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고유한 조선 문화를 찾는다는 의미에서라면 조선의 박물관은 적어도 그 장소가 아닐 상 싶다. 이것은 필자의 솔직한 고백이지만, 평양박물관에서는 보다 더 한문화漢文化의 이식인 낙랑樂浪 문화를, 경주에서는 보다 더 불교 문화를, 그리고 개성과 경성, 이렇게 시대를 따라 내려온다면 딴은 그래도 어딘지 현재의 우리와 비슷하다는 일종의 유사감類似感을 가질 수 있어도 이 유사감 역시 아직도 우리가 고려말과 이조李朝의 유교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으로 오는 유사감에 불과한 것이고 조선 고유의 것인 때문에 오는 친근감은 아니라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인상인 것이다. 단군 조선에까지 올라가면 모르나 적어도 사군四郡, 고구려, 신라, 고려, 그리고 이조까지 통틀어서 한문화, 특히 유교 문화나 그리고 불교 문화와 같은 외래 문화를 빼 놓는다면 순수 고유한 조선 문화로서의 문화적 유제遺制, 유물이 과연 어느 정도나 남게 될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에 유산 정리에 있어 이 정리가 순수한 '내 것'만을 찾으려는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행해진다면, 그리고 정리자의 국수주의가 양심적이라면 조선의 문화유산은 몇 가지의 토속품에 그치고 말 정도의 무섭게 단출한 목록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것은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벌써 국수주의자는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낙제落第가 되는 것이다. 자랑하려는 것은 좋으나 자료의 빈곤에 부닥치고 말기 때문이다. 탈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 고유만을 고집하려는 그릇된 문화관의 고질痼疾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문화란 순수 고유의 것만이 '내 것'인 것은 아니다. 민족이 그러하듯이 문화 역시 순수 고유한 것만이 홀로 '내 것'인 것은 아니며 이러한 '내 것'만이 비로소 민족 문화인 것은 아니다. 원형은 어디서 왔든 생산자가 조선인이며 향유자가 조선인인 한, 그리고 흡수, 섭취,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가 떳떳한 한 개의 조선 문화며 이것이 점차로 민족의 살이 되며 피로 화化한다는 것이 문화사의 상식이 아니면 아니 된다.
문화 문제에 있어서의 국수주의의 이같은 당착, 순수 고유만 찾다가는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건더기마저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당착은 문화라는 것을 초超역사적인 민족과의 결부에서만 보려는 그릇된 사관에 가장 큰 유래를 가지는 것이어서 의례히 문화라면 반드시 민족의 이름과 얽어매어, 가령 유교 문화라면 한족 문화, 불교 문화라면 인도 문화, 서양 문화라면 백인 문화, 이렇게 보려고 들고 이것을 가령 부족部族 조선의 문화라든지 봉건 조선의 문화라든지 하는 과학적인 범주 밑에서 관찰하려고 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파탄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부족 조선은 각기 각양으로 부족 국가로서의 형성과 지속을 위하여서, 그리고 봉건 조선은 봉건 조선을 위한 문화를 만들고자 자신에게 소유되는 우수·적절한 외래문화를 흡수·종합함으로써 자기의 체질에 알맞은 자기의 문화를 만들어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여기에 고유니 외래니 하는 시비是非가 처음부터 문제될 턱이 없는 것이다. 또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화를 '제 것'이라고 내세운다고 해서 불만을 제출할 건더기라고는 조금도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석굴암을, 또는 첨성대를 우리의 것으로서 얼마든지 세계를 향하여 자랑해서 무방하며 오직 논리적 모순에만 장기를 가진 국수주의자만이 이같은 자랑을 자랑할 자격이 없다면 없을 따름인 것이다.
민족이 문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민족을 위해서 있다는 것은 한 개의 민족이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순시瞬時도 잊어서는 아니 될 간명중대한 진리다. 높고도 아무리 아름다운 문화라 해도 그것이 한 민족의 세계사적 발전에 도움이 못되고 도리어 이것을 조지阻止[각주:1]하는 질곡으로 화하게 되고 마는 한, 문화는 남아도 민족은 망한다. 비단 마야나 잉카나 크메르의 경우를 운위云謂할 것이 아니라 문화사상上으로 본다면 확실히 선진임에도 불고하고 근대 문화, 좀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 과학 문명의 섭취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경지에 떨어지고만 아시아의 제諸 민족의 오늘이 무엇보다도 웅변적인 좋은 예다.
이같은 전락을 자위하는 수단으로 동양 문화는 정신 문화고 서양 문화는 물질 문명, 기계 문명이니 하면서 억지로 문화와 문명을 구별해 가면서까지 변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자아기만이다. 여기 다시 박차를 가한 것이 일제의 음흉한 인종관일 것이다. 우리를 때려 부수고 우리를 약탈한 도구로 사용된 그들의 비행기나 기관총은 동양의 '정신문화'가 아니라, 기실은 서양 물질문명, 아니 정확히는 자본주의 과학 문명에서 배워온 것 중의 하나인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하거늘 그들은 의례히 문화 하면 동양 문화니, 아니 백인 문명이니, 황인 문화니 하며 문화가 마치 인종의 차이 때문으로 그처럼 차이·현격懸隔이 생긴 듯이나 떠든다는 것은 확실히 한 개의 음모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쳐 감으로써 한편으로는 그 소위 서양 문명이란 자를 슬금슬금 수입해다가는 저들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압박과 침략의 도구, 가령 소총·기관총·전함·비행기 등속은 자꾸만 만들어가는 한편, 우리나 또는 그들 자신의 피압박 대중에게는 소리를 높여서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니 팔굉일우八紘一宇니 하는, 근대 정신과는 얼토당토않은, 원시적·샤만적·국수당黨적인 미신이나 그런 것들을 지켜줄 것을 강요해 온 것이다. 또 알고 보면 봉건적인 굴복과 인종[각주:2]밖에는 더 안 되는 봉건 도덕적인 노예적인 것을 이것이야말로 서양인에게는 절대로 없는 동양 고유의 미풍이라고 해 가면서 동양 도덕, 동양 정신이라는 미명하에 극력 칭송, 권장, 강요함으로써 압제에 의한 예속의 영원화를 기도해 왔던 것이다. 이같은 음흉한 기만은 비단 우리네 조선인에게만 한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 침략·태국 침략·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침략에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은 지금은 한 개의 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들 일본인 자체에 대해서도 지배·특권·전제 제도의 확보를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어 비교적 교양이 낮고 마음씨가 단순한 무수한 피압박 근로 대중들은 지배자의 이같은 속임수에 그대로 넘어가서 누구를 위해서인 줄도 알 수 없는 침략 전쟁에 귀중한 땀과 피와 목숨까지도 알뜰히 제물로서 바쳐 온 것이다. 제국주의라 아무리 자국민·동포라 해도 압제와 착취에 들어서서는 별수가 없는 것이다. 신생 조선도 자칫 하다가는 이 일제가 밟던 전철을 되풀이할 위험이 결단코 없지 않은 것이다. 세계사의 면에서 보지를 않고 거저 덮어놓고 이것이야말로 동양적, 이것이야말로 조선적 운운만 하다가는 첫째 세계사적 수준에서 영영 뒤떨어져 버릴 위험성이 다분히 있을 뿐만 아니라 이같은 시대착오적인 완미頑迷한 국수주의적인 언동言動이 전제주의자나 친親파쇼분자들에게 이용되는 날이면 봉건적인 것을 일소하려는 민주 조선의 사회 해방은 영영 바랄 수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대저 전제주의자, 더구나 조건이 나쁘기로는 이미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경우에서 충분히 보듯이, 개명開明한 전제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가령 무기를 비롯한 물질인 면에서는 되도록 근대를 확보하되 정신적인 면에서만은 어디까지든지 야만·미개·원시에다 인민을 얽매어 두려는 것이 인민 기만에 있어서의 그들의 상투적인 전략인 것이다. 이같은 전략이 결국에 가서는 실패하고야 만다는 것은 오늘 이들 파시스트들의 말로가 무엇보다도 그 증거거니와 무릇 문명과 미개, 현대와 원시가 무리 없이 동서同棲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원래 문화라는 것을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고 나누는 것부터가 과학적이 아닌 것이다. 서양 문명에도 고대가 있고 중세가 있는 것이며 또 중세나 고대에 올라가면 과학 문명이나 기계 문명과는 얼토당토않은 소위 정신 문화에 정확히 해당할 그러한 성질의 문화가 동양이나 마찬가지로 지배적이었던 것이며, 이른바 과학 문명, 기계 문명이란 자도 알고 보면 이 의미에서 단적으로 거저 서양 문명인 것이 아니라 근대 문명, 시민 문명, 좀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 문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편 또 가령 제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만 구비했다면, 슬프나마 이제 와서는 이것은 단순한 희망적인 조건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만, 동양에도 아니, 조선에도, 그 소위 서양 문명이라는 것이 영미英美 등 서양보다도 한 걸음 앞서 수립되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말만이 서양문명이지 기실은 봉건 문화의 지양자止揚者로서의 자본주의 문화가 동양보다 서양에 한 걸음 앞서 꽃이 피었을 따름이며 오직 가령 영국은 영국답게 미국은 미국답게 이 자본주의 문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만한 조건이 구비되었고 또 이같은 조건 밑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음에 반하여 조선은 진실로 '조선답게' 아직도 봉건적 유압遺壓에 허덕이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 중대한 민족 문화의 재건기에 있어 덮어놓고 순수 고유만을 찾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속히 문화의 역사적 방면에 있어 한 걸음 앞선 선진 문화국의 수준에까지 따라갈 현실적인 제 조건의 준비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면 아니 된다. 이같은 제 조건의 진보와 긴밀한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조선인으로는 놀랄 만한 슬기로써 혹은 불교문화를, 혹은 또 유교문화를, 섭취·소화시켜 가면서 부족 조선, 봉건 조선의 건설·유지·발전에 이바지한 것처럼 지금은 일제의 잔독殘毒과 봉건의 유제遺制를 청소하고 용감하고도 재치 있게 신문화를 흡수·소화하여 민주주의 조선의 새로운 문화, 민주주의 민족 문화의 건설에 노력하지 아니 하면 아니 된다.
여기에 다시 부언하고 싶은 것은 첫째 위에서 민족이 문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가 민족을 위해서 있다고 말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문화라는 것이 그저 막연히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민족의 '누구'인가를 위해서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령 이조 봉건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유교 문화라고는 해도 유교 문화는 발생지인 중국에 있어서도 그러했지만 본질상 소위 서민의 문화일 수는 없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조선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로는 문화가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는 했으나 반드시 민족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문화가 민족을 위해서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민족이 문화를 위해서 있느냐, 문제를 이 모양으로 제기한다면 문화가 민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문화가 문화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더구나 민족이 문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대답해야 옳은 것이지만,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민족만을 위해서 문화가 있는 것이라든지 따라서 민족이란 것을 떠나서는 문화라는 것이 당초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이렇게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요要는 단적으로 '민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민족' 운운이야 어찌되었든 간 필요하기에 만들어 내고 만들어 내어서는 그것을 향유하는 개인 내지 개인의 집단만 있고 보면 민족 운운이야 어찌되든 문화는 생성·향유·발전하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 한 개의 훌륭한 예로서 우리는 가령 아메리카 문화라는 것을 들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아메리칸이라는 독자적인 민족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문화라는 한 개의 문화가 독자적인 성격을 구유具有한 채로 기운차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과 문화의 상관 문제에 있어서 금후今後를 암시하는 중대한 시사示唆의 의미가 있지 않는가도 생각되어 초민족적인 중세의 가톨릭 시대와 그리고는 소련의 경우와는 물론 다르다고는 해도 일련의 유사점이 눈에 띄어 우리로서는 특히 주목해 두어야 될 중요한 경향인 동시에 문화라면 반드시 민족과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국수적인 문화관에 대한 중대한 반성의 재료가 될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이들과는 달라 단일 민족 국가이며 이 점만은 훨씬 더 다행하다. 하나 중요한 것은 막연히 그저 민족이 아니다. 민족의 '성원成員'이 어떻게 하면 되도록은 보다 많이 함께 잘 살 수 있느냐일 것인 한, 문화의 문제 역시 그러므로 어떠한 문화를 가지는 것이 이제부터 우리 민족의 되도록은 전부를 위해서 행복 될 것이냐 아니냐에 관심의 전부가 놓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소용될 문화는 이미 역사적 기여를 완료하고 물러선 봉건 문화나 그런 것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내 것'이었기로서니 내 것이었다는 단순한 이 까닭만으로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잘 살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래 잃어버린 것이란 아쉬운 법이다. 더구나 사적史的인 유제, 유물은 한결 더 그러하다. 시간은 예사 물건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잃더라도 도로 찾을 수도 있을 그러한 물건이 아니며 여기에 다시 진실로 유물은 이같은 시간의 해골骸骨이라 아쉽기도 할 법하다. 그러나 아쉽든 말든 결국은 소용되는 것만이 소용되는 것이며, 소용되는 것만을 '내 것'으로 할 줄을 아는 민족만이 보다 더 오래 새롭고 씩씩한 민족일 수가 있다는 것은 민족의 묘지墓地, 세계사의 냉혹스런 교훈이다. '답보踏步로'라 해도 인제는 벌써 퇴보를 의미하는 중요한 지금이다. 보수와 주저는 금물이다. 일체의 보수와 주저를 물리치고 하루바삐 신문화를 대담히 받아들여 급속히 우리의 피와 살이 되게 하지 않으면 새 조선이 요구하는 민주주의 민족 문화의 건설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19년, 슈미트는 과거에 대한 뜨거운 향수와 작별하였다. 1922년 그는 법질서를 중지시키는 긴급조치와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주권적 권력에 정치의 요체가 조직되어 있다는 『정치신학』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개별 행위자들을 절대적 무차별의 경지에서 바라보는 그 정치신학으로서 유대정신과의 투쟁을 연출했고 나치 정권 밑에서 곡학아세했다. 유대인들이 죽어서 나뭇잎처럼 쌓여가던 더러운 시기에 그는 다만 탈 없이 살았다. 슈미트의 화법에 대한 매혹과 혐오는 지금까지도 전후 자유민주주의적 정체성의 본질적 특질을 구성하고 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악마굴 속에서 자기를 성취시켰다. 그가 입헌민주주의의 모순을 간파한 것인지 악용한 것인지는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고, 그가 진실과 양심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인지 논단할 만큼 나는 현명하지 못하다. 그에게는 그에게만 예외적으로 열려 있는 정치신학이라는 안목이 있었고 그 경지는 높은 만큼 더 강한 유혹 앞에서 쉽게 흔들렸다. 그는 늙어서 플레텐베르크에서 두문불출했고, 사람잡는 언론과는 상종하지 않았다. 결국 한갓 늙은 글쟁이, 역사의 흉물로서 그가 살았던 나치와 일체가 되어 버렸다. 『구원은 옥중에서』는 내면의 냉정 하나로 겨우 자신을 지켜온 자의 횡설수설이었다.
