더 신뢰할만할 것”이라고 콜레라균만도 못한 취급을 했던 것처럼,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 이 폐허 같은 제목이 여러 겹으로 봉인하고 있는 가열한 절망의 고담준론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불가해했던 것이다. 엘리어트의 불운과 퇴폐는 영락한 부잣집 막내아들이 누리는 호사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에즈라 파운드나 W. B. 예이츠와 같은 영미 계통의 모더니즘 총아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세월이 가는 만큼 연약해지고 생로병사에 밟힌 나머지 진보적인 성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순응주의로 나아간다는,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운 미적 혁명의 불안감과 가파름이 견딜 수 없이 무섭고 시퍼렇게 숨이 막혀서 기독교의 확실성으로 그 절박한 모호성으로 후퇴했다는, 그러므로 20세기로 뚫고 나아가지 못하고 19세기에 주저앉아 버렸다는 흥미로운 실패이자 선구자의 비극, 아니면 전위의 뒤쳐짐, 또는 훼절 시인으로서의 엘리어트라는 주지의 명제에 의지해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와 「휑뎅그렁한 놈들」에서 속절없는 무간지옥을 그려내고 「하마」라는 그의 이십대 시절 쓴 시에서 피가 시키는대로 그토록 선연한 눈빛과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에 덤벼들던 엘리어트가 연륜과 더불어 기독교, 전통, 보수주의 등등을 운위하고 고전주의자, 앵글로가톨릭 등의 무슨 무슨 “주의자”로 스스로 선포해 자승자박하였다고 그를 흘겨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 안에 교회를 지닌다는 것, 자신의 내부에 유배지를 가지는 일은 얼마나 쓸쓸한 일일 것인가. 『네 개의 사중주』는 정말 엘리어트의 장미정원이었을까). 모더니즘이란 결국은 모던에 대한 반발이고 민족적 · 국가적 전통의 거덜남을 감당하고 수용하는 다양한 표정이자 그 표정들의 집회장소, 예배당이라면, 저 고명한 「황무지」뿐 아니라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 또한 역사적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예술의 종언이자 전통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생겨나는 마음이나 표정 같은 것, 그리고 그 종말감을 통해 심미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시인이 바로 엘리어트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순간에 매우 강렬한 포에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모더니스트, 이 미美의 사도들은 예술을 사회로 재통합시키고 그것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상상하는 기초가 더 이상 될 수 없다는 자각의 절망에 힘입어서 (에즈라 파운드와 W. B. 예이츠의 경우) 그 둘의 찬란한 합일을 약속하던 파시즘을 수락하거나 (윈덤 루이스와 D. H. 로렌스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심미적인 것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와 사회의 경계를 긋고 독야청청한 미의 참호를 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야말로 진보, 즉 혁명을 통한 과거—낡은 진실—의 극복이었으므로 미야말로 모든 혁명의 법칙이고 복고야말로 진보의 소실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그래서,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의 팸플릿은 사회를 배반한 미의 참호로부터 뛰쳐나간 부랑아일 것인가, 창조적 힘을 소진한 시는 그렇게 언어의 주관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말의 길이 끊긴 저 언어도단의 세계로 들어섬으로써 저 스스로의 안타까운 운명을 완성해나가는 것인가, 그것이 엘리어트의 가엾은 모더니즘이었던가..., 나는 먹먹했다.

 

   새벽이 되어 나의 번역수첩을 들여다보고 있다. 잡종, 열성인자라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난 칼 만하임, 아돌프 뢰베 같은 독일계 유대인들, “독일 라이히의 적”으로 적시되어서 대학교를 집어치워야 했던 폴 틸리히, 열아홉의 나이로 가톨릭으로 개종해 젊어서도 노인 행세를 했던 크리스토퍼 도슨, 문학적 상상력, 혹은 미적 직관, 또는 아름답고 근사한 것이 윤리적인 것을 정초 지으며, 이것이 다시 문학의 자율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인해서 근대로 건너가지 못하고 낭만주의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다가, 모더니즘도 하고 반모더니즘도 하고 공산주의자도 하고 페미니스트도 하고 그리스도인도 하면서 당대의 온갖 사조와 충돌을 하던 존 미들턴 머리,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 비명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고 온갖 악다구니를 쓰면서 몸부림치던 머리 같은 삼류 로맨틱 구라꾼에게 덧없는 공감을 만들어 가졌던 친체제주의자 엘리어트 들을 규합해서, J. H. 올드햄이라는 스코틀랜드인 선교사는 이 가장 참혹하게 저주받은 이방인들을 데리고 1938년 4월 “무트Moot”를 결성하였다. 저, 유대인과 유대인 혐오자들, 망명자들과 고향의 고국산천이 망명지가 된 폐인들,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과 교회를 저주하는 자들, 가시면류관을 쓴 배교자 코스모폴리탄들이 서로를 부축하면서 기독교인으로 환골탈태해 간 이 서클을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두려운 그림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서구 문명의 정당성에 대한 깊고 대책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혀 종교의 문턱 앞에 모여 두려워하면서 서로에게 기대는 이단자들이다. 저 진보적인 인사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로 낡은 원탁 앞에 쪼그려 앉아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저, 말시적 징후의 멸절의 위기에 닥친, “거꾸로 뒤집힌” 세계를 게워내고 영국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대관절 대중들이 삼키기 좋게 키치에 의해서 희석된 그런 문화가 아니라 (그래서 엘리어트 들에게 문화는 교회나 엘리트, 귀족들에 의해서 담지되고 전승되는 것일수밖에 없었고, 한국말로는 “혼”이 가장 적합하겠다) 어떻게 문화를 창조하고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회적 질서를 마련할 수 있는가 의 문제에 사로잡혀 슈미트가 “구체적 질서”(법학적 사고의 세 단계)를 운위하고 켈젠이 “법적 질서”(순수법학)를 말하고, 하이에크가 이 모두를 벗어난 “자생적, 경제적 질서”에 골몰하고 있을 때 이들은 이 같은 문제에 마음을 투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가 되어가는 유럽의 영적인 파탄과 대혼돈을 독대하면서, 시민적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종교적·도덕적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섬뜩하리만큼 총명했던 이 유다들은 절망을 부정하고 절망을 긍정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저 “질서”를 위해 무자비하게 정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의 뼈대가 된 엘리어트의 바우트우드 강연은 이 모임에서 발표된 미들턴 머리의 논문(“기독교 사회이론을 향하여”)과 그들이 함께 읽고 토론했던 자크 마리탱의 책(『온전한 휴머니즘』)에 대한 응답으로 쓰인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낡은 중년이 된 그들의 진보성을 의심하는 일은 쉽고 기독교 신앙, 유럽의 뿌리를 잘도 나불대면서 입술이 닳도록 바울의 서신을 음독하고 그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지 않을 수 없었던 50살 먹은 닳아빠진 인간들,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지 몇 번이고 되묻지 않을 수 없던 기성旣成의 절망의 바닥을 헤아리는 일은 어렵다.

 

   걸레처럼 썩어서 후줄근해지는 아사리판 같은 현대문명을 위한 처방전은 기독교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엘리어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1930년대의 시대사적 특징은 국제질서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던 자유민주주의라고 총칭되는 제국주의의 가리개가 경제대공황으로 그 쓰라린 불구의 교언영색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때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발호와 세계대전의 대살육으로 화답되었던, 온갖 더럽고 불행한 꼬라지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엘리어트는 각고의 불완전과 미완성 속에서 한 글 한 글 쓰기 시작했다. 1926년 봄, 크라이테리온 지誌에 서유럽의 공통된 문화라는 이념을 회복함으로써 과거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갈파했던 엘리어트는 혼돈과 비합리의 수렁에서 더 높고 명확한 이성의 개념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단연코 현대적인 감각을 “고전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의 힘으로써 1927년에 “이성의 복권”을 겨우 썼으며, 그 해,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였다. 엘리어트는 전 생애를 걸고 삶과 혈투하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전력을 다하는 힘으로써 그 모순과 역설을 녹여내고자 했다. 1928년에는 “랜슬롯 앤드류스를 위하여”에서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근왕주의자, 종교에서는 앵글로 가톨릭”이라는 포즈로써 위대한 샤를 모라스를 모방해 보이고 (그러나 포즈가 곧 본질이다), 1930년에는 “휴머니즘이 없는 종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에세이를 쓰고, 1932년에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에세이를 쓰고, 1933년에는 “가톨리시즘과 국제 질서”라는 논문을 쓰고, 1937년에는 “세계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다. 엘리어트에 따르면, 도덕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해결책은 전혀 없다. 신의 사랑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이상적인 행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사려 깊게 고정된 지점, 즉 가톨릭의 교리가 요청되는 것이다. 교리에는 여지가 없으며, 여지가 없는 것만이 겨우 교리라고 불릴 수 있다. 엘리어트에 따르면,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이고 프로테스탄티즘적인 “내면의 목소리”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이며, 고전주의적인 비판으로서 존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내면에 결정적으로 있는 것이다. 무르익는 모든 것들은 대책없고 허망하다. 그 초지일관할 수 없는 사회철학으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유효성과 충분성까지를 엘리어트가 의심하게 된 것은 1938년 가을의 치사하고 바닥을 치는 뮌헨 협정에서 엘리어트가 말로 해서는 도저히 안 되는 개같은 세상의 파국 직전의 위기를 느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하나된 유럽을 절규하던 독일의 디 노이에 룬트샤우, 스위스의 노이에 슈바이처 룬트샤우, 스페인의 레비스타 디 옥시덴테, 이태리의 일 꼰베뇨 등은 일제히 아작이 나게 된다. 그리고 1939년에는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엘리어트는 그가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던 크라이테리온 지를 종간시켜 버린다. 그는 힘에 부쳤다. 이 팸플릿은 유럽의 정신적 보초의 최전선이 모두 닫쳐버리고 망해버리던 시대에 엘리어트가 불행하고 처참한 기독교에 스스로의 몸을 묶음으로써 그것을 서구 문명의 자랑이라고 부르는 자조의 힘으로 자신의 절망감을 언어로 개조해내고, 더러운 세상을 깊이 증오하는 그 미움의 가호 아래서 삶을 간신히 추어올려야 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해서 출간되었다.

 

   다자 간의 연결감, 연대감이 곧 사랑이라는 나의 낙서를 노려보고 있다. “곁에 있겠다”는 약속은 “당신의 교리가 되겠다”는 말로도 된다는, 이제는 알 수 없는 말도 적혀 있다. 에토스에 미만하는, 중량감이 전혀 없이 쓸려가는 마음의 시시껄렁은 중립사회라고 불린다.

 

   (엘리어트와 동갑내기인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는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스미는 것이며, 중립적인 영역 같은 것은 없다고, 그것은 그저 리버럴들의 병신 같은 말버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그는 내부적인 정치화를 “중립화하는” 더 거대한 힘으로서 국가에 모든 것을 걸기에 서슴없이 나아갔고 (따라서 슈미트에게 이 중립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시민사회는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봄처럼 칭칭 감기는 운명과 조국과 모든 관계를 혐오했고, 그 혐오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문화를 아끼던 시인 엘리어트는 기독교 “사회”를 선전하는 팸플릿을 쓰기에 이른다. 국가와 사회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적 두 구분이 그 두 “반동” 작가의 생에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 있다. 엘리어트가 이 팸플릿을 출간한 1938년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유대인 스승 후설의 장례식에 불참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저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순례를 떠나고, 칼 슈미트는 리바이어던의 작가 홉스에 관한 저서를 세상에 내보내다. 그 저서에서, 정치화된 여러 기독교 분파와 교파들 간의 분주한 대립을 중지시키는 데 국가의 사법적 권위는 자리하는 것이며 싸우고 반목하는 그 자들이 지닌 계율commitment 보다 더 높은 계율에 호소해야만 탈정치화는 가까스로 확보될 수 있을 터인데, 이 지엄한 중립화하는 계율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청승이자 진리주장일 수밖에 없다고 홉스는 절망적으로 말했다고 슈미트는 적었다.)

 

   마음이 중립기어처럼 정처없이 건들거리고 시시때때의 욕구에 허무하게 얽혀들거나 저항하는 그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인간과 스승들은 하루하루 말을 바꾸어 가고, 우리는 오늘 저 자신의 말의 공터와 마음의 얼룩 안에 있는 그림자 속에 남겨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신경증으로 고통받는 아내에게 (“오늘 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내가 당신의 말을 열심히 듣겠노라고, 나무토막처럼 어디에도 가지 않고 사랑하는 당신 곁에 있겠다고 텅 빈 눈으로 거짓말했던 엘리어트는 그 같은 사회를 수락하기를 힘들어 했다. (그 버림받은 아내는 엘리어트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어서 자신을 찾아오지 못한다는 섬망에 시달리다가 정신병동의 아스팔트 바닥에 코를 박고 죽었다.) 중립사회는 오래 버티어내지 못하고 이교사회 (비기독교 사회) 역시 마찬가지로 될 일이 아니라고 엘리어트는 탄식했다. [진정한] 신을 부정하는 이교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엘리어트는 그가 주저앉아 있는 중립사회를 이를 갈면서 증오했다. 중립사회는 마음처럼 쉴새없이 낡아가서 기진맥진해질 뿐이고 이교사회는 효율성을 빌미로 염결적 도덕지향성의 청교도주의 (한반도에서는 리理의 신앙이나 도덕지향성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를 옹위하고, 프로파간다와 미디어를 통해서 의견의 통일성을 강박하며, 그 참상 속에서 예술은 다수의 취향을 따라갈 때만 장려되게 된다. 이 창녀급의 목불인견을 엘리어트는 전체주의라고 불렀다. 숫자가 많다고 정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오로지 남아있는 가능성은 기독교 사회의 이념을 회복하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보기에,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인 것은 한사코 기독교적인 것이거나,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유럽문화의 뿌리는 기독교적인 것이고, 원죄의식이 없는 디시플린은 가능하지 않다. 기독교 사회는 순정을 완성한다. 고전주의(혹은 모던에 대한 고전주의적 견해)는 리버럴들이 사회에 없어도 된다고 믿는 치졸하고 비루먹은 것들에 무진장으로 연연하고, 집착하고, 추슬러서 간직한다: 위계! 신앙! 장소(고향)의 감각! 공리주의적인 것이 아닌 더 높은 합리성, 전통의 권위를 포함해서 이 슬프고 희망없는 것들은 수치심을 가르친다. 짓무르고 늘어붙는 수치심이 없다면 예술에서 형식과 부자유한 한계가 사라지는 것처럼, 종교에서 디시플린과 권위는 어렴풋해지고, 통치에서의 중앙집권 또한 가능하지 않으며, 사회는 건들거리고 술렁이는 마음처럼 썩어서 무너져 갈 것이고 쇠진하여 잦아들 것이다. 훌륭한 예술은 간음 없는 마음에서만, 원망과 토라짐 없는 절망에서만, 끝없는 용서 속에서만 숨쉴 수 있는 가난하고 영원한 마음에서만, 진정한 귀족과 지배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탄생한다. 그래서, 제어되지 않은 도무지 시건방진 감정의 배출이 극성하고, 인간에게 서운한 인간들이 행복해야 할 당연한 권리와 무슨 잘난 인권을 보채고 투정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엘리어트의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대한 정의: 피조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마구 쓸리우면서 서러움에 넘쳐서 제 울음소리에 도취된 짐승들처럼 “감정의 존중”을 무진장으로 종알거리는데, “취존”을 부르짖는 현대의 야만인들은 지난 시대의 예술 또한 우리 당대의 예술처럼 엉망이고, 형편없고, 징그럽고, 나른하고, 대수롭지 않으며, 못나고 흔해 빠졌다는 음모론에 속아 넘어가고, 그 체념의 가녀리고 참혹한 편안함은 문명 전체에 대한 혐오와 쓸쓸한 자기혐오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어서 (“무녀야 넌 뭘 원하니 애들이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부정과 탄핵의 문화가 창궐하게 되었다고 엘리어트는 혀를 차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밤새 흐느끼다가 약을 먹고, 자유주의는 저 스스로 씹창이 난다. 나서, 저 자신의 귀결인 대혼돈의 산산조각에 대한 억지책으로서 인위적이고 기계적이며 야만적인, 흉흉하고 조악한 통제(=전체주의)를 막무가내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신을 향해서 너희들의 무릎이 꿇리지 않는다면 히틀러, 스탈린 들을 향해서 네 잘나고 메스꺼운 무릎은 꺾이게 되어 있다고, 엘리어트는 일그러지고 뭉개진 얼굴로 우리에게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으면서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이든 엘리어트는 서구문명 전체의 죄업이 저 자신의 저지른 죄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교회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죄가 많은 것처럼 폐타이어 같이 오체투지했다는 증언은 더 이상 가책과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우리의 시대, 곧 죄사罪史로서의 역사의 차원이 실종된 시대에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엘리어트 개인사적으로는 1921년에 정신이 완전히 거덜난 이후, 이를 악물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지옥을 두려워하고 애틋해 하는 힘(상상력)으로 신생에의 열망과 그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꿈꾸는 몸부림으로 그의 남은 생은 살아졌다. 그가 꿈꾸던 비타 누오보의 신천지를 위해서 치성을 드리는 일로 엘리어트의 낡은 무릎은 계속 꿇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개폼 잡는다고, “백작 부인의 사치”에 지나지 않고 절망이라는 꾀병을 앓는다고 안철수에게 헛된 윙크를 허비하고 JTBC에 나와서 시진핑을 찬양했던 김용옥처럼 야멸차게 부르고 엘리어트의 허벅지를 질겅질겅 밟아도 좋은 것일까? 퇴폐보다 인간적인 것이 다시 또 있을까? 엘리어트의 무릎을 뚫고 무엇이 들어왔던 것일까? 한국의 누추한 정신사는 무엇으로 무릎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엘리어트의 그 고개를 수그러뜨리는 치성은 요샛말로 하면 자신이 지닌 가치의 순결만을 고집하는 고집스러운 꼰대의 결벽증과 과대망상의 노추, 또는 메시아 콤플렉스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얼마나 무거운 멍에이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저토록 경건하고 엄숙하고 성실해야만 하는 것이며, 쉽게 인생 앞에서 까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엘리어트는 자신의 상상력이 자신의 뉘우침과 불화하는 절망과 무정견 속에서 한 글 한 글 써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곧 그의 기도의 중력이어서, 그는 상상하기 위해서 더 철저하고 뼈저리게 인간 질곡의 밑바닥을 떠멨고 상상하기 위해서 형벌의 질량을 자진해서 가장 많이 짊어졌다. 언젠가, 엘리어트는 “완전한 예술가일수록 고통받는 자아와 창조하는 정신을 더욱 엄격히 분리시킨다”고 썼다. 그러나 엘리어트의 고통받는 자아가 창조하는 정신 속의 먼 오지에 남아 부비적거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늑하지만 쓸쓸하다.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내 수첩의 모서리에는 “도덕성”, “도덕적 진지함”, “에토스” 같은 멸종 위기의 다 거덜나고 망가진, 쑥스럽고 무기력한, 숨이 끊어질 것 같이 힘겹고 쫓기고 내몰린 단어들도 빌붙어 있다.