정당성Legitimität의 관점은 슈미트의 장기이고, 법Recht에는 합법성만이 아니라 정당성까지 머금어져 있음을 보이는 것은 그의 춘추필법이었다. 그는 홉스와 막스 베버를 탐닉했고, 신화 속에 모셔져 있던 홉스를 그가 우리의 삶 속으로 불러온 것은 정치사상사의 전무후무한 장관이었다. 『정치신학』에는 근대 국가가 걸신들린 대기업처럼 되었다는 베버의 발언이 그대로 복창되어 있다. 십년 후에 편찬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슈미트는 서구의 조락, 곧 세계의 탈주술화라는 마법에 걸려있던 앞 세대의 대표급으로서 베버를 지목했다. 슈미트가 주저앉아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낡고 희망이 없었고, 시간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이 강렬한 크로노리비도 위에서 슈팽글러가 열독되고 칼리가리의 밀실에서는 미래와 몽유가 한 덩어리로 뒤엉켰다.
슈미트는 베버로부터 조금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베버가 서 있던 국법의 길이 끊어지는 절체절명의 심연에 곁따라 섰고, 제 사상을 관료적, 사법적 지배가 문제적으로 되는 통곡과 저주의 시대조류의 예외로 두지 않았다. 법과 정의와 같은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추상어들이 아니라 법률적인 낱말들을 붙들고 그 극진한 중립적 부호들에 나타나는 마음을 정직성이라고 고함쳐 가면서 입헌국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치화의 형식을 찾아서 그는 선배를 따라서 맨 몸뚱이를 던졌다. 1932년 출간된 『합법성과 정당성』은 그의 조국에 곰팡이처럼 피어났던 니힐리즘—합법성과 정당성의 분리—을 파기하려는 결사항전이었다. “이성의 카리스마”는 “카리스마의 합리성”과 구분되지 않았음으로, 슈미트는 백전백패할 것이었다.
베버는 합법성이 정당성의 일종인 것처럼 얼버무리곤 했다. (이는 이후 제자들에 의해서 합법성을 통한 정당성으로 변용되었다). 베버는 산업과 경제발전은 중앙화를 촉진하고 국가의 합법성이 국가 기능의 유일한 법적 토대가 되었으며 따라서 합법성이 정당성의 유일한 현상형식이 되었다고 적시했다고 슈미트는 견강부회했다.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에서 슈미트는 법 자체 속에서 법의 하자를 물고 늘어졌다. 법이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찢어지고 법에서 정당성이 도려내지는 궤적을 치밀하게 추적했고, 법을 합법성이라는 작위로 환원시켜 죽사발을 만든 죄를 물어서 실증주의를 패대기쳤다. 그에 따르면, 합법성은 군주로부터 인민으로의 주권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 놓는 것이었다. 헌법을 정당하게legitim 건지기 위해서는 그 일부는 합법적으로 침해되어도 별 수 없으며 비헌법적인 행위가 결국은 헌법적으로 충실한 행위가 된다는 슈미트의 논설은 합법성과 정당성이 함께 추는 독무獨舞였고, 이 정당성이 홀로 추는 파드두에 희망이 지겨운 많은 자들은 전율했다.
내 모국어에서, 레기티미탣은 자주 단도직입으로 “정당성”으로 번안되고, 그 번안 속에는 레기티미탣이란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연극이 있다. 이 나라 학문판은 너무 고급화되어서 미국을 닮아 간다. “정당성”에는 국민들을 죽여서 자빠트리는 정권은 정권으로서 정당하지 않다는 위대한 진취성의 근거가 있는데 (도덕, 정치철학적), 그런데 “정통성”에는 국민들의 살점을 튀기는 복잡하고 가혹한 것까지 사무치게 국가라는, 목을 조르는 듯한 인륜이 있다 (사회과학적). 슈미트가 의회주의, 자유주의의 지리멸렬을 넘어서는 조국의 정치질서를 상상하기 위해서 레갈리탣과 레기티미탣을 일도양단했던 것처럼, 한국어에서 정당성과 정통성正統性의 철두철미한 구분은 1948년의 건국헌법은 정당하게 제정된 것이지만 그 정통성은 1919년의 3.1 운동에서 기원한다는 한국사회의 가련한 믿음에 봉사해 왔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을 통해 3.1 운동을 미화하고 그 미화의 절실함으로써 만민공동회 및 임정과 대한민국 사이의 조화를 절망적으로 종용했다. 1919년과 1948년 사이의 이십구 년의 세월은 불투명한 맹목盲目에 잠겨 있고, “건국 70주년”과 “100년의 헌법”이라는 국가의 기년紀年을 둘러싼 과거정치 속에서 존속하거나 존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레기티미탣이라는 낱말에 정당성과 정통성은 오로지 합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의문은 감당할 수 없이 무섭다.
슈미트의 『헌법이론』이 연세대학의 김기범에 의해서 한국어로 초역된 것은 1976년이다. 제 조국이 비상사태인지 정상사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던 196, 70년대의 황야를 정신없이 나뒹굴던 김기범은 “Legitimität”은 한사코 “정통성”을 의미한다고 오금을 박았다. 오늘 그토록 자명해 보이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결합은 겨우 역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적 평등성은 다른 정치적 결정을 통해서 반자유주의적이고 비의회주의적인 방식으로도 표현되고 수습될 수 있다고 그가 번역한 『헌법이론』에는 적혀 있었고, 이 언명은 유신과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 모두에게 영적인 자극을 주었다.
섬광 같은 순간은 오지 않았다. 나는 “정당성”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 우연히 튀어나온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말 살림의 너절한 구차함과, 정통성의 객지까지 갔다가 정당성으로 돌아가는 무위의 마음을 이해받고 싶다 (끝).
본문
I. 헌법의 정당성의 종류들. 헌법은 사실적인 상태로서뿐 아니라, 적법한 질서로서 승인될 때, 그 결정에 헌법이 근거하는 헌법제정권력의 힘과 권위가 승인될 때 정당하다. 국가적 실존의 특성과 형식에 관해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은 헌법의 실체를 구성하는데, [그 결정이] 유효한 것은 그 헌법이 문제되는 정치적 통일체가 엄존할 뿐 아니라 헌법제정권력의 주체가 그 실존의 특성과 형식을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은 윤리적 또는 법적 규범에 의한 정당화는 필요로 하지 않고, 정치적 실존에서 제 의의를 취한다. 규범이라는 것은 여기서 무엇 하나도 근거지울 수 없다. 이 특수한 류의 정치적 실존은 저 스스로를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두 헌법제정권력의 주체, 군주와 인민에 짝지어서 두 종류의 정당성, 즉 왕조적정당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이 역사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권위의 관점이 압도하는 곳에서는 군주의 헌법제정권력이 인정되게 될 것이고, 인민의권리maiestas populi이라는 민주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헌법의 효력은 인민의 의지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근거로부터만 그리고 왕조적 정당성과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구분하는 관점 하에서만 헌법의 정당성은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는 정치적 통일체의 실존형식의 문제로 된다.
II. 헌법이 정당하다는 것은 헌법이 그 전에 유효하던 헌법률에 따라서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이야기란 매우 황당무계하다. 헌법은 자신의 상위에 위치해 있는 규율에 따라서 성립되는 것은 정녕코 아니다. 게다가 새 헌법이, 새롭고 근본적인 정치적 결정이 기성의 헌법에 굴복하고 거기에 종속되게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기존의 헌법이 소멸되면서 새 헌법이 들어서는 곳에서 그 새 헌법은 구 헌법이 제거되었다는 이유로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이 말이 틀리다면 소멸되었다는구헌법은 효력을 지속하는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구헌법과 새 헌법의조화[각주:2]라는 문제는 정당성의 문제와는 어떠한 관련도 지니지 않는다. 바이마르 헌법의 정당성은 독일인민의 헌법제정권력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 헌법이 1871년의 기존 헌법을 제거하고 들어섰다는 사실은 왕조적 정당성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고, 그게 전부일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관점에서는 군주정적 원리에 의거해서 왕이 발포한 흠정 헌법은 모조리 정당하지 않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전의 헌법률적 규율과 형식을 준수하여 성립되었는가, 즉 이를테면 바이마르 헌법의 규정들이, 구 라이히 헌법이 헌법개정을 규율하고 있는 제78조에서 규정한 절차적 규정에 따라서 들어선 것인가를 물음으로써 새 헌법을 측정한다는 것은 도대체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새 헌법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이전의 규범들에 의하여 구속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고, 또 틀림없이 유효한새 헌법이 이제는 효력을 상실하게 된 구헌법이 그 자신의 개정을 위하여 규정하고 있는 법규를 따랐는가 아닌가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규범성”에 대한 우매한 필요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무의미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W. 부르크하르트가 “헌법전과 제정법 Verfassungs- und Gesetzesrecht,” Politisches Jahrbuch der Schweizerischen Eidgenossenschaften, Bd. XXVI, 1910의 48쪽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새 헌법의 적법성을 그 전 헌법의 규정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행헌법을 그 제정자가 그 전 헌법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적이라고 한다면, 그때에는 먼저 그 전 헌법 자체가 적법한 것이었는가 등을 물을 수 있을 것이고, 시대를 소급해 올라가다가 불법적인 헌법을 하나라도 마주치면, 그 헌법이 제 존재근거를 현재로부터 도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거의 승인 하에서 생명을 가지게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허용될 수 없었다는 이유로 모든 다른 헌법들은 불법적인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헌법의 적법성에 관한 이러한 진술야말로 도대체 어떤 의의와 목적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허구에 찬 짓이다.” 그건 그렇고, 부르크하르트가 “헌법이 그것이 어떻게 개정될 수 있는가를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방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46쪽)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했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대답을 했다면, 이러한 포괄적인 아니오는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의 헌법과 헌법률의 혼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러 번 설명된 바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개정되어야 하는가는 헌법률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헌법은 그것이 그 이전부터 유효하고 헌법률적으로 규율되었던 헌법개정절차를 따라서 들어섰을 때에만 “정당하다”고 불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당성” 또는 “비정당성”같은 표현들이 사용될 때도 때때로 있다.
라이히 재판소는 유명한 판결, 민사판례집Zivilsachen Bd. 100, 25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변란에 의해서 발족한신국가권력(노동자 및 군사위원회)에 대해서 국법적 승인이 거부될 수는 없다. 발족이 적법했는가가 국가권력의 본질적 표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발족의 비법성은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권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구권력의 제거과 동시에 관철되는 신권력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이 명제들은 바이마르 헌법이 “적법한”것 인가, 즉, 제거된 헌법의 제78조의 절차를 따라서 성립했는가의 문제의 무의미함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물론, 이 [명제]들은 “헌법”이 아닌 다만 “국가권력”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합당하게 이해된 헌법개념에 있어서는 헌법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고 따라서 가령 안슈츠, 주석Kommentar, 5쪽에 있어서와 같이, 바이마르 헌법에도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을 주의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국가 또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말해질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 즉 인민의 정치적 통일체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 내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사법私法의 영역에 있어서 개개 살아있는 인간이 제 실존을 규범적으로 근거지울 필요도 없고 근거지울 수도 없는 것보다, 국가에게 합리화Rechtfertigung,[각주:3] 적법성, 정당성 등의 능력이 더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en, Bd. 58, 1927, 1ff. 쪽을 참조하라). 둘째, 국가와 국가권력은 동일한 것이다. 국가권력 없는 국가는 없고, 국가 없는 국가권력도 없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변한다거나 국가적 질서에 변동이 있는 것은 정치적 통일체의 계속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셋째, 기존헌법의 제거와 신헌법의 발포는 헌법제정권력의 문제에 관련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 제10장을 참조하라). 넷째, 헌법의 정당성은 마찬가지로 헌법제정권력의 문제와 관련을 가지는 것이지, 이제는 통용되지 않게 된 헌법률의 규정과의 조화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기성의 표현법은 헌법의 합헌성과 헌법개정의 허용성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합헌적인 헌법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거나, 전적으로 공허한 상투어이다. 헌법이 저 스스로 자신이 합헌적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또 그 때문에 합헌적인 것으로 승인된다 할지라도, 헌법은 그로써 새로운 어떤 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효한모든 헌법은 자명하게도합헌적인 것이다. 규범은 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는 없고, 그 효력은 그 발포자의 실존적인 의지에 기반한다. 그러나 “합헌적인 헌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않은 헌법률의 의미에 있어서 합헌적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면, 그 모순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한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법률은 하등의 유효하고 법적으로 유의미한 특성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III. 왕조적 정당성은 군주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제가끔의 개별자들이 그 개인적 현존으로부터 이러한 정치적 의의를 획득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군주의 헌법제정권력도 마찬가지로 군주 개인에게 멎어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국가와 결부되어 있는 가족의 역사적 지속성에, 왕조와 왕위계승의 계속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왕조적 정당성으로 인도되게 된다.
이에 반해서, 민주주의적 정당성은 국가는 인민의 정치적 통일체라는 사상에 근거해 있다. 인민은 국가에 관한 모든 정의定義의 주역이다. 국가는 인민의 정치적 상태이다. 국가적 실존의 종류[양태]와 형식은 민주주의적 정통성의 원리를 따라서 인민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민의 헌법제정의지는 어떠한 특정 절차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적 헌법들의 현재의 관행은 그것이 헌법제정 총회에서의 선거이건, 또는 국민투표[레퍼렌덤]이건 간에 특정한 방식들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이 방식들은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이념과 자주 결합되는 것인데, 이로써 정당성의 개념에 특정 절차가 개재되고, 따라서 개별적인 비밀투표의 절차로써 산정된 국민 과반수의 동의를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헌법들만이 진실로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명명되게 되는 것이다. 이 개별적인 비밀투표의 방법이 특히 참다운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문제적인 것인가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 뒤에서 더 자세히 서술될 것이다. 인민의 암묵적인 동의도 언제나 가능하고, 또 [이는]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헌법에 규정된 공공생활에 대한 단순한 참여만으로부터도 가령 인민의 헌법제정의지가 충분히 명료히 표현되게 되는 확정적 행위가 인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정치적 상태를 초래시키는 선거에 대한 참여에도 적용될 수 있다.
비얼링Bierling은 법적 원리론Juristische Prinzipienlehre, 1898, II, 363/4쪽에서 어떠한 “강제된 법규범도 여느 혁명적인 법제정과 꼭 같이 법적 동료[Rechtsgenossen, 시민]들의 추후적인 승인에 의해서 진정한 법적 효력을 획득할 수 있고”, 또 적법성을 산출하는 것은 항시 “제정된 규범들의 일반적인 승인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357쪽에서는 “이 제헌 라이히의회(1867년)의 선거의 실시는 (연방정부가) 의회와 합의한 헌법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전事前적인 승인을 내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으로써 비록 다만 암묵적으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 항시 육박하는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에 그 헌법의 기초를 둠으로써 갖가지의 헌법들에 대하여 민주주의적 정당성의 성격이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시커먼 아저씨들 중에는 옛날 한국신들의 형상形象이 숨겨진 장소를 안다고 말하는 중장년층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젊은 아들들에게 저 신들에 대해 기염을 토하고 그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한국인의 심장에는 귀중한 비밀 하나가 남게 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희망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희망이었다. 구김살이라곤 없는 틱톡과 엔터테인먼트의 시대에 “민족중흥”이라는 절규적인 슬로건은 가망없이 낡고 초라해 보인다. 세대 간의 유대를 회복시키는 것은 인간들에게 삶의 비극적 인식을 심어주는 사무친 경험들뿐이어서, 죽음을 품지 못하는 이 땅에서는 민족도, 역사도, 사명도 전혀 있을 수 없다. 구구한 신변잡기나 자전적 소재로 도피한 오늘의 작가들은 기어코 탯줄과 염색체에 대해서밖에 쓰지 못해서, 죽은 자와 산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연결시키는 유대감의 구도를 제시하지 못한다. 젊은 정열의 허영심은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과장하는 경향에 의해서 손쉽게 선동되거나 페미니즘적 영웅으로 찬양됨으로써 투쟁에 이용된다. 엉거주춤한 시장주의자들과 조촐한 체제친화적 인사들이 보수주의자로서 행세하고, 그들은 결국 사정대로 살수밖에는 없다는 뻔뻔스런 비정을 홍보한다. 우리 시대는 희망에의 소명을 상실했다.
이 빛바랜 “서론적인 구상”을 옮겨 적으면서, 근대와 민중Volk을 하나의 수맥으로 뚫어낸 박종홍의 펜을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민중주의와 인민주의가 문화 일반을 위협하는 나의 시대에도, “민족중흥”의 착란적 성격이 점차로 명확해지는 나의 폭력적인 시대에도 새로운 정체성 정치를 향한 내 맘은 좀체 단념이 되지 않았다. 삶의 본질과 숙연하게 맞부딪쳐 있는 긴장감은 한국에서는 협조적, 봉사적 민족주의에 가장 많이 깃들어 있었고, 이는 국민들의 국가감각에 스미었는데, 이 지순한 한국적 휴머니즘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은 2016-7년을 통과하지 않았음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동학과 천도교를 고함소리로 운운할 수 있는 박종홍에 대한 질투를 만들었고 그를 물리치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충동을 만들어 냈다. 충동과 의지력은 마주 부딪쳤고 나는 홀로 외로웠다.
열암은 한국의 스승praeceptor이고 급진적 보수주의자였으며 박정희의 양심이었다. 그는 다만 옛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의 복고를 희구하지도 않았고 근대화를 막무가내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한국 말로 말하며 생각하며 살고 있는 한국 사람” 곧 “우리”가 그의 논의의 중심이었고 한국혼이라는 전통을 아르키메데스의 점으로 삼아서 변화를 관리하려고 애썼으며 근대라는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변형된 프레임워크 속에서의 한국 전통의 재전유를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한국사상”으로서 한국은 “한갓된 정치적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에 대립되는 보수주의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1960년대를 통과하면서 독재 및 권위주의에 의해 회수된 “자유민주주의”가 지배이념이자 권력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박종홍의 민족주의를 깊이 침식시킨 유토피아주의에도 그 원인이 있다. 열암의 민족주의는 영국에서처럼 공식 지배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지 못했고 5.16 이후 저항이념로서의 자유주의를 약화시킨 나머지, 그 중층결정된 자유주의는 급진화한 좌파 민족주의 담론을 이루었고 인민주의의 민족종교적 기원을 형성하였다. 유신 이후 한국에서 민족 및 민중은 보수주의의 핵심개념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이는 약화된 국가감각으로 이어졌으며 국익에 대한 합의의 전적인 부재로 귀결되었다 (이 황량한 공간으로 “시민”이 들어온다). 정치적 현실주의의 성품을 지니지 못한, 곧 기골이 없는 보수주의는 허무한 보수세력, 기득권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적 천도교가 낳았던 독버섯, 대한제국의 문둥이인 열암은 인간의 막연하고 물러터진 선행에 조금도 얽매지 않는, 인간 본성이 얼마나 더럽고 악한지 직시시키는 신학 및 형이상학으로써만 보수주의는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방도가 없었고, 그것은 그의 시대의 과제도 아니었다. 그의 시대가 실패한 만큼 그는 실패했다. (끝)
본문
1.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한국사상을 문제 삼기 전에 이미 한국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서 사는 데서 한국사상도 생겨났으며 또 문제로 삼게도 된 것이다. 외국 사람은 한국사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할 수는 있으나 몸소 한국사상을 낳을 수는 없다. 외국 사람이 그대로 곧 한국 사람은 아니고 우리 대신 한국 사람의 삶까지 살아 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삶을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의 사상을 낳아 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국제적 세계적으로 추진되어 가고 있는 이 새로운 시대에 처하여 한국사상을 운운함은 마치 보수적인 고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이것은 국제적 세계적이라는 것의 진의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소치인 줄 안다. 각국의 특징을 말살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 국제적이 아니다. 서로 장점을 살리어 이해가 깊어질 때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 각자의 특색을 의의 있게 관철함으로써만 그 특색을 초월한 깊은 면에 있어서의 일치 융합도 가능한 것이다. 한 가정의 화목을 운하여 부부의 중성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아연해질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맥락 속으로 얽히어 있는 만큼 한국의 사정이 그대로 세계적인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요, 구태여 한국을 따로 내세울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르나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이 하나의 한국 사람으로서 행세해야만 되고 또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사람의 사상은 한국사상일 수밖에 없다.
혹은 말하기를 세계적인 종교사상을 보라, 철학사상을 보라, 위대한 사상에는 국경이 없는 법이다 할는지 모른다. 옳다. 그러기에 서로 이해가 가능하고 친선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세계적인 종교, 세계적인 철학이 단 하나인 것은 아니다. 설사 근본 원리에 있어서 하나라고 보려는 사상이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또 그것대로 벌써 하나의 특색을 형성하며 있는 것이다. 하물며 동일한 종교, 가령 불교만 하더라도 전파된 나라를 따라 같은 동양에 있어서 그 얼마나 많은 종파가 생겨났던가. 한국적인 기독교라야만 한다는 주장도 일리 있는 일 같다. 철학은 왜 고대, 중세, 근대로만 나누어지지 않고 영미철학, 독일철학, 불란서철학 등의 특색을 말하게 되는 것일까. 그 모두가 하나같이 세계적인 진리를 지향하는 것이련만 사상이란 원래 인간의 생활 속 깊이 그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그의 옳은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인 만큼 자연 민족성 국민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한국사상도 하루 아침에 그 어느 개인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내진 것은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이 한반도에서 생을 영위한 우리 선조들이 두고두고 피와 땀으로 싸워 얻은 고귀한 체험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 대하여 그런 한국사상이라고 도대체 무엇이 있었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좋다. 한 가지만 그분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외국 것을 알기 위하여 허비한 시간과 노력의 기분幾分을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하여 바쳐 본 일이 있느냐고. 알아본 일도, 아니 관심조차도 가져 본 일이 없으면서 단안부터 내리는 용기와 의아심은 자기의 일을 남의 일같이 대하는 너무나 딱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사상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거의 미개의 처녀지 그대로 있다. 미술이나 음악이 외국 사람으로서도 칭탄할 만한 그러한 수준의 것임이 사실이라면, 그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그와 더불어 생활한 한국 사람의 사상만이 유독 이렇다 할 것이 없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같다. 자아를 망각한 빈 마음은 이리 좇고 저리 달리어 새로운 사조를 유일의 진리인 양 받아들이기에 바쁜 것도 같으나 이를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 겨를을 가지지 못한 채로 거기에 남는 것은 공허한 모방에 지친 형해形骸뿐일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른바 사대주의의 말폐末弊요 자각을 가지지 못한 나라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안타까운 약점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의 도입이나 섭취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생활이 없는 곳에 우리의 사상만이 있을 수 없고 우리의 생활 자체가 하나의 완성품일 수 없다면 한국사상도 어떤 완결된 봉쇄적인 것일 수는 없다. 나의 생활이 나 홀로 고립하여 불가능하며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사상은 외래사상과의 접촉 대결에 있어서 비로소 세련도 되고 성장도 한다. 한국사상이라 하여 태고적부터 완성 고정되어 있어서 마치 땅속에 파묻힌 보석과도 같이 어디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그대로 찬연한 빛을 발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함도 경계할 일이다. 설사 그러한 보석과 같은 것이 있다 치더라도 그것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요, 또 갈아야 광채가 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의 살 길을 찾는 데 있다면 한국의 사상은 우리가 살아 나아갈 앞길을 밝혀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사상이란 회구懷舊적인 추억에 그의 사명이 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에 새 힘을 넣어 주는 안내의 몫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길을 개척할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길을 개척하여야 하며 걸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우리로서의 확호불발한 사상이 먼저 뚜렷하게 서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한국의 정치적 독립, 경제적 독립은 누구나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신적인 밑받침이 될 사상적 독립을 위하여는 그렇게도 대범한 것일까. 한국의 지도 이념이 떠난 정치 투쟁도 경제 계획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거니와 이 한국의 지도 이념이란 딴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사상이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정신을 이름이다.
2.
한국 사람이 겪어온 고난 극복의 역사가 중첩한 파란과 곡절로 아로새겨질 적마다 한국의 사상은 폭이 넓어지고 깊이를 더하여 왔다. 따라서 섣부른 일면적 고찰로써 한국사상 전체의 본령을 파악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인 줄 안다. 보통 말하기를 한국 사람은 대체로 현세적 실제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고 그를 즐기려 하며, 중시하려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이 본래 그랬음직한 일이요, 근세에 와서는 유교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가령 같은 불교에 있어서도 삼국시대의 유물로서 오히려 미륵반가상의 절묘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거나, 신라말엽에 있어서는 저 궁예가 특히 미륵불의 현신임을 자칭하였던 것 같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륵은 미래불이다.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사상 속에는 미래와의 관련에 있어서 현재를 파악하려는 태도도 있었던 것같이 짐작된다.
현재의 진의는 한갓 현재에만 얽매임으로써 살려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나 과거의 파악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태도 여하가 다시없이 중요한 몫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과거의 역사와 당면의 사실은 사람의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간 날에 저지른 일을 후회하기도 하며 목전에 봉착한 난관 앞에 무력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과거나 현재의 의의가 언제나 일의적으로 이미 결정지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에 찬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써 현재가 긴장된 건설로 맥진驀進할 때 비로소 그의 과거는 새로운 뜻을 가지고 빛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의 과거가 살려져 현재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둘도 없는 힘이 되기도 한다. 건설적 의욕에 불타고 있는 청년의 맑은 눈동자에는 모든 것이 그 이상의 실현을 자극하며 추진시키는 귀중한 계기로 보여질 것이 아닌가.
과거에서 무엇을 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는 미래에 대한 태도가 결정한다. 보통은 과거가 그대로 밀려 내려와 현재가 되고 또 미래가 된다고 하나 인간의 능동적 건설적인 행운은 그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또는 고려시대의 역사에서 무엇을 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는 현재의 우리의 태도에 달렸고, 이 현재의 우리의 태도는 미래에 대한 건설적 의욕에 의하여 제약되는 것이다.