 

   에토스는 공동체를 향해 있는 마음이라는데, 그 깍지 낀 이심전심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범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인가 라는 낙서도 적혀 있다. 그 작위성의 막막함이 견디기 어려울 때 나는 엘리어트가 집어치웠던 이 팸플릿의 가제假題를 생각하곤 한다. 그는 이 팸플릿을 “기독교 국가라는 이념”이라고 이름 붙였고, “국가”를 향해서 비틀거리면서 나아가던 그는 찢고 다시 썼다. 후인으로서, 그의 어눌함의 환경이나 그의 마음의 지하도의 풍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우리”라는 허상의 껍데기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더 잔혹하고 간절하고 지극한 것이다. 그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 “우리”는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었음으로 사랑의 길은 “사회” 속에 저들을 가만히 두는 일뿐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도덕에도 사랑은 있다. 그러하되, 사랑이 한낱 도덕에 의해서 예속되고 길들여질 때, 사람들은 더는 진정으로 서로를 돕지 않는다. 사랑은 무질서하고 위태롭게, 대책 없이 절망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서로를 돕는 것이다. 너로 하여 불붙는 것이다)(물론, 엘리어트는 사제니, 기독교 엘리트니,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니 해서 그 “사회”를 “이념”이 거듭남을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비책을 마련해두고는 있었다는 사실은 지적해 둔다.) “사회”에 의해서 동질성이 확보될 때 국가의 [민주적] 정당성의 수준은 제고되게 된다. “Society”의 원原인도유럽어 어근인 sekw-는 “따르다”라는 순하고 낮은 뜻을 지닐 뿐이다. “사회”라는 일본식 한자어는 다만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짓고 서로 기대면서 두려워하고 또 받아들이는 터를 의미함으로 “에토스”는 예절과 다른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가축들이 사는 마구간을 지칭할 때 자주 에토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엘리어트는, 국가다운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들의 자유에 선행하는 다자를 통일하는 습관이나 공동체적 정체성, 곧 연결감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그 연대감은 억지로 해서 될 만한 일은 아니며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서는 감당될 수 없다는 인식의 슬픔으로 저 “국가”를 뭉개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권, “크리스텐덤”의 존재는 결코 원활한 공동체 국가의 형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며, 이미 크리스텐덤에서 이해대립의 중화 기능을 찾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내재적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엘리어트의 핵심 논변은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공동체적 질서는, 전통적 일체성을 구성 원리로 하는 전근대적인 기독교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체의 위기를 경험한 공동체의 재건은 이 크리스텐덤을 모델로 삼지 않으면 안 되고, 공동체 원리는 이것에 의해서 기초 지워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공동체가 기독교 윤리를 국가에 일의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국가만이 존재하는 세계, 사회라는 범주가 국가 자신에 의해 구성된 헛것이 된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역설적으로 사회는 종교의 공기를 공급받지 않으면 고름집처럼 고여서 썩어갈 뿐이라는 엘리어트의 테제를 증명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이후 엘리어트에게, 다원주의나 이질성 같은 영악한 것들을 잘 다독거려서 사회적, 관계적 동질성의 안쪽으로 확실히 편입시키는 일에 그의 이론적 노력은 마침내 바쳐질 것이었다. 1948년의 “문화의 정의에 관한 각서”를 참고하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자립자존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에너지를 강화하고, 결박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추슬러 간직하고, 축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완시키고, 건들거리게 하고, 놓아보내는 경향만을 가짐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관습과 지조를 파괴시키고 본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의식을 개별자적 구성원들로 용해시키는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다. 질서의 기초가 되는 맨 밑바닥은 종교적 교리이다. (이 무참한 우스갯소리 같은 말은 내 조국에서는 터무니없다. 우리는 더 이상 충과 효를 근간으로 나라의 기강을 잡지 않고, 땅 위에 간신히 세워졌던 인륜과 인간의 기본 도리들은 두렵게 여겨지지 않는다. 마을과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미풍양속은 끝을 모르는 태업을 하고 있는데,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저질러진 많은 비리, 억압, 차별, 불평등과, 그런 모순들이 엉덩방아를 찧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리게 되었으니 그 덜 떨어지고 불미스러운 “질서”를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통해서 엘리어트의 명제는 저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인가.) 교리와 신조라는 바탕 위에서 인간문화는 가까스로 이루어졌다고, 엘리어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포즈밖에 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의 말, 가난한 사람의 말이다. 그는 연대의 결과가 고통과 실패라 해도 당신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다. 이런 태도의 성실성이 거듭되는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공동체)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다고 엘리어트는 믿었다).

 

   노트 가득 붙어있는 나의 메모 쪼가리들은 여기서 끝나 있다.

 

2.

   민주주의의 참모습으로서의 기독교사회! 엘리어트는 이미 자신의 당대에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는 불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또는 그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저 자신의 사회에 대해 골몰하고 민주주의라는 말로써 지시되는 그 대상이 전체주의를 향해서 얼마든 전개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괴로운 사실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의 법규정이나 실정규범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무엇인가 기어이 따져 묻고, 거기에 서슴지 않고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복창이 아니라 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 행위였다. 그 행위는 민주주의의 규정과 규칙들은 그 자체 지향하는 이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과거에 실정화된 수단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로 해졌다면,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을 위한 쓰여지지 않은 전제조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묻고 있다. 또 그 아이디어라는 말에는 기진한 자유주의의 근간은 종교적 관용이고 이를 구성하는 공과 사의 구분일진대, 서로가 저마다 제 내면의 사막을 견디는, 관용의 그 말하지 않는 정과 영험함은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 이념의 곡진함이 너와 나, 공과 사를 구분하는 골격을 이루며, 오늘날에는 그 곡진함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념과 이념 아닌 것의 전면전이 요구된다는 시대사적 자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골격 안에서 너의 나임과 공의 사인성과 자기 밖의 자기 (유행 따라 말하면 타자화된 자아)는 발생하는 것이다. 그 골격이 전제되지 않은 오늘날 우리가 포섭하게 된 민주주의의 판본이 자랑하는 다양성포용성은 이 관용의 부지런이 아니라, 제일 불쾌한 것처럼 발악하는 자가 제일 감수성 있는 자로 되는, 여하한 관심도 폭력으로 치환시키는 한낱 몰염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사회라는 꼬장꼬장한 단어에 매달린 ...라는 이념이라는 골수를 울리는 당부의 말은 자유주의적이되 마침내 비관용적이다. 엘리어트는 자유주의에 약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엇이 공통된 전통을 부르짖으며 그토록 하나되기를 기원하던 유럽은 다 깨져버렸다.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와 구분되지 않고, 허무주의는 흔쾌히 보수주의로 통용된다.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공통의 전통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동아시아주의가 이미 곤죽이 되어버린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책으로 횡행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비록 전 인류가 견딜 수 없는 재앙이라도 우리를 여기서 구원해줄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진부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엘리어트에게, “기독교 사회라는 이념”은 전근대적 의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기독교”는 유독 서구인들의 지배이념에 맞는 종교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자라는 저 위선자들의 얼굴을 직시하기 위해서 선 절박한 자기 진실의 자리이자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고 야만을 감지하는 그 힘으로 현실을 조직하고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선 백척간두였다.

 

   한국에도 그 작고 서늘한 자리가 확보될 수 있는가. (엘리어트의 범유럽주의 모양으로 그것은 우리에게는 동아시아주의인가? “유교사회” 내지는 “대동사회”가 내 자유민주주의 조국의 기독교 사회가 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존하고 이를 품는 반대급부로 국가로부터의 거리를 획득했음으로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은 한국의 토양에서 품어지거나 역사성에서 획득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그 시초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정주지, 보루이고 그 기점起點이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투쟁해본 바 없고, 늘 국가 친화적이었다. 국가와 교회는 한 덩어리로 뒤엉켜있었으므로, 그 알량하게도 거룩한 예배당에서는 세속과 신성이 다르지 않았다. 국가와 교회는 내통했고, 결탁했으며, 서로를 충분한 정도로 불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와의 투쟁으로부터 (정통의 기초가 되는) 가톨릭성catholicity을 형성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미국=기독교=자유민주주의를 수입했으므로 (엘리어트는 기독교가 자유민주주의와 어떤 긴장 관계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긴장 상태를 담지할 교회가—또는 “사회”가—한국에게는 없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는 광화문이고 그들의 기도의 내용은 구국救國과 국가정체성의 회복이며 그들의 일은 아메리카의 국기를 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문제는 개발도상의 국가권위를 어떻게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할 것인지를 묻는 “세속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저 신자들이 기독교의 기율이 국가의 공법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락하게 만드는 “정치신학”을 재구성하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신학의 임무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선을 계속 새롭게 그려내는 것임으로, 그것은 그 이분법의 강고한 시대착오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개념사적 작업이기도 하다.

 

3.

   이 번역의 무수한 브러싱업을 거듭하면서 기독교, 사제, 이념 같은 발붙일 자리가 없는 신학적·형이상학적 단어들, 이 화려하고 거덜난 것들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쥐어짜내고, 저 안쓰러운 단어들을 징검다리로 늘어놓고 닿을 수 없는 인의예지와 공편타당의 아득한 저편으로 건너가려고 하였던 엘리어트의 야욕과, 소멸해가는 것들과 소생하는 것들의 사잇길에서 어둠 속에서 어둠을 수정해가는 숨막히는 허송세월을 읽고 말았을 때, 나는 이미 시를 배반한 시적 사상가 엘리어트는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여전히 단테와 아퀴나스의 시대를 열어내야 하는 내 고향의 정신사에 물어, 나는 극도로 예민해졌던 것이다.

 

   둘러보라. 이제 그 죽음의 내음이 수술대 위에 까무라친 환자처럼 한국의 정신세계로 풍겨오고 있다. 기독교는 세속화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제3세계 속으로 환원되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의 새로운 정주지이자 피난처이고, 그것의 보루이고 그것의 반석이며, 신생의 성령들이 출렁거리는 다가오는 시간이다. “전염”을 아랑곳 않는 전광훈의 광신적 전념과 대형교회의 “웰빙 보수주의” 사이에서, (촛불혁명가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이승만 광장”과 (우리가 거기 수용되어 있는) “광화문 광장”의 사이에서도, 신은 한 분 살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다 같이 천국에서 만나자던 이승만의 『독립정신』의 마지막 문장과 (샨티 샨티 샨티) 미국인 선교사들의 피흘리는 선구자적 노력과, 서구가 쳐들어와서 전통 사회의 물적 토대를 짓밟아버리고 그럼에도 그 저주받을 깡통 같은 기독교에 매달려서 새로운 공동체를 가차없이 작심해내야만 했던 선비 이승만의 고독한 “개종”과 조정력 있는 나라를 만들지 못한 그의 실패, 그리고 뒤이어진 유구한 갑질과 약육강식의 전통, 윤보선의 민족주의적 기독교관과,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두고 우리 민족이 겪어내야만 했던 질곡들과 기독교가 깨운 혁명적 에너지를 전용해서 민중=모던으로 환치하려고 했던 한신의 허다한 역사, 민중신학자들의 좌절된 시간들, 문선명의 하나님주의와 아베의 가슴을 관통하던 총탄 사이에서, 내가 태어나서 살아온 이 손바닥처럼 빤한 나라에서 기독교만큼 상스러운 것이 다시 또 있을까,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 부족의 다정과 화냥은 기어코 짝사랑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나의 하나님, 유일신이신 하느님을 향해서 말 건넨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혼자서 뇌까리는 참혹한 독백극, 강간당한 문화의 사랑타령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라, 거짓 사랑아). 이래서, 가혹한 말이지만, 기독교는 끝끝내 한국인의 자기혐오의 동의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마도, 고유하게 한국적인 모든 것은 독백적인 것 같기도 하다). 브라질의 황무지에서 돌무더기를 옮기는 한농복구회의 작고 슬픈 신앙과 사랑을 연설하는 권세가들과 압구정 소망교회의 거대한 예배당 사이에서, “국가의 신화”에 복무하는 목사들이 토해내는 신권정치적 언설과 억압받고 눌린 자들의 메시아주의 사이에서, 사랑으로 사랑을 억압하고 사랑으로 사랑을 강변하는 기독교의 가혹한 아수라이자 무정의 황무지, 교회의 전단지 뭉치가 창궐하는, 성聖과 결별한 세속도시의 도심 바닥과 잔인한 장미정원인, 나의 사랑하는 지옥, 나의 조국에서, 긴 겨울밤 동안 연필을 혀끝으로 적시면서 “오, 크리스쳔 소사이어티!”를 외쳤던 엘리어트를 우리는 다만 잔잔한 미소로 되새길 수 있을 것인가. 좌절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혁명적 에너지의 메시아주의와 신권정치가 마주 부딪치는 이 피묻은 아이러니에서, 그것을 내리누를 수 없다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 나가도록 발길질하는 것이 보수주의라면 그 보수주의는 우리 시대의 카테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보수주의의 상징적 수반이자 얼굴마담, 모더니즘의 교주가 모던 앞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단말마적인 긴장과 오체투지의 자기학대로 그토록 간절히 질서를 지향하면서 시대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신공양은, 그 생지옥 같은 엘리어트의 “이념”은 내 나라의 근본주의자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외친 악명 높은 “전통”론은 “기억”과 “욕망” 사이의 좁은 문을 통과해가는 황톳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생사의 거듭이라는 쳇바퀴을 가차없이 드러내는 봄의 관능에 진저리치고 쩔쩔맸던 저 젊어서 늙은 시인 T. S. 엘리어트, 그리고 1960년의 사월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는 전율”에 빠졌지만(김수영)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오지 않던 봄을 절규하고 통곡한(이성복) 한국의 시쟁이들의 “모던”과 엘리어트의 “모던”은 그렇게 맞닿아 있는 것인가, 혹은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 것인가. 왜 우리의 “고전”들은 당대의 작가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가 를 절규하고 몸부림하던, 늘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찌그러진 인생들, “얼과 넋”, “초연”(서정주) “고삽미”(조지훈) 같은, 전통의 인자인지 전통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 위장하는 허허로움의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단어들을 늘어놓고 근대로 건너가려고 했던 저 못나고 부끄럽지만 기어코 무를 수 없는 나의 식민지 조국과 대한민국의 선배들인 육당과 벽초와 백철과 김동리 들의 혼백이 들락거리는 서재에서, 이 가혹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나는 삭아 문드러진 원서를 들고 책상에 붙어 앉았다. 이 번역은 끝내 서글픈 것을 보여줄 것 같아서 나의 눈에는 날이 섰다.

주권에 대한 전쟁이 다가온다[각주:1]

존 볼턴

 

번역자의 앞글

   주권의 영생을 믿었던 것은 똥구더기 같은 보수 세력만이 아니라 주권을 “글로벌 컨셉트”라고 치켜세웠던 좌파 학자들이었고, 시간의 다수성에 대한 그들의 서정적인 열광이었다. 이 개념의 환절기에, 로마황제의 임페리움이 영토군주의 왕권확립으로 놓여나고, 또 근대국제질서를 지탱하는 일반명사로 해탈되어지는 평범한 순서 속에서, 주권의 변주가 자아내는 낯설고도 강렬한 무대야말로 어떤 역사철학의 차원을 생생하게 환기해주고 있다.

 

   들으니, 미국과 세계를 지극한 비참함으로 몰아갔던 것은 미 정부의 대외정책이고 인페르노적 집단이라고 평해지는 네오콘이라고 한다. 걸프전에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이 주전론자들의 침략주의는 타자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 결정 지워지는 것이고, 그 공포의 기류 위로 부유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동일성의 사유”라고 규탄되고 있다. 그 상투적 면박이 어찌되었건 간에, 그 순진함을 조롱해 가면서 주권은 그런 자유주의 근성에 찌들린 체념 따위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끝까지 싸워서 이긴 주인의 것이라고 크리스톨의 제자들과 레이건의 수하자들은 극악무도하게도 떠벌렸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서 “포스트주권”적인 유럽연합에 열광하던 하버마스와 같은 코스모폴리탄들이 외치던 사회적 연대나 정의 같은 멀고 희미한 주장들과, 국민국가의 담장의 형해화에 열광하면서 전개되어갔던 휘황찬란한 이론적 성과들이 이론이 실천에 대해 가지는 필연적인 관계에 걸려 넘어지고, 하버마스가 그토록 부심했던 절차주의적 주권이 포퓰리즘적인 민족주의의 발호와 복지국가의 붕괴에 대한 구멍마개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2008년 금융위기가 역사로의 회귀를 표시하는 뒤숭숭한 지표가 되었을 때, 2009년에 씌어진 존 볼턴의 이 기고문은 이미 한낱 시국적 표현은 아니었다.

 

   오바마 이후, 부시 행정부의 산일하고 희석되었던 네오콘들은 차곡차곡 번성했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자멸적 정서를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가면서 시대의 파괴적 경향과 결탁했고, 특히 볼턴은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어서 초강수로 아태지역을 충격했다. 그가 진두지휘했던 “하노이 노딜”에서 그 보수반동적인 계기는 문재인 정권이 전력투구했던 남북관계를 말아먹었다. 로마법적 기원의 주권은 수많은 색으로 흘러가다가 기어코 신보수주의로 함몰하고, 유엔 헌장으로 육화되었던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피에 물든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주권의 개념을 사로잡았던 것은 인권이었다. 1945-48년 이후, 국가들 간의 평등이라는 대외적 주권의 모호성 안에서 서식했던 것은 인권이라는 난공불락의 환상이었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국제법의 원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하던 켈젠이나 마이클 도일과 같은 국제주의자들에 반해서, 인권은 자유주의적 국민국가에서만 제도적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왈쩌, 롤즈와 같은 국가주의자들은 훈수를 두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 대항해서 주권의 깃발을 내세우는 거대한 주권주의의 대열이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가 운명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주권의 규범화, 윤리화를 따지고 들면서 그 혹세무민에 대해서 단말마의 신음과 절규로 사보타주했던 것이다. 국제법이나 인권협약들이 인권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주권의 사실로부터 유리되어서 국가주권과 국내법을 침범하는 뻔뻔스러운 괴력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을 하트와 네그리, 모인과 같은 좌파들은 시비했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제국과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지독한 인권의 위선과, 인권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선하고 좋은 낱말들도 주권 위에 완강히 입각하지 않을 때 무모하고 추잡한 권력으로 탈바꿈된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 주권주의자들에게서 인권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미 제국의 야심은 물구나무를 서서, 인권은 삽시간에 애물단지로 구박받게 되었던 것이다.