한국은 종래에 이상하게도 주로 소극적인 은사隱士의 나라, 더 나아가 애상哀傷의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고려자기의 형태나 또는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의 빛깔과 문양이 그렇다고도 하며 애조를 띤 민요의 멜로디가 또한 그렇다고도 한다. 대륙의 우렁참도 없고 섬나라의 현란함도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하늘에 호소라도 하는 듯한 애달픈 조의 멜로디가 그의 특색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는 사람 자신이 너무나 애상적인 견지에서 미래에 대한 소극적 건설 의욕이 세차지 못할 때에 보여지는 일면인 줄 안다. 고구려 고분 내의 벽화들을 보라. 석굴암의 석가상을 보라. 거기 어디서 그런 소극적인 것, 더구나 애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청룡이나 현무의 그림에서 약동하는 선 속에는 오히려 웅혼한 기상과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석가상의 원만구족한 상호相好에는 누구나 믿음직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탄압에 시달린 일제 치하에 있어서 유행되어 온 민요의 멜로디가 그대로 한국적인 정조를 대표한다고 하여도 좋은 것인지 나는 의문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민요란 대개가 애조를 띠는 것임직도 한 일이나, 신라나 고구려의 서울 거리에서, 그러한 애조를 띤 노래가 흘러 나오곤 하였을까 자못 의심되는 바다. 을지문덕의 시구에는 적을 삼키고도 남는 기개가 넘쳐 있거니와 대자연 속에 노닐은 화랑도들의 입에서 그처럼 나약한 애상의 노래가 흘러 나왔을 리 만무하다.
한국은 반도이기 때문에 대륙과 섬나라의 양 틈에서 고난의 역사를 마치 운명적으로 받아 온 것처럼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틀림없는 판단이라면 장래도 그러한 운명을 걸머진 채로 같은 고난의 역사만을 되풀이하여야 된다는 말인가. 도대체 반도니까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끌어 내진 말인가. 저 희랍의 반도를 생각해 보라. 이태리반도는 어떠하였던가. 고대희랍의 문화, 문예부흥기의 문화는 반도 아닌 어디서 생겨났던 것인가. 반도니까 그저 소극적인 운명을 걸머져야 된다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반도니까 오히려 종합적인 새로운 문화의 꽃이 필 수도 있고 반도니까 대륙도 섬나라도 포섭할 운명을 가질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건설적 기백과 계획에서 과거의 역사를 보는 눈을 기르자. 우리는 우리를 너무나 얕잡아 보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바로 우리의 것을 살려서 적극적으로 다룰 줄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허장성세가 아니다. 왜곡되었던 사실史實을 널리 바로 보자 함이요, 부질없는 편견을 제거하자는 것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한국사상이라야 불교사상 아니면 유교사상일 것이요, 불교나 유교가 모두 남의 것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그와 유사한 외국인의 질문에 한국유학생들이 가끔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논법으로 일관한다면 서양의 여러 문명국에는 하나의 문화밖에 없고 아마도 이렇다 할 각자의 독자성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 서양문화라는 것의 독자성마저 엄밀하게는 없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동양에서 시작된 종교이겠기 때문이다. 희랍사상까지도 동양사상의 영향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 단언하기 힘들 것인 줄 안다. 동양문화의 특색이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람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반대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만 불교나 유교가 외방外邦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여 사상적인 독자성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한국의 불교는 선禪을 위주하였으나 선교를 겸한 조계종이 전체적인 주류를 형성하여 왔고 그와 관련하여 지눌과 같은 창의적이며 총혜聰慧한 고승을 낳았다. 우리는 이 지눌의 사상을 탐구천명함으로써 한국불교사상이 어떤 점에 있어서 그의 특색을 발휘하고 있는가가 밝혀질 것이 기대된다. 또 보통으로 말하기를 이조는 유학도들의 공리공론으로 망하였다고 하나 한 예로서 사단칠정론 같은 것은 오히려 세계철학사를 빛낼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지언정 무의미하다거나 더구나 해를 끼쳤다고 함은 지나친 혹평이 아닐 수 없다. 사단칠정론에 있어서와 같이 하나의 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수세기 동안이나 뒤를 이어 끊임없이 줄기차게 논의되어 왔음은 아마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보지 못할 일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한국 사람의 강인한 사색벽의 발로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의 철학적 두뇌와 역량을 여실하게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리공론 같이 보여지는 사단칠정론을 다시 계승하여 현대철학적 견지에서 좀더 철저히 연구 전개시킬 필요조차 있다고 나는 느끼곤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널리 알려지는 날 세계 사람들은 한국에 그처럼 정치精緻한 철학적 이론이 있었음에 새삼스러이 놀랄 것이다. 그 총명한 머리를 가진 한국 사람으로서 독자적인 사상이 없었을 리 없고 더구나 차후로 확립하지 않고는 못 견딜 일이다.
여기서 백 걸음 천 걸음을 양보하여 우리의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에는 독자성이 없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한국에는 한국에서 생겨난 천도교라는 종교가 있지 않은가. 인내천의 종지宗旨는 현대의 그 어느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갓된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보다 철저한 윤리적 종교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종교다. 현대 사상은 휴머니티를 자주 문제 삼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외친다. 그러나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서보다 더 어디서 인간의 존엄성을 고조하는 사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면 전통적인 기독교인은 깜짝 놀랄 일이다. 그보다도 더 큰 죄악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특색이 있다. 그러니까 서학 아닌 동학이었다. 논자는 말할는지도 모른다. 천도교는 유불선 삼교의 영향 밑에 이를 종합한 것뿐이라고. 좋다. 그러나 그 어느 사상 치고 유래를 따지면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곤 절대로 없을 것이다. 가끔 독창적이라 하여 마치 하늘에서라도 떨어진 것같이 말하는 일도 없지 않으나 알고 보면 이미 어떤 사상과 반드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들 자체도 모두 그의 전신이라 할까 오히려 간단하다 할 수 없는 유서由緖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그 영향 밑에 서면서 거기에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들이라 함이 온당할 것이다. 천도교도 여러 사상의 영향 밑에 서면서 인내천이라는 면을 강조하여 한국 사람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의 독자적인 사상이라 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논자는 또 아직도 사상적으로 충분히 이론화하는 데까지 전개되지 못하였음을 탓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바울 외에도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기타의 출현이 필요하였고 불교에는 아난의 총명은 물론 용수 기타의 이론이 필요하였고 유교에는 자사子思, 맹자, 내려와서 한유漢儒, 송유에 의한 전승 내지 철학화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천도교도 이후 수세기를 내려가는 동안에 그와 같은 역사를 가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덮어놓고 한국에 독자적인 사상이 없다 함은 스스로 하는 어리석은 소이밖에 안 될 것이다.
한국에는 실학사상과 더불어 서양의 과학이 처음으로 수입되었었다. 과학은 오늘도 서양 것을 배우기에 바쁘다. 무엇보다도 시급히 배워야 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에게 과학적 창의성이 본래 없었던 것이 아님은 국민학교 학생들도 잘 안다. 거북선이나 활자의 발명을 모를 어린이가 없겠기 때문이다. 정책이나 기타의 이유로 해서 이러한 면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우리 한국 사람이 과학적 소질이 본래부터 없었다 하여 좋을 리 없다. 소질이 없는 바 아니요 사상이 고정 완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미래의 건설을 꾀하는 견지에서 새싹을 찾아내어 다시금 북돋우어 줌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 소질에 있어서 그 능력에 있어서 무엇이 외국 사람에 비하여 손색이 있단 말인가. 널리 배우는 동시에 우리를 알고 우리를 찾자. 한국의 앞날이 그대들과 더불어 희망에 차 있듯이 한국의 사상은 멀지 않아 뚜렷한 의의를 나타내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3.
독자 중에 나의 이 모든 논조가 그대로 미덥지 못하게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로 말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묻고 싶다. 이 글을 읽고 그에 대하여 의아한 생각이나마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글을 알며 그에 의하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한국 사람은 한국 말로 말하며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영어도 좋다. 불어, 독어, 중국어도 좋다. 알면 알수록 좋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을 소통하여 친선을 도모하며 또는 무엇을 배우기 위한 것이요 한국 사람이 영미 사람이 되며 불란서, 독일, 중국 사람이 되어 버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국 말로 말을 하며 생각하는 이상 우리는 한국 말이 가지는 특색을 무시하고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한국 사람의 사고 방식은 우리 말의 구조가 이미 이를 제약하고 있다. 우리의 말이 일조일석에 인공적으로 부자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님과 같이 우리의 사고 방식은 아득한 옛날부터 장구한 우리 역사를 통하여 세련된 나머지에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한국사상은 한국적 사고 방식을 떠나지 않을 수 없고 그 독특한 사고 방식은 우리의 말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한국 말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적인 사고 방식은 거기에 엄연히 있는 것이요 따라서 한국사상은 없을 수 없다. 한국사상이라는 말에 대하여 무엇인지 석연치 못한 감을 그래도 가지는 사람에게 나는 한국 말이 외국 말과 같은가, 따라서 사고 방식이 같은가를 묻고 싶다. 사고 방식을 초월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꿈에서나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꿈 속의 잠꼬대도 우리의 말로 하지 않는가.
위에서 나는 우리의 생활을 떠나서 우리의 사상을 생각할 수 없다 하였거니와 인간 생활의 기쁨과 슬픔, 한걸음 나아가 이론적인 추리에 이르기까지 말을 매개로 표현되어 전하여질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하여 더 깊어도 지고 진전도 된다. <말은 존재의 집>이라든지 <말 없이 세계도 있을 수 없다>든지 하는 식의 현대철학적 표현도 일리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 말에 의하여 사고하며, 그 사고 방식의 특색이 다름 아닌 사상의 특색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상을 그의 토대인 생활과 매개 연결시키는 몫을 하는 것이 곧 말이다. 그러므로 한국사상을 연구하려면 한국 말부터 연구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일 것도 같다. 어휘의 정리와 비교, 문법상 구조의 차이 등이 밝혀질수록 우리의 사상적 특색도 밝혀질 것이다. 우리말의 특색을 알기 위하여서도 여러 외국어를 배워 비교 연구함은 둘도 없이 중요한 일이다. 나를 알기 위하여 남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외래어의 영향을 한국 말이 받지 않았다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어, 불어, 독어로 된 책을 아무리 독파하여도 그것만으로 우리의 한국사상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의의를 가졌고 또 불가결한 일이어서 널리 지식이나 자극의 섭취가 필요함은 인정하나 그것이 한국 말을 통하여 소화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영미사상, 불란서, 독일 사상은 될지언정 우리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없다. 남이 아무리 좋다는 사상이라도 그것이 한낱 수입품에 그치어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말로 소화 흡수되지 못한 채로 그저 껍질 외양만 흉내낼 때 어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몸짓을 하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꼴이란 넌센스라기보다도 정녕코 가엾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무슨 활로가 발견될 것이랴. 자기 나라 말을 존중하여 아낄 줄 알고 그것을 잘 살리어 쓸 줄 아는 곳에 독특한 사상도 싹트며 빛을 발하게 됨을 우리는 외국의 사상사에서도 본다. 중세 이래 나전어羅甸語[각주:1]로써만 통하던 학술용어를 재빨리 모국어로 고쳐 쓰는 선견의 명明을 가졌던 나라가 근대사상을 리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영국이 그러하였고 독일, 불란서가 그러하였다. 이러한 용어에 관한 점에 있어서도 천도교는 그의 일부 경전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나는 우리 국어학에 대한 문외한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한국사상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야를 차지함이 마땅할 것 같아 여기에 언급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 나의 서론적인 구상으로서의 이 시론은, 한국사상연구는 어떠한 태도로 그리고 어떠한 범위에 있어서 다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을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 데 불과하다. 그 외에도 우리의 사상이 우리의 생활과 불가분리인 관계를 가진 것이 사실인 만큼 경제적인 조건 또는 법률 · 정치적인 제도 등등을 포함한 일반 문사 전반에 걸친 연구가 또한 보조를 같이하여 병행하여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 점 저런 점 등을 고려할수록 한국사상의 연구는 단시일에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성과를 기대하기 곤란할 줄 안다. 분과별로 각기 전문을 따라 담당한 부문에 있어서 우선 자료의 수집과 정리로부터 꾸준한 노력이 요구되는 일인 줄 안다. 그 단계를 밟고 나서 비로소 종합적인 결론이 점차로 가능할 것이요, 섣부른 독단적 억측을 서둘지 않음이 진실된 태도일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도 묵묵히 정진하는 선구자가 있어야 할 일이거니와 나는 그런 분들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시설과 편의가 구비된 호시기의 도래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막연하기 끝이 없을 노릇이다. 다행으로 근자에 이르러 각 대학 또는 특설 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연구의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현상이 보임은 진실로 동경同慶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상의 연구는 그와 아울러 뜻을 같이하는 청년 학구學究들의 발분과 협동적인 노고로써만 가치 있는 성과를 거둘 것이요, 그것이 동시에 우리의 새 세대의 앞길을 밝혀 주는 등대의 몫을 다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한국사상은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요, 오늘의 이 한국에 태어난 우리로서 세계사상사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이 외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급적이고 위계적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적은 수의 개인들만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아우성 쳤던 것은 학문은 엄격한 사실 위에만 바탕해야 한다고 보았던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와 같은 판연한 사회과학자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인민에 의한 통치는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하고, 아이러니를 섞지 않고 “국민” “인민”을 떠벌리는 학자는 얼치기,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대의제 운운은 다독거리는 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 대표자들은 금권주의를 형성할 뿐이다.
자유주의적이거나 인민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란 과두제oligarchy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추구적인 태도에는 엘리티시즘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붙었다. 파시즘의 황야를 살았던 아롱은 이 과두제의 사실에 입각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언파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수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제임스 번햄을 따라서 저 현대 사회학의 거두들을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희망(규범)이나 환상(이념)과 같은 콩깍지가 아니라 까맣게 절망스러운 사실에 바탕해야 한다는 지론은 국제정치학에서는 현실주의realism라고 불린다.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권모술수의 대명사이다. 정치는 도덕에 절대적으로 대립되어 있으며 대중은 뇌동하고 양육받기를 주저없이 원한다고 이 핏발 선 눈의 인본주의자는 갈파하였다. 공화국은 온화하고 나약한 자들의 펑퍼짐한 천국이 되기 십상인데, 로마 공화국에서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귀족과 평민들의 발광적 투쟁과 충돌이야말로 자유를 확보하고 맹렬하고 심오한 창조정신을 고양하는 첩경이 되었다고 그는 『로마사논고』에서 칭송해 마지 않았다.