 

   볼턴의 주권론 또한 이 좌파 주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주권을 스스로 저 자신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닌 높이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다. 인간의 억압과 고통과 야만에 대응하려는 전투의식은 인권의 언어를 더욱 들뜨고 허망한 신기루로 만들어 가서, 가령 리처드 턱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주권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고 웃자란 초국가적 제도와 인권의 위태로움을 돌아보려는 경계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네오콘의 화행이 배후조종했던 것은 다만 팽창주의나 간섭주의, 강권주의라는 악질적 이념이 아니라, “미국적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에 기반해 있는 도덕주의였다. 좌파 학자들이 들끓고 날뛰는 인권의 언어를 글로벌 자본과의 밀월 관계 위에 설정했다면, 볼턴에게 유럽연합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포스트 베스트팔렌적” 주권모델은 자기통치라는 제일원칙을 져버리는 것이었다. 국제법은 그 자기통치의 원리를 위협하는 다자주의적 기구들의 외곽을 치장하는 패션에 불과하다는 볼턴의 수사법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몽매한 열정의 언어들을 돌이키게 하는 견인력을 가진 것이어서, 보수적 주권주의는 이내 시대의 중원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볼턴이 강조하고 있는 대로 주권이 보호하고 있는 것은 “위 더 피플”이라는 정치적으로 통합된 사회의 민주적 자기결정이었는데, 이는 다만 자민족중심주의라고 넘겨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주권이 여전히 민주주의의 선결요건이자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핵심관념인 이유가 있다. 볼턴의 주권론은, 요사이의 사나운 표현법에 따르면 단순히 개별적 미국인들을 국민적 수준으로 재주술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권이야말로 민족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과 국가적 신념의 중개장치라고 확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권은 단념할 수 없는 것인데, 벤하비브가 난민의 문제에 그토록 공들이는 이면에는 에트노스ethnos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 거대한 결핍들에게도 노모스의 정당한 몫이 주어질 수 있는가, 곧 데모스demos, “우리”의 경계라는 어렵고 모순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 좁고 가난한 영역 안에 갇히는 부자유를 모두가 수락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주권의 종명終命을 기록하는 돈 헤어조그 같은 대학교수들이 조소했던 것은 권위에 대한 공간적 유비에 갇혀서 멈칫거리는 주권적 사고의 타성이었고, 권위의 비장소성, 분리가능성, 제한성 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론적 구조의 허망함이었다. 그 후, 영토성에 기반한 주권관념을 실질적으로 탈각하는 “디지털화된 주권”이라는 역설적 종합명제가 (피스토Pistor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제시되었고, 주권자가 기술수단의 최고도의 실효성을 거머쥔 자로 되어가는 “주권 2.0”과 같은 참신한 논자들의 공격적 아티클 속에서 보댕과 홉스의 고전적 주권론에 둘러쳐진 차일막은 소멸되고 훼손되어 버렸던 것이다. 

 

본문

   상례가 되었지만, 갓 시작된 버락 오바마의 임기는 그의 행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유력하고 위세 높은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정책 제안들로 홍수를 이루었다. 공물 하나가 눈길을 잡아 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연구보고서이고, 발원처는 비범하며, “행동을 위한 플랜”이라는 제목이 지녀져 있다.[각주:2] 그 부제는 놀라우리만치 거침이 없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국제협력의 새 시대: 2009, 2010, 그리고 그 이후.”

 

   “행동을 위한 플랜”은, 설명하는 방식이나 말씨에서는 치사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그것은 대외정책보고서 보다는 기업의 홍보물을 더 닮았고 또 그렇게 읽힌다. 그것은 세 학자들—뉴욕대의 브루스 존스와 브루킹스 연구소의 카를로스 파스쿠알, 스탠포드의 스티븐 존 스테드먼 들—의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보고서의 결론과 주문들은,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의 여러 전 국무부장관들 뿐 아니라 클린턴과 아버지 부시 정권의 국방부 관계자들까지 포함해서 국내 및 해외의 대외정책 분야의 명사들과의 대담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들은 역설한다. 저 명망가들의 참여에 의해서 “행동을 위한 플랜”은 그 그럴싸함을 보장받는 것이지만, 그들의 생각들이 보고서에 실제로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저러나, “행동을 위한 플랜”에서 표현된 생각들이 미국 대외정책의 향방에 대한 좌파적 비전의 주조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쉽잖은 것 같다.

 

   “행동을 위한 플랜”이 유독 흥미롭지만, 또 그만큼 걱정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보이는 그대로의 것이라면—즉, 조지 W. 부시의 대외정책과는 구별 지어지는 대외정책을 개발하려고 하는 오바마 행정부를 위한 청사진이라면—이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은 미국의 건국부터 미국이라는 실험의 핵심부에 있었던, 대표에 의한 자기통치의 원리와 실천으로부터의 (급격한을 넘어선) 급진적인 방향 전환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주권에 대한 변화된 이해를 그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 * *

   “주권”이라고 하는 말에는 무수한, 때로는 상호 충돌하는 정의들이 미끄러져 들어왔지만,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은 우리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는 우리의 집단적 권리를 뜻하는 것으로 그 어휘를 이해해 왔다. 그러함에도, 오늘의 좌파 엘리트들은 주권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어서, 개개 시민들에게도 덜한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라고 의뭉을 떤다. 저마다의 국경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개별 국민국가들이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관리하는 모델을 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게 된 것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한 것인데, 그 모델은 21세기에 한결 적합한 새로운 구조들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이 새로운 모범으로 주로 내세우는 것은 유럽연합이다. 브뤼셀에서 통어되는 중심화된 금융시스템의 지도력 아래 스물일곱 개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있다. 기후변화에서 무역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슈마다, 미국의 좌파들은 초국가적 합의라는 유럽적 사례를 미국에 대해서도 합당한 표본으로서 점차로 더 참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특히 더 두드러지는 것은, 존 케리가 2004년 대통령 후보경선 과정에서 미국의 정책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 노출되고 있는 그대로이다.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이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의 행동이 때때로 지극히 상이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지닌 다른 정부들의 동의를 상관해야 한다는 관념을 미국인들은 오래 저항해왔다. “행동을 위한 플랜”을 배후에서 추동시키는 것은 저 오랜 미국적 신념에 대한 대외정책 기득권들의 불안감이고, “행동을 위한 플랜”은 그러한 신념들은 혁파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가공할 만한 시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목적이 그러함으로, 필자들은 그들이 “책임 있는 주권”이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한 변론서를 써냈다. 이것은 “주권에는 저 자신의 시민들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까지 의무와 책무가 수반된다는 관념”으로 정의 내려지고, 그 적용은 “협동적 국제질서”를 위한 기반을 형성하리라고 그들은 믿는 것이다. 언뜻 보아서, “책임 있는 주권”이라는 귀절에는 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누가 도대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주권”을 옹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하되, “플랜”의 주류적 발원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은 주권 자체를 극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글로벌 리더들은 고립되어서는 자신들의 이익과 시민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으며, 국가안보는 국제안보와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플랜”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미국이 “일방주의[단독주의]를 거부하고 군사력의 저편을 바라보는 규칙 기반의 국제 시스템”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임시방편의 국제체제에 매몰되어야만 하리라”는 것이다. 단순한 “전통적 주권”은 우리가 들어선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고, 이 시대에는 우리는 “이제 초국가적인 세계라는 현실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 “규칙 기반의 국제 시스템”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위한 조건들을 빚어내리라는 것이다.

 

   부시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참담한 피해 때문에 이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당장에라도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 “플랜”의 주장이다. “플랜”의 내러티브에 따르면, 부시는 외교를 경멸하였고 무력사용, 체제변혁, 선제공격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무작정無酌定을 한결같이 선호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플랜”은 “일방주의[단독주의]를 탄핵하고 군사력 저편으로 눈길을 돌린다”는 것이다. 실행되어서, “플랜’은 분쟁들을 잇따라 요령 좋게 해결할 것이고 급기야 전세계적인 상합이라는 새롭고 전례 없는 시기를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 * *

   오바마가 집권했음으로, 외교의 효용에 대한 활발한 토론은 분명 필요할 것인데, 그러나 그 토론이 “행동을 위한 플랜”에서 제시된 너절한 전제들에는 기반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절대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국제 시스템 내에서 발생하는 갈등들의 해결책은 외교일 수밖에 없다고 대외정책 전략가들은 이념적 성향을 가릴 것 없이 믿고 있다. 부시 정권도 그처럼 행동했음은 물론이다.

 

   차이는 극소수의 경우들을 고려할 때 발생한다. 그 경우들이란, 외교적 노력을 극력 어지럽히고 저마다의 국익들이 기어코 화해되지 않는 경우들이다. 만약에 외교가 먹혀들지 않고 먹혀들 수도 없다면, 문제적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외교를 고집하는 것은 암환자에게 차도도 없는 화학요법을 고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 결과는 치료 비슷할지 몰라도, 사실은, 환자는 그저 악화될 뿐이며, 개선의 가능성 또한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교라고 다른 인간 행위들과 다를 바 없다. 비용이 있는가 하면 편익도 있는 것이다. 특정 문제와 관련해서 외교에 관여할지 그렇지 않을지[의 판단]은 비용과 편익 양자의 엄정한 셈을 요구한다. 이는 합리적 인간들 간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외교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매개변수—언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일지, 우리의 목표들을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지, 그리고 이 과정의 목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확정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냉전 초기, 해리 트루먼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강자로서 협상할 수 있을 때에만 미국은 비로소 소비에트와의 협상을 고려해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외교라는 무도에서 시간만큼 중대한 변수는 없다. 자주, 시간은 이편에는 비용을 부과시키는데 그 반대편에는 혜택을 부과시킨다. 외교적 프로세스가 허락하는 시간을 누림으로써, 국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뭉뚱그리거나, 동맹을 형성하거나, 전쟁을 위한 작전에 매진하거나, 그리고 특히 오늘날에는 대량살상 무기와 이를 운반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제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인도주의적 지원으로서 호의를 베푼다든가, 경제적 제재를 중지한다든가, 심지어 협상 도중에 정상무역관계를 재개한다든가 하는 것을 위시한, 적국을 외교적 영역 속에 관여시키는 행위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구체적 경제적 이법들도 엄존한다.

 

   당연히, 더 큰 목표의 달성을 위한 현명한 투자처럼 보인다면 상당한 비용도 기껍게 지불하는 것은 미국만 아니라 모든 합리적인 국가의 상정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러한 몽상적 결론들은 당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 불편하고 명명백백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국가들은 개선의 마지막 빛이 꺼진지 오랜데도 협상을 질질 끌어왔던 것이다. 너무나 많은 외교관들에게, 교섭의 점멸 버튼은 존재하지 않고,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순간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혹시라도 수포로 돌아간 협상으로부터의 “엑시트 전략”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는 외교관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겠지. 그런데 말이다. 있어야만 하는거 아닌가.

 

* * *

   외교는 도구일 뿐 방침이 될 수 없다. 외교는 기예이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적들과 “교섭해야engage”[각주:3]한다고 절절하게 부르짖는 것은, 그러나 협상테이블에서 인사치레가 끝난 후 뒤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도 말해주는 바가 없다. 특히 그 자리에 나오는 것만으로 공인되는 이들이 있는 만큼, 대화를 무릅쓰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유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더 보태지지 않는다면, 사진촬영의 의미와 효능은 빠르게 수그러들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외교는 추잡하고 공공연한 알목을 내동댕이치지 않는, 보다 포괄적인 전략적 스펙트럼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외교가 혹독한 제재와 껄끄러운 비난, 심지어 무력사용의 위협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이는 한쪽은 합의에 다다른다는 순진한 기대에 멍청히 있는 동안 다른 쪽은 꼴리는 대로 행위하게 되는 호구놀이가 될 위험마저 있는 것이다.

 

   “행동을 위한 플랜” 속에서, 외교는 그 자체 목적으로 되고 있다. 다자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플랜”이 상찬하고 옹호하는 다자주의는 부시 정권에 대해서 그려낸 제 나름의 초상화—현존하는 국제조약과 국제기구들을 재미삼아 뒤엎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일방주의자 카우보이들로 넘쳐나는—와 현격한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방주의에 대한 정의는 간단명료하다. 그 낱말은 국제 사회에서 제멋대로 행위하는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다.[각주:4] 그러하되, “다자주의”를 단순히 그 반대말로 새기는 것은 심중한 개념적 착오가 아닐 수 없다.

 

   먼 예를 들 것도 없이, 국제연합과 나토,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의 갖가지 역할들을 구경해보라. 다자주의의 성배라고 해야 할 국제연합은 192개국의 조직으로서, 국제평화와 안보를 수호하는 책임은 안전보장이사회에게 맡기어져 있다. 나토는 26개국의 군사 동맹인데, 회원국은 모조리 서구 민주주의[국가]이다. 확산방지구상(PSI)은 부시 정권에 의해서 2003년에 창설되었고, 대량살상무기의 불법적 국제거래를 방지하기 위해서 현재는 90개국 이상의 다양한 국가들이 포함되어 협력하고 있다.

 

   이 각 조직들은 두말할 나위없이 “다자주의적”이지만, 그 낱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에 그들의 역할은 민망할 정도로 상이하다. 예를 들어서, 가령 미국이 중대한 위협과 맞부딪쳤을 때, 다자주의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그 문제를 나토나 국제연합에 회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두 선택지는 모두 “다자주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실질 뿐만 아니라 아마도 군사적 함의에서까지도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그 둘이 비교가 가능하다고 해도, 스테이크 나이프가 일회용 버터 나이프와 비교 가능하다는, 그런 멋쩍은 의미에서만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PSI는 더욱 역연한 대조를 이룬다. 국제연합이나 나토와는 다르게, PSI에는 사무총장이 없고 사무국이나 본부도 없으며 정기적인 회의 또한 개최하지 않는다. 한 영국 외교관은 PSI를 “조직이 아니라 액티비티”라고 불렀다. 아닌게 아니라, PSI의 모델은 때때로 비효율적이고 별무효력이었던 재래의 국제기구의 구조를 넘어선다는 이유로 인해서 미래의 다자주의적 행위의 이상적 모델로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자주의”는 더불어 행위하는 일군의 국가들이 취하는 국제적 행동action를 묘사하는 낱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행동을 위한 플랜”의 필자들에게 다자주의는 거의 영적이기까지 한 면모를 가지고 있고, 국경과 대양을 넘나드는 하모니의 기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모니가 불협화음들을 마름질하기 위해서 꾀해지는 것처럼, “책임 있는 주권”에 의해서 지도되는 미국 대외정책이 그려내는 다자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 속에서 미국은 다만 여럿 중 하나의 행위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 국가들의 연합체는 그 하모니를 위해서 대체로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대외적 행동 뿐만 아니라 50개 주 내부에서의 행동에까지—제약하도록 결의된 정책과 행위들을 개시하는 것이다.

 

   이것의 선례가 되는 것이 유럽연합의 준거conduct로서, 그 27개국은 이제 유로라는 공통화폐와 주권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극도로 복잡한 무역 및 노동 정책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유럽연합은 “행동을 위한 플랜”의 필자들이 미국 내로 수입하려고 내세우는 “책임있는 주권”의 레짐의 궤범을 제공하고 있다. 브뤼셀에 소재하는 유럽연합의 관료들은 이제 십여년도 넘게 회원국들의 우선순위와 요구들을 재편성해왔는데, 그 기제를 본뜬 시스템을 제안하는 것은 미국을 그 대외정책에서뿐만 아니라 온당히 일국적 정책에 속하는 문제들에까지 국제적인 감시에 항복시키려는 속셈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규범설정norming”이라고 알려져 있는, 국제적 행동conduct을 규격화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작태에서 수년간 드러난 대로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를테면 측정을 위해서, 또는 공해에서의 행동[규범]을 위해서 국제적인 규준을 설립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규범설정”은 이 같은 예사로운 이유들을 초극하는 것이다. 일례로, 국제연합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명백한 의도에서부터 여러 위원회에서 사형제를 규탄하는 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낙태권과 총기류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투표들이 행해져 왔다.

 

* * *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 내에서 무성한 민주적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토론을 더 풍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문제들을 국제화할 필요는 없다. 이 문제들과 여러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것은 국내 토론에서의 패배자들이 자주 논쟁들을 국제화하는 것의 옹호자로 된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행위자를 바꿀 수 있다면, 정치적 결과도 바꿀 수 있다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 듯싶다. 이곳의 국내 정치판에서 패배한 그네들은 저 논제들이 판정될 수 있는 판도를 재구획하려고 하고, 단독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미국의 의사결정을 다자적이고 관료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환경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국내적 문제들을 망라하여서 자신들의 당면과제를 “규범설정”의 문제로 어떻게든 바꿔치려는 비정부단체들이 국제무대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이름하여 “책임 있는 주권”이란 이러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이다. “행동을 위한 플랜”의 저자들과 서명자들에게 있어서, 주권이란 다만 추상어에 불과한 것이고 그 단어가 처음 연원했던 절대적 권리를 지닌 “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상실한 구태의연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헌법이 이해하는 바는 이와 다르다. 미국 헌법은 국가의 주권적 권위를 구성하는 “우리 인민들we the people”에 그 정통성의 기반을 의존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과 주권을 “공유”하자는 것은 미국인들에게는 결코 추상에 지나는 것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부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가지는 미국인들의 주권적 힘을 감소시킬 것이고, 이는 헌법이 씌어진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오래] 주저해 왔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주저함은 계속해서 진군하는 “책임 있는 주권”을 저지하고 뒤바꾸기 위해서 이에 대한 보다 합력된 행동의 형식을 띠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건국자들이라면 이 필요를 직시했으리라.

  1. The Coming War on Sovereignty - John Bolton, Commentary Magazine [본문으로]
  2. [볼턴의 원주] 보고서는 http://www.brookings.edu/reports/2008/11_action_plan_mgi.aspx 에서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다. [본문으로]
  3. [역주] 외교안보 분야에서 “engage”는 대체로 “관여”로 번역되고, “교섭”은 “negotiate”의 번역어로 정착된 것 같다. 대체로 이 관행을 따랐으나 역자의 판단에 따른 부분도 있다. [본문으로]
  4. [볼턴의 원주] 일방주의와 고립주의의 계속되는 착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이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부시 행정부 이전부터 나는 이 구분에 관해서 “일방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Gwyn Prins, ed., Understanding Unilateralism in American Foreign Relations, Chatham House, 2000. 근래에는 매쿠빈 토마스 오웬스가 “부시 독트린: 공화당 제국의 대외정책”, Orbis, 2009년 겨울호에서 유사한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만자동경曼字銅鏡[각주:1]

김동리

 

   내가 고향에 갔을 때 이미 그 성은 없어진 뒤였다. 옛날 성이 있었던 자리는 반반히 닦여진 채 깨끗한 상가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두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는 듯했다. 어깨뿐 아니라 머리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나는 그 새로 난 상가를 덧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도 없는 울분과 허망과 설움 같은 것이 뒤엉켜서 머릿속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옛날의 서문 거리까지 와 있었다. 서문 거리의 외딴 오두막, 옛날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 쓸쓸한 오두막도 물론 없어졌고, 그 자리엔 새로 지은 양기와집 한 채가 <경주 양조장 서부출장소>라는 함석 간판을 이마에 붙이고 서 있었다.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나는 오던 거리를 향해 되돌아섰다. 서문 거리의 오두막 생각은 다시 성 가에 붙어 있었던 옛날의 다른 오두막을 내 머릿속에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일대는 다 상가로 변했어, 하지만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나 살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서문 거리에서 남쪽으로 한 마장쯤 나가면 성 안쪽으로 오두막 두 채가 성 가에 붙어 있었다. 보통 오두막 두 채로 불리긴 했지만, 앞에 앉은 좀 큰 편인 오두막은 방 한 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조그만 부엌과 헛간이 붙은 찌그러져 가는 낡은 기와집이었고, 거기서 다시 여남은 발 뒤에 엎드린 작은 오두막도 방 한 칸에 부엌이 따로 붙어 있었다. 앞의 큰 오두막에는 석씨 성의 홀아비가 살고 있었고, 뒤의 것은 무당 연달래가 쓰고 있었다.