아롱은 이 피렌체인에게 촌철의 진실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체제regime는 권력을 향한 투쟁에 의해서 각인되는 것이었고, 지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늘 소수일 것이었다. 그에게, 체제란 투쟁과 분규에 대처하는 상이한 방식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가차없이 산문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전체주의는 투쟁을 위협으로 간주해서 주류 이데올로기와 동떨어진 모든 견해를 억압하였고, 자유민주주의는 투쟁을 인간의 근원적 조건으로 간주하여서 그 평화적인 표현을 제도화하는데 힘쓰는 것이었다.
그러하되, 그것은 부패의 문제, 과두제적인 권력의 집중의 문제, 정당들의 데마고기와 정치인들의 무능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력이 돌아간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지배 엘리트가 엄존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제 사이의 간극은 아롱으로 하여금 냉소주의와 사회학을 넘어서는 판단과 정치철학과 정치적 사회학으로, 일당독재와 “통합된 엘리트”에 대립하는 입헌주의와 “분열된 엘리트”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분쟁적 다원주의야말로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도사린 파시즘에의 전율을 계속 흡수해줄 것이었다.
헛말은 쓰레기처럼 넘쳐나고, 세상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해져 간다. 터무니없이 지속된 저금리 시대와 지나친 유동성은 황홀경 같은 환각들에 불을 붙였다. 소비자대상 기술들의 난무는 볼썽사나운 스타트업 대표들 몇몇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부채질 했다. 그 한편으로, 일론 머스크 같은 자본가들은 “워크woke”한 “관리자”들을 향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밑으로 가라앉은 쪼다들의 반항력을 일론 머스크들은 “문화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감쪽같이 횡령해선 관리계급이 점유한 경제구조 못지않은 과두제를 이루었다.
그 횡령의 방법을 규명하는 법은 불가능한 이상을 알(지 못했)던 파레토와 같은 우익의 맹장의 저서에 있다고 아롱의 “마키아벨리적” 글들은 증언하고 있다. (끝)
본문
지난번 강의에서 나는 소비에트 유형과 서방 유형의 두 산업사회에서의 지배적 카테고리에 대한 이론을 대강 설명했습니다. 그 이론은 다음 세 가지 주요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요 카테고리들은 어디에서나 발견됩니다. 정치적 · 경제적 조직이 어떠하든 간에, 생산수단의 관리자들, 행정가들, 정치적 지도자들, 대중의 선도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사회는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없이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지배적 카테고리들이 단일 그룹으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는가, 아니면 서로 분리되어 어느 정도 공개적인 경쟁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 두 가지 이상적 유형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3. 세번째 명제는 분석 가운데 함축되어 있었는데, 나는 오늘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어떤 분리는 찬양되고 또 어떤 것은 저주됩니다. 좌파가 비난하는 지배적 카테고리의 분리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인 관리인들과 공동체들의 대표인 관료들 사이의 분리입니다. 이 분리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며, 그 명칭으로 혐오받는 것의 양상을 형성합니다. [각주:2] 순수한 상태의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동시에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인 사회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이런 형태 하에서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제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이 이론상 공동체 전체의 대리인으로서 국가 관리와 구별되지 않습니다.[각주:3]
반면에 서방사회에서의 세속적 권력과 정신적 권력의 분리, 또는 지식인 및 대중의 선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분리는 찬양을 받습니다. 이 분리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자유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이 됩니다.[각주:4]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표명하고 그것을 강제할 권리가 있다면,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감추어지는 영역들은 토론에서 제외됩니다. 사람들은 자본가와 관료 사이의 분리는 비난하고, 정치인과 지식인 사이의 분리는 찬양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적 분리가 사람들이 애착을 갖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분리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닙니까?[각주:5]
나는 이 문제를 다시 취급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은 이 강의의 출발점에서 표명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우선 다루고자 합니다.
1. 각 사회를 그 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하여 특징지을 수 있는가?
2. 여러 산업사회의 상층 계급들에 관한 경험적 비교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가?
3. 지배계급이란 개념 자체가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라는 반대 명제에 의해 두 지배계급의 대조를 사람들이 어떻게 공식화할 수 있었습니까?[각주:6]역사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고찰로부터 마르크스의 생각 속에 이론이 탄생했습니다.[각주:7]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생산 관계가 봉건사회의 가운데에서 형성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각주:8] 앙시엥레짐의 내부에서 일정한 시기에 형성된 부르주아지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지배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옛 귀족계급을 추방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생산관계가 옛 틀의 내부에서 이미 성숙했을 때에만 정치적 혁명이 가능합니다. 경제적 성장이 그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는, 생산력의 발전을 구속하는 계급을 제거하는 마지막 행위를 수행하는 일만이 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계급은 경제 자체의 뒤떨어진 시대착오적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관계가 전에 부르주아지의 귀족 계급aristocratie에 대한 관계처럼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인 차이를 주목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귀족 계급noblesse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는 특권 소수층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는 비특권자들의 대중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과 앙시엥레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대립을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확인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시사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특권 소수층이 아니라 사회의 거대한 대중을 형성하기 때문에, 혁명을 수행한 다음 다른 소수층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지배하는 소수층을 소멸시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20세기의 역사적 현실에 의해 판단하건대, 소비에트 혁명은 그런 관점에서 이전의 혁명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그룹은 거대한 대중과 혼동되지 않으며, 그 그룹은 인민의 운동 덕분으로 자리잡은 하나의 새로운 과도 정치oligarchie를 형성합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은 부르주아지와 귀족계급의 대립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철학의 차이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존재했던 철학의 차이보다 더 약합니다.[각주:9] 일차적인 접근에서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명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봅시다. 20세기를 가득 채웠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비마르크스주의자들, 소비에트 사회와 서방 사회 사이의 강렬한 논쟁만을 국한해 본다면, 존재의 개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정치적 갈등은 진정시킬 수 없을 만하지만, 사고방식은 그 정도로 상이하지 않습니다. 옛 귀족계급의 기원은 전사들의 계급이었습니다. 군주 정치에 의해 길들여진 후에도 그 계급은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귀족계급은 노동이란 상류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으며 영웅주의와 한가loisirs의 가치관을 신봉했습니다. 활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철학과 권력을 장악한 마르크시스트들의 철학을 대조해 보십시오. 논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대립이 아니라 목표와 야심의 공통성인 것입니다. 양편을 막론하고 그들은 자연자원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며,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고자 하며, 양자가 다같이 일하지 않는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그룹의 각각은 이 원칙들을 상이한 방식에 따라 적용하는 것입니다. 두 철학이 다 노동과 풍요와 진보를 앙양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두 철학 전체가 사회의 확고부동한 표상을 이루는 앙시엥레짐과는 대립됩니다.[각주:10] 계층 질서는 어느 정도 운명에 의해서 부과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은 유지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르주아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 질서란 끊임없이 경신되어야 한다고 단언하며, 고위의 기능들은 그것에 가장 합당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기를 바랍니다. 고위의 기능에 가장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정의定義는 사회에 따라 변하는데, 사람의 선택은 덜 변합니다.[각주:11] 부르주아지의 철학과 귀족계급의 철학은 두 개의 상이한 양식genres에 속하는 데 반하여, 여기서는 동일한 양식genre의 두 종류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두 철학 사이의 진정될 수 없는 싸움은 결국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선전propagande의 궤변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싸움은 적은 수의 내깃거리를 포함하고 있을 뿐입니다.[각주:12] 우선 산업 발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사회의 생산성 증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빠르다고 은밀히 변호합니다. 다음으로 어떤 체제가 개인의 복지bien-être에 더 유리하냐 하는 문제입니다.[각주:13] 두 진영이 다같이 암암리에 동일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고, 주민 전체의 생활수준을 높인다는 동일한 목적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토론은 합리적 논거에 의존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것이 정의正義에 가장 합치되며, 비경제적 가치, 예를 들어 문화의 가치에 더 유리하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논쟁의 공식적 내깃거리, 즉 소유의 규범statut을 제외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고전적 내깃거리는 사실상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실적으로 보아 그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의 거대한 규모의 집중에 관해 말하자면, 소유의 의미 자체가 변했습니다. 미국 스타일의 대기업이나 소비에트 스타일의 대기업 사이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방법에 따라야 생산이 가장 빨리 증가되는가, 어떤 체제에서 분배가 가장 공정한가, 어떤 사회가 개인의 복지와 지적 자유에 가장 유리한가를 아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두 사회의 상층 계급에 관한 경험적 비교라는 두번째 문제로 넘어갑시다. 어떤 의미에서 서방 사회는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릴 만하고 소련 사회는 그렇게 불릴 수 없는 것입니까?
부르주아지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용어는 우선 귀족 계급이라는 용어와 대조되었고, 지금은 농부와 노동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인 인민peuple이란 용어에 대조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조는 오늘날 아직도 의미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지역, 예를 들어 서부 지역에서는 앙시엥레짐의 잔존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각 서방 사회의 특징의 하나는 경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한 사람들과 옛 귀족계급 사이에 설정된 관계라고 말할 수조차 있습니다.[각주:14]
영국은 귀족계급과 경제의 지도적 계층의 대표자들 사이의 혼합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에 의해 특징지어져 있었는데, 몽테스키외는 벌써 그 사실에 놀란 바 있었습니다. 책의 페이지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 몽테스키외는 때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귀족계급이 전혀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귀족계급은 농업과 공업의 발전에서 행하는 역할의 덕택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각주:15]반면에 프랑스의 귀족 계급은 얼마간의 시도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경우는 경제적 활동이 상류사회의 인사에게는 부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인 이외의 사람들이 즐겨 귀족계급이라고 부르고, 영국인들 자신은 중산계급middle class이라고 명명하는 혼합된 지배계급을 영국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르주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 계급은 옛 귀족계급의 생활양식으로부터 나온 생활양식의 한 부분을 간직해 왔습니다.
반면에 미국에는 귀족계급의 자취가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귀족계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남부에서 대농장주들이 어느 정도 귀족적인 스타일의 사회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남북전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프러시아의 귀족계급이 본질적으로 공공적인 직무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귀족계급이 1914년의 전쟁 때에도 군대의 상층부 대부분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계급은 우리 시대에까지도 국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해왔습니다.
귀족들이 역사적으로 차지해온 위치에 따라 유럽의 국가들을 비교하는 분석도 흥미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폴란드와 헝가리 두 나라는 중부 유럽에 있는 한 귀족계급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맨처음으로 자신의 귀족계급을 상실한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입니다. 생활양식과 가치관의 서열에 나타나는 많은 차이가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일체의 귀족적 잔재가 강력히 제거되었지만,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는 이 현상이 두 사회의 비교에서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옛 귀족계급의 생존자들은 위신에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힘과 영향력은 점점 더 상실해 갑니다. 주민은 도시에 집중됩니다. 그런데 귀족계급은 대토지를 소유하는 데 따라서만 현실적으로 지배적인 사회적 위치를 유지합니다. 토지 소유의 덕분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마지막 두 귀족 계급인 헝가리와 프러시아의 귀족계급은 2차 세계대전 후에 뿌리가 뽑히고 파멸되었습니다. 최후의 귀족들은 서유럽의 수도에서 레스토랑의 만찬을 장식하지만, 그들은 산업사회의 전형을 특징짓지는 않습니다.[각주:16]
이제 부르주아지 (존재양식과 생활양식으로서의)와 농부 내지 노동자들의 대립을 고찰해 봅시다. 알랭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며, 재료와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않는 사람이며,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만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는 별다른 예외 없이 부르주아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모스크바 대학의 계단교실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똑같은 제안을 할 위험이 있음을 나는 덧붙여 두겠습니다. 아마도 그곳 학생들의 과거와 연관하여 보면 예외가 더 많이 있겠지만, 소비에트 사회가 오래될수록 그 예외는 줄어드는 경향을 띨 것입니다. 부르주아가 단순히 지적 또는 반지半知적 기능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소비에트 사회건 자본주의 사회건 간에 모든 산업사회는 부르주아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들에 의해 관리되며, 부르주아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입니다.[각주:17] 어떤 유명한 작가가 도발과 수치심을 곁들여 <나는 부르주아다>라고 외칠 때, 그가 소비에트 시민이라 할지라도 그는 동일한 고백을 반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규율을 지킨다는 조건하에서라면, 소비에트의 대작가는 서방의 대작가보다 우월한 특권을 누립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사회주의자인 앙리 드 만Henri de Man에게서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꿈꾸는 좋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몇 시간, 일년에 얼마동안, 그들 생애의 몇 년 간 공장에 일하러 갈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동질적이 될 것이고, 노동자와 관리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대조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한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날까지는, 알랭과 같은 의미로서의 부르주아의 개념, 즉 비육체 노동자는 서방 사회만의 특징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산업사회에서 (그런 의미로서의) 부르주아가 발견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육체적 노동자들의 대단히 방대한 카테고리는 서로 상당히 거리가 먼 다양한 그룹들로 세분됩니다. 그 그룹들은 수입의 차이와 동시에 직업의 성격에 따라 경계가 정해집니다. 대기업의 지배인과 중등학교 교사 사이에는 봉급의 차이와 생활방식의 거리가 대단한 것입니다.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통일된 계급이 아닙니다. 행위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위자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정치학 교수가 장관들을 모르며, 실제로 어떻게 결정이 취해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한 작가가 우리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한 사람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자는 일생을 통해 자기가 단 한 달 또는 단 하루에 만난 만큼도 정치인들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한 논쟁을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각주:18] 여기에서 철학자는 하나의 순수성의 증거를 내보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각주:19] 그는 정치에 관한 직접적 지식이 없이 정치를 다루는 위험을 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수입의 불평등은 여러 구별 가운데 하나의 기준에 불과합니다.[각주:20] 부르주아가 봉급생활자냐 독립적 생활자냐에 따른 다른 구별들이 있습니다. 이때 독립성이란 대단한 중요성을 갖습니다.[각주:21] 의사의 직업상태에 관해서 독립생활이냐 봉급생활이냐 하는 전형적인 논쟁으로 신문들은 가득 차 있습니다. 논쟁에서는 놀라운 논거들을 사용합니다. 어떤 의사는 의술이란 하나의 성직이라고 선언하며, 환자와의 직접적 대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진료비를 결정할 자유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논법들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유업으로 남고자 하는 직업은 동시에 도덕성의 논거, 경제적 논거, 진료당 수천 프랑을 받는 성직성 등에 의하여 직업의 규준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고찰들이 문제 자체를 일도양단하겠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다른 구별은 직업의 위신prestige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보르도, 르아브르, 스트라스부르 같은 지역적 범위에서의 성층 구조는 활동의 화려함이나 가문의 유래에 따라 높고 낮은 수준에 위치하는 부르주아지의 여러 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방 유형의 부르주아지와 소비에트 유형의 부르주아지를 근본적으로 대립시키는 단 하나의 방법만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앙드레 지그프리드André Siegfried 씨의 정의를 사용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각주:22] 부르주아는 본질적으로 예비금을 가지고 있어 그의 일상생활이 자기의 노동 수입에 의존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덧붙이는 것은 없습니다. 소련 같은 나라에서 국가화된 상층계급이 서방의 상층계급과 동일한 상황을 가질 수는 없다는 우리의 출발점의 생각으로 그 차이는 우리를 다시 이끌어갑니다. 한편에서는 자본의 수입이 받는 봉급에 덧붙여지는데, 소비에트 편에서는 많은 유산을 축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소비에트 유형의 체제에서도, 비육체적 직업에 속하는 사람들의 그룹 내부에 구별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서방사회에서 볼 수 있는 구별과 비견될 만합니다. 일시적으로 볼 때는 대중과 특권자 사이의 거리가 서방에서보다 동방에서 더 큰 것처럼 보입니다.[각주:23] 소비에트의 비숙련 노동자의 생활방식과 기업인의 지배인의 생활방식은 미국에서의 양자의 차이보다 더 현격합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반드시 체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두 사회의 부의 차이에 기인될 수 있습니다. 1세기 전에는 미국 · 영국 · 프랑스에서의 수입의 격차 및 생활방식의 격차가 오늘날보다 더 현저했습니다. 생활방식의 차이는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완화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계는 서방 사회에서보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더 분명합니다. 소련에서 점점 숫자가 늘어나는 중간 간부들 내지 지도자들이 이제는 계급을 나타내는 표지를 단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광산에서는 일꾼들, 노동자들, 십장들, (카테고리에 따라 여러 지위로 된) 기사들의 위계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으며, 각자의 위치가 분명하고 잘 인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아마도 구별이 더 쉽사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별은 재산이 아니라 기능과 연대적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서방의 위계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소비에트의 위계는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한쪽에서는 재산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해주고, 다른 쪽에서는 반대로 지위가 재산을 확보해주는 것으로 그들의 눈에 비치기 때문입니다. 소련에서 국가 기업의 지배인은 높은 봉급을 받지만, 그러나 그는 커다란 책임을 맡고, 필요불가결한 직무를 수행하며, 공동체에 결정적인 봉사를 행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그가 기여하는 바의 반대급부로서 그가 갖는 특권을 여론이 수락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서방 사회와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문제될 때에는, 개인에게 그의 위치를 확보해주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재산이나 또는 그의 부모가 소유했던 재산이라는 인상을 여론이 흔히 갖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공동체에 봉사하기 때문에 부유해지고, 다른 쪽에서는 부유하기 때문에 우월한 지위를 얻는다는 것이 에피날Épinal의 기술입니다. 물론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합니다.
서방 사회에서도 역시 많은 수의 특권자들이 그들이 가치 덕분에 그들의 상황을 얻게 됩니다.[각주:24] 특권자들이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체제는 오래 전에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각 사회에 고유한 선별제도가 갖는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은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의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방법이 소련에서 더 나은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 나은지를 나는 여러분에게 말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경쟁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선택은 거의 소규모 기업에서만 적용됩니다. 제너럴 모터스 같은 회사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행정적 내지 관료적 조직의 내부에서 승진이 행해집니다. 이론상으로는 소련에서도 선별이 같은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 승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지, 판단하는 사람들이 공정한지, 지적 정통성이나 이단성의 정도가 개입되는지 등등을 알아보아야 할 일이 남습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이점의 하나는 최상의 사람들을 찾는 일이 서방 사회에서보다 더 넓은 계층에 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사회적 유동성이 더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의 양상을 얘기하는 것을 끝마치기 위하여, 양 진영의 지배계급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존재방식 사이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여러가지 비교를 몇 마디로 지적합시다. 예를 들어 학자들savants의 상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과학자들les scientifiques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비에트 사회에서 더 우월한 상황을 누리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카데미 회원, 전문가, 물리학자는 임금계층의 최상층부에 위치합니다. 재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생산수단의 관리자들 아래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는 위세는 대단합니다. 반면에 성공한 작가의 상황은 이점avantages과 더불어 독특한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의 수입은 때때로 연간 수십만 루블에까지 이르지만, 그는 서방사회에서는 알지 못하는 표현과 창조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한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생산수단의 관리자들에 관해서는, 유일한 위계를 갖는다는 것이 소련의 독자성입니다.[각주:25] 그 유일한 위계는 권위, 수입, 위신의 동시적인 계단을 가지고 소기업의 지도자로부터 정부부처의 국장에까지 나아갑니다.[각주:26]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적어도 수입에 관한 한 관계가 상이합니다. 국영 회사들을 통할하는 정부부처의 국장이 그 회사 지배인들보다 수입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관리자들과 행정가들의 유일한 위계 대신에 서방사회는 두 개의 위계를 내포합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수입이 상대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관료들의 위계와, 봉급의 폭이 더 벌어져 있는 사기업 내지 공공기업의 위계가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 두 상위계층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정치 지도자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련 · 프랑스 · 영국 · 미국에서 통치하는 사람들의 인간형과 생활양식에 관한 비교가 가장 교훈적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민주 정당과 의회 정치를 중개로 하여 길을 연 현재의 우리 국회의장[각주:27] 같은 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한 정당의 제일서기나 서방의 사회당과는 거의 비슷한 점이 없는 정당을 관리하는 흐루시초프 같은 사람의 존재양식, 성공방법, 사고방식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각주:28]아마도 우리는 계략과 웅변에 능한 사람과 난폭함을 수반하기 쉬운 행동인 사이의 마키아벨리적 반대명제를 막연히 상기시킬 대조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생활방식의 비교를 더 밀고 나가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사생활이 공적 생활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고위층 인사의 가족관계는 완전한 비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기자들이 X씨의 부인과 최고회의 간부회 임원인 어떤 다른 사람 사이의 친척관계를 창작해내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특징적 창작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비에트 지배계급의 사회생활은 서방의 관습에 비하여 놀라운 스타일에 속합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차이인가, 아니면 모체인 볼셰비키당의 관습 (심각한 일과 정치는 사적인 사항과 연루될 수 없다는)을 간직한 계급의 혁명적 과거에 기인하는 단순히 과도기적인 차이인가? 어쩌면 양 진영에서 성공하는 인간형의 대조가 결정적인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프랑스의 체제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 다른 무엇보다도 성공을 확보해주는 자질입니다. 그것은 전혀 경멸할 만한 자질은 아니지만, 지적인 우수성이나 의지나 단호함과는 다른 자질입니다. 의회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동류에 대한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의원 상호간의 행동을 예견하는 정말로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회에서 어떤 후보자가 몇 표를 획득할 것인지를 세 표 정도의 오차로 계산해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직감 · 계략 · 타협의 기술을 증명해 보여주는 전혀경멸할점이아닌능력입니다.[각주:29]유일 정당 속에서 성공을 확보해 주는 것은 그와 똑같은 능력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서는 우월한 행정능력, 특히 의지와 강인한 지탱능력, 결정의 감각과 어쩌면 난폭성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체의 일반화는 어렵습니다. 어떠한 선별의 체계도 권력이 최상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보장하지는 못하며, 또 어떤 것도 항상 훌륭한 결과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체제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면밀히 연구하면 성공이나 실패의 불변하는 인자가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론에 합치하지 않는 경우들과, 성공하지 못해야 했을 사람들이 성공한 경우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존재합니다. 정치에서는 독단론을 삼가야만 합니다. 모든 체제는 놀라운 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문제, 즉 마키아벨리적 의미로서의 지배계급의 문제에 관해 몇 마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마르크스적 이론은 생산수단의 관리인들이나 소유자들이 그 자체로서 소수 지배층을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사擬似 이론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상의 명제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단정에 귀착합니다. 서방 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이 현실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신화적 형태로서는, 국회의원과 통치자들을 조종하는 월스트리트나 시티City라는 표상에 귀착됩니다.[각주:30]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사실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그룹이 지배계급을 형성한다고 단언하는 대신에, 객관적인 분석에 의하여, 여러 서방 사회에서 그 그룹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그 그룹은 사실상 어느 정도까지 공동체 전체를 지배하거나 통치하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각주:31]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그들 자신이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기능은 귀족이나 선량들이 맡아 왔습니다.[각주:32] 자본가들이 정치 지도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논증을 요구합니다.
이른바 마키아벨리적 이론은 조잡하고 불충분하지만, 도처에서 그리고 항상 정치 권력이 소수에 의하여 행사된다는 것과 정치 권력도 경제적 힘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적절하게 상기시킵니다. 이 이론은 서방 사회에는 잘 적용되지 않으나 소비에트 사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적용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이론을 싫어합니다. 마키아벨리적 이론가들도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권력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들에게는 권력이 일차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적 도식에 가장 잘 들어맞고, 마르크스적 도식에 가장 잘 안 맞는 혁명이 소비에트 혁명입니다. 소비에트 혁명은 전형적으로 소수가 권력을 장악한 경우입니다. 그 소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인민 대중의 대변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표현도 아니었으나, 당으로 조직되어 국가를 장악했습니다. 뒤이어 경제적 · 사회적 혁명이 소수의 지도 아래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키아벨리적 이론은 불충분합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우월한 기능을 행사하고, 최대한의 수입과 위신이 수반된 위치를 차지하는 소수가 모든 사회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특징은지배계급의통합화가자연스런현상이아니라는사실입니다.[각주:33]법률적으로 구분되는 계급이나 신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군사적 기능과 토지소유의 결합이라는 과거의 귀족 사회의 전형은 사라졌습니다. 인민 대중이 도시에 살게 될 때에는,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다양화가 불가피하게 생겨납니다. 노동을 조직하는 사람들, 여론을 조종하는 사람들, 행정이나 기술의 지도자들, 정치의 우두머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떠한 군사계급도 힘의 수단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지 못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산업사회에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다양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지배계급이란 개념은 문제를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숨깁니다. 지배적 카테고리들은 어떻게 조직되며, 어느 정도까지 분리되어 있거나 통합되어 있는가, 그들의 경쟁의 스타일은 어떠한가를 각 공동체 별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회계급의 분석은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분석으로 유도되며, 지배적 카테고리들에 대한 연구는 또한 정치 체제의 분석을 불러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도시들의 구조를 연구했을 때, 그는 그룹들의 구분이나 체제들의 다양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담겨있는 사회학과 같은 양식의 사회학에 귀착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산업사회에 공통된 특징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구성과 지배적 카테고리들의 상이한 양식을 추출해 내고, 마지막으로 정치 체제의 성격과 기능을 파악하고자 애씁니다. 경제적 및 정치적인 궁극적 체제를 향한 필연적 전진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끊임없는 반대 명제의 개념, 산업사회의 성격과 양립되는 경제적 · 정치적인 조직의 다양한 방식의 개념으로 대치합니다. 어떤 유형의 체제는 경제 성장의 어떤 국면에 의하여 조장됩니다. 그러나 <조장된다>는 표현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결코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하여 전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아롱의『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의 제10장에 해당한다. 현대어로 일신했으며, 명백한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대체로 따랐지만, 그 쓰임이 굳어진 것은 관례적인 표현을 따랐다. 의미파악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 원어병기했다. 주석은 이동렬이 아닌 나의 것이다.[본문으로]
다시 번역하자면, “이 분리는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것—그리고 그러한 명칭으로서 혐오되는 것—의 한 양상을 구성한다.” [본문으로]
이동렬이 “관리”와 “관료”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파악하기 힘들다.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리인들은 이론상 [곧] 공동체 전체의 대표이기도 한 것이어서, 국가 관료들foctionnaires과 구별되지 않습니다.”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본문으로]
“경제를 일구고 관리하는 자들과 고대 귀족[계급] 사이에 설정된 관계는 모든 서방사회의 특징 중하나라고까지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본문으로]
“책의 페이지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Selon les pages et l'humeur”는 다소 희극적인 직역이다. 문장의 중반부의“몽테스키외는 때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귀족계급이 전혀 파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는 오역이다.“그[몽테스키외]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만큼 귀족계급을 파괴시키는 것은 없다고 때때로 말하기도 했고”라고 번역했어야 했다.[본문으로]
이동렬은 “gentilshommes” “noblesse” “aristocratie”를 모두 구분없이 “귀족”으로 옮기고 있다.[본문으로]
1955년이었다.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유전통을 레몽 아롱이 체계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고, 1938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책을 출간했으며, 40년대 후반에는 이미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197, 80년대의 프랑스에서 혁명적 마르크시즘이 자유주의로 무너져 내리는 “반전체주의적 회전”과 함께 그의 자유주의자로서의 명성은 도무지 확고해졌다. 지금, 아롱은 프랑스 자유주의와 거의 전적으로 동의어이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은 난무하고 학원은 무법지대화되었다. 아롱은 68혁명의 적대자로서 반공주의자 개새끼, 미제 간첩이라고 무턱대고 내려갈겨지거나, “아롱을 따라서 옳느니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겠다”라며 혁명꾼들의 이런저런 배척 여론에 몰리게 되었다. 아롱은 내내 외톨이로 돌았다. 비앙쿠르의 르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르트르에 마음이 낚였고, 스탈린 정권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는 서슴없이 일소에 부쳐졌다. 이후 혁명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솔제니친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며, 젊은 재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을 운위하기 시작해서, 프랑스 사회의 혁명적 좌익사상이 반전체주의적 자유주의를 향해서 전개되어 가던 197, 80년대에서 아롱은 엄연했다. 1981년에 발간된 대담집 『참여하는 방관자』는 아롱의 지적 영광의 정점이었다.