   내가 이 오두막들이 옛날 있었던 자리를 찾아보느라고 동쪽 상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 어떤 늙수그레한 사내 한 사람이 그쪽 이층 기원에서 층계를 내려와 인도 위에 나서고 있었다. 사내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듯했다. 나도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내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이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는 나를 향해 포도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는 내 곁을 다가오자 손을 내밀며,

   “창봉이 앙이가?”

했다.

   나도 물론 미소로써 손을 마주 잡았다. 서예가 김수권이었다. 수권은 나와 같이 교회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소년 시절을 남달리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같은 반이었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라고 했었다.

   “거기서 뭐하노?”

   수권은 또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기원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잖나?”

   “오냐 잘했다. 내가 기원에 있는 걸 서울서부터 보고 있었제?”

   그는 이렇게 받으며 나를 건너편 다방으로 끌었다.

   우리는 커피를 시켜놓고 간단한 인사말들을 나눈 뒤, 서로가 상대를 조금도 늙지 않았다는 둥, 늙은 것 같지도 않다는 둥 격려를 아끼지 않다가, 수권이 다시,

   “자네 일제 말 때 다녀가고 이제 첨이제?”

하고 물었다.

   “그쯤 되네.”

   “예끼 사람, 그럼 이십 년도 넘잖나?”

   “그러니 나도 할 말은 없다마는, 여기 본디 성이 있었는데, 그 성 없앤 거 유감 천만일세.”

   “잘한다, 그런 소리나 했다가?”

   “왜?”

   “여기가 바로 성터 아이가? 그런데 성을 와 없앴노 카먼 여기 상가 사람들이 좋닥 하겠나? 그뿐 아니라 그 바람에 경주가 비약적으로 개발이 됐다고 좋아 죽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 줄 아노?”

   “그렇지만 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개발할 수도 있었잖아?”

   “문화인 같은 소리 하네. 그런 생각하는 사람, 자네하고 나하고 또 몇 사람 더 있을 끼다.”

   “그렇지만 나는 분해 죽겠어.”

   “와,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고향이 없어진 거 같잖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고 그 성 가에 붙어 있던 오두막은 어떻게 됐나?”

   “홀애비 영감하고 무당네 집 말이제?”

   수권이 이렇게 되묻고 나서, 내가 입을 열 사이도 주지 않고 다시,

   “그 오두막 얘기 같으머 내가 잘 알고 있네. 단지 추억이 아쉽닥 하는 거라면 별도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수권의 말에 나는 좀 놀랐다. 그 오두막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냥 관심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되던 사람도 나밖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믿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기심과 기대에 찬 눈으로 수권을 잠깐 바라보다가,

   “그래, 얘기해 주게.”

했다.

   우리는 다방을 나와 아까 내가 보고 온 서문 거리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문 거리에서 돌다리로 개천을 건너서, 이내 북쪽으로(개천을 끼고) 돌면 수문이 있고, 그 일대엔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이라, 두 사람이 얘기하며 거닐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성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성이라기보다 길고 큰 돌 무더기에 가까웠다. 돌 무더기의 높이는 한 길 반이나 되었을까. 거기다 개천 바닥이 또한 한 길 남짓 되어서, 개천 바깥쪽에서 바닥을 가늠하고 쳐다보는 높이는 두 길 반에서 세 길가량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돌 무더기로 성을 복구시킨다면 몇 길이나 된단 말이냐. 적어도 네 길이나 그 이상의 높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렇게까지 높았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동북쪽에 허물어지지 않고 옛날대로 남아 있을 부분으로 보아도 두 길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돌 무더기는 본디 그 자리에 성을 쌓았던 돌만이 아니고, 다른 데서 더 많이 옮겨 왔다는 얘기가 된다.

   본디 경주성은 경주읍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그러므로 남문이 있었던 남문 거리라는 곳이 당시의 경주읍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이 남문 거리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엔 개천만이 남아 있고, 성도, 성을 쌓았던 돌 무더기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동남 귀퉁이에서 동북 귀퉁이까지도 대개 이와 비슷했다. 성이나 성을 쌓았던 돌 무더기를 찾아볼 길이 없었다. 개천도 중간쯤에서 북쪽으로는 절반가량 메워져 있어서, 남쪽이나 서쪽의 그것에 견주어 넓이나 깊이가 다 형편없이 줄어들어 있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똑똑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막연한 추측으로는 남쪽 성의 돌 무더기는 서쪽 성(돌 무더기)으로 옮겨지고, 동쪽 성의 돌 무더기는 동북 성 귀퉁이께와 북천北川 쪽으로 옮겨졌거니들 하고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서쪽 성의 돌 무더기는 그렇게 높고 컸던 것이다. 성이 그런 만큼 개천 바닥도 옛날대로 그렇게 깊고 넓은 편이었다.

   이러한 서쪽 성 밖에 우리 집은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동네를 가리켜 성 밖 동네라 하였다. 사실 성 밖의 동네는 서쪽뿐 아니라 동 · 남 · 북에 다 있었지만, 다른 데는 다 본디 성이 있었던 자리뿐이요, 서쪽에와 같이 그렇게 크고 길고 완강한 돌 무더기가 쌓여진 데는 없었기 때문에, 같은 읍내이면서도 유독 우리 동네만을 두고 성 밖이니 성서城西니 하고 불렀던 것이다.

   이 성 밖 동네에서 성안으로 다니는 길은 남쪽에서 개천을 끼고 남문 거리 쪽으로 내왕하는 길과 서문 거리를 통하는 길과 둘이 있었지만, 그 중간쯤에 성을 넘어 다니는 손바닥 넓이의 지름길이 있었다. 보통 성을 넘어 다닌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넘어 다닐 만큼은 돌 무더기가 치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성 터진 데>라고 불렀다. 그래 이 성 터진 데를 넘어오면 개천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재 넘고 물 건너고 하는 꼴은 다 갖추어진 <성 터진 데>의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름길을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에겐 그랬다. 그 까닭은 첫째 길이 험하다는 것이요, 둘째 오두막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째의 길이 험하다는 말에는 까닭이 있었다. 성 터진 데란 것이 돌 무더기가 대강 치워졌다는 뜻이지만, 그 치워진 돌 무더기가 양쪽으로 더 높이 쌓여진 꼴인 데다 그 위에 잡초가 덮여 있었기 때문에 언제 독사나 지네 같은 것이 기어 나올지 모르도록 되어 있었고(그 돌 무더기에 뱀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좁은 길바닥이란 것이 거의 전부가 돌부리였고 그 위에 경사가 좀 급했기 때문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었고, 또 개천의 징검다리라는 것이 그렇게 반반하게 다듬어진 돌들이 아닌 데다 옆댕이엔 이끼가 파랗게 끼어서 자칫 돌 끝을 잘못 밟기나 하면 개천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그뿐도 아니었다. 성 터진 데를 넘어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쪽이나 개천을 건너서 성 밖 동네로 나오는 쪽이나, 바로 곁에는 인가가 없고 보리밭을 몇 뙈기씩이나 지나서야 동네 끝이 시작되기 때문에 문둥이나 도둑의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통틀어 길이 험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밖에, 거기 있는 오두막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오두막에 문둥이가 사느니 거지가 사느니 했지만 이것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그 길을 피하도록 만들려고 어른들이 조작해 낸 헛소문이었고, 사실은 그냥 외로운 남녀가 따로따로 살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여러 차례나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내가 물어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나는 내가 왜 이 길을 즐겨 자주 다니게 되었던가 하는 것부터 먼저 잠깐 일러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까 우리 집이 성 밖 동네였다고 했지만, 성 밖 동네하고도 동북쪽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남문 거리 쪽으로 돌아 나가려면 길이 여간 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쪽으로 조금 더 나가 서문 거리 쪽을 통과하려면 남문 거리 쪽보다 길은 좀 더 멀지만 그 대신 무섭고 쓸쓸하기는 성 터진 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자주 들러야 하는 백모님 댁은 경주 객사 뒤였기 때문에 성 터진 데로 넘어다니는 쪽이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이 밖에 내가 그 길을 즐겨 다닌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한마디로 그 길의 쓸쓸함이 왠지 내 맘을 끌었던 것이다. 성 터진 데뿐 아니라, 성으로 일컬어지는 그 긴 돌 무더기에 나는 왠지 곧장 마음이 끌렸었다. 그래서 나는 백모님 댁엘 다닐 적마다 언제나 이 성 터진 데를 이용하곤 했던 것이다.

   성 터진 데서 내가 뱀을 발견한 일도 두서너 번 있었지만, 뱀이 나에게 달려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달려든다 하더라도 뱀이 나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잘 살피기만 하면 된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성 터진 데를 넘을 때마다 돌 무더기 밑에 붙어 있는 두 오두막을 한참씩 바라보는 일도 거의 거르지 않았었다. 성 터진 데서 북쪽으로 여남은 발 떨어져 돌 무더기 곁에 붙어 있는 찌그러져 가는 기와집 오두막과 거기서 북쪽으로 좀 더 떨어져 있는 초가 오두막에서 문둥이나 험상궂은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대개는 빈집인 듯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한 달에 두서너 번씩은 샛노란 얼굴에 노르께한 콧수염이 달린 쉰살쯤 되어 뵈는 남자를 앞 오두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는 일이 결코 없었다. 내가 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두어 번 이쪽을 흘낏흘낏 쳐다보긴 했어도 그 다음엔 고개도 돌리는 일이 없었다.

   뒤의 오두막에서 홀어민가 무당인가를 발견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한 달 잡고도 한두 차례가 고작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섯 살 때인가부터 어른들 몰래 이 길을 다녔지만 내가 그 홀어민가를 가까이서 만난 것은 아홉 살 때였다. 하루는 어두워질 무렵 서문 거리로 나오는데(어두울 때는 성 터진 데로 다니지 않았다), 오두막에서 서문 거리 쪽을 향해 밭둑 길로 걸어 나오는 그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서른 살 남짓 되어 뵈는, 꼬챙이같이 마르고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얼굴빛이 파르스름한 여인이었다.

   내가 먼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채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 쪽에서도 별덩이 같은 굵은 두 눈으로 나를 한참 쏘아보며 지나갔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성 터진 데를 지날 적마다 그 여인이 사는 뒤의 오두막 쪽에다 더 오래 시선을 쏟곤 하였다.

   그런 지 3, 4년이나 지난 뒤였다. 온 들판에 보리가 가득 실려 있는 이른 여름이었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나는 백모님 댁엘 다녀서, 입시 준비에 필요한 참고서 한 권을 사 들고 성 터진 데로 나오려니까, 그쪽(뒤의) 오두막에서 보리밭 사이로 나오는 나와 같은 반의 이영희李永姬를 만나게 되었다.

   이영희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너무나 뜻밖의 일에 나는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영희 쪽에서도 물론 그 굵은 두 눈으로 나를 그냥 쏘아보고만 있었다.

   “니 여기 웬일이고?”

   한참 뒤에야 나는 겨우 이렇게 물었다.

   “······.”

   영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무섭게 빛나는 두 눈으로 그냥 나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순간 나는 야릇한 충동이 일었다. 그 보리밭 고랑에다 영희를 쓰러뜨리고 싶은, 일찍이 느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욕망이었다. 순간 영희의 입에서 야무지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져 나왔다.

   “길 비켜 줘!”

   이 소리에 나는 정신을 돌이키며, 무슨 말을 건넨다는 것이,

   “너······ 너······.”

했을 뿐이다.

   “길 비켜 줘!”

   두 번째 명령에 나는 길을 비켜 주었고, 영희는 쏜살같이 내 앞을 지나 성내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뒤부터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영희는 언제나 그 무서운 광채를 가득 담은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을 뿐, 우리는 아무런 말도 서로 건네지 않았다.

   그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영희는 나에게 접힌 종이쪽지를 전해 주었다.

 

창봉아 니는 나를 미워하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니가 날 미워할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로워.

나는 어쩌면 니를 좋아하는지도 몰라. 니가 오라고 하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말 것 같다. 그 대신 니가

거기서 나를 봤다는 말 비밀로 해줘. 니가 그 말을 터뜨리면 나는 그날로 죽어 버린다.

                                               영희.       

 

   내가 여기까지 대충 이야기했을 때 수권이 불쑥 물었다.

   “그래 그 가시나 꼬셨나?”

   “에끼 사람, 그때 나는 중학 입시 준비한다고 정신 없을 때야. 그 대신 비밀은 지켜 줬지만.”

   “자네 간덩이 가지고야 고작 그렇겠지. 그 뒤 그 가시나 자살했대이.”

   “뭐, 자살을?”

   “자네 공부 떠난 뒤에 그 가시나 경주 우편국 교환으로 취직해서 한 삼 년 잘 댕겼다. 열여덟 살 땐가 연애를 했지. 남자는 내 형뻘 되는 우리 집안 사람이야. 결혼을 할라고 가정 관계를 알아볼라고 하니, 이 가시나 곧장 고아라고만 하고 밝히지를 않아. 남자는 답답해서 가시나 뒤를 밟았단다. 황남리에 어떤 할머니하고 살더래. 그 할머니한테 매달렸던가 봐. 그 할머니한테서 밝혀졌지. 성 가 오두막에 사는 무당의 딸이란 게. 그리고 그 할머니는 무당의 친어머니더래.”

   수권이 여기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니 결혼은 터졌지. 무당 딸하고야 어떻게 하노. 남자한테 채이자 가시나는 쥐약인가 먹고 뻗어 버렸고.”

   수권은 담배 연기를 후 불었다.

   나는 개천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경주성을 에워싼 개천 물은 모두 이 서북 귀퉁이로 모여서 수문으로 빠지기 때문에, 이 일대는 물이 깊고 넓을 뿐 아니라 바닥이 수렁져 있는 곳이었다.

   “얘기는 끝났는가?”

   “지금부터지.”

   “뭐라고?”

   “그 가시나 주었닥 하니 불쌍하다고 남자가 찾아갔을밖에. 거기서 저 서문 거리 주막 할망구를 만났거든. 얘기는 나중 그 할망구 입에서 나온기라.”

   “아, 그렇겠군.”

   나도 그때서야 얘기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작부터 그 무당인가 하는 여인이 서문 거리 주막 아주머니와 가깝게 지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나같이 어린 나이로는 주막에 접근해 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수권은 자기의 집안 형뻘 되는 남자(영희의 애인이었던)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희 어머니가 무당이 된 것은 서른 살 때였다. 스물일곱에 남편을 여의고, 그해 세 살 난 영희와 단둘이 사는데 차츰 외로움이 무서움과 겹쳐져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남편을 여읜 허전함과 설움이거니 했는데 나중은 그것이 무서움증(공포증)이라는 증세로 바뀌어져 버렸다.

   어미는 딸이 너무 외로워서 그렇거니 하고, 오릉五陵에 사는 친정어머니가 와서 함께 살기로 했으나 증세는 가셔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량을 앓고 나니, 그 다음에는 눈만 붙이면 꿈이요, 꿈만 꾸면 귀신을 보던 것이, 나중은 깨어 있는 눈에도 귀신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입에서 절로 푸념 같은 것이 슬슬 흘러나왔다. 무당 귀신이 들린 거라고 했다.

서른 살 나던 해 봄에 유명한 시악 무당에게서 내림굿을 받았다.

   시악 무당은 내림굿을 끝낸 뒤, 명도(明圖 · 冥途) 들린 사람처럼 입에서 쉿, 쉿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얄궂다 얄궂아, 니 몸주는 선덕 여왕님이다. 이런 일 누가 알까 봐 겁난대이.”

했다.

   그리고 잇따라 쉿 쉿 소리를 내며,

   “니 이름은 연달래다. 만자를 모시락 하신다.”

   이렇게 덧붙였다. <만자>는 만자曼字라고 나중 밝혀졌다.

   그녀는 시악 무당이 일러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채, 그 뒤부터 새무당이 되어 굿도 다니고 점도 치고 했다.

   친정 어머니는 창피해 죽겠다고 울상이었지만 그런 짓 해서 신을 풀지 않으면 골이 깨어지는 것 같아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울상보다 시가 사람들의 압력은 더 견딜 수 없었다. 시삼촌 되는 이는 의관 정제하고 와서 방에 좌정한 채, 결판을 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나왔다.

   연달래도 이제는 더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죽든지 떠나든지 하겠으니 영희나 맡아 달라고 빌었다.

   그날 밤 꿈에 몸주 마님이 나타났다. 내림굿 때 들은 말이 있어 그런지, 훤칠한 키에 흰옷을 입고 머리에 왕관을 쓴 여느 여왕의 위풍이었다.

   연달래가 질겁을 하고 일어나 그 앞에 꿇어앉으며, 대왕님, 대왕님, 하고 불렀으나, 몸주 마님의 얼굴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은 채,

   “니한테 거울을 주마, 서쪽 성 밑에 가 찾아라.”

하고는 사라졌다.

   연달래가 신어머니(시악 무당)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시악 무당은 연달래의 어깨를 만지며 부러운 듯이,

   “아이구 야야, 니 큰무당 될따, 선덕 여왕님을 몸주 마님으로 모셨으니 이 하늘 아래 그카마 더한 영광이 어딨겠노. 어서 성 밑에 가 봐라. 거기 가면 오두막이 두 채 있니라. 아무 데나 맘 내키는 대로 들어가면 그게 곧 니 집이다.”

   이렇게 일러 주었다.

   성 밑에 있는 두 개 오두막에서 뒤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발길이 향해졌다.

   오두막 속에는 마흔 살쯤 돼 뵈는, 얼굴이 붉고 몸이 뚱뚱한 아주머니가 혼자 누워 있다가 연달래를 보자 비죽이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연달래는 방에 들어가 앉으며 이내,

   “성님, 여기서 나하고 같이 삽시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렇게 말을 붙였다.

   아주머니는 또 한 번 비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큰절꾸(아주머니의 별명)는 저녁밥을 먹으며,

   “나는 동승(동생)이 무당이락 하는 거 첫눈에 알아봤대이.”

했다.

   이에 대해서 연달래는 더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여인은 아무것도 서로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그날로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정다운 친구요 형제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 보름 지난 뒤였다.

   큰절꾸가 여느 때처럼 비죽이 웃으며,

   “동숭아, 니하고 나하고 이별해야 되겠대이.”

했다.

   “성님, 와요?”

   “저기 서문 거리 오두막 있제? 지금꺼지 내가 술을 담아(빚어)서 그 주막에 대 주고 안 있었는가베. 그런데 그 할매가 오두막을 나한테 맡기고 지 아들한테 들가 뿌랏다 앙이가. 그러니 천승 내 손으로 술을 담아서 팔아야 될 팔자제?”

   “사람이 팔자를 못 속인다 안 캅니꺼?”

   연달래는 큰절꾸의 팔자란 말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했다.

   본디 큰절꾸는 남문 거리 근처에서 주막을 내고 있었는데, 인심이 너무 좋아서 파산을 하고 이 오두막으로 옮겨 왔었다. 그러니 아무리 서문 거리 오두막이라 하지만, 이제 또 주모 팔자는 면할 수 없이 됐다는 뜻이었다.

   큰절꾸가 서문 거리로 옮겨 가고 이 오두막은 연달래 단독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연달래가 오두막을 지키고 있을 때는 흔치 않았다. 황남리에 두고 온 어머니와 딸이 보고 싶다고 사흘들이 들러야 했고, 굿이나 푸닥거리를 쉴 때는 서문 거리 주막의 큰절꾸를 보러 다녀야 했다.

   연달래가 오두막을 차지한 지 달포쯤 지났을 때였다. 또 꿈에 몸주 마님(선덕 여왕)이 나타나더니,

   “거울을 찾아라, 석가한테 가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연달래도 앞의 큰 오두막 홀아비의 성이 석씨라고는 큰절꾸한테서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먼젓번 꿈에 몸주 대왕님이 나타나셨을 때 서쪽 성 밑에 가 거울을 찾으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석 영감을 찾아가란 뜻이었구나 했다.

   연달래는 꿈을 깨고 일어난 아침 얼굴을 깨끗이 씻고 새 옷을 갈아 입은 뒤, 먼젓번에 큰절꾸를 찾아갔을 때처럼 거침없이 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나이 쉰 살가량 되어 뵈는 얼굴빛이 노르께한 홀아비는 그때서야 아침 먹은 밥그릇을 들고 방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인 주이소. 지가 치워드리께요.”

   연달래는 낯선 홀아비에게 달려들어 거의 빼앗다시피 남자의 손에서 밥그릇을 받아 들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연달래가 부엌에서 나올 때까지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연달래는 부엌에서 나오자 사내의 한쪽 팔을 붙잡으며,

   “어르신네요, 방에 들어갑시더.”

했다.

   그녀의 푸르스름하게 아리따운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사내는 어리둥절하여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꾸밈없이 호의 같은 것이 넘치고 있는 것을 보자 말없이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바닥엔 낡고 모지라진 삿자리가 깔려 있었고, 네 벽엔 누렇게 뜬 묵은 신문지가 발라져 있었지만, 그 위엔 파리똥이 닥지닥지 앉은 데다, 군데군데 빗물이 새어 내린 자국으로 거멓게 썩어 있었다. 퀴퀴하고 지릿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이것은 먼젓번 큰절꾸네 오두막을 찾았을 때와 여간 대조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달래는 그런 걸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나오는 대로,

   “어르신요, 지를 여기 살게 해 주이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뭐, 뭐라꼬요?”

   사내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렇게 묻고 나서, 조금 뒤,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르신요, 지가 어르신네를 해롭게 하겠능기요? 고마 딸 삼아 각시 삼아 살게 내부리 두이소.”

   “앤 될시더.”

   사내는 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연달래는 아랑곳없다는 듯,

   “오늘 저녁부터 여기 와 잘 겁니대이.”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날 저녁때 연달래는 일찌감치 쇠고기 한 근을 사 들고 사내네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사내에겐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상을 보려니까 밥상 다리가 찌그러진 채 쓸 수 없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네 오두막으로 가서 밥상을 가지고 왔다.

   저녁상을 보아서 방에다 들여놓으니 사내도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들었다.

   저녁을 마친 뒤, 연달래는 자기네 오막으로 가서 침구를 안고 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이녁 집 놔두고 와 이카노?”

   나무라는 목소리였다.

   “어르신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오막 하나씩 따로 차지하고 살 게 뭔기요?”

   연달래는 그녀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며 이렇게 되물었다.

   사내는 이 여인과 다투어야 소용이 없다고 체념을 하는 듯, 아랫목에서 벽을 향해 돌아눕고, 연달래는 윗목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밤, 둘은 잠자리에서 어우러졌다.

   사내는 훌륭히 남자 구실을 치러 냈다. 연달래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어르신요, 이렇게 넉넉한 남자 어른이 와 자꾸 혼자 살라꼬 했는기요?”

   이렇게 물었다.

   “글씨, 나도 살다 보니 어찌 되는 긴지 모르겠구마.”

   사내의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연달래에겐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석탈해왕의 후손이지만 선대부터 자손이 귀한 데다 자기 역시 아들 하나를 낳고 아내가 죽자 이날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부산서 제과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으며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늘 편지를 보내지만 자기는 답장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들 생각이 안 나는기요?”

   “즈거나 잘살먼 됐지 뭐, 석씨는 언제든지 성을 비껴 살먼 안 되는기라, 아들이 부산서 그렇게 성공한 것도 내가 성을 지고 있는 덕인 줄 모르고······.”

   “그러면 옛날 옛적부터 이 집에 살았는기요?”

   “우리 시조왕은 반월성 안에 있는 궁궐 속에서 살았던 기라. 그 뒤에는 반월성 가에 붙어 살다가 우리 할배(할아버지) 때 이리로 옮겼닥 하오. 이 집도 그때 지은 집이지. 그러니 지금은 성이 돌 무더기가 되고 집은 도깨비굴 같은 외딴 오두막이 됐지만, 내가 여기를 떠나면 조상을 배반하는 기라요.”

   “맞심더. 어르신 말이 꼭 맞심더.”

   연달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런 지 다시 얼마 지난 어느 날 사내는,

   “임자가 무당이락 해서 내가 어디 같이 지낼능아? 누구 보더라도 뭐락 할노.”

했다.

   “그러니 내 굿할 때 입는 옷이나 기물들은 모도 저쪽 오두막에 그대로 두고 앤 와 있는기요?”

   “그래도 우리 아들이 소문을 듣는닥 하먼!”

   “소문날 게 있는기요? 밤에만 이불하고 내 몸하고 와 있는데······ 낮에는 작은 오두막에나 단골집에 가 있고······.”

   사내는 그녀가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까 입을 닫아 버렸다.

   이듬해 봄에 사내는 괭이로 밭을 일구고 있었다. 오두막 바로 앞에 붙은 꽤 넓은 밭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가장자리께를 묵히고도 혼자 먹을 잡곡과 채소는 충분했다.

   그해엔 식구가 둘이라는 생각에서였겠지만, 사내는 가장자리에까지 삽을 넣고 있었다.

   성 밑 쪽 밭 귀퉁이를 좀 깊숙이 파고 있을 때였다. 시커멓고 둥그런 놋쟁반 같은 것이 삽 끝에 얹혀 나왔다. 사내는 그것을 밭둑에 집어던지고 밭 귀퉁이까지 깨끗이 파헤쳐 놓고 들어왔다.

   “밭이 더 커졌네요.”

   연달래의 말에, 사내는,

   “여적까지 가장자리에는 앤 뚜졌거든.”

했다.

   “엄매, 그래요?”

   “그러니까, 귀퉁이 좀 뚜지는 데 땀을 뺐지. 흙이 어찌나 딴딴한지, 전에는 한 번도 뚜져 본 일이 없었던 기라. 그러이까 얄구진 썩은 쇠붙이가 다 나오고······.”

   사내의 말에 연달래는 눈이 커다래지며,

   “어떤 쇠붙인데요?”

하고 물었다.

   “모르지. 꺼멓고 뚱그런 놋쟁반 같은 기라.”

   “어르신요, 그거 어쨌는기요?”

   “와?”

   “글씨 말임더.”

   “어쩌긴 어째? 밭둑에 내뿌릿지.”

   “어르신요, 그거 고마 저 주이소.”

   “썩은 쇠붙이 갖다 뭐할라꼬? 맘대로 하라믄.”

   “고맙심대이.”

   연달래는 밭 귀퉁이께로 뛰어갔다. 밭둑 위에서 그 둥그런 쉬붙이를 발견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오, 신령님요!”

하며 그 위에 엎으러졌다.

   두 손으로 쇠붙이를 집어 올린 연달래는 또 한 번,

   “오, 신령님요!”

를 외치며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혹시나 누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연달래는 쇠붙이를 두 손으로 가슴에 싸서 안은 채 작은 오두막으로 갔다. 거기서 그것을 대야에 담그고 오랫동안 깨끗이 씻은 뒤 명주 수건에 기름을 묻혀서 닦기 시작했다.

   흙이 다 씻기고 꺼먼 때가 벗겨지자, 푸르스름한 녹이 나타나고 녹이 씌워진 사이사이로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부분도 군데군데 보였다. 신어머니(시악 무당)한테서 여러 번 들어 온 옛날의 구리쇠 거울이란 것에 틀림없다고 헤아려졌다.

   뒷면에는 가운데 작은 동그라미가 쳐지고, 그 안에 해 · 달 · 산 · 물(一月山川) 따위가 그려졌고 작은 동그라미 밖으로도, 아래위 좌우로 같은 글자 넷이 돋을무늬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종이에 떠서 영희에게 맡겨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 보도록 했다. 영희가 전한 말에 의하면 그 글자는 만曼이라고 하는데, 멀 만 또는 아름다울 만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연달래는 하도 신기해서 다시 한 번, 그러면 그 글자가 옛날 여왕님의 이름 글자로 된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도록 했는데, 선생님이 며칠 동안 역사책을 조사하고 나서 가르쳐 주더라면서, 그 글자가 여왕 이름에 쓰여진 일이 세 번 있는데 처음은 선덕 여왕의 이름에 덕만德曼이란 만자가 그 자요, 두 번째는 진덕 여왕의 승만勝曼이란 만자가 또한 그 자요, 세 번째는 진성 여왕의 그냥 만曼이라는 이름의 만자가 또한 그 글자라 하더라고, 영희는 선생님이 적어 주신 쪽지까지 들고 와서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똑똑히 일러 주었다.

   그렇다면 내림굿 때 신어머니가 선덕 여왕님이 너의 몸주 마님이시라고 일러 준 대로, 선덕 여왕께서 자기의 거울을 점지해 주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시악 무당이 특히 선덕 여왕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여왕이라면 선덕 여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일러 주었던 것이었고, 연달래는 신어머니가 일러 준 대로 믿을밖에 없었으므로 꿈에 본 여왕 차림의 몸주 마님도 으레 선덕 여왕님이거니 했었던 것이다.

   거울을 얻은 뒤부터 연달래의 푸념과 춤엔 신바람이 두드러졌고 굿이나 푸닥거리의 효험도 현저하여 그녀의 이름은 온 고을에 떨쳐졌다.

   그때부터 5, 6년간이 무당으로서의 그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신나던 황금기였다.

 

   “영희가 자살을 한 뒤부터는 연달래네 굿이 잘 안 되대이요. 와 그런지 신바람이 앤 난닥 하는 기라요. 딸이 즈거 엄마한테 들린 귀신을 데리고 갔을 리도 없는데 참 얄궂대이요.”

   서문 거리 주막집(큰절꾸)이 하던 이야기를 자기 집안 형님한테 들었다면서, 수권은 이렇게 흉내를 내었다.

   “그렇지만 워낙 이름이 나 있던 연달래라 그 뒤에도 성(돌 무더기)이 헐릴 때꺼지는 그럭저럭 팔려 댕겼지.”

   “오막이야 옮겨 앉음 되잖나?”

   “그게 좀 묘했던 기라.”

   수권은 그 묘했었다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성(돌 무더기)을 치운다고 그 밑에 붙어 있는 오두막을 뜯어내라는 연락은 석 영감도 연달래도 다 같이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도 자기네 오두막을 치우려 하지는 않았다.

   성을 치우기로 한 사흘 전에 다시 직원이 나와서 오늘 밤까지 오두막을 치우지 않으면 부득이 시에서 강제 철거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전했다.

   “어르신네요, 어쩔랑기요?”

   연달래가 사내에게 물었다.

   “임자 갈 데나 정하라꼬.”

   “싫심더, 내사 어르신네하고 안 떠날랍니더.”

   연달래는 조금 전에 큰절꾸네 서문 거리 주막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한결 정겨운 목소리였다.

   “내사 벌써 몇 해 전부터 부산 아들네가 같이 살자꼬 그렇게 성화를 대쌌지만 몬 떠난 거 앙인가베. 나는 죽어도 이 성 밑을 안 떠난다고. 여길 떠나서 아무 데도 가 살고 싶은 데가 없는 걸 어짜노?”

   “그렇지만 어짭니꺼? 어디든지 지하고 떠납시더, 지가 끝까지 모실낌더.”

   “임자 속이사 내가 모르나? 그렇지만 나는 명색이 석씨 왕손인데 어디 간들 임자하고 내놓고 살 수야 있나. 임자 듣기에 섭섭하닥 하겠지만, 그락 하면 내가 조상을 배반하게 되는 기라. 어짜노? 섭섭하닥 하지 말고 임자 살 생각이나 하라꼬. 아까 그 사람들이 와서 오늘 밤에라도 여기를 헐어 뿌린닥 하니까.”

   “몬 합니더. 어르신네 혼자 두고 지는 못 떠납니더.”

   “글씨 임자하고 나하고는 다르다고 멧 번이나 말하면 알아듣겠노? 석씨 왕손이락 하먼 임자하고 내놓고 몬 산닥 하이까.”

   “석씨가 왕손이면 김씨도 왕손 아잉기요? 내가 어쩌다가 무당이 됐닥 하지만 조상은 나도 왕손인기라요.”

   “글씨 조상은 조상이고 무당은 무당 아닌가베. 임자는 어쩌면 남의 속을 그렇게 몰라 주노. 나는 여기다 왜지름(석유) 한 병 들이붓고 불처지르면 그만인데 임자가 꼭 날 따라 같이 가야 될 게 뭐꼬?”

   “그러지 마이소. 사람 사는 게 다 뭔기요? 정 들면 살고 몬 살먼 죽는 거 아잉기요? 어르신네는 우리 몸주 대왕님이 선몽(현몽)해서 점지해 주신 대주 어른인데 내가 어르신네를 여기 혼자 두고 어떻게 떠나는기요?”

   연달래는 설움과 노여움을 가눌 수 없는 듯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더니 자기의 요를 내려서 깔고는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석 영감은 연달래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그는 움직일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밤중까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닭 울 때나 되어 석 영감은 방에서 나갔다. 그리하여 풀 덤불 속에 감춰 두었던 큰 병을 안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큰절꾸가 달려왔을 때, 큰 오두막이 있었던 자리에는 시꺼멓게 타다 남은 나무토막들과 부서진 숱한 기와 조각들과 그을린 흙더미와 재와 흩어진 그릇 조각들이 범벅으로 뒤섞인 속에 타다만 남녀의 시체가 반쯤 묻힌 채 드러나 있었다.

   허물어지다 남은 벽 귀퉁이와 흙과 재가 뒤범벅이 된 사이사이로 여기저기서 아직도 연기가 퍼렇게 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큰절꾸는 두 손으로 땅을 두드리며,

   “동숭아, 동숭아, 내 동숭아, 불쌍하고 불쌍한 내 동숭아.”

   어느 때까지나 목을 놓고 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체를 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큰절꾸는 작은 오두막으로 가서 연달래가 쓰던 무당 옷과 기물들과 거울을 보자기에 싸서 서문 거리 주막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무당 물건을 집 안에 두면 반드시 귀신을 보게 된다는 술꾼들의 말이요, 그녀 자신도 그렇게 여겨졌으므로, 하는 수 없이 주막 곁의 돌다리 위에다 내놓고 불을 질렀다.

   재 속에 그냥 남은 꺼멓고 둥그런 쇠붙이는 수렁진 개천물 위에 집어던져 버렸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수권은 개천을 가리키며,

   “이쪽은 모두 수렁이 져서.”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가리킨 수렁이 진 개천물을 어느 때까지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각주:2]

 

  1. 제목의 “동경銅鏡”은 구리로 만든 거울을 의미한다. 이 단편은 계간문예에서 출간한 김동리 문학전집 14권에 실려 있다. 그 편집원칙을 따랐다. [본문으로]
  2. 1979년에 발표되었고, 1986년에 개정되었다. 큰절꾸의 울음소리에 이끌리어, 김동리는 일흔넷에 이르기까지 경주의 돌 무더기를 맴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동리는 1995년에 죽었다.

    문학은 절대적이었다. “수렁이 진 개천물” 속에서, 근대와 근대를 무화시키는 하염없는 섭력攝力은 구분되지 않았고 오직 먼 것만이 아름다웠다. 허깨비에 미쳐 날뛰는 샤머니즘의 미망 속에서, 연달래와 석 영감은 천년고도의 오두막 둘처럼 행복했다.

    나는 보릿자루처럼 주저앉아 날을 샌 석 영감의 모습에 마음이 얹혔다. 절대적인 것들은 그것에 대응될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이념” “동양” “민족” “천지신명” 등 나는 그것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본문으로]

左 스트라우스, 右 헌팅턴

에릭 헨드릭스-킴

왜 중국은 보수를 사랑하는가[각주:1]

 

번역자의 앞글

   미국 헤게모니의 일극적 세계는 끝나려 하고 있다. 미국이 탈퇴한 CPTPP는 중국이 코를 묻히고 있고, IPEF는 환경과 노동의 거창한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가식을 패대기치지 못하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자는 이야기에 무슨 반론할 거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솜씨 좋은 전문가들은 동아시아질서의 미래가 미국의 일극적 주도권과 동아시아의 다극적 지역통합노력이 타협하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결정되리라고 온당하게도 전망하고 있다.