이 번역에서 프랑스어의 “ouest”와 “occident”은 송두리째 “서방”으로 옮기어졌다. 그러하되, 소비에트 연방과 자유주의적 “서방”을 비교 대조하는 이 전후戰後의 강의는 공산당을 트집잡고 결딴내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종용하기 위한 지질한 수사학적 시도는 아니었다. 전체주의라는 민주주의적 모더니티의 기획 안의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뿌리부터 재숙고하려는 진지한 이론적 노고였던 것이다. 아롱이 시금석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반전체주의적인 운동이 어떤 적들과 어떤 자유주의의 개념들을 향해서 겨누어졌으며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재발견을 불러들였고 프랑스 지성계 내에서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의 잡탕의 헤게모니를 탈환해낸 사실에 대해서는 나는 더 부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강의를 포함한 『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이 내 미소한 모국어로 초역된 것은 1980년이다. 그때, 한국은 심란한 민족의 시절이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정치는 학문에 필적했으며 역사와 세계관은 구분되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인터내셔널리즘은 함께 가득하였다. 역사는 단일한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아롱의 피력된 신념은 이념과잉의 80년대 한국에서 전혀 무시되거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코옵트되었다. 의탁할 19세기도, 토크빌도 가지지 못한 이 빈약한 초토에서 이른바 자유주의는 못된 보수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안병직, 이영훈에서 윤소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마르크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개종한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임으로, 이동렬의 번역은 어떤 시차를 간직하고 있다.
이 범조사 판은 80년대 그 희미하고 어수선한 “혁명”의 시대에 야스퍼스, 슈바이처 등과 함께 전집으로 포괄되어서 낙지 같은 중산층들의 “교양”으로서 통독되고 있었지만, 속물이니 교양비판이니 따위의 주지의 명제를 여기서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이제, 이 글 한 편을 음미하고 문득 자유주의적 의욕을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책임 운운의 엘리트주의로 점철된 아롱을 읽으면서, “자유주의”에 관해서 예습된 지식의 허망함을 느낀다면 그저 그것이 고작일 것이다. 이 회의주의의 진입과 그 지속은 “냉전”이라 불리고 있어서, 최근 아롱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단연 자연스럽다. (끝)
본문
지난번 강의의 끝 부분에서, 계급의 이론으로부터의 권력의 이론으로 나아가는 세 개의 길을 나는 여러분에게 열거한 바 있었습니다. 그 세 개의 길은 동시에 우리에게 주요한 문제들을 지적해주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첫번째 길은 계급이 권력을 위해 투쟁한다고 생각하는 계급의 이론가들 (단지 마르크시스트들 뿐만이 아니라)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첫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각 체제는 거기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계급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정의되는 것이 사실인가? 두번째 길은 경험적 사회학의 길입니다. 이것은 각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능을 수행하며, 가장 높은 수입을 얻는 소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여러 산업사회의 지배계급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세번째 길은 지배계급에 관한 이론의 길입니다. 마키아벨리로부터 파레토에 이르기까지, 얼마간의 사회학자들은 모든 사회에서 주요한 구별은 사회계급들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통치받는 대중과 통치하는 소수 사이의 구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세번째 문제가 나옵니다. 이론상 그리고 사실상 사회계급의 개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각주:2]
순서에 따라 처리하기 위해서, 나는 <지배적 카테고리> 또는 명령의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학의 설립자인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상세하게 전개된 바의 세속권력과 정신적 권력 사이의 구별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강제하거나 설복해야 하기 때문에, 오귀스트 콩트의 눈에는 그러한 구별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말한 그런 분리는 결코 전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명령의 어떤 정당화를 동시에 갖지 않는,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자기의 동류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하면서 명령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다른 한편, 필요한 경우에는 설득을 강제로 대치代置하는 것이 주는 편리성을 정신적 권력의 소유자들이 전적으로 포기하는 일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이 증명해 줍니다.[각주:3] 진실 또는 선을 말하고, 가치 체계를 정하고 종교를 가르치는 소수와 그리고 힘의 도구를 사용할 능력이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다른 소수 사이에 설정되는 관계에 따라 여러 사회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권력에 종교사가인 뒤메질Dumézil 씨의 생각을 사용해서 세번째 종류의 권력을 덧붙일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뒤메질 씨는 인도 유럽의 사회는 사제 · 전사 · 근로자의 삼원적 구분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최고의 진리를 말하고 교의 또는 종교를 해석하는 사람들, 무기를 들고 전쟁을 행하는 사람들, 사회로 하여금 노동의 덕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을 하나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포함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통치하는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적용됩니다. 노동이 본질적인 활동으로 간주되는 우리 산업사회에서는, 세 종류의 명령의 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즉 정신적 권력의 소유자들, 군사적 · 정치적 권력의 소유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단적 노동의 지도자들이 차지하는 지위가 있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나는 내 생각에 비추어 민주적 유형의 산업사회를 특징짓는 명제를 즉시 공표하겠습니다. 즉 이 유형의 사회에서는 정신적 · 정치적 · 경제적 권력이 분리되어 있으며, 그 세 종류의 지배를 행사하는 그룹들은 항구적인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정신적 권력을 고찰해 봅시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혁명 후의 사회들은 정신적 통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병리학적이라고 오귀스트 콩트는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결합시킬 수 있는 종교적 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개혁의 최초의 임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의의 주위의 개인들을 결합시키는 일일 것입니다.[각주:4] 오귀스트 콩트의 목적이며 이상이었던 그러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서방 산업사회들은 정신적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초기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최고의 진리, 즉 초월적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종교와 그리고 과학에 의거하는 지식인 내지 교양인 사이의 갈등이나 분리가 분열의 기원이었습니다. 오귀스트 콩트의 눈에는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라는 두 종류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종류의 진리가 합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사제들이 대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자들이 대변하는 두 개의 사고방식이 그에게는 비양립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과학적 진리 위에 종교적 교의를 설정함으로써 통일을 회복시킬 것을 꿈꾸었습니다. 한 세기 후에도 그 두 사고방식 자체는 살아 남아서, 반드시 그 양자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에서 오귀스트 콩트는 잘못 생각했습니다), 서로 자발적으로 합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정신적 권력의 세번째 화신, 즉 <대중의 선도자들meneurs de masses>까지 있습니다. 철저한 이론적 무장doctrine을 갖추고서,[각주:5] 종교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보다 우월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과 동등한 진리를 가르치겠다고 때때로 주장하는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나는 그 <대중의 선도자들>이란 용어로서 지칭하는 것입니다. 양차 대전 사이에는 파시스트나 국가사회주의자 타입의 선동가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각주:6] 오늘날에는 노동 지도자들, 특히 공산당 지도자들에 의해 그 힘이 대변되고 있습니다. 대중의 선도자들 모두가 거의 종교적 주장에 맞먹는 교리doctrine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마르크시즘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과학적 진리 내지 종교적 진리와 동등한 것으로 해석됩니다.[각주:7] 어쩌면 마르크시즘은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습니다. 아무튼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습니다.[각주:8]그들은 종교란 미신이고, 무신론이 진리이며, 사적史的 유물론이 장래에는 전통적인 종교적 교리를 대치代置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동시에 그것의 진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인류가 거치는 단계를 엄밀한 방식으로 결정하는 과학적 진리에 합치시킵니다. 마르크시즘에 의하면, 인류가 자신의 구원을 행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입니다. 계급투쟁을 통하여, 역사적 투쟁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합니다. 세속종교의 일종인 그러한 교리는 전통적 종교와 직접적인 대립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체의 초월을 부인하면서 인류의 운명이 행해지는 것은 내재성 속에서,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서방적occidental 스타일의 산업사회에서는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동국인同國人들의 찬성표를 획득한 민간 정치인들로서 정당의 경쟁에서 활동적인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두 범주인 군대나 경찰 (고전적인 군사적 힘)의 지도자들과 관리들의 협력을 얻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지배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합법성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인은 <공식>[각주:9]에 의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지명된 양식과 합법적 지명의 원칙 사이의 일치에 의해 자기 권력을 정당화해야 합니다. 민주적 사회에서는 선거가 그 원칙입니다. 따라서 민주적 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도자들이 정당의 지도자들입니다. 시민 전체가 아니라 최상의 경우에 다수를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행해집니다.[각주:10]
관리들foctionnaires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각주:11] 왜냐하면 그들은 합리성에 따라 통치하며 집단의 보편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범주 사이의 구분은 현대 민주사회의 깊은 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식>은 선거입니다. 선거는 개인들 사이의, 그리고 그룹들 사이의 경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선출된 자는 그를 선택한 사람들, 즉 전체의 일부분을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가피하게 <당파적>입니다. 거기에 관리들과 정치인들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의 소지가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만을 인정하고자 하는 관리들의 눈에는 정치인들이란 집단 일부의 욕망을 해석하는 좌흥을 깨는 자들로 흔히 보이는 것입니다.[각주:12] 완벽하게 합리적일 수 있으나, 특수한 이익이나 선거에 대한 염려에 종속되지 않는 한 권력에 대한 꿈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나의 환상입니다. 관리는 정당성을 갖고 있지 못하며, 명령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는 정치인들로부터 명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정치인들은 또한 통치자로서의 시민들의 위임이란 형식을 필요로 합니다. 위임이 개입하게 되자마자, 공통의 이익의 희생을 부과하는 구분적 이해관계intérêts sectionnels의 가능성이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민주적 산업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은 군대 지도자들로부터 복종을 받아야만 합니다. 서구에서는 쿠테타의 시대가 경과헀음이 자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의회 민주주의의 기능을 위해 그것은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그렇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산업사회에 있어서조차도, 군대 권력의 정치개입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회중심제이든 대통령중심제이든 간에 어느 정도 빈번한 쿠테타의 사용에 의해 작용을 받는 체제들이 존재하는 대륙 하나를 우리는 적어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그 방법이 일종의 합법화 내지 습관화되어, 그것이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라기보다 오히려 당파간 경쟁의 거의 관습적인 에피소드가 될 정도입니다.
이제 경제적 권력을 고찰해 봅시다. 시민들은 정치 권력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입니다. 시민들은 민주 정치의 민간 지도자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주체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객체입니다. 산업사회의 시민들은 근로자로서 <집단 작업의 관리자gestionnaires>라고 불리울 사람들의 더 밀접한 권위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관리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범주는 흔히 자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로서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입니다. 다른 하나의 범주는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들입니다. 기업의 그런 지도자의 권위에 종속된 노동자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비앙쿠르에 있는 르노 자동차 공장에 가 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기업의 그런 지도자는 어떤 방식으로는 공동체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국가 자체에 의해 임명됩니다. 집단 작업의 그러한 관리 이외에, 근로자들은 두번째 조직에 통합되어 있는데, 역사상 거의 유일한 것인 이 조직의 항구적인 목적은 요구revendication에 있습니다. 산업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기업의 기술관료적 위계에 속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민주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또는 정당에 속해 있는데, 후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의 개선을 위한 요구입니다.
이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산업사회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주요한 카테고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각주:13]
1. 오귀스트 콩트에 따라 내가 정신적 권력이라고 명명하고자 하는 것을 두 카테고리가 주장하게 되는데, 하나는 사제들 (또는 전통적 종교의 대표자들)의 카테고리이며, 다른 하나는 세속 사상의 해설자인 지식인 내지 과학자들의 카테고리입니다.
2. 정치적 지도자들은 관리들 (또는 행정가들)과 군대 내지 경찰의 지도자들 (그들은 흔히 단순한 관리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이라는 두 카테고리와 관련을 맺습니다.
3. 공동 작업의 관리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일 수도 있고, (번함Burnham이 유명하게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오늘날 <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매니저>는 조직 내지 지휘의 능력을 본질적 성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대중의 선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현존 사회의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표현하고, 그 요구의 방향을 유도하며, 때로는 그와 동시에 정치 권력, 나아가 정신적 권력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교의가 절대적으로 진실이라고 믿는 데 따라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의 서기들과는 달리 정신적 권력을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하나의 예를 원한다면, 영국의 노동당 지도자들은 그런 종류의 주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회는 기꺼이 기도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현대의 대중운동에 의한 전통적 종교의 상징적 수락을 뜻합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회의가 그런 의식으로 시작되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프랑스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회의에서 그것을 상상하기는 더욱 더 어려울 것입니다.
민주적 산업사회에서 권력의 분리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정신적 권력의 다원성, 나는 오귀스트 콩트가 생각했듯이 그 다원성이 병리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마도 그 다원성은 현대 사회의 특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통해서,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최고의 진리에 관해 분열되어, 가치 체계를 공통으로 갖지 못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조차도 일치하지 못한 일은 드뭅니다. 인간 생활의 본질적 도식은 정치적 조직화와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된다고 마르크시스트는 생각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개인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개인의 구원과 나아가 인류의 구원이 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는 진보적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까지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근본적 전망인지, 아니면 반대로 원죄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도래를 거쳐 세상의 종말까지에 이르는 인류의 발걸음의 전망이 근본적 전망인지를 확실히 모름으로써 두 해석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2. 권력의 소유자들이 그들의 권력 행사가 일시적임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으로 민간적인 권력.[각주:14] 민주 정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황이 선거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 번 선거에서 투표의 운수가 그들에게 불리하면 그들의 기능fonctions을 포기할 것을 미리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의 대표인 민간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힘의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의 복종을 기대합니다.