 

    역사의 종언 여부는 영구미제이다. 역사의 소멸은 역사의 시원을 이끌어내서, 늘 새롭게 제기되는 논쟁에서 낡은 논쟁의 흔적은 역사 위에 남겨지지 않는다. 그러니, 절대정신의 부패는 해체가 아니라 그저 변태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의 토양은 대체로 비옥한 것이다. 동양과 서양,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되었고 낡은 아이온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거와 더불어 새로워서,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끄트머리에서, 중국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역사철학이 아니라 보수의 힘, 반동의 힘에 의탁해야 한다. 일단, 역사철학이라는 독극물이 주입되면 국가의 국성國性은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보편주의적 · 계몽주의적 원칙이 모든 역사적 사고에 이론적으로 강제되고 모든 역사적 고양이들이 동일한 무늬를 띠게 되는 서구인의 정신승리법은 동양인의 자존심에 끝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제,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문명” “민족” “문화”의 신기루는 서구와 맞서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또 선전하는 과정이면서 (이런 작업의 대표격으로는 토마스 만의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을 들 수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헐거워진 서구가 “보수”에 대한 저작권을 잃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에서 “보수”는 이국선망적인 요소가 아니라 호국 사상으로서, 이방의 신이 아닌 중화 민족주의로, 또 팍스 시니카의 표상으로 에스컬레이트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보수 사상을 매개로 하여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중국적 보편성에 관한 사상적 주제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외래의 가시덤불을 중국의 틀 속에 정착시키는 기제와 기준을 만드는 역할은 “보수”라는 교두보에 의해서 감당되고 있다. 구미에서는 구악의 찌꺼기로 치부되는 스트라우스와 헌팅턴이 중국에서 지성적 후광을 얻는 과정은 그들이 중국의 사상적 기조인 유교와 제휴를 맺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무신론적 입장에는 체제긍정적인 보수주의가 깃들 수 있는 여백이 넉넉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수행된 학술學術은 보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중국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서 그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되게 해주었다. 신보수주의 유학자 장칭과 자오팅양의 저작은 민족을 허투루 보고 인간을 문명의 점착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보편주의의 정신적 침식에서 벗어나, 중국이 다시 자기자신을 확실히 소유하기에 이른 자유가 된 정신의 현현이자 새로운 보편성을 향해 전진하는 중국혼이다. 헌팅턴과 스트라우스의 저작은 신보수주의 유학이 입지立地하고 있는 위기의 기념비이다. 거기서 전근대적 토속주의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중국사상의 핵심성격은 전환되고 있는데, 이는 서구 “보수주의”에 대한 원근법의 획정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사이의 긴장을 참고 견딘다. 그들은 전통적인 것의 진정성을 위해서 전통적인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긴장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신보수주의는 서구의 보수주의들 보다도 훨씬 무거운 것이다. 신보수주의는 그에게 고유한 부정성의 모멘트를 본질적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보수주의라는 마계魔界는 이토록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고뇌의 세계를 부여한다. 그 원환적 시종귀일에서 한국에서 보수라는 말은 여전히 쑥스러워서 나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자오팅양의 천하주의에 나오는 세계주의의 전제는 민족주의이다. 이 글의 저자 헨드릭스-킴은 자오팅양의 천하주의를 “유토피아적”이라고 비난했던 거자오광의 논지를 과연 복창하고 있다. 두긴을 연상시키는 중국공산당의 인종주의적 논법과, 자생적 운명의 뿌리를 함께 하고 한통속이 되자고 하는 “아시아운명공동체” 따위의 어법에는 동아시아를 중화성의 확대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불행의 냄새가 느껴진다. 전통의 힘으로 현실을 개혁해 나갈 수 없었던 한국에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두 극단 가운데서 중용쯤을 취하자고 머리를 굴리는 창작과비평 류의 동아시아담론은 이 혼곤한 교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전통에서 근대까지의 거리는 아득하고, 그 거리를 건너가는 방편은 다만 “동아시아”니 “지역주의”니 하는 찬란한 허상 이외에는 없지 싶어서, 조공국의 박식한 책상물림들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바퀴를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모던은, 따라서 근대화는, 단일하거나 일괴암적이지 않다는 경우바른 말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은 불과 몇 십년 전이었다. S. N. 아이젠슈타트가 이제는 고전적인 개념이 된 “다중적 근대성”을 통해서 표현했던 것은 합리화와 세속화라는 형식을 띤, 기독교와 그것이 사회 및 정치에 대해 가지는 관계가 점진적으로 근대화되었다는 중서부 유럽적인 서사가 그 자체만으로로서도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적용되기에는 턱없다는 단도직입이었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도 이 “다중근대성”에 포함되는 바, 세계화나 국경의 넘나듦 뿐 아니라 당당한 한국의 얼굴을 찾아야 겠다는 민족주의화의 과정 또한 근대화의 형식으로 편입되게 된다. “근대의 초극”이나 “근대의 폐기”는 이 근대화의 과장어법에 편승하는 정치구호였고, 이 정치구호를 긍정하거나 거둬내 버리지 못하는 심적 바탕 위에서 한국에서는 김덕영의 “한국적 사회학”을 포함해서 무수한 좌파적-보수적 인식론과 동아시아 내부의 관계망과 비교연구에 천착하는 (정치적 기원을 가진 서구 대 중국이라는 이분법을 다소간 해체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전문적 헛소리의 물결이 형성되고 있다.

 

    헨드릭스-킴은 1963년을 기점으로 잡고 있지만, 문화의 보편사를 쓰려고 했던 베버와 슈팽글러의 연구방법론은 70년대부터 문화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이라고 비난 받아서 원시적인 비교 만능주의와 동일시되었다. 그 후, 문화연구와 사회과학에서의 타입Type의 사용은 백안시되었고, 비교연구는 아마추어리즘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대항해서, 비교연구를 포기하는 대가는 역사주의로의 퇴행일 뿐이라는 비판이 회자되었던 것이다.

 

    전통을 밑돌로 괴서 근대를 향해 전환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전통이 정신의 누름돌이 되지 못했던 나의 조국에서, 문화주의와 (도래하고 있는) 보수주의의 연관을 끊어내는 것은 필수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하나같이,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초기의 감정적인 도전과 자코뱅적 멘탈리티를 극복하고 나면 완숙기에는 반드시 아시아적 삶의 내용과 정서, 민족적 전통의 우위를 입증하는 역사적 문명의 재현을 극구 애면글면해 왔다 (백영서 등은 동아시아론의 비조를 테러리스트 안중근에게서 찾고 있다). 이것이 베버가 말하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균형감을 갖춘 새로운 정신사의 개발로 이어질지, 또는 문화민족주의가 새로운 보수주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한국에서, 보수주의는 “이중과제론”이나 “핵심현장”과 같은 부류의, 여러 부면의 난제를 동시에 해결해보겠다는 오해와 헛디딤의 위험이 큰 기염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희망심과의 거대한 반목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문화의 보편을 조여들어가서 그 실증정신 속에서 명멸하는 깊고 조용한 힘이 부재한다면, 이른바 비교연구는 기독교의 성찬식과 오래된 부족 종교의 식인풍습을 일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식의, 딜레탕티즘에 주저앉고 말 것이다.

 

    헨드릭스-킴의 마지막 문단은 중국인이라는 무신론자, 현실적 종말론자들이 “보수”라는 이름을 참용僭用하는 것이 매우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중화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주류가 있었고 그 주변에 서구 보수라는 사상적 흐름이 있었는데 그 둘의 원초적인 동질성이 발견되자 자연스럽게 양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중국인의 세속적인 정향에는 보수주의가 보유補遺할 수 있는 사상적 여백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아직도 이 “보수”라는 이름이 전통적이고 총체적인 기획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돼야 하는가, 라는 막막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보수에 의탁하는 것이 다만 서구 보수주의 정신의 변질이고 의태라고 깎아내릴 수 있는 것인지, 게다가 중국인들이 벌이는 저 기이한 연극은 스트라우스나 헌팅턴이라고 하는, 보수주의 가운데서 중화성의 추구로 합류될 수 있는 부분만을 추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리버럴 국제주의라는 가태假態를 집어치울 수 있었다).

 

    저자는 이처럼 서구의 “보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유교의 비논리적 복합체가 부추기고 뒤흔드는 저편에의 열망을 자신의 이름 속으로 받아들여 가면서 중국의 “신보수주의”로 넓어져 가는 과정에서 자의성의 모멘트로 보이는 것을 비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로써 저자는 문화적으로 총체적 접근과 개념으로서의 보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하는 길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비타협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장 비교연구에 취약한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문화적으로 총체적인 접근(저자가 “보수”와 동일시하는 것)의 약점이다. 이 재맥락화의 움직임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되, “보수”라는 말은 총체적인 활동을 인도하는 이념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부터 지속된 혁명의 카타스트로프—계급없는 사회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영성까지를 포함해—를 드러내는 데 여전히 도움을 주는 이름이기는 한 것이다.

 

본문

    서구 보수들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은 지랄같은 적수이다. 시민사회, 그리스도교,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수주의의 애착을 깡그리 부정하는 레닌주의 정당에 의해서 지배되는 억압적인 테크노 디스토피아가 거기 여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본토의 지적 주류의 입장에서는 서구 보수주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오로지 타당하리라. 중국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공산주의이고, 신유학이니, 마르크스주의와 등소평의 개혁주의를 위시한 그 정치사상의 대표적 전통들은 서구 보수주의적 전망과 도무지 겹치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구 보수주의와 중국의 지적 주류 사이에 도대체 어떠한 친연성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워라, 중국에는 서구 보수주의 작가들에 대한 독실한 사랑이 있다. 가령 새뮤얼 헌팅턴이나 레오 스트라우스의 저작은 중국 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숙독되고 사랑받는다. 그리고 미국 정치에 대한 중국 쪽의 해석들은 때때로 미국 우익들의 해석들과 겹치어진다. 이러한 친연성은 분명히 복잡다단한 원인들을 가질 것인데, 두드러지는 한 가지 공유된 믿음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회는 통합적이고 총체론적holistic 문화에 의해서 비끄러매인다는 것이다. 무릇, 건강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북미의 대학교에서 횡행하는 진보좌파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중국 사상가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북아메리카의 정체성정치를 지칭하는 중국어—白左(“하얀 좌파”)—는 극구 경멸적이다. “백인 좌빨들이 어제오늘 꽂혀 있는 것들” 정도를 의미한다고 할까. 중국에서 가장 리버럴한 파당의 학자인 쉬지린 같은 지성사가도 북아메리카의 바이주오白左를 지나치고 분열적인 것이라고 감정한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에 관한 한 토론회에서 쉬지린은 “그 운동이 운용하는 강압적인 전략”은 “역사를 삭제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더 깊은 인종적 민족적 분쟁”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타박했다.

 

    나이 먹은 자들은 바이주오에서 마오의 문화대반란(1966-76)을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가 그렇다. 문화적 평등이라는 미명 하에 “계급의 적들”을 찍어누르던 그 폭거에 시달린 기억으로 인해서, 이 사상가들은 급진적 초관념론에 가슴이 짓눌리게 된다. 비판가들과 중도세력들이 도중에 훼방 놓지만 않는다면 역사의 진보는 평등의 유토피아를 몰고 오리라는 일종의 관념론—이런 사고유형이 기지개를 켤 때마다 이 장년들은 눈앞이 아찔하고 그 뒤를 따라서 편협성, 강압성, 그리고 더 얼빠진 것이 이윽고 닥쳐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양하겠습니다. 쯧.

 

    이 지긋지긋함은 사회 · 정치 이론으로까지 뻗어나가게 된다. 오늘 서구의 진보좌파들로부터 배척되는 서구의 사상가들이야말로 중국에서 가장 자지러지는 관심을 받고 있다. 몇 년쯤 전 베이징 대학에서 근무할 때, 나는 새뮤엘 헌팅턴이 자주 인용될 뿐 아니라 꽤 진지하게 섭렵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이한 일이지만 헌팅턴은 문화적 보수주의자인데도 무수한 중국 지식인들에게 각광받는다. 중국 리버럴들에게조차 말이다.” 몬트리올 대학 동아시아 학과의 데이비드 오운비의 관찰이다. 그러나 명백한 요인들이 중국에서의 헌팅턴의 인기를 부추김으로, “기이한 일이지만”은 적확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헌팅턴은 서구의 보편주의적 자기이해를 거부했고, 아시아의 자신감의 상승을 예견했으며, 자유민주주의로부터 근대화를 분리시켜 냈다. 그의 『변동하는 사회들 속에서의 정치질서』 (1968)는 근대화에 관해서라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질서 및 국가적 역량이야말로 더 중대한 독립변수라고 강론하였다. 과연, 냉전 이후, 자유주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널리 과시되었던 가설—근대화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는 가설—을 몸소 반증해냈다고 현대중국은 기세가 등등해 있다. 중국 본토의 저명한 정치이론가이자 대중지식인인 지앙시공은 저 하버드 정치학자의 호소력의 핵심적 이유를 간추린 바 있다. “자유민주주의적 통치야말로 지고한 정치적 이상을 대표한다는 도그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믿음을 틀어쥔 서구 정치이론을 헌팅턴은 비판했던 것입니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6)은 또 하나의 접점이 된다.[각주:2] 불가피한 충돌을 예언한 그 비관론에 처음에 콧방귀를 뀌던 중국 지식인들도 문명 · 문화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창달한 그 저술의 지론은 틀림없는 것이라고 마침내 무릎을 치게 되었다. 헌팅턴의 강한 “문화주의적” 관점은 종교와 문화적 가치를 상위의 반열에 세웠고, 중국의 공식적 자기이해를 진작시켰다. 중공의 프로파간다는 지칠 줄 모르고 문화놀음을 하면서, 제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서구식의 자유민주주의로는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일관했다. 각 문화들은 서로의 정치체제를 존중해야 하고, 이질성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뿐이라고 헌팅턴은 귀띔했던 것이다. “차이를 존중한 문명 간의 대화”에 대한 시 주석의 호소는 이런 사로思路를 답습하는 것이어서, 시진핑은 “기를 쓰고 헌팅턴의 기대와 걱정들에 응답하는” 것처럼 비치기까지 한다고 쓰촨 대학의 문학교수 휘민진은 적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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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스트라우스에게도, 미국 학계에서의 쇳소리와 중국에서의 관심이라는 대조는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195, 60년대에 시카고에서 가르쳤던 스트라우스는 [미국에서는] 자리잡지 못한 보수 지식인들의 회동에서나 간간히 거명되는 편이다. 대학교의 철학과나 정치학과에서 그의 교설은 칙칙한 뒤안길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다. 중국은 영 사정이 다르다. 그곳에서, 그는 매튜 딘의 표현대로 “사로 잡힌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스트라우스의 저작들의 중국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은 너무도 열광적이고 부지런한 나머지 지금 “영어보다 중국어로 더 많은 스트라우스의 저작들이 시판되고 있다.”

 

    중국 스트라우스주의의 두 좌장은 앨런 블룸에게서 사사한 류샤오펑과 간양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편집한 총서 『서구 학문의 원천들』의 구성권 서문에는 스트라우스와 그 사도들의 심금을 익히 울릴만한 경고들이 토해져 있다: “서구에 대한 건전한 독해를 포용하는 중국의 학자들은 서구사상의 체계에 대해 까탈스럽게 굴기를 불사하고, 서구의 대학캠퍼스를 점철하는 잡다한 혹세무민하는 관견管見에 직면해서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왜 중국학자들은 스트라우스의 저작으로 말려들어갔을까? 2010년 마크 릴라는 중국에서 지낸 뒤 이 문제에 관해서 글을 적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삶의 리버럴한 관념들에 대한 역연한 불만족이 스트라우스를 매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는데, 스트라우스 역시 현대 자유주의가 충분한 것인가에 대해 의심했다는 것이다. 릴라는 또한 “공공선에 봉사하기 위해서 양성된 엘리트 계층” 이라는 스트라우스의 “생각”이 중국의 유교적 전통과 맞아떨어졌다고 보았다. 참, 스트라우스가 서구 정치철학에 관해서 큰 필치의 개관을 제공한다는 것 또한 중국의 독자들의 혼을 앗아갔다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한가지 요인을 얹으려고 한다. 스트라우스의 사회관은 “문화적 총체주의”라고 지칭할 만한 것에 대한 중국인들의 선호에 부합한다. 그리스 전통에 의거해서, 스트라우스는 저마다 독특한 기조基調를 가진 정치적 · 문화적 전체들로서 사회들을 취급하였다. 그 기조는 폴리테이아, 또는 이 희랍어에 대한 그의 번역을 따르면 레짐regime이라고 지칭된다. 그가 『정치철학은 무엇인가?』(1957)에서 적었던 것처럼 “레짐이란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파편화된 형태로 보기 버릇하는 저 전체를 의미한다. 레짐은 사회에서 삶의 형식과 그 삶의 격식과 그 도덕적 취향과 사회의 형식과 취향의 형식과 통치의 형식과 법의 정신 [모두]를 폭넓게 의미하고 있다.”

 

    중국 사상가들도 기이하리만큼 레짐의 분석틀로서 사유한다. 1991년 왕후닝은 여행기 『미국과 미국이 마주서다美国反对美国』에서 하나의 통합된 문화적 · 정치적 레짐으로서 미국 사회를 조감했다. 그때는 국제정치학 교수였고 지금은 중국의 고위 관료가 된 그는 미국적 삶의 기조가 되는 정신을 천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에 비해 역력히 더 소루한 사회적 상상력을 지녔다. 자아에 대한 통합적 감각이 결핍되어서, 미국인들은 제 나라의 병폐의 얽히고설킨 성격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개인주의를 숭앙하고, 그 믿음은 미국 레짐의 반석인 것인데, 이 정신상태야말로 사회적 피폐화, 더 심하게는 파탄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던 것이다.

 

    대체, 보수 사상가들에 대한 중국의 이끌림에는 어떤 패턴이 설정되어 있다. 헌팅턴과 스트라우스는 선명하게 민족적 · 지역적인 “삶의 형식들”, 곧 우리가 문화라고 약칭하는 것에 휘어잡힌 것으로서 정치를 사유한다.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도 이와 같다. 사회적 삶과 정치적 현실은 문화적 전체들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문화적 전체들을 형성한다). “문화는 한바탕 전체로서 현현하는 것이지, 다른 것들과 고립된 부실한 것일 수는 없다”고 휘민진은 『텔로스』 지에서 썼다. 문화적 가치들이 사회를 붙들어 맨다. 쉬지린의 말처럼, “한 나라의 정의正義를 둘러싼 내적 질서는 실질적 내용을 지닌 절박한 공통된 가치들을 요구한다.”  그는 이 사실을 도외시했다는 사실을 들어 미국 자유주의의 조류를 비판했다. 법적 권리와 절차적 규범들에 의존하는 저러한 자유주의는 시민들에게는 너무도 적게 요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국제적으로는 과도한 규범적 수렴현상을 기대한다고 쉬지린은 지청구했다. 현대 자유주의는 “서구식의 인권 기준들”이나 떠들어대고, 그것들이 특수하게 서구적일 뿐 아니라 “많은 기축 문명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것이다.

 

    진보좌파의 이데올로기는 정말이지 문화적 전체들을 낮잡아본다. 그것은 세계를 보편주의적이고 세계주의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한편으로, 민족적 사회들은 사분오열된 개인들의 집합 쯤으로 도리어 끌어내린다. 정체성 정치로 고양되어서, 이 판본의 자유주의는 개인들을 교차하는 정체성 범주의 구성원으로 산산조각 낸다. 그 범주들은 실제의 공동체나 문화들이 아니라, 다만, “아시안 아메리칸”이니 “LGBTQIA+”니 하는 인구통계학적 창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LGBTQIA+ 커뮤니티” 식으로 “커뮤니티”라는 어휘가 그 추상물들에 덧붙기는 하지만, 어떤 정체성정치의 범주들도 공유된 문화적 삶을 지닌 구체적 공동체들은 아니어서 헛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정체성정치의 유사연대감은 상속된 문화들의 정통성을 이지러뜨림으로써 결국 개인들을 가차없이 원자화하게 된다. 이 같은 결과는 필연적인 바 있다. 진보좌파들은 사회적 세계에 대한 그들의 서사에서 더 거대한 문화적 집합체들을 배제함으로써 그 영향을 타기하려고 한다. 하여, 그들은 서구의 인문학 및 사회과학 학과들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함으로써 저들의 서사들을 살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서구의 보수들은 이러한 기획에 분통을 터뜨리고, 중국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찬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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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려면 서구 지식계가 문화적 총체론에 주구장창 눈을 흘겼던 것은 아니다. 서구 사회학의 선구자들은 사회를 유기적인 전체나, 갈등과 자원 배분의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각축장로서 파악한 바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858-1917)이나 독일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1864-1920)가 현대 사회가 직업 및 가치영역의 수준에서 어떻게 더 내적으로 분화했는가를 부각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뒤르켐에 따르면, 어쩜, 현대 사회들은 공유된 사회적 상상력에 의해서 철석같이 응집되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베버가 뒤르켐보다는 문화 내부적인 가치 투쟁들에 대해서 더 주의했다고 해도, 각종 세계종교의 사회경제적 유산에 대한 베버의 연구는 실로 여러 문명들에 대한 비교 연구였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와 중국의 문명 질서는 독특한 가치와 전통들의 다이나믹으로 구성된 것이었고, 고유한 사회적 삶의 형식을 산출하는 것이었다.

 

    서구 학계 내에서 베버 식의 비교문명론이 무리없이 존중받을 만했던 마지막은 1963년이었다. 슈무엘 아이젠슈타트가 『제국의 정치체제』에서 유럽과 일본, 중국과 이슬람이 어째서 모더니티의 다른 판본들을 생산해냈는가를 설명했던 해였다. 그 후, 파편화하는 시각들이 발호했다. 모름지기 문화들은 “경화”되거나 “본질화”되어서는 안 되고, 징고이즘을 부추기고 비서구인들에 대한 억압을 인가한다고 말해지는 “문명”이나 “서구세계”와 같은 단어들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서구학계의 에티켓이었다. 거대한 문화단위들은 썩 내키지 않았다. 혹, 극미한 그룹화에 “문화적”이라는 형용사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무방해서, 서브컬쳐는 용납되었다. 그러나 “미국 문화”와 같은 것을 입에 올리는 것은 미심쩍을 정도로 다양성에 충분히 맞춤하지 않고 심지어는 반동적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사회를 버티어주는 것에 대한 성찰은 곧 중국 학자들이 뿌리박힌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총체론으로서, 민족주의적 정치기획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말해진다. 이는 선생과 학생들 모두가 질세라 덮어놓고 혐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구의 학자들이 제도적 형식들과 세계화에 대한 연구에 덧붙여서 서브컬쳐와 미시적 정체성 그룹들을 강조하기에 부심한 것은 그 [민족주의적] 경향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민족적 끈끈함과 문명의 블록이라는 질식할 것 같은 패치워크에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투였다.

 

    그 당연한 귀결로서, 서구 학자들은 공유된 전통에 의거한 문화적 비교연구를 홀대하게 되었고, 헌팅턴이 지적하듯이 인류의 문화적 삶이 다분히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블록들 내부에서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은 유념되지 않았다. 물론, 문화들은 칼로 벤 듯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어슴푸레한 경계 지역들, 디아스포라들, 하위집단들, 지역적 변이들, 그리고 독특한 정체성으로 조합된 에트랑제들은 늘 출몰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측면들만 부여잡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문화적 삶이 여전히 얼마나 블록들에 의해서 틀어쥐여 있는가를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논문 “이른바 민족학에 대해서”에서 플라먼 아칼리스키 등은 세계가치조사에서 민족적 단위의 설명력을 종교 또는 인종과 같은 대안적 분류단위의 설명력과 비교했다. “민족nations”이야말로 한 개인의 문화적 가치의 “최적의” 설명변수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많은 학자들의 직관과는 대척되지만, 인종적 · 언어적 · 종교적 그룹과 같은 여타의 사회 종합구성체들이나 이런저런 사회인구학적 범주들은, 민족에 의해서 이미 설명되고 있는 분산explained variance에 별 보태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민족이 문화의 철두철미 실재하는 단위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여타의 변별되는 요소들보다 유의미한 것이라는, 중국 학자들과 많은 서구 보수들의 지배적 견해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보다 앞선 연구에서, 사회학자 로날드 잉글하트와 크리스찬 웰츨은 잘 알려진 세계문화지도를 제시한 바 있다 (그래프를 참조하라). 세계가치조사와 유럽가치조사의 응답자들을 민족에 따라서 나누어 볼 경우, 보다 큰 세계-문화적인 지역과 문명들의 클러스터를 이룬다는 것을 이 두 조사들은 보여주고 있다. 잉글하트와 웰츨은 전통적 가치를 세속적 가치와 비교하고 생존 가치를 자기표현적 가치와 대조했다. Y축 (전통적-세속적)은 종교, 가족의 가치, 정통적 권위에 응답자들이 부여하는 중요도를 표시하고 있고, X 축 (생존-표현)은 경제적, 물리적 안정성에서 주관적인 웰빙과 삶의 질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만일 민족적 평균치들을 산점도scatter plot에 배열할 경우, 세계-지역적 패턴들이 드러나게 된다. 가령, 강고한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가진 유럽 국가들이 세속주의와 자기표현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반면에, 영어권 국가들은 그들 못지않게 자기표현적이면서도 더 극명하게 전통적이었던 것이다.

    두 연구의 결론을 본격 종합해보자. 민족적 소속이 분산의 거개를 설명하고 민족들은 보다 큰 단위의 문화적 지역으로 무리 지음으로, 우리의 문화세계는 가히 “사람들은 민족 안에 존재하고, 민족들은 문명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 문화적 박스의 세계를 상상하는 서구 보수와 중국 학자들 모두의 습벽은 아주 억지는 아닌 셈이다. 민족과 문명을 정치적 삶에 있어서 핵심적 실재로 보는 견해는 문화의 박스 바깥에서 사유하려는 진보좌파들의 시도들 보다 십분 타당한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사회는 도덕적 실체를 지닌다. 문화적 각축은 준열하고, 문명들은 한사코 엄존하고 있다. 중국 사상가들과 서구의 보수들은 이처럼 근본적인 명제들에서 의견이 일치된다. 두 그룹들에게, 사회는 공유된 가치들에 의해서 붙들어지는 짙게 문화적인 전체로서 사념되고 있다. 당연히, 이 수렴 현상은 전폭적이지는 않다. 중국 사상가들과 서구의 보수들이 사회 속에서 간파해내고 정치적으로 포용하는 문화적 총체주의들은, 세상에, 그 실체가 상이한 것이다. 민족문화와 문명적 정체성을 부각하는 서구 보수주의가 말하는 총체주의는 중국 정치사상의 총체주의와 같지 않은 것이어서, [중국의 그것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 사회적 결속, 정치적 권위에 대한 견해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자주, 중국 사상가들은 지도자들과 사회는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있다는 유토피아적 믿음에 붙들려 있다. 현대 중국 철학자들로 하여금 선한 지도력과 도덕교육에의 지속적 노력만 뒷받침된다면 이기심과 당파성이 언젠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퇴조할 것이라는 호기를 부리게 하는 것도 이 같은 낙관론이다. 내가 중국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믿음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이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2017년에 베이징에서 사람들과의 토론이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입버릇처럼 말하던 한 고등중학생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토론들이란 곧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통합시키는 도덕적 진리가 곧 부상해서 사람들이 토론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 그가 대는 이유였다. 아, 왜 금시에 낡아질 견해차이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야 하는가.

 

    그 성실한 우등생은 중국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토마스 A. 메츠거가 “중국적 유토피아주의”라고 지칭했던 중국 정치사상의 굵직한 지류를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뜬구름』에서 메츠거는 “구체적인 지금-여기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해져야만 한다는 신념”이라고 중국적 유토피아주의를 풀이했다. 이 믿음은 유교적 관념론의 현대적 재해석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전근대의 신유학자들에게는, 인류의 황금기는 주공周公이 천하를 하나의 조화로운 가족으로 불러모았던 치세 (1042-1035 BC)의 머나먼 과거에 자리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인류는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이 점진적 하강의 추세는 부분적인 복벽에 의해서 간헐적으로 중단될 뿐이었다. 역사적 진보에 관한 사회주의적, 현대적 · 서구적 관념들에 영향을 받아서, 캉유웨이 (1858-1927) 같은 근대주의자들이 구원의 국가를 근미래로 옮겨 놓았던 20세기의 초엽에 이 역사관은 물구나무를 섰다. 그의 저명한 『대동서大同書』는 모든 이들이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부면에서 평등한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도모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인간적이고 자기도야적이기에 힘쓰기 때문에 경쟁은 타개될 것이었다.

 

    유교적인 것과 모던한 것의 이 같은 융합은 지난 세기 중엽에 마르크스주의적-레닌주의적 유토피아주의의 수입을 예기하였고 오늘까지도 중국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메츠거는 부연했다. 그리고 북경대학교의 철학자 자오팅양은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서 파당성이 제거되고 외교적 긴장은 낡은 것으로 되며 세계의 문화들이 서로를 존중하게 되는 글로벌 도덕혁명의 비전을 그려냄으로써 근래에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의 근작인 『천하』는 정치적 대립을 전세계적 우정의 질서로 대치하자는 그의 호소를 되뇌고 있다: “정치란 경쟁적 대립에 대처하는 기술이 아니라 적대감을 우정으로 착색시키는 예술이 돼야만 한다.”

 

    이 도덕적 유토피아주의는 서구 보수주의의 종지宗旨와 정면충돌한다. 그 신념에 있어서 버크적이든, 하이에크적이든, 신학적이든 간에, 버젓한 보수주의는 인간의 타락이라는 기독교적 관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이기심을 포함한 죄야말로 인간존재의 뿌리깊은 특징이라는 것에 착목하면서 최악의 권력남용에 대비한 안전판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권력의 분립], 법치주의와 열린 토론이 정녕코 불가피한 것은 지도자들은 결코 전폭적으로 신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의견차이는 언제까지나 산재할 것이다. 순결한 지도자들과 시민들조차 그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와 제한적 관점에 의해서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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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저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본마음에 대한 비관론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볼 때] 질서잡힌 사회란 한바탕 균형잡는 행위에 가깝다. 다른 제도들과 문화적 전통들이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인간적 오류가능성을 메워줄 때 질서는 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중국식의 낙관론에 따르면 집단은 조화 속에서 통합되어 있고 개인들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구성부분들은 그 통합 속에서 더 높은 도덕적 차원으로 더불어 상승하게 된다. 중국에는 “인구소질人口素质”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 단어는 인구의 “이념적, 문화적, 신체적 [소]질들”을 지시한다고 중국 최대의 인터넷 백과인 바이두백과는 정의하고 있다. 그 모든 소질들은 개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개개인의 도덕성까지를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것들은 문화적 집합체가 향상되고 개선됨과 함께 맞물려서 증진될 수 있고 증진돼야만 하는 것이고, 마침내 완전한 지도자들을 지닌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도덕성이 그 근저에서부터 집단적으로 개선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서, 중국 사상가들은 일종의 문화적 총체론을 상정하였다. 이는 서구 보수주의자들의 가장 통합주의적인integral 비전보다도 더 집단주의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주류[사상]은 서구 보수주의 보다도 더 “우파적”이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유사점은 그것으로 끝이다. 중국 정치사상의 막강한 조류로서의 중국 유토피아주의가 서구 쪽에서 가지는 짝짜꿍은 급진적 사회주의, 그리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포용의 다문화 사회의 꿈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중국 유토피아주의는 좌파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도 있다.

 

    중국의 사회적 상상력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의 회전은 그처럼 복합적이고 또 복합적으로 다채로운 대상을 서구의 좌우 스펙트럼 속으로 바루어 들이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보여준다. 서구 보수주의와 친연성을 지니고 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고는 해도, 중국의 지적 생활은 전적으로 타자적인 세계라고 해야만 한다. 완전한 전세계적 조화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한에서 서구와 중국이 무수히 불화하는 가운데서도 공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관심을 되돌려주고 또 어떤 공감까지도 보태야만 하는 건 아닐는지.

  1. 원문: Why China Loves Conservatives. [본문으로]
  2. [역주] 헌팅턴은 동아시아를 중화문명과 일본문명으로 나누고, 과거 중화문명의 향수자인 한국을 전자에 귀속시켰다. UC 어바인의 교수인 데이비드 팬은 “중국과 서구”를 다룬 『텔로스』199권의 서문에서 중국의 대극으로서의 “서구”에는 일본과 대만이 귀속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흥미롭게도 한국은 제외시키고 있다. 비참하게도 이 두 서구인들에게서, 미국의 “가치동맹”(윤석열) 대한민국은 자신의 부재증명을 얻고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번역자의 앞글

   독일 보수혁명에는 1918년이라는 절대 연도가 부여되어 있다. 그 연도의 전언傳言은 선명한 바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고 『서구의 하강』의 첫째 권이 출간된 해였다. 정치적으로, 공화국의 의회주의는 파국적 모순에 직면해 있었고, 괴테의 고전주의의 신휴머니즘적인 유산이 남긴 문화적 여백 속으로 횔덜린에서 하이데거에게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적 파토스는 파고들었다. 학문에서 그 휴머니즘은 실증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고대의 가치들을 상대화시키던 역사주의에 의해서 포섭되었고, 그 반고전주의로서 어제와 그제들은 더 이상 오늘의 삶의 실재를 조형하는 일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보수와 혁명은 결국 같은 것이었는데, 같은 것이 왜 반대인지 사람들은 묻지 않았다.

 

   에른스트 윙어는 보수혁명을 통해 일대사를 이루었다. 1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유럽 내부의 권력다툼이 아니라 헌정체제와 문화들을 둘러싼 일대 전면전이었다. 독일의 우월감은 학문과 고전문예, 군사력과 입헌적 군주제에 바탕했고, 독일의 문화적 성취는 축적된 고전의 수용과 전승에 의해서 조건 지어져 있다는 의식은 확고했는데, 이 우월감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보답되었을 때, 세계대전은 “무에 의한 대숙청”이었으며 상처받은 윙어들은 사교도들과 같이 잘로몬과 에드가 율리우스 융 주변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시대가 어지러웠음으로 이에 따라 말도 어지러웠다. 고국에 용납되지 못했던 폐품 같은 청년들은 독일과 유럽 사이에 광야를 짓는 독랄한 말부림들을 함부로 주워 읽었고 신들이 뛰쳐나온 그 땅에서 그들은 트라클과 게오르게의 미학에 세뇌당했다. 말초신경은 옥죄이고 뇌세포들은 부어올랐고, 계몽과 부르주아의 시대는 끝났다는 흔한 말 한 줄 더 보태기 위해서 『데어 링』과 『다스 게비센』에게 석권되었다. 세기말적인 환흉 속에서 핏물이 솟구치도록 의미를 구하고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시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했던 그 벌거숭이 인간들은 테러의 미학으로 함몰했다. 서부 전선의 모리배에게 감전된 그 버러지들은 윙어의 무모한 역마驛馬에 열광했고, 『강철 폭풍 속에서』의 쓰레기매립지 같은 참호 속으로 유폐되었다. 저능아들의 몸에서는 모든 땀구멍마다 헤아릴 수 없는 『광란의 오를란도』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바야흐로 니힐리즘의 시대였다.

 

   하이데거는 그 니힐리즘의 은총을 받았다.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공허와 모욕감은 숨막혔고 그들은 몸 둘 곳 없었다. 소년배들은 니힐리즘의 가호 아래서 다음 페이지를 서둘러 넘기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도주”를 도모했다. 카시러의 상징형식에서 시간의 밀도는 맹렬한 기세로 엷어졌고, 로젠츠바이크의 구원의 별에서는 시간이 고여서 폐수처럼 썩어가는 분지盆地의 형상이 감지되었다. 그 때, 하이데거의 철학은 시간을 짓무르게 하는 요술이었다. 그에 따르면 시, 곧, 철학은, 언어로 사유하는 부재였고, 오로지 시와 사유만이 세계와 역사에게 의미를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와 시간』 속에서 비재非在는 존재를 모독하고 존재를 성화하는 의미의 광채를 띠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파락호들의 시혼을 받아내는 피뢰침이었고, 비극적인 것, 스스로를 오므리는 것 속으로 의미는 핏발을 세웠다. 윙어는 니체를 추수했고, 선악의 피안에 있었으나, 숲으로 자신을 밀어넣고 그 밟히지 않는 죄의 길을 집으로 삼았던 하이데거의 호명권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었다. 윙어는 하이데거에게 예속되었다.

 

   전간기 독일은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공간연출이었다. 하이데거는 보수혁명론자들의 출판 그룹에 소속되지 않았고 1933년 이전에는 정치적 작가로서 운을 떼지도 않았다는 점에서는 슈미트와 구분되었다. 그러하되, 하이데거는 분명히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족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에콜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이치툼과 실지회복주의의 푯말을 치켜 들어서, 그는 독일인들에게 각별히 주어진 역사적 사명들을 대의했다. 『존재와 시간』의 실존적 존재분석은 존재의 역사로 인계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울부짖던 참다운 역사적 실존은 “민족적인 것”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31년부터, 꼴같잖은 “1789년”의 진저리나는 유산과 그 모순덩어리의 진보를 속속들이 표백하고 또 내다버리자고, 그리하여 “오른쪽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룩하자고, 하이데거는 외마디로 짖어댔다. 열등하고 비역사적인 인종들의 씨를 말리고 오염투성이가 된 독일을 게워내자고 비명을 질렀던 히틀러에게 젊은 교수의 시선은 박혀 있었다. 이처럼, 하이데거가 나치 내부의 혁명적 분파를 향해서 통제불능으로 이끌리고 있을 때, 윙어는 노동자에 관한 혁명적인 견해에 몰두하고 있었다. 1932년, 윙어는 『노동자』를 편찬한다.

 

   하이데거가 이 독일적 현존재에 눈독을 들인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1932년, “소규모 서클에서”, 윙어의 『노동자Der Arbeiter』를 강독했다고 그의 총장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마르크스에서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아바이트는 독일인들의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같았다. 윙어의 매니페스토는 노동자의 몰개성성을 집요하리만큼 상찬했다. 『강철 폭풍 속에서』가 군인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세계대전의 전쟁터를 통과한 뒤 어떻게 역사적으로 현신現身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듯이, 윙어의 노동자는 기술이 부추기는 생산성의 요구에 절대복종하는 병정과도 같았다. 그렇기는 해도, 군인이 다만 기술의 지배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유형인 반면에 노동자는 기술과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 형상이었다. 윙어는 기술을 “총집결”로 특징지었는데 이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모든 국면을 작동시킨다는 뜻이었다. 윙어가 볼 때, 이 총집결에 부응할 수 있는 타입은 바로 군인이었고, 이 총집결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존재가 곧 노동자였다. 하이데거는 윙어의 이 정치적 전체주의에서 니체식의 권력의지와 초인을 직시했다. 윙어와 하이데거는 긍휼한 새로운 형상들Formen에 목말라했고 새로운 엘리트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인류학적인 관점을 공유했다. 때가 이르면, 윙어의 노동자론은 율리우스 에볼라에게 영향을 미치고 신우파들의 헹가래를 받을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보수주의자였고, 전통의 타자他者였고, 보수혁명론자였다. 파괴하고 해체해야만 전통이 이루어짐으로 그는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장 완고하고 가장 하릴없는 복고주의의 힘으로 철학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가 가장 미래지향적인 철학의 혁신을 단행했다. 1934년, 12개월 간의 총장-영도자 직에서 내려선 연후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일신론 배후에 있다는 프리소크래틱한 시작점으로 돌아갔고, 아테네와 예루살렘, 플라톤과 모세 이전으로 소급하는 그 태어나지 않은 근본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몽롱한 말들을 많이 지껄였다. 그에 따르면, 막힌 수챗구멍 같은 형이상학의 첫 시작은 하강Untergang 곧 모더니티였음으로 (그리고, 젊은 날의 하이데거에게, 히틀러의 반정反正이야말로 이 하강을 유기하기 위한 불가피한 의례일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에게 형이상학으로 나가는 최일선의 전진기지이며 형이상학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일 것이었다. 오래된 것만이 새로웠고, 태어나지 않은 곳이 곧 열반이었다.