3.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비특권자들의 상설조직,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우리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사회 현상입니다.[각주:15] 이 현상은 너무도 역설적이기까지 해서, 모든 독재적 혁명은 그것을 폐지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했습니다.[각주:16] 왜냐하면 그것은 질서에 대한 일종의 항구적인 위험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현상에 익숙해졌고 이 현상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가를 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의 노예들도, 봉건사회의 농노들도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상설 조직을 안출하지는 못했습니다. 비특권자들의 이러한 조직의 존재는 아마도 산업시대 민주사회의 가장 긍정적인 정의定義일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별로 어려움 없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혁명적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사회와 대중의 선도자들의 카테고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사실상 충분한 것입니다. 대중의 선도자들이 권력을 획득하면 그들은 동시에 최고의 진리의 해석자, 정치적 지도자, 공동 작업의 관리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의가 전통적 종교의 위에 있고 과학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중개에 의하여 통치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착취자로서의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배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동시에 그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를 그들이 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 대중의 선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들은 국가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민주정치의 우두머리들의 역할과 다릅니다. 민주정치의 우두머리들은 자신들이 <당파원partisans>이며, 직접적으로는 나라의 일부만을 대표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다른 부분의 대표자들인 다른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그들을 대치代置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혁명가들의 시점에서는 그러한 다원성이란 수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원성이란 그들이 소멸시키고자 하는 사회계급들의 다원성 내지 대립의 가정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각주:17]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그런 단일성을 완수하기 위해 정당의 다원성을 폐지시키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선출된 우두머리와 관리 사이의 구별은 후자의 보편성과 대조되는 전자의 특수성에 근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가 공동체 전체의 대표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그러한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서방에서는 개인 기업은 공동체와 구분됩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 후에는 회사가 그 자율성을 상실했습니다. 회사는 국가의 대표자를 지도자로 갖게 될 것입니다. 조작된 작업 전체가 동시에 국유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각주:18] 사회와 국가, 또는 독일어 용어를 쓰자면 게젤샤프트Gesellschaft와 슈타트Staat 사이에 더 이상 분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모든 독재적 혁명은 단일성을 복구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입니다.[각주:19] 최고의 진리의 단일성, 유일 정당으로 되는 사회계급의 단일성, 사회와 국가의 단일성.
이러한 분석이 정확하다면, 산업사회의 두 유형 사이의 근본적 대립은 한 유형 속에 있는 지배적 카테고리의 분열과 다른 유형 속에 있는 단일화의 시도에 기인합니다. 민주적 사회는 외견상 분열되어 있으며, 소비에트 유형의 산업사회는 이데올로기의 해설자이며 대중의 선도자이며 동시에 관리인이기도 한 정치 지도자들과 더불어 외견상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 대조opposition는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한 이상적 유형들 사이의 대조antithèse입니다.
이 강의를 끝내기 위해서, 한 편의 권력의 분열이나 다른 편의 권력의 통합이 다같이 완전하지 못한만큼, 한 유형은 통합을 향해서 그리고 다른 한 유형은 분열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각주:20]
우선 서방의 사회를 고찰해봅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작업관리인과 관료들 사이의 분리가 현재에는 생산 도구의 국유화가 증가함에 따라서 점점 더 많은 경우에 그 두 직책이 혼동되어 가는 경향을 막지는 못합니다. 프랑스의 전기나 가스, 르노 공장 같은 것이 문제될 때에는, 그 지도자들이 개인적 이해관계의 대변인이 아니라,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특수한 사명을 위해 지명된 관료에 비견됩니다. 미국에서는 회사의 중역들이 공공 행정의 고위 직책을 받는 일이 빈번합니다.[각주:21]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프랑스에서는 많은 고위 관료들, 예를 들어 재무성의 고위 관료들이 관료로서의 정상에 다다른 다음에 사기업체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의 직책을 계속해 갑니다. 행정가와 정치인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한, 이론상en théorie 그 구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실상en fait으로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 그 구분이 완화됩니다. 한편으로 관료는 자기 상관의 선거에 대한 염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권력을 맡도록 선출된 사람은 반대파의 정치인과는 언제나 다릅니다.[각주:22]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는 집단적 이익의 대표자가 되어 항의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변모가 도덕가들에 의해서는 흔히 하나의 배반의 형태로 간주되고, 어떤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하나의 전향으로 간주됩니다.[각주:23] 반대자는 이성과 보편성의 필요를 모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인식함에 따라 진지하게 됩니다.
정치인들의 경쟁에 관해 말하자면, 다수 정당의 체제는 투쟁 (그것이 현실적으로 있다 할지라도)이 어떤 합치를 위장함에 따라서만 기능을 잘 발휘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각주:24] 다수 정당 체제는 유일 정당의 체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공공연한 투쟁conflits publics을 내포합니다. 그렇지만 아무것에도, 게임의 규칙에 대해서조차도 정당의 대표자들이 일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수 정당 제도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피상적일 것입니다. 우리 프랑스인들이 민주 정치의 모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 같은 나라를 고찰해 봅시다. 사고나 또는 나쁜 운수로 인해서 보수당과 노동당이 근본적인 사활의 문제에 대해 일치를 못 보게 될 때는, 체제의 기능이 어려워집니다. 권력의 좋은 분열 상태, 건전한 상태의 다수 정당 체제는 심층적인 일치와 제한된 강경한 대립을 내포하는 것입니다.[각주:25]
마지막 카테고리에 관해 말하자면, 대중의 선도자들의 목표가 덜 야심적일수록 민주 정치 체제는 그만큼 더 잘 기능을 발휘합니다. 또다시 우리 프랑스인들은 앵글로색슨의 체제를 모델로 들어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각국이 자기 이웃나라에서 참고를 택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앵글로색슨 족은 프랑스에서 민주정치의 모델을 찾지는 않습니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 내지 정치 지도자들이 체제의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노동조합 위원들과 노동당의 지도자들의 최고의 진리의 대변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각주:26] 그들은 게임의 규칙에 찬동하며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이데올로기의 다원성이 생사를 건 싸움으로 변모되자마자 민주 사회의 기능은 위태로워집니다. 안정된 민주주의에서는, 비특권자들의 조직이 혁명적은 아니며, 요구가 체제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고, 정신적 권력의 분열이 진정시킬 수 없는 경쟁을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민간 정권이 그 고유한 정당성, 다시 말해 선거의 정당성 속에서 받아들여집니다.[각주:27] 그 순간부터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어떤 만장일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권력을 선택시킨 규칙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에 존재합니다.[각주:28] 모든 주제에 관해 논쟁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가 민주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자체의 조직이 근거해 있는 원칙을 만장일치로 또는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덕분에 권력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분열된 권력들 속에 존재하는 통합성의 부분을 여러분에게 지적하고 난 지금, 균형에 대한 염려 때문에 나는 통합된 사회에서 관찰될 수 있는 분열에 대해서도 여러분에게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소비에트 체제는 그런 종류의 체제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서, 예를 들어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내포하고 있던 것 이상의 단일성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 단일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당이 교회보다 우월한 정신적 권력을 자임하고 있으나, 혁명 후 40여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과 동방 정교회 사이의 관계는 투쟁과 박해, 해빙과 화해의 교차되는 언어에 의해 지속되어 왔습니다.[각주:29] 전통적 정신권력은 어쩌면 억제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을 볼 것 같으면, 그들도 역시 강화된 규율과 상대적 자유주의의 교차되는 언어를 알고 있습니다.[각주:30] 이론상 당은 특수과학의 진리보다 우월한 이데올로기를 가져옵니다.[각주:31] 그러나 사실에 있어, 당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신자들,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목적으로 그들의 지성을 사용하는 지식인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 자신이 어디까지 당의 진리가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모릅니다. 당의 진리의 폭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언어학, 음악, 또는 예술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이 모든 시민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교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형식주의 음악을 작곡하고, 비사실적 소설을 쓰고, 서방의 타락한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막지는 않을 공식적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단일화가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강화되지만, 분열이 전적으로 소멸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치적 진실이 결국에 가서는 종교적 진실을 대치할 수 있다거나, 정치적 진실이 지적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정확하게 명령을 행사할 수 있다고 시사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각주:32]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카테고리들의 통합화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입니다.[각주:33] 생산 수단의 관리인들이나 정부부서의 관료들은 공산당의 당원인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양자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직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에게서나 상이한 사람들에게서나, 서방에서의 분리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불가피하게 다시 나타납니다.[각주:34] 한편으로는 당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자들이 있습니다.[각주:35] 기술자들은 프랑스의 재무관리들과 같은 방식으로 합리적이고자 하며, 당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국회의원이 선거에 대한 염려를 하듯이 이데올로기나 대중의 여론을 염려합니다. 재선출에 맡겨진 정치인의 관심과 하나의 교리에 충실한 지도자의 고려 사이에는 아마도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성 (여기에서는 민주적 정당성, 저기에서는 혁명적 정당성)의 덕분으로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과 그리고 생산성과 기술적 합리성의 법칙에 따라 작업을 조직하고 효율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기업체 내지 정부 부서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구별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생산 수단의 관리자들과 동일한 직업에 속합니다. 그들은 직업을 바꿈이 없이 한 직책에서 다른 직책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서방의 특징인 대중의 선도자와 직업 관리인 사이의 분리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각주:36]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기능에 의해 사고방식이 암시되는 것이 아닌가? 어떻든 간에, 어느 사회에서든,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관심과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필요성을 구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권력의 분리와 통합의 개념에 관해 내가 부여한 뉘앙스가 그 반대 명제의 가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정신 속에 들어있는 전형은 순수하지만, 그 전형에 대한 우리의 표상보다 현실은 항상 더 복잡한 법입니다.
이동렬의 번역으로 1983년 범조사에서 출간된 『산업사회와 사회계층』 현대사상신서 판을 베껴 적은 것이다. 제9장이다. 1980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범조사상신서” 시리즈로 출간되었던 것을 재발간했다. 필사를 원칙으로 하되, 명백한 오탈자의 경우에는 첨삭을 가했으며, 필요한 경우 주석을 달아서 전격적으로 수정하였다.
일반독자는 물론 학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으로서, 1955년에서 1958년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행해진 강의의 강의록이다. 여기 제시된 본문은 서구권 및 소비에트 사회에서의 사회적 투쟁들(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서 이른바 “파워 엘리트”들에 대한 재정식화의 시도, 또 소비에트의 정치경제적 모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이 책의 허리 부분에 해당한다.
아롱의 원문은『계급투쟁La Lutte de Classes』라는 제목으로 1964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1962년 출간된 강의록 『산업사회에 관한 열여덟 개의 강의Dix-huit Leçons sur la société industrielle』의 일종의 후속작으로서, 1965년에 출간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Démocratie et Totalitarisme』와 함께 산업사회에 대한 삼부작으로서『자유를 생각하다, 민주주의를 생각하다Penser la liberté, penser la démocratie』에 나란히 묶여서 재출간되었다. 이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그 문단구분에 따라서 국역본의 문단구분을 수정하였다.
“원주”의 표기가 없는 모든 주석은 교정자인 나의 것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에는 별도 언급없이 원문을 병기했다. [본문으로]
단어 몇 개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론상 그리고 사실상, 사회계급classe sociale과 지배계급classe dirigeante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본문으로]
“대치”의 한문을 추가했다. “설득을 강제로 대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강제”는 명사로서 사용되었음으로, “설득을 강제로서 대체하는 것”이라고 쓰는 편이 더 명료할 것이다. [본문으로]
원문을 의역한다면, “이 강의를 마치기 전에, 한 쪽[민주사회]에서의 권력의 분열이 다른 쪽[소비에트사회]에서의 권력의 통합보다 더 전적일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유형은 분열을 향한 경향을, 다른 유형은 통합을 향한 경향을 지닐 뿐이라는 것을 저는 여러분께 보이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그 반대의 의미에서dans le sens contraire”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졌지만, 의미 전달에는 지장이 없다. [본문으로]
뜻을 풀자면, “그[선출직]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집단[전체]의 이익의 대표자가 됨으로, 반대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변모는 도덕주의자들에 의해서 때때로 배신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사색가philosophes들에 의해서는 전향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정치인들의 경쟁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알아두어야 할 점은, 투쟁이 (그것이 얼마나 실질적인지와 무관하게) 어떤 합의accord를 감출 때만 다당제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의역하자면, “권력의 긍정적인 분리, 다당제는 그 합의의 깊이 속에서 제한되고 명랑한 대립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제 언어로 풀면dans mon langage”에 해당하는 대목이 빠져 있다. [본문으로]
“민간 정권”이라는 말은 “군사정권”의 반대말처럼 들린다. 여기서는 “시민적 권력Le pouvoir civil”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본문으로]
이동렬이 “언어”라고 옮긴 말의 원어는 “phase”이므로, 이는 그가 “phase”를 “phrase”로 오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문에 따라서 다시 옮기면, “당과 [러시아] 정교 사이의 관계는 투쟁과 박해, 해빙과 화해의 번갈아드는 단계들을 거쳐왔습니다.” [본문으로]
마찬가지 이유에서 오역이다. “교차되는 언어”가 아니라 “교차되는 단계들” 혹은 “번갈아드는 단계들”이라고 옮겼어야 했다. [본문으로]
“특수과학”으로 옮긴 “sciences particulières”는 그저 “특정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질 뿐이다. [본문으로]
“진실”이라는 말은 몽롱하고 혼곤하다. “진리vérité”라고 옮기는 편이 좋았을 성싶다. [본문으로]
이동렬이 “통합화” “단일화”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하는 것은 “unification”이라는 단일한 단어이다. [본문으로]
알아듣기 쉽게 풀자면,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관리인들과 관료들이] 같은 사람들이든 다른 사람들이든 [간에 관계없이], 서방[세계]에서 이 분열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이곳에서도] 여여한 것입니다.” [본문으로]