 

   하이데거와 윙어가 마침내 교유하고 우의를 맺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1948년 9월 16일 토트나우베르크에서 두 늙은 혁명가는 처음 조우했다. 윙어에게도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에서 눌러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무서운 고립의 지루한 집착 안에서 철학을 탄생시키는 그 요술꾼은 신령했고, 그 법음法音은 논리나 역사를 초월한 피의 호소이자 절대적인 확신으로 군림해 왔다. 이 때늦은 방문을 계기로, 1949년부터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 번역해서 내놓는 대목은 1950년에 씌어진 것으로, 초창기의 서신에 해당한다.

 

   1950년은 “검은 수첩”에서 노골화된 그 분노가 가라앉고 그간의 뒤숭숭했던 생활이 겨우 정상화된 해라고, 하이데거 전기작가인 로렌츠 예거는 쓰고 있다. 그 해, 많은 사람의 경복을 받았던 『숲길』이 발간되었고, 그의 환갑을 기념해서 『Anteile』가 출간되었다. 뢰비트나 가다머 같은 하이데거의 큰 제자들뿐 아니라 사랑이 계속 지체되는 사태를 뜨겁게 자각했던 과르디니와 같은 가톨릭 사상가, 그리고 에른스트 윙어와 그의 남동생 프리드리히 게오르그가 이 기념논문집에 기고했다. 에른스트 윙어의 「선을 넘어서Über die Linie」는 이 논문집의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고, 그로부터 5 년 뒤 이번에는 윙어가 환갑을 맞았을 때, 하이데거는 윙어의 기념논문집에 「선”에 대해서Über <Die Linie>」라는 글을 기고한다.

 

   「선을 넘어서」에서 윙어는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경유해서 『노동자』의 각론을 폈다. 그는 세계의 니힐리즘적 상태를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니힐리즘과 정면대결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신학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신학을 질타했다. 윙어가 볼 때, 노동자들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부르주아 대중의 유일한 빈틈이었고, 총집결된 노동자들은 그들의 세련된 나약을 찢어버리는 이 시대의 타이탄들이었다. 니힐리즘은 외면하고 싶도록 두려웠지만, 니힐리즘은 이 세계의 재편과 갱신, 부활과 복원을 위한 통과의례가 될 것이었다. 니힐리즘을 끝내기 위해서 우리가 그것의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선을 넘는다”의 의미이다) 기술적 프레임워크(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Ge-stell”)는 존재망각의 양식일 뿐 아니라 여전히 존재의 양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총동원되는 노동자의 형상 속에서 윙어가 위험을 보았지만, 위험이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강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형상을 통해서 위험을 소진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 소진으로부터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구원이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선 너머를 향한 팽팽한 그리움으로 글을 쓰고 있던 윙어와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윙어에게 기술이 “거인족”적인 것인 반면에 하이데거에게는 다만 형이상학의 실현이었던 것처럼, 윙어가 니힐리즘에게서 서구적 ·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가치들의 정반대를 본 반면에, 하이데거에게 니힐리즘은 그 가치들의 안타까운 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윙어는 니힐리즘은 데카당스가 아니라 강철기계와 같이 진군하는 인간들, 카타스트로프에도 부숴지지 않고 나아가는 영웅적인 노동자들을 양산해냈다고 보았고, 하이데거의 「”선”에 대해서」는 그 남루한 희망조차 섣부른 낙관주의라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심으로 하이데거는 연명하지 못했다. 근대 테크놀로지는 하이데거의 종부성사였다. (오직 한 분의) 신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조그맣게 간증했던 1966년의 『슈피겔』 지와의 대담에서도 근대 기술의 본질은 천부적인 화두를 이루었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유년기의 뇌파에 새겨진 메스키르히의 햇빛과 종소리를 따라서 그의 103권에 달하는 전집 속의 수천만 활자들은 모조리 하나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자진自盡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사람의 자세였는지, 아니면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다만 가톨릭 신앙 쪽으로 허물어진 것인지, 나는 두려워서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보수혁명”이라는 네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그 자멸적 암호에는 “보수”와 “혁명”을 조합한 첫 마음과 그 두 단어 속에서 시든 마음이 비명처럼 심겨져 있다고, 나는 겨우 추스르고 있다.

 

   이 서신을 번역하면서 유의한 핵심 사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알랭 드 브누아의 지적대로 윙어가 하이데거의 휘하에 들어 있었다는 점 (그렇기는 해도, 여기 번역된 두 서신은 니힐리즘에 대한 이 두 대가의 견해 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두번째는 내 나름으로는 언어를 관념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고 즉물적으로 써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그 노력은 마침내 무익했다. 결과적으로는, 톤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떫은 번역이 되었다. 글자를 남기지 못한 이미지들과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무기력해진다.

 

본문

   라벤스부르크, 1950년 1월 6일

   친애하는 하이데거 선생님께,[각주:1]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들길」에 대해서 미처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읍니다.[각주:2] 그 선물은 저에게 선생님의 사유의 본질에 관한, 선연한 깨달음들을 수여해주었읍니다.

 

   선생님과 제 공동의 출판사인 비토리오 클로스터만 측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선생님의 생신에 즈음하여 간행되는 기념논문집에 기여함으로써 선생님의 저 선물뿐 아니라 선생의 존재에 대한 제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각주:3] 아마 이 선물은 [다른 분들의 것들과] 동질적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 대신에 바라건대 진실되기는 한 것입니다.

 

   저의 독자이신 바르트 씨로부터 선생님의 브레멘 방문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았읍니다.[각주:4] 그가 제게 귀띔해준 대로의 토론이 그 세부에서 틀림이 없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읍니다만, 선생님께서 “저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서 말씀하셨다고 하던가요.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주장을 내세워 본 일이 없습니다. 저를 정작 두렵게 하는 것은 신학적 통찰의 속절없는 결핍이고, 제 바람은 그것이 철학자들에 의해서 극복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철학자도 시인도 그들[신학자들]에게서 인수할 수 없는 직임이어서, [행여] 다른 세력들에 관해서는 불문가지이겠지요.

 

   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갓] 반反그리스도인은 더구나 아닙니다만.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의 명언明言 속에는 집요한 알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저는 호의를 가지고 참을성 있게 굴며 사실들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저희가 감내했던 많은 충격들을 품어 안았습니다. 오늘까지도 라벤스부르크 같은 도시에서는, 그곳의 두 교회[교단]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날 밤에라도 식인食人 행위가 창궐할 것만 같은 형편입니다. 그것은 얇디 얇은 허울 아래 도사리고 있습니다.

 

   포스트 페스툼post festum에도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개입할 수 없는 천상天上에, 다른 것들 가운데서, 태어나려고 떨고 있는 기독교의 아이온이 결단코 없다고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전조Vor-Gänge가 우리 여생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지도 모르겠읍니다. 천국은 마지막 한 번의 쪼아댐만을 남겨둔 알껍질처럼 보입니다.

 

   잡지에 관한 계획은 아주 포기하였읍니다. 특히, 저를 모해하는 실없는 출판 계획들을 고려했을 때, 선생님의 주저함이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인식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놈들이 제가 그들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보고 있읍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과 같은 [몇 가지] 물음들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저러한 플랫폼은 다소나마 유익했을 뻔했읍니다만, 저 여우원숭이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늘 건강하시길

EJ 삼가 씀.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1950년 12월 18일

   윙어 형!

 

   형의 “몫Anteil”에 대한 제 진심 어린 감사는 외람될 정도로 뒤늦어 도착하겠군요. “선線을 넘어서”는 형께서 존재 자체에 막바로 참여Anteil하시는 고무적인 모험입니다. 이로써 형의 참여는 [형의] 제씨弟氏의 것과 더불어서, 여타의 모든 기여[논문]들과는 영락없이 구별되는 것이군요. 그것은 또 “숲길”을 걸어가는 것과도 북돋아주는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 형이 적실하게 조명해 주셨습니다.[각주:5]

 

   『노동자』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거기 확정된 실재에 구태여 옥죄여 있던 그 정신이 이제는 정화되었고 안목은 터졌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예리해졌으며, 종사할 준비가 된 채로 도상道上에서 자유롭습니다.[각주:6]

 

   그 글은 청년들에게 상황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지침까지 덧붙어 있는, 봄(Sehen, 관觀)에 대한 절묘한 훈련을 가져다 줍니다. 그 주시가 그 자체로 선을 넘어서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수런거리는 요구는 무엇보다 “고통이라는 미지未知의 자본”(258, 274)을 보살피고 있는 자들에게 때로는 절망적이기까지 한 용기를 회복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어그러져 있던 표상방식에 만족하려는 환경의 한복판에서, 서투르기 짝이 없는 시도들을 꼼지락거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형의 “몫”를 읽었을 때—저는 다른 모두를 제쳐 두고 그것을 맨 먼저 읽었습니다—저는, 뒹굴며 걸어온durchmessen[각주:7] 길은 따지지 않고도, 이제 형이 『노동자』에 대해서 자유와 우월성을 확보했다고 자답할 수 있어서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형은 이로써 그 작품을 다시 한번 시대의 뇌리 속에 부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스튀번바센 [산]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우리의 첫번째 대화를 통해서, 제가 그 작품을 얼마나 흠모하는지 형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스타일과 체재Dimension에 있어서, “선을 넘어서”는 [바야흐로] 『노동자』의 새로운 판본의 씨앗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이제 제가 몇 가지 물음을 통해서 형의 “참여”에 대한 제 특별한 관심을 표현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저는 271쪽의 하단에서 형이상학적 요체가 되는 일절을 발견합니다: “선이 돌파되는 순간은 존재의 새로운 뒤채임Zuwendung을 가져온다…”. 우리는 또, 존재의 본질에 응대하기entsprechen 위해서 [이렇게] 말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선이 처음으로 돌파될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자신의 뒤채임을 마련하는 순간이고, 이 뒤채임은 무엇보다 인간본질을 향한 자지러지는 곤두세우는[각주:8] 말건넴Ansprechen이라고 [말입니다].

 

   선을 넘어서는Überqueren 것은 무無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다만 인간의 약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구원하는 것(das Rettende, 구원자)에 의한 [저편으로의] 건너가기Überholen이고 그것의 이편으로는 오직 넘어서기Überqueren만을 위해서 선을 환히 밝혀주는lichtet 것입니다. 이 길道에서 형의 스타일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지점을 붙좇아야만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 방면에서, 두 개의 물음이 저를 붙들어 오는군요. 이들은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니힐리즘을 카오스나 질병, 악惡 들로부터 뜯어내는 극도로 중요한 [작업]과 회통하는 것입니다. 저 관계들을 규명하지 않는다면, 아서라, 특히 “신학”은 거푸 안개 속을 더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힐리즘이라는 근본적인 힘과, 곧, “선”이, 병증病症은 아님으로, 선을 넘어가는 사유는 그것이 “예후”니 “진단”이니 “치료”니 하는 의학적 용어법 아래에서 꾸물거리는 한에서 [사유하는] 사태에 대해서 도대체 부적합한 것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각주:9] 물론, 형께서 이러한 분류법을 채택하셨던 것은 다만, 기여[논문]의 부류가 요구하는 부득이한 제한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형께서 심리치료를 이 시대의 단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격상시키려는 것과는 아주 멀다는 것을, 제가 어째서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표상방식이 사방에서 그 방향으로 모여들고 이로써 위험한 신新인류학이 모략됨으로 그 매캐한 흐름을 절단해내는 것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젊은 니체가 1873년에 쓰려고 계획했던 글의 제목은 “문화의 외과의로서의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저의 두번째 질문은 “질서”의 화두와 관계됩니다. 형은 니힐리즘 속에서도 질서가 지배하고(253), 심지어는 그것의 스타일에 속한다고(256) 또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형은 다른 한편으로 선의 이쪽 편에서 “도저한 질서사유”는 “완벽한 예술작품” 만큼이나 희귀한 것이라고 쓰셨습니다(250). 형께서는 또, 선의 저쪽 편에서까지 질서를 하나의 근본범주로서 고집하고 계시고, 이쪽 편과 저쪽 편에서의 질서사유 간에 [질적이나 종적인 구별이 아니라] 다만 정도에 따른 구별을 하실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선은 본질적이고,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구별을 위한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질서의 범주는 끝끝내 무근거한 형상-질료 관계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관념론적이거나 유물론적인, 체계적이거나 역사적인, 모든 변증법들은 그 [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의 저쪽 편에서는 어떠한 지고한 질서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질서”는 근원적인 것을 주지 않으며, 그것은 가치Werte와 정확히 마찬가지로, 구축된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제게는 272쪽 상단에 있는 형의 문장이 본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의 이쪽 편에서는 사태에 대해서 누구도 판단 내릴 수 없는 것이다.”

 

   형께서는 “선을 넘어서”와 관련해서 자연과학의 현재 입지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자연과학은 막다른 골목에 있으며, 자신의 방편으로는 그 막다름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재래의 철학이 손댈 수 있는 것은 뭣도 없다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에게 무규정적 관계가 몰려오는 곳에서,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사유가 엄존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형이 작가의 수공예품을 얼마나 높게 감정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잗다란 것 하나를 감히 지적하려고 합니다.   

 

   252쪽의 끝에서 두번째 문단에서 형은 “직관과 인식”과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 일치성을 설정하시는군요. 고대로부터 직관(intuitus)은 인식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그러나 이 대목에서 형은 비직관적인 것, 개념적인 파-악Be-greifende을 직관과 대비되는 것으로 지칭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인식이 아니라 마땅히 “판단Urteil”이 들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들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저는 그저 형의 어여쁜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아마 한 차례 더 흉금을 터놓을 기회가 있어서 사상Sache과 스타일에 관한 물음들을 하나하나 톺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타일에 관한 물음은 공방工房의 신비이면서 동시에 소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것은 공적인 폭로에는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필수적이고 가장 불가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스타일은 사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성절萬聖節에, 저는 제 남동생과[각주:10] 더불어 몇 일간 메스키르히에서 머물렀고 형의 새 집으로 형을 거의 기습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교통 수단이 당시로서는 여의치 않더군요.

 

   때로는, 세계의 혼돈과 박모薄暮의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리고 우스개로 만드는 공공성의 위세에 노출되어서, 유일하고 그리고 도리어 충분한 것으로 남아 있는 일은 주어진 순간들에 존재의 뒤채임에 다만 응대하는 것, 들리지 않고 말하는 것인 것처럼 보입니다. 짐작건대 그러한 응대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의” 여정이 개시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필수적일 터입니다.

 

   프리데리케 포더빌스 백작 부인이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으로 가져다 주신 “미르둔”에 대해서 아직 감사의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각주:11] 가지가지의 아름다움 가운데, 형이 이 근사한 단어를 문득, 그리고 수많은 지면 뒤에서야 발음하게 되는 방식이 참으로 경쾌했습니다. 언젠가 그 단어를 노르웨이인의 입술으로부터 청취하고 싶은 욕망을 살큼 일깨워주더군요.

 

형에게 평안이 깃드시길.

마르틴 하이데거 드림

 

  1. [역주] Klett-Cotta 출판사에서 2008년에 출간된 Briefe의 14쪽에서 21쪽까지의 번역이다. 하이데거의 “윙어 커넥션”은 한국에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하이데거 연구서들에서 윙어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거나 소략하다. 서신이 오고 간 초창기에 둘은 주로 팔라스Pallas라는 잡지의 참여 여부에 대해서 논의했다. 팔라스에는 당시 윙어의 개인 비서로 집무하던 아르민 몰러가 편집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 잡지를 기획하던 출판인 에른스트 클레트는 윙어 형제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던 하이데거와 하이젠베르크를 대표 편집인으로 모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이에 클레트는 1949년 중순경 하이데거에게 직접 접근했다. 하이데거는 머리카락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윙어는 이후 하이데거가 아닌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안타이오스Antaios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된다. [본문으로]
  2. [역주] 「들길Der Feldweg」이라는 책자는 비토리오 클러스터만 출판사에서 1949년에 비매품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책자는 하이데거 전집의 제13권으로 묶여 나왔다. 전집 해당 권의 국역본은 신상희 번역의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도서출판 길, 2012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3. [역주] 하이데거의 환갑을 기념해서 1950년에 출간된 『Anteile』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4. [역주] 하인리히 바르트(1914-1997)를 지칭한다. 아데나우어 정권에 참여한 정치인이었다. [본문으로]
  5. [역주] 하이데거는 1932년 자신이 재직하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서 모임을 조직해 에른스트 윙어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했다. 이 시기의 메모와 기록은 하이데거의 전집 제90권에 담겨 있다. [본문으로]
  6. [역주] 윙어의 『노동자』는 국역본이 존재한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최동민 번역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 [역주] durchmessen, 즉 “남김없이 측정한”이나 “가로지른”. 여기에서는 말의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쓰이고 있지만, 하이데거의 철학 체계 내에서는 “차원Dimension”의 동의어로서, 본래적 시간에 귀속되는 것이다. 이하에서도 Sache (“사태”)의 경우에서와 같이 정립된 번역어를 따르지 않은 사례가 많다. [본문으로]
  8. [역주] ereignendes. 이는 한국 하이데거 문헌에서는 흔히 “생생하게 고유화하는” 식으로 번역된다. Ereignis, 곧 “생기” (또는 “별기”)는 넓은 의미에서 존재의 진리가 고유하게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9. [역주] 윙어는 라이프치히에서 한스 드리시Hans Driesch에게 생물학을 배웠다. 다윈 이후 1900년 어간에 탄생한 “생물학주의”와 이후 물리학의 혁신이 과거에 철학적, 신학적 논쟁으로 점철되었던 보수주의 담론의 레토릭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는 몹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본문으로]
  10. [역주] 프리드리히 “프리츠” 하이데거(1894-1980)를 지칭한다. 하이데거가 나고 자란 메스키르히에서 평생 살았다. [본문으로]
  11. [역주] “Myrdun”은 윙어의 노르웨이 기행문이다. 1935년 7월부터 8월까지 윙어의 여행 기록을 담고 있고, 노르웨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독일 군인들을 위해서 1943년에 특별히 편찬되었다. 포데빌스 부인은 클레멘스 폰 포데빌스 백작의 여동생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